58년, 강경한 카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Suetonius Paullinus가 브리타니아의 총독이 되어 웨일즈Wales 공략부터 시작했다. 61년 봄이 되자 남서쪽 끝 모나Mona섬의 드루이드 성지에 접근했다. 타키투스는 “적은 무장을 하고 밀집대형으로 해변에 줄지어 있었다. 중간에 머리를 풀어 헤치고 횃불을 휘두르는 검은 복장의 여성들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치며 무서운 저주의 비명을 질러댔다”고 기록했다.
로마군은 잠시 공포에 질렸지만 수에토니우스가 “광신도 여자에게 물러설 생각이냐”며 꾸짖으면서 켈트족을 포위해 공격했다.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고 수에토니우스는 섬에 수비군을 두고 성스러운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포로의 피로 제단을 적시고 내장으로 점을 치는 인신공양 장소였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과장이 심했다. 켈트족이 인신공양을 했다고 해도 일반적인 의식이 아니며 성스러운 우물이나 호수에 보석과 무기 같은 상징물을 던져 넣는 의식이 대부분이었다.
부디카는 로마군의 드루이드 성지파괴가 큰 충격이었겠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꿀 잔인한 사건이 아직 남아있었다.
프라수타구스는 모나섬이나 그 이후 전투에서 목숨을 잃으면서 켈트법이나 로마법에 전례가 없었던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아내, 두 딸과 로마황제를 이케니왕으로 지명했다. 켈트전통에 따르면 부족의 뜻을 모아 족장을 정하기 때문에 유언으로 후계자를 정할 수 없었다. 로마법에 따르면 왕이 죽으면 주종관계도 끝나며 새 왕이 즉위할 때까지 로마황제가 영토와 재산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프라수타구스는 부족의 안전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런 유언을 남겼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죽자 로마징수관이 근위병을 이끌고 이케니 궁전에 도착했다. 그는 영지의 재고조사를 시작했는데 이미 로마의 재산으로 여기며 당시 관행이었던 자신의 몫을 챙기려 들었다. 부디카가 항의하자 그녀를 채찍질하고 두 딸을 성폭행했다.
부디카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비슷한 처지가 된 다른 부족의 분노를 모으기 시작했고 로마의 처벌을 무릅쓰고 무기를 모아 무장했다. 부디카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옷 속에 숨겨 놓았던 토끼를 켈트족 방향으로 풀어 신의 뜻이라며 사기를 높였다. 부디카는 하늘을 향해 감사를 올렸다.
일부 역사가는 부디카의 이런 의식을 두고 그녀를 드루이드로 보고 있다.
부디카는 큰 금목걸이(토크)를 걸고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리고 두터운 망토를 걸쳤다. 부디카가 목에 건 금목걸이는 전쟁에 나서는 켈트족장이 갖추는 장식물로 부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부디카가 금목걸이를 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켈트족이 여성의 지휘를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 타키투스의 장인이 군기록관으로 브리타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부디카의 공격이 자세하게 남아있다. 부디카는 먼저 카룰로두눔을 노렸고 콜로니아 안에 있던 켈트족이 로마군 진영에 혼란을 일으켰다.
카물로두눔의 승전 상이 마치 달아나는 것처럼 등을 돌리고 쓰러졌고 여성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템즈Thames강 하구는 피빛으로 물들었는데 시신모양으로 떠다녔다.
카물로두눔은 론디니움의 카투스 데zl아누스Catus Decianus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겨우 200명의 경무장 보병만 받았다. 켈트족을 얕잡아 봤던 로마군은 그 동안 도시 외곽에 벽도 쌓지 않았고 요새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해자까지 평지로 만든 상태였다.
부디카군은 순식간에 도시에 들어섰고 로마군은 저항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인 신전으로 쫓겨 들어갔다. 2일간의 격전 끝에 신전도 함락되었다. 카물로두눔 건물은 진흙을 덮은 목재로 만들어져서 불에 잘 타지 않았는데 켈트족 지른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지금도 자기처럼 남아 있을 정도였다.
켈트족의 반란에 당장 투입될 로마군단은 레기오 9 히스파니아Hispania로 2,000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이 전부였다. 군단장 케리알리스Cerialis는 증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카물로두눔으로 출발했지만 도착하지 못했다. 부디카를 로마군단을 매복공격해서 학살했고 케리알리스는 기병과 함께 린둠Lindum으로 달아났다.
모나 원정을 마무리 중이던 수에토니우스는 켈트족 공격을 듣고 본대보다 먼저 출발해 부디카의 공격이 있기 전에 론디니움에 도착했다. 론디니움은 카물로두눔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마에서 물자와 병력을 수송할 목적으로 템즈강변에 지은 도시로 15년이 지났지만 방어벽은 없었고 몇 개의 튼 건물만이 방어시설로 사용할 수 있었다.
카투스 데키아누스는 이미 골Gaul 지역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수에토니우스는 론디니움을 비우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노인과 여성은 자신의 터전이라며 떠나지 않았다.
부디카는 론디니움에 도착하자 눈에 띄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 “그들은
귀족과 유명한 가문의 여성을 나체로 목매달았고 가슴을 도려내 입에 집어넣었다. 마치 가슴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신음하는 여성을 꼬챙이로 꿰뚫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론디니움 북서쪽의 카투벨라우니의 옛 수도 베룰라미움Verulamium도 부디카의 분노를 피하지 못했다. 로마는 자치권을 인정하며 로마시민권의 길을 열어준 곳인데 부디카는 로마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잔인한 처벌을 했다.
수에토니우스는 14군단과 20군단 일부, 약간의 비정규군까지 합쳐 10,000명을 모았다. 그리고 지금의 엑세터Exeter인 이스카 둠노니오룸Isca Dumnoniorum의 2군단에게도 급한 지원요청을 했지만 2군단장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2군단은 이미 부디카 편에 선 지역을 관통해야 했는데 이미 9군단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급히 모은 병력만 데리고 부디카에게로 향했다.
양쪽 군대가 마주친 지역은 불분명하지만 타키투스의 기록을 보면 워윅셔Warwickshire 아니면 토우캐스터Towcaster 부근으로 보인다. “수에토니우스는 숲을 등뒤로 하고 대형을 갖췄다. 등 뒤에는 적이 없었고 눈앞의 초원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정규군을 밀집대형으로 중앙에 두고 경무장 비정규군을 양측면에 배치했다. 기병은 따로 모아 측면에 두었다.”
부디카의 병력은 23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켈트전사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로마군의 훈련과 무장은 그 차이를 극복하고도 남았다.
타키투스의 기록을 보자. “켈트군은 보병과 기병이 무리 지어 길게 늘어섰고 이미 승리를 자만하고 있었기에 가족을 수레에 태워 전장까지 데리고 왔다. 부디카는 두 딸과 함께 전차를 타고 각 부족에게 켈트족은 여성 지휘관이 이끌었다고 소리치며 다녔다.”
수에토니우스는 “원시인의 들뜬 기세는 신경 쓰지 말라. 저 놈들 틈에 여자가 더 많다. 우리는 이미 저런 오합지졸을 여러 번 격파했다. 우리의 칼과 용기 앞에 등을 돌려 달아날 것이다. 몇 명의 용기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우리만으로 저렇게 많은 적을 궤멸시킨다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도 없다”고 격려했다.
군단과 비정규군은 좁은 지형을 이용해 부디카군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투창을 던지고 쐐기대형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기병은 창으로 보병을 지원했다.
로마군은 널찍한 방패로 서로를 보호하며 찌르는 짧은 칼로 근거리에서 켈트족의 배를 찔러 쓰러트린 후에는 다음 대열에게 접근했다.
휘두르는 긴 칼로 무장한 켈트족은 근거리에서 칼을 휘두를 수 없었고 로마군의 밀집대형을 뚫지 못했다. 전차는 넓은 평원에서나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좁은 지형 때문에 로마군의 측면으로 돌 수 없었다.
로마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살아남은 켈트족은 달아나려고 했지만 뒤는 자신들이 끌고 온 수레와 마차로 막혔다. 로마군은 여성은 물론이고 가축까지도 살려두지 않았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80,000명의 켈트족이 죽었고 로마군 피해는 400명에 불과했다.
승전소식을 들은 2군단장은 수치심에 목숨을 끊었고 부디카도 독약으로 목숨을 끊었다.
켈트족의 저항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부디카의 초반 대성공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 네로는 위험한 게르마니아에서 2,000명의 보병, 비정규군 8개 대대와 1,000명의 기병 (총 7,000명)을 급히 빼냈을 정도였고 두 도시에서 70,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켈트족은 부디카의 자살 후에도 병력을 모아 로마군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새 병력이 도착하자 겨울 숙영지로 들여보냈다. 그는 여전히 외교보다는 무력에 의지했고 계속 켈트족의 저항을 일으켰다.
켈트족은 전투에서 입은 피해만으로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였는데 대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켈트족은 로마군의 곡식창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까지 모두 징병했기 때문에 일년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켈트족은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일년의 공백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농사를 지었다고 해도 어차피 수에토니우스의 보복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마는 문제를 일으키고 달아난 데키아누스를 대신해 율리우스 클라시키아누스Julius Classicianus를 임명했다. 그는 로마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수에토니우스를 혐오해서 좋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골지역의 켈트족 출신으로 성난 켈트족을 달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켈트족에게 부드러운 총독이 부임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고 로마에는 수에토니우스를 교체하지 않으면 갈등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네로는 측근인 자유노예를 파견해 상황을 조사했고 클라시키아누스의 보고와 비슷한 보고를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수에토니우스는 배 몇 척과 선원을 잃는 일이 벌어져서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Petronius Turpilianus로 교체되었다. 그는 켈트족의 공격을 용납하지 않겠지만 자극시키지도 않는다는 자세로 더 이상의 보복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그의 우유부단한 정책을 비꽜지만 어쨌든 브리타니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켈트족은 부디카의 죽음을 슬퍼하며 호화스러운 장례를 지냈다. 이케니족의 저항은 패전 후에 더욱 큰 피해를 가져왔지만 브리타니아는 질서를 되찾았고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부디카의 후손은 3백 년 후에 독립을 쟁취해 정의와 명예를 되찾았다.
부디카를 영화로 만든 Boudica Warrior Queen의 봉기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패전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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