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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 (2부) - 전장

by uesgi2003 2022. 3. 18.

나폴레옹전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보병전술을 보며, 이해못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밀집대형으로 상대와 힘대힘으로 맞붙는,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가장 기본적이고 이상적인 보병전술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야기 뒷부분에 원거리 사격전이 불가능한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전쟁 중 최대규모의 전투는 50만명 이상이 1813년 10월 16~19일 동안 벌인 라이프치히전투였고 최소규모는 아마도 바로사Barrosa와 마이다Maida전투로 양측이 1만명 정도를 투입했다. 
대부분의 전투에 양측은 5~10만명을 동원했다. 나폴레옹이 대승을 거둔 마렝고, 아우스터리츠, 예나와 프리틀란트전투 모두 10만명 이하였다. 병력이 많을수록 둔하고 통제하기 힘들지만 방어력은 그만큼 높아졌다. 
이탈리아와 이베리아반도와 같은 제2 전선은 병력규모가 훨씬 작아서 양측이 6만명 이하를 동원했다. 1813년 6월, 웰링턴은 비토리아Vitoria전투에서 처음으로 6만명 이상을 지휘했는데 많은 문제점을 인정했다. 

거의 모든 전투가 하루, 심지어 오후 반나절 안에 승패가 갈렸다. 그렇지만 탈라베라Talavera와 후엔테스 데 오뇨로Fuentes de Onoro와 같이, 첫날은 탐색전을 벌이다가 이튿날에 결전을 벌인 경우도 있다. 
1809~1813년에는 병력투입이 크게 늘어나서 바그람과 라이프치히와 같이 전면전이 하루 이상 계속된 전투도 있는데 극히 드문 경우였다. 피레네스Pyrenees와 니브Nive전투처럼 전장을 옮기며 전투가 이어진 경우도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미국남북전쟁처럼 병력규모가 커지고 작전기간이 늘어났지만 나폴레옹전투에서는 아직 드문 경우였다.

원정 최적시기는 여름과 초가을로 병사와 말을 먹일 식량과 목초가 풍부하고 길이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마렝고, 프리틀란트, 비토리아Vitoria와 워털루전투는 모두 6월, 울름, 예나-아우어슈타트, 라이프치히는 10월에, 다른 많은 전투는 그 중간에 벌어졌다. 
가끔 아우스터리츠와 코루냐Coruna전투처럼 겨울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1807년 폴란드 겨울작전은 2월의 아일라우전투로 끝났다. 1814년 초, 연합군은 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겨울추위로 양측의 군대와 시민이 큰 고통을 겪었지만 4개월을 기다렸다면 나폴레옹은 새 군대를 모으고 더 많은 전투가 벌어질 수 있었다. 
전투는 계절과 날짜에 상관없이 벌어졌다. 워털루는 일요일, 툴로즈Toulouse전투는 부활절에 일어났다. 

날씨가 중요했다. 비가 오면 화약이 점화되지 않았고 기병과 포병은 굳은 땅에서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1813년 8월 23일 그로스비렌GrossBeeren과 1813년 8월 26일 카츠바흐Katzbach전투는 폭우 속에서 벌어져 매우 혼란스러웠다. 눈보라 속에서 벌어진 아일라우전투는 눈앞을 가려 오제르Augereau군단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격하다가 러시아군의 포대에 전멸될 뻔 했다. 알부에라전투에서 폴란드창기병대는 갑작스런 폭우덕분에 콜본Colborne여단의 측면을 기습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악천후 특히 폭우 속에서 벌어진 전투는 정교한 전술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더 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는 화창한 날씨에 벌어졌고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의 태양덕분에 전설을 남겼다. 

 


당시의 전투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벌어졌다. 보통은 전날 밤에 진영을 갖추고 야영하다가 이튿날 전투를 벌였다. 부대 지휘관은 적의 배치를 확인하고 적의 계획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아우스터리츠의 연합군은 나폴레옹의 의도를 완전히 오판했던 반면에 그는 적의 계획을 예상하고 제대로 대응했다. 이 전투에서는 양측이 서로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지만 탈라베라, 부사코와 보로디노처럼 많은 전투에서는 어느 한쪽이 처음부터 방어태세를 굳혔다. 
워털루는 좀 복잡한 형태였지만 독특한 진행은 아니었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의 접근을 계속 확인하면서 영국군에게 계속 달려들었고, 마지막 단계에서 프로이센군의 등장과 영국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프랑스군이 퇴각했다. 

새로운 전력이 적의 측면이나 후방에 나타나는 우회기동 형태도 많았다. 적은 급하게 방어선을 만드느라 주도권을 잃었고 병사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마구잡이 퇴각으로 큰 피해가 발생했다. 
그렇지만 본대의 작전진행 속도에 맞춰 전장에 도착하기 어려웠고 상대도 우회기동의 위험을 알고 사전준비를 했다. 우회기동이 제대로 들어맞으면 대승을 거둘 수 있었지만 대부분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고 완전히 실패한 경우도 많았다. 

전투가 갑자기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라도 부근에 적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선봉이나 후위가 소규모로 충돌하다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본격적인 전투로 벌어졌다. 아우어슈타트가 바로 그런 전투였다. 
프리틀란트, 뤼첸Lutzen과 드레스덴Dresden전투와 같이 별동대라고 생각하고 공격을 시작했는데 적의 본대인 경우도 있었다. 
살라망카처럼 양측의 본대가 근접거리에서 며칠동안 기동한 전투도 있다. 웰링턴은 포르투갈로 퇴각하려고 했고 마몽Marmont은 퇴각하는 영국군을 괴롭힐 생각이었다. 7월 22일 오전, 웰링턴은 프랑스군이 길게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다. 이런 즉흥적인 전투는 드물었다. 

군대가 비슷한 무장을 했기 때문에 당시의 전투진행은 공통점이 많았다. 20년간의 전쟁에도 기술혁신은 거의 없었다. 경보병은 전장식소총으로 무장했고 경기병은 100년 전에 버렸던 창을 다시 사용했다. 포장비는 가벼워지고 단순해져서 기동성이 좋아졌고 포병도 정식 군사훈련을 받으며 상당히 발전했다.
가장 큰 변화는 병력의 규모였다. 유럽농업 생산성과 정부의 통제권과 효율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이전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모든 군대의 중심은 보병이었고 징집이나 자원으로 충원했다. 보병은 전장에서 가장 유용한 병력이었다. 어떤 지형에서라도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전투는 보병간에 벌어졌고 다른 병과는 보조하는 정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병의 역할이 중요했다. 경기병은 적을 탐색하고 진격속도를 늦췄으며 전장에서는 적의 측면에서 적의 우회기동을 조기에 발견했다. 경기병을 정면돌파에 투입하기도 했지만 주로 용기병Dragoon과 흉갑기병Cuirassier같은 중기병이 적진을 돌파해서 대열을 무너트렸다. 기병은 적이 수비태세를 굳히고 있다면 크게 우회해서 공격하거나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포병은 적의 진격을 무산시키거나 포대를 후방으로 옮겨야 할 때까지 포격을 퍼붓는 방어에 주로 사용되었다. 포화를 뒤집어 쓴 적은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전장에서는 3개 병과가 연합하거나 유기적으로 지원했다. 

 

용기병은 상황에 따라 일반보병처럼 말에서 내려 전투를 벌이는 말탄 보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기병용 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지휘관은 군대규모, 편제와 지형에 따라 판단을 결정했다. 라이프치히와 바그람은 당시 최대의 전장으로 양측의 전선이 18km 이상 늘어졌다. 반대로 마이다Maida는 겨우 1.6km에 불과해서 가장 작은 전장이었다. 
보로디노는 병력 밀집도면에서 최고의 전장이었는데 1km당 프랑스는 4만4천명, 러시아는 3만6천명을 투입했다. 당연히 양측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창의적인 전술과 판단을 발휘하려면 공간이 필요했는데 아우스터리츠와 살라망카는 1km당 겨우 8천명이 투입되었다. 
반대로 워털루의 영국군은 1km당 2만 4천명을 배치했는데, 병력을 최대한 밀집시킨다고 방어에 유리하지 않았다. 전선을 좁히면 양측면을 돌파당해 오히려 위험을 자초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양측이 쉽게 기동할 수 있는 평원에서 일어났다. 전사에 자주 등장하는 언덕과 산등성이는 완만한 언덕이나 경사에 불과했다. 전술적 가치가 높았지만 진격을 막는 천혜의 장애물은 절대로 아니었다. 
물론 예외가 존재한다. 세라 도 부사코Serra do Busaco는 계곡에서 100m이상 솟은 산등성이였고 살라망카에도 가파른 산이 2개 있었다. 웰링턴은 탈라베라전투에서 동쪽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계곡에 의지해 프랑스군의 접근을 막았다. 

가파른 경사로는 수비군에게 아주 좋은 위치였다. 적을 내려다 보며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어서 기습당할 염려가 없었다. 완만한 경사로도 적의 진격속도를 늦춰 더 많은 사격을 퍼부울 수 있었고 적이 올라오더라도 이미 숨찬 상태로 백병전을 벌이기 힘들었다. 적이 후퇴하면 경사로를 달려 내려가 반격할 수 있었다. 웰링턴은 주로 경사로를 선호했는데 경사로 반대편에 병력을 배치해서 프랑스군의 감시와 포격을 피했다.   
반대로 포격과 사격은 위로 향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아래를 향한 사격은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릴 수 있지만 위로 향한 사격은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언덕에 배치한 포대는 기병의 접근을 막고 원거리를 포격할 수 있어서 유리했지만 퇴각하기 어려워서 전멸당할 수 있었다. 

 


전투규모와 전장이 확대되면서 마을이 있기 마련이었고 전술적 요충지가 되었다. 마을을 확보하면 포대를 옮겨서 수백미터 이상을 장악할 수 있었다. 마을은 방어거점인 동시에 최우선 공격목표였다. 
시가전에서 기병은 무용지물이었고 포대를 마을 후방이나 측면에 배치해서 마을 진입이나 진출로를 막았다. 시가전은 보병이 맡았고 새 병력이 투입될 때마다 점령하고 빼앗겼다.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던 프랑스출신 렁제홍Langeron장군은 라이프치히전투에서 쉐네펠트Schonefeld마을을 탈환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마을을 확실하게 장악한 후에 입구로 가서 감초소를 설치하려고 했는데, 네Ney가 갑자기 공격을 해왔다. 순식간에 들이닥쳐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5개 대열이 총검을 앞세워 돌격해왔고 나는 마을 곳곳에 퍼져있던 병사들을 집결시키려고 했다. 
압도된 병사들은 허둥지둥 퇴각했다. 도망병들이 내 옆을 마구 지나쳤는데 그런 모습을 욕할 수 없었다.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워낙 빠르게 달아났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당한 예비병력이 대기 중이어서, 도망병이 충분히 물러난 후에, 적에게 똑같이 되갚아주었다. 이번에는 적이 마을에 분산된 상태였고 우리가 질서정연하게 적에게 달려들었다.‘ 

시가전은 너무나도 치열했다. 병사들은 마을 곳곳에 산개되어서 장교들이 통제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집, 정원, 막다른 길에 갇혔고 포로를 잡지 않았다. 총검을 주로 사용했지만 모든 집에 일제사격을 퍼붓기도 했다. 
집안으로 간신히 피신한 부상병은 화재에 그대로 타죽었고 농장에는 가축이 죽어 넘어져있었다. 포격과 사격소음, 병사와 가축의 신음소리, 도움을 바라는 외침, 온몸이 불붙은 비명소리, 연기, 먼지와 화염이 사방을 뒤엎어 도저히 시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을, 농장과 농원은 부대의 신속한 기동을 가로막는 위험한 장애물이었다. 아우스터리츠의 연합군은 장애물을 돌파하느라 프랑스방어선을 돌파하는 것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워털루에서는 프로이센군이 와브르Wavre를 통과하면서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살라망카에서는 콜Cole사단은 보잘것없이 작은 마을 때문에 애를 먹었다. 
워털루의 라 에이 생트La Haye Sainte와 우구몽Hougoumont정원과 아우스터리츠의 소콜니체Sokolnitz성은 대단한 방어시설역할을 했다. 영국군은 워털루에서 두 정원을 요새로 강화시켰고 프랑스보병대를 좁은 진입로로 유도해 전력을 반감시켰다.
나폴레옹은 레유Reille군단을 우구몽공격에 소진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우구몽을 점령했더라도 영국군의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프랑스포대가 라 에이 생트에 배치되었다면 영국군 대열에 치명적인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워털루전투에서 최대 격전지였던 라 이에 생트와 우구몽입니다. 

나폴레옹은 사전에 이 농원을 장악하지 못해, 그리고 심지어 우구몽정원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과 큰 피해를 자초했습니다. 


다행히도 도시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도시 시가전은 아무런 의미없이 대규모 살상전이 벌어져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스몰렌스크Smolensk전투(그림 참조)에서 유서깊은 요새를 방어하려고 했던 예외가 있었지만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툴루즈와 뉴 올리언즈전투는 도시 외곽에서 벌어졌다. 
군대가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면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와 시우다드 로드리고Ciudad Rodrigo, 바다호스Badajoz, 산 세바스티안San Sebastian처럼 무분별한 학살과 약ㅌ탈로 이어졌다. 
그래도 도시 시민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원정이나 전장의 마을과 농장은 전투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주민은 터전을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군대가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1810년, 웰링턴은 포르투갈을 방어하면서 대대적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813년, 술트Soult는 피레네라는 천연방어물에 진지를 쌓았고 바욘Bayonne외곽에 깊은 참호를 팠다. 나폴레옹도 드레스덴에 진지를 구축해두었는데 몇 개월 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군은 워털루전투 오전에 포대진지를 만들려고 했지만 도구와 시간이 부족해서 포기했다. 러시아군은 야전요새 구축으로 유명했다. 보로디노전투에서도 라에프스키Raevsky방벽과 바그라티온Bagration방벽을 구축했는데 당시 야전방벽으로는 최대규모였다. 
라에프스키방벽은 대단한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V자형 토벽을 쌓아 포대를 설치했다가, 앞에 50m 길이로 마른 해자를 팠고 뒤에도 여장(성벽난간, Parapet)을 쌓고 2열로 말뚝을 박았다. 
야전요새는 방어말고도 독특한 기능을 했다. 수비대는 자신이 구축한 진지에서 생황을 했고 마치 집을 지키는 것처럼 진지방어에 최선을 다했다. 

 


야전요새는 본대 앞에 구축해서 적의 공격을 흡수하거나 분산시켰다. 특히 평원에서 기병돌격에 노출될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네Ney원수는 진지구축을 아주 자세하게 지시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정교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지는 제 역할을 다했다. 적이 진지를 점령했을 때에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지친 상태여서 예비병력을 투입하면 쉽게 탈환할 수 있었다. 

보로디노 라에프스키방벽에서는 매우 치열할 전투가 벌어졌다. 방벽에 진입했던 프랑스군은 미처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러시아군의 반격에 밀려났다. 프랑스군은 다시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공성전에는 아주 보기 드문 형태였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중기병 2개 군단이 공격을 주도하고 방벽을 점령하면 러시아군의 반격에 맞설 보병 3개 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기병은 접근하던 중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마른해자를 건너 방벽을 오르다가 말이 쓰러지고 기병이 떨어졌다. 총탄이 쉴새없이 쏟아졌다. 
웨티에르Wathier 흉갑기병사단이 방벽주변을 오르고 배후로 돌다가 러시아보병대의 사격에 물러났다. 로르게Lorge 흉갑기병사단의 작센, 폴란드와 베스트팔렌 기병이 방벽에 진입하는데 성공했고 방벽 안에 몰린 러시아보병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방벽을 점령했지만 러시아보병은 놀랍게도 야포 일부를 끌고 퇴각해 포로가 거의 없었다. 보로디노전투에서 어쩔 수 없이 기병을 투입했지만 절대로 바람직한 전술은 아니었다. 

 


지휘관은 시가전과 마찬가지로 울창한 숲전투를 기피했다. 과수원, 관목지대, 키가 큰 농작물밭도 공격측의 속도를 늦추고 적이 매복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기병과 포병이 무용지물이었고 경보병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 
웰링턴은 캬트흐 브하Quatre Bra에서 숲을 측면장애물로 이용했고 빌라흐Villars도 1709년 말플라크Malplaque전투(지도 참조)에서 숲을 이용했다. 웰링턴은 워털루에서 스와니Soignes숲을 등뒤에 두고 전투를 벌였는데 패전했다면 퇴각로가 막혀 극히 위험할 수 있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니면 숲을 피해 북서방향으로 퇴각하느라 브뤼셀을 프랑스군에게 그대로 내줄 수 밖에 없었다. 

 


늦여름에는 농작물뿐만 아니라 길게 자란 잡초가 큰 위험을 불러왔다. 포탄에 맞거나 포대가 불타면서 화재가 발생했고 아무리 훈련이 잘된 군대라도 마구 달아나게 만들었다. 로베레아Roverea소령은 마이다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포탄이 꽤 근거리에서 터졌고 바짝 마른 들판에 불을 질렀다. 우리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27연대는 우왕좌왕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그대로 타죽었고 병사와 말의 시체의 구역질나는 탄내가 퍼져 역전의 노장도 구토했다. 
관목이나 낮은 돌담도 공격측에는 상당한 부담을 주었고 방어측에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퀼트치마를 입은 하이랜더Highlander는 관목 가시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다. 

 

미국남북전쟁 최대 승부처인 게티스버그전투에서 남군은 이 작은 돌담 하나에 막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강과 개울은 무척 흔했고 전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배후에 바로 강이 있거나 직각으로 개울이 흐르는 지형이 최악이었다. 러시아군은 프리틀란트에서 이런 지형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전투에서 적을 앞에 두고 도강을 했는데 카를Charles대공은 일부러 강을 수비하지 않다가 프랑스군이 도강하면 교두보를 마련하기 전에 공격해 전멸시키려고 했다. 공격측이 마음대로 공격지점을 정해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전술이었다. 리니Ligny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여러 마을을 거쳐 굽이치는 개울을 장애물로 방어선을 펼쳤다. 그렇지만 예비병력을 마을 뒤편의 경사로에 배치해 프랑스군의 관측에 노출시켰고, 개울은 오히려 프로이센군의 기동에 장애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몇 천 명만으로 틸레만Thielemann군단을 하루 종일 묶어둘 수 있었다. 

 

아스페른-에슬링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고, 그리고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입니다. 

전장에는 천연장애물말고도 전투자체에서 발생하는 장애물이 있었다. 전투가 격렬해지고 늘어지면 연기, 소음, 전사자와 부상자가 전장을 뒤덮었다. 워털루에서는 연기가 너무 짙어서 70m 이상을 볼 수 없었고 마치 오븐 안에 있는 것처럼 공기가 탁했다고 한다. 
‘적이 연기를 뚫고 코앞에 나타나야 보였다. 10m 앞도 안보였다.’ 
워털루는 비좁은 전장에 너무 많은 병력이 전투를 벌인 전투였고 우구몽과 라 에이 생트가 불타면서 많은 연기가 발생했고 비가 온 직후라 바람까지 없어서 전장 전체가 연기아래에서 질식했다. 

다른 전투에서는 포연과 일제사격으로 부분적으로 시야가 가려졌다. 해리스Harris소총수는 비메이로Vimeiro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격전의 중심에 있었고 장전과 사격했다. 주변 동료의 사격까지 더해져서 몇 분 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 소총의 붉은 섬광만 보였다. 바람이 불어와 연기를 날려 보내고서야 내 주변에 죽어 넘어진 동료 그리고 적의 동작이 보였다.’ 
보병대대는 일제사격을 주고 받으면서 짙은 연기에 휩싸였고 시간이 지나거나 바람이 불어야 적과 아군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워털루와 보로디노와 같은 대회전에서는 전투소음도 엄청났다. 병사의 편지를 보면
‘지옥같은 날이었다! 피아의 잔인한 포격 때문에 귀가 들리지 않았다. 총탄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우박처럼 쏟아져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총탄에 맞고 쓰러져서야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이 대포의 포격음에는 크게 놀라면서도 날카로운 총탄소리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음은 명령전달에 문제를 일으켰다. 나팔이나 장교의 고함소리로 명령을 내렸는데 포격과 사격소음이 너무 커서 나팔소리는 고사하고 대대장교의 명령도 들리지 않았다. 

전장은 정말 끔찍한 곳이었다. 연기와 소음, 부상병과 말의 비명소리, 드럼과 나팔소리, 환호성, 저주, 울음, 폭발하거나 튀어오르는 포탄, 부대를 찾아 헤매거나 멍하게 서있는 병사, 미쳐 날뛰는 말, 화약과 피비린내, 구토와 배설물. 
도저히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후방으로 달아날 기회만 노렸지만, 대부분은 대열을 유지했고 동료를 믿었고 자긍심과 의지로 마지막까지 전장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