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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3부) - 대육군의 붕괴

by uesgi2003 2019. 1. 8.


너무 오래 지체되어서 이번 이야기에 나머지를 모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꽤 긴 이야기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즐기시거나 그냥 분위기만 느끼시기 바랍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3부) - 대육군의 붕괴


외젠은 스몰렌스크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다. 병사들은 보급창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12 16일에 겨우 8,000명만 데리고 도시를 떠났다. 나타나지 않는 나머지는 포기했다.

러시아장교 한 명이 백기를 들고 선봉대에 다가왔다. 나폴레옹은 이미 포로가 되었고 외젠의 지리멸렬한 병력으로는 러시아군 20,000명을 뚫지 못한다며 항복을 권했다.

외젠이 대답하기도 전에 기Guy장군이 앞으로 나서 크게 외쳤다. “네가 있던 곳으로 꺼져라. 그리고 네 상관에게 말해라. 우리는 40,000명이다!” 

러시아군 포대가 바로 불을 뿜었다. 외젠군은 착검상태로 전진했다. 외젠은 남은 포 2문으로 응사하고 13사단을 앞으로 보냈는데 사단장과 부관 모두 포탄을 맞고 실려갔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러시아기병이 달려와 학살했다.

나머지 병력은 러시아군의 포격에도 전열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둠을 틈타 침착하게 탈출하던 중에 러시아군 초소에서 소란이 일었다. 폴란드 클리스키Kliski대령이 달려가 입닥쳐! 비밀임무 중이다!”라고 야단쳤다.

이 덕분에 후위에 남아 있던 15사단을 제외하고 모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쿠투조프는 90,000명의 병력이 있는데도 나폴레옹의 50,000명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명성과 근위대의 전력을 두려워했다. 나폴레옹은 16일 저녁에 2근위사단에게 크라스니에서 3km 떨어진 러시아진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은 매우 추웠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경계를 늦추고 불가에 몰려 있었고 프랑스군의 기습을 받고는 모두 도망쳤다. 프랑스군은 3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당황한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작전을 멈추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지켜 보기로 했다

 

한숨 돌린 나폴레옹은 고민에 빠졌다. 외젠, 다부와 네를 기다리며 크라스니에 머무르기에는 위험하고 그렇다고 계속 전진하면 러시아군이 그들과의 사이를 끊어 놓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기다리기로 했다. 외젠의 퇴각로를 확보하기 위해 보병 1개 대대, 창기병 2개 중대, 2문을 보냈다.

이 별동대는 러시아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외젠에게 몰린 병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외젠은 러시아군을 뚫고 본대와 거리를 좁혔고 나폴레옹은 더 이상 병력을 잃지 않고 외젠을 구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했다

 

러시아 6보병군단은 주 도로를 가로막았다. 58보병군단도 그 뒤에 제23의 전선을 펼쳤다. 갈리친Galitzin공은 3보병군단과 2흉갑기병사단과 함께 프랑스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밀로라도비치와 합류해 다부를 차단하고, 다부가 탈출하면 밀로라도비치가 추격하기로 했다.

1217, 나폴레옹은 우측에서 밀로라도비치와 갈리친의 80,000, 100문과 숫자를 알 수 없는 코사크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대로 두면 본대가 고립되고 네와 다부와도 단절될 위기였다.

나폴레옹은 아직 14,000명의 근위대, 근위대기병 몇 개 중대, 기타 400기의 기병과 몇 문의 포가 있었고 전력이 크게 줄어든 외젠의 4군단도 투입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신근위대 5,000명을 크라스니의 동과 남동쪽에 배치하면서 하루 동안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부상입은 기병까지 모두 전투에 투입했다. 구근위대 대부분은 나폴레옹과 함께 남았다.

러시아군은 30문의 포로 헤센부대를 두들기다가 100문 모두가 포문을 열었다. 프랑스군은 맹렬하게 러시아군 진영을 밀어붙였지만 돌파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오후 4, 석양이 지면서 전투가 끝났다. , 동과 서쪽 지평선은 화톳불로 물들었다. 이제 상황이 심각해졌다. 나폴레옹은 모르티에르와 다부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를 구원하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붉은 화살표가 크라스니 위치입니다. 오르샤의 위치도 확인해두세요. 

 

러시아흉갑기병대는 불타는 크라스니에 들어섰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죽였다. 3 네덜란드척탄병대대가 마지막 순간에 도시를 빠져나갔다.

구근위대는 얼어붙은 경사로를 올라가지 못했다. 인력으로 마차와 포를 끌고 밀었지만 계속 미끄러져 내렸고 많은 사람이 깔려 죽었다.

1117,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오르샤Orsha로 달려가서 드니에페르강의 다리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군은 크라스니에서 6,229명을 붙잡고 포 45문과 많은 군수품을 노획했다

 

프랑스군에게 오르샤는 구원 그 자체였다. 보급창에는 군수품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낙오병을 다시 무장시킨 후에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에 불필요한 마차와 보급품을 모두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벌어졌다. 불분명한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드니에페르강을 건널 부교까지 모조리 불태웠다. 근위대공병장군 엘베Elbe는 나폴레옹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8대의 마차를 구해 석탄과 연장을 실었다. 그리고 모든 공병에게 개인도구를 챙기라고 명령했다.

 

네의 3군단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후위를 맡았기 때문에 이제 러시아군의 단단한 저지선을 뚫고 빠져나가야 했다. 1118일에 크라스니에 도착했고 곧바로 항복권유를 받았다. 네는 원수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네가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라며 러시아군 장교를 붙잡았다.

러시아군은 5, 6, 8보병군단이 있었고 밀로라도비치와 갈리친이 크라스니 부근에서 강력한 저지선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데프레라도비치Depreradovitch의 근위기병과 흉갑기병연대 등이 네의 우회에 대비하고 있었다.

예르몰로프Yermolov가 나폴레옹을 추격하기로 했다.  

 

1118일 오후 3, 코사크가 네의 접근을 알렸다. 밀로라도비치는 2개사단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도 2개 사단을 더 배치해서 네의 돌파에 대비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2보병군단을 예비대로 남겨두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네의 선봉대가 불과 250보 거리로 접근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러시아군 포대가 파열탄을 쏟아 부었지만 프랑스군은 신속하게 건너 포대로 뛰어들었다. 26사단이 급히 달려와 프랑스군을 밀어내고 군기를 노획했다.

다른 프랑스군도 주도로 오른쪽으로 접근하다가 격퇴당했다. 5시간 동안 격전이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24문의 러시아포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네는 도저히 크라스니를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드니아코바Dniakova마을로 후퇴했다.

 

네는 마치 야영을 할 것처럼 화톳불을 지피게 하고 러시아군의 경계가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드니에페르강쪽으로 움직였다. 날이 새자 속은 것을 안 러시아군은 코사크를 보내 네의 탈출로를 찾았다.

코사크는 곧바로 네를 발견했고 네는 자신도 소총을 들고 병사들을 지휘했다. 다시 밤이 되자 드니에페르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얼음이 너무 얇어서 마차와 야포를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이 있는 오르샤까지 아직도 70km나 떨어져 있었다.

코사크가 강건너까지 뒤쫓아왔지만 1121일에 오르샤에 도착했다. 네는 폴란드장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외젠은 급히 구원병을 보냈다. 네의 기적과 같은 돌파는 패배로 전의를 잃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나폴레옹은 보리소프Borisov다리를 확보할 수 있을 지가 염려되었다. 우디노에게 보리소프(현재의벨라루스 바리사우)의 교두보를 탈환하고 보리소프 남쪽으로 40km 떨어진, 베레지노Berezino와 베셀로보Veselovo 사이의 도강지점을 찾아보라고 명령했다. 우디노는 도강지검을 발견하면 다리 2개를 놓고 러시아군을 막기로 했다.

우디노는 보리소프에서 베레지나 오른쪽 강변을 탈환했지만 반대편의 치차고프의 러시아군은 밀어내지 못했다. 다리도 파괴되었기 때문에 두번째 명령인 다른 도강지점을 찾기로 했다



시아탈출의 마지막 장애물인 베레지나강입니다. 그렇게 넓은 강은 아닙니다. 

 

보리소프 부근에서 얕은 강바닥을 찾았지만 러시아군이 먼저 달려야 막았다. 스투디안카Studianka로 갈 수밖에 없었다.

1120, 나폴레옹은 빅토르에게 보리소프로 이동해 26일에 통과할 본대의 후위역할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만 우디노의 진로를 노출시켰는데 비트겐슈타인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마지막 탈출로를 봉쇄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빅토르의 뒤를 추격했다.

 

나폴레옹은 실수를 깨닫고 빅토르에게 북쪽으로 되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남쪽 멀리 가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추격까지 받고 있어서 방법이 없었다. 쿠투조프는 부대를 2일 동안 부대를 재정비했고 플라토프만이 코사크를 이끌고 프랑스군을 계속 괴롭혔다.

스투디안카 서쪽 강변에도 러시아군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더구나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과 얼음이 녹아 수위가 높아지고 유빙이 급하게 흘러내려갔다. 습지도 녹기 시작해서 마차가 통과할 수 없었다.

우디노의 정찰대는 누촐로디Ucholodi와 볼쇼이-스타르코프Bolshoi-Starkov를 찾아냈지만 그 곳에도 러시아군이 있었다.

 

치차고프와 비트겐슈타인은 남쪽에서 접근 중인 슈바르첸베르크를 견제하기 위해 병력을 이동시켰는데 나폴레옹은 슈바르첸베르크의 이동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빌나Vilna(폴란드의 빌니우스)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엘베에게 모든 공병과 장비를 우디노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2개 군단의 마차 중 절반을 불태워 수송마가 얼마 남지 않은 포대를 견인하게 했다.

다리가 놓이면 우디노가 서쪽 강변으로 건너가 교두보를 확보하고 네가 뒤따라 건너가 좌측을 확보하고 두 사람이 남쪽의 러시아군을 견제한다는 계획이었다. 빅토르는 본대가 모두 도강할 때까지 후위를 맡고 엘베는 마지막에 다리를 불태우기로 했다.

 

1123~24,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습지가 다시 얼어붙었다. 나폴레옹은 우디노에게 스투디안카를 건너라고 명령했고 1125. 엘베의 공병이 보리소프에 도착했다. 우디노의 본대는 보리소프의 진영을 조용히 빠져나가 스투디안카로 향했고 마을을 부숴 다리를 세울 목재로 사용했다.

동쪽 강변에 44문의 포를 배치해 포격을 퍼붓고 선봉대 400명이 서쪽 강변의 코사크를 몰아냈다. 1126일 오후, 양쪽 강변을 잇는 다리가 완성되었다. 우디노와 봄브라우스키의 11,000명이 강을 건넜다. 두번째 다리가 오후 3시에 놓이자 우디노의 포병과 황제근위대가 건넜다.

엘베의 공병이 최선을 다했지만 다리가 계속 주저 앉았고 공병은 다리를 보수하느라 떠날 수 없었다.


 

치차고프는 26일에야 나폴레옹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비트겐슈타인이 병력을 이동했지만 도로사정때문에 포병 12개 중대를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쿠투조프는 3, 4, 5, 6, 8보병군단, 4기병군단, 흉갑기병 2개 사단과 함께 보리소프로 이동했다.

27, 대부분의 프랑스군이 다리를 건넜고 9군단과 낙오병만이 동쪽에 남아 있었다. 치차고프도 급히 북진했지만 보리소프에 남아 있던 프랑스 낙오병무리 때문에 발목이 잡혔따.

비트겐슈타인은 프랑스군의 도강지점이 스투디안카라는 것을 알고는 후위인 빅토르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프랑스군 12사단장과 참모가 길을 잃다가 포로가 되었고 12사단은 러시아 1보병군단에게 포위당했다. 러시아군은 4,000명의 보병과 500기의 기병을 고스란히 포로로 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겨우 160명만이 빠져나가 나폴레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나폴레옹의 프랑스본대 전력입니다. 

 

나폴레옹은 호흐베르크Hochberg여단에게 다시 강을 건너 9군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다리는 이미 낙오병이 길을 막고 있었다. 여단의 바덴Baden포대는 포를 서쪽강변에 버려 두고 건너야 할 정도였다.

치차고프는 베레지나강의 보리소프 동쪽강변에 도착했고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29일 오전에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다리를 수리했지만 코사크가 도강하는데 실패해서 겨우 보병 9,000명과 기병 1,500기 만으로 공격에 나섰다. 

우디노가 중앙와 우익을 지키고 네가 좌익을 지켰다. 우디노는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부상을 당했고 네가 지휘를 했다. 오전 10시 네는 3~4천명을 투입해 숲에서 대기중이던 러시아군 좌익의 18사단을 공격했다




 

18사단은 울창한 숲에 의지해 경계를 늦추고 있다가 프랑스군의 기습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600명 이상을 죽이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우익을 공격한 신근위대 1사단은 러시아여단을 순식간에 무너트려서 3,300명을 죽였다.

프랑스기병은 기세를 몰아 러시아군 918사단의 8개 연대를 덮쳤다. 러시아군은 기병에 맞서는 대열로 바꿨다가 뒤따라온 프랑스보병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도 파블로그라드경기병연대가 용감하게 맞서 전멸을 면했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이 계속 보강되는데도 물러서지 않았고 밤이 되면서 전투가 끝났다.

 

베레지나 동쪽 강변에 남아 있던 빅토르는 나폴레옹이 지원한 호흐베르크 연대와 군단을 스투디안카마을 양쪽에 배치해 두었다. 러시아군은 경기병과 코사크연대로 우측면을 먼저 공격하면서 12문을 끌어와 호흐베르크여단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여단은 총검을 앞세우고 러시아군을 밀어냈다.

러시아군은 우측면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좌측면에도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빅토르는 다마스Damas에게 바덴여단과 함께 언덕 위에 있는 러시아군 포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두번의 공격을 큰 피해만 입고 실패했다.

러시아군의 포격은 베레지나강을 건너는 낙오병대열에게도 쏟아졌고 낙오병은 마구잡이로 다리로 몰려들었다. 강을 헤엄쳐 건너려는 병사도 있었다.

 

빅토르의 9군단이 후퇴하자 러시아군이 우익으로 접근하면서 포격과 산발적인 사격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헤센과 바덴경기병의 분전과 러시아군의 공격이 주춤해진 틈을 타, 프랑스군은 계속 다리를 건너 퇴각했다.

양측의 피해는 극심했다. 바덴여단은 1,100명이 죽거나 다쳐서 이제 900명만 남았고 호흐베르크여단은 60명으로 줄어들었다. 강건너에는 여전히 많은 낙오병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화톳불 근처를 떠나지 않거나 부서진 마차잔해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다.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129, 프랑스군은 근위대를 앞세워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구근위대는 2,000명을 줄어들었고 신근위대는 800명이 전부였다. 러시아군이 빌나로 가는 도로를 먼저 차단했다면 프랑스군은 그 자리에서 전멸할 운명이었는데 러시아군은 보이지 않았다.

10시에 나폴레옹은 200명의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본대를 이탈했다. 무라에게 본대를 이끌고 폴란드로 넘어가라는 명령을 남겼다. 네가 2, 35군단으로 후위를 맡았다. 엘베는 아군이 모두 빠져나가자 다리를 모두 불태워서 러시아군의 추격을 24시간 동안 지연시켰다.

치차고프는 프랑스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비트겐슈타인은 치차고프가 부교를 마련해줄 때까지 베레지나강을 건너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강을 건넌 후에도 네와 거리를 두며 따라다녔을 뿐이고 싸움을 걸지 않았다. 아직 프랑스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치차고프는 베레지나강에서 나폴레옹을 그대로 도망치게 한 책음을 물어 1813년에 해임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 다시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22, 북과 남의 별동대를 제외한 프랑스군 본대의 전력은 전멸 직전까지 떨어졌다. 



기온이 다시 급강하했고 양군은 날씨, 식량부족, 전염병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규율이 완전히 무너져서 코사크는 마음대로 약탈하고 학살하며 돌아다녔다.

129, 프랑스군은 빌나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보급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패전소식을 들은 관리들이 코사크의 습격이 두려워 달아난 상태였다. 병사들이 보급품을 마구 약탈했다. 네는 간신히 병사를 모아 코사크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였다.

 

1210, 프랑스군은 빌나를 빠져나갔고 곧바로 코사크가 진입했다. 네는 남은 보급품을 모두 불태우고 강을 건넜다. 무라는 카우나스Kowno에 도착했고 독일징집병 1,500명과 44문의 포를 편입했다. 250만 프랑의 군자금과 막대한 보급품도 받았지만 네만Niemen강이 얼어서 카우나스를 지킬 수가 없었다. 무라는 도시 진입로의 언덕에 포 9문을 배치해서 네를 엄호한 후에 도시를 빠져나갔다.

네는 1,000명을 데리고 카우나스에 들어섰고 도시는 시체와 술 취한 병사들이 가득했다. 플라토프와 코사트는 오후 2시에 도착해서 사격하기 시작했고 언덕에 배치했던 포병이 모두 달아나 포 9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네는 급히 도시입구로 달려가 위기를 수습하며 코사크를 몰아냈다. 다음날 오전 9, 네는 퇴각하며 네만강의 다리에 불을 질렀다.

 

1214, 본대는 다시 네만강을 건넜는데 이제 보병 400명과 기병 600기로 줄어들었다. 러시아에 끌고 갔던 포 800문 중에서 겨우 9문만 남았다.

1219, 무라는 쾨니히스베르크Koeignsberg에 도착해서 낙오병을 긁어 모았다. 증원군을 모두 모아서 12,000명과 포 30문으로 30사단을 편성했다.

치차고프는 1210일에 빌나에 입성해 프랑스 낙오병을 포로로 붙잡았다. 쿠투조프는 1213일에 빌나에 들어섰다. 러시아군은 베레지나에서 빌나로 오는 동안에 90,000명이 사라졌다. 빌나로 보낸 신병 10,000명 중에 겨우 1,500명만 도착했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질병과 동상으로 병원신세를 졌다.

 

북쪽에서는 맥도날드와 함께 퇴각하던 프로이센장군 요르크Yorck1230일에 러시아군과 타우로겐Convention of Tauroggen협정을 맺고 프로이센군단의 중립을 선언했다. 프로이센왕의 승인 없이 독단으로 체결한 협정이었고 협정을 번복하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무라는 외젠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나폴리로 달아났다. 외젠은 지휘권을 거부했지만 위기를 수습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외젠은 다양한 국적의 병사 10,000명을 임시로 혼성연대로 편성했다.

113, 비트겐슈타인은 30,000명을 이끌고 비스튤라(비스와, Vistula)강을 건넌 후에 단치히Danzig에 있는 프랑스군 20,000명을 견제했다. 치차고프는 20,000명으로 토른Thorn으로 전진했고 쿠투조프는 30,000명으로 포메라니아Pomerania 국경을 넘었다.

 

외젠은 병력이 크게 모자라는 4개 사단. 기병 2,000, 9군단의 31사단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10,000명이 전부였다. 포니아토프스키의 8,500명은 슈바르첸베르크가 러시아군과의 휴전에 합의하면서 전력에서 이탈했다.

러시아군 주력은 진격을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코사크는 베를린 부근까지 누비고 다녔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젠은 안전했는데도 베를린의 불안한 움직임 때문에 오데르Oder강 너머로 후퇴했고 덕분에 프로이센이 본격적으로 반프랑스진영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813 2 28, 프리드리히 빌헬름Frederick Wilhelm은 칼리슈조약Treaty of Kalisch을 맺고 러시아진영에 가담했다. 3 27일부터 완전무장한 프로이센 30,000명이 러시아군과 보조를 맞췄다.

러시아군은 프랑스연합군의 붕괴와 프랑스군의 퇴각에 새로운 동력을 얻었고 계속 밀어붙였다. 외젠은 엘베Elbe강 너머로 다시 후퇴하면서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은 마침내 끝이 났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 투입한 680,500명 중에서 93,000명이 살아 돌아왔다. 특히 프랑스 본대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450,000명이 25,000명만 남아 완전히 궤멸했다. 슈바르첸베르크, 레이니에르, 맥도날드 등의 측면기동군은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고 큰 전투를 벌이지 않았기 때문에 68,000명이 귀환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연합군 370,000명이 전투 등으로 목숨을 잃었고 200,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 중 절반도 살아남지 못했다.

원정에 투입된 176,850마리의 말은 거의 살아 남지 못했다. 러시아는 말 시체 123,382구를 치웠다고 기록했다. 나폴레옹은 워낙 많은 군마를 잃었기 때문에 유럽 최고의 기병전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1,800문의 포는 250문 정도만 되돌아왔다. 러시아가 929문을 노획했고 나머지는 호수나 강바닥으로 수장되었다. 프랑스 병기창과 산업시설은 이 손실을 거의 복구했다.

다부군단의 66,345명 중 2,281명이, 황제근위대 50,000명 중 1,300명이 살아 남았지만 800명은 병원신세를 졌다. 나폴레옹은 생존자, 이탈리아사단, 독일주둔군을 중심으로 병력을 재편성했다.

러시아도 큰 피해를 입었다. 150,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000명이 영구 장애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국내상황이 불안해져서 먼저 귀국했고 국내동요를 잠재운 후에 군대재건에 나섰다. 러시아에 있던 9월부터 새로운 징집령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15만명 가량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1814년에 추가로 150,000명을 징집하고 주요 도시에 민병대를 차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16,000명도 육군에 편성되었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1814년까지 656,000명이라는 대군을 보유할 수 있겠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했다. 이전과 달리 전투에 맞지 않는 늙거나 퇴역한 병사가 많았고 해병은 육상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훈련을 받은 신병은 실제 전투에서 큰 도움이 안되었다.

10,000명의 기병이 생환했지만 군마가 턱없이 모자랐다. 그나마 근위대는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전력감이었고 해군포병은 육군포병과 비슷한 전력이었다.

 

1813420일이 되자, 나폴레옹은 210,000명을 병력을 다시 모았고 그 중 35,000명은 동맹군이었다. 프랑스군 175,000명 중 75,000명이 신병이었고 징집령에 따라 훈련병이 계속 늘고 있었다.

부족한 장비는 외국에서 수입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은 급히 재건한 육군을 이끌고 1813년에 다시 전쟁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