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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4부)

by uesgi2003 2015. 11. 5.

 

오늘 국정교과서 망발 대표필진 두 노인의 인터뷰가 다시 한 번 배꼽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편향된 교과서가 문제여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참여했다면서도 교과서를 읽어보지도 않았고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인지도 모른다고 했죠.

 

타칭 진보라고 했던 노인은 권위가 없는 고등학교 교사들이 지금 교과서를  집필해서 문제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외국인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막장코미디로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한 무대에 같이 올라가 있으니 슬픈 일이죠. 

 

동부전선 기갑전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시키면, 지금 정리하고 있는 이야기는 2차대전 동부전선의 전차전과 그 배경에 대해서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의 5개년 계획 등의 추진에 대해 오해할 수도 있는데, 스탈린과 인민위원회는 국민을 장기판 말판처럼 마구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런 사회정치 배경에 대해서는 범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일체의 설명을 하고 있지 않죠.

그리고 독일군은 전쟁초반 공군에게 상당히 의존했는데 그런 배경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동부전선 독일기갑부대의 선봉이자 에이스는 수투카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블로그를 열면서 계속 당부해오듯이,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고 우리가 오해했거나 몰랐던 배경에 대해서만 취사선택하면 됩니다. 절대진리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4부) 

 

전차는 외형과 달리 복잡한 무기체계이며 전차병이 포격, 기동과 통신을 맡아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전차병은 보통 4~5명이 1개 분대이지만 전투/비전투 손실로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인원인데 훈련까지 미흡하면 분대 전체가 위험해졌다. 가장 계급이 낮았던 장전수라고 해도 미숙하면 전차전에서 이길 수 없었고, 온갖 험한 지형을 달려야 하기 때문에 운전병의 솜씨와 판단도 매우 중요했다.

19416, 대부분의 소련전차병, 특히 T-34KV-1 전차병은 실전경험은 고사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급하게 투입되었고 이듬 해에도 이런 약점이 계속된 반면에 독일전차병은 한 두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신병도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전차병의 삶은 전투보다 유지보수와 보급의 연속이었다. 큰 바위, 나무 둥치. 잔해물을 넘으며 장거리를 이동하다 보면, 긴 핀으로 연결시킨 궤도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점검을 했다.

보통 여분의 궤도를 가지고 다니지만 궤도를 연결할 핀은 늘 부족했다. 몇 분이라도 정차하면 궤도와 로드휠을 확인하고 바로 조였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궤도가 로드휠과 어긋나 움직이지 않았다.

소대장과 중대장은 악천후에 상관없이, 심지어 작전 중에도 유지보수 작업을 지시했다. 마모는 적의 포탄보다 더 심각한 위협이었고 강을 건널 때마다 그리스가 씻겨 나가서 다시 바르지 않으면 로드휠 허브가 타버렸다.

 

 

 

예를 들어 T-34는 일반 도로를 100km 이동할 때마다 최소한 1kg의 그리스가 필요했지만 물을 건널 때에는 훨씬 많은 양이 자주 필요했다. 거의 모든 전차엔진과 트랜스미션에 누유가 생겼고 필터와 개스킷이 닳으면 증상이 더 심해졌다.

독일전차엔진은 고무 개스킷을 사용했는데 소련의 혹독한 추위에서는 얼어서 부서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바로 교체하지 않으면 오일이 줄줄 샜다. 포탑의 유압저장통, 광학장치와 무전기 뿐만 아니라 주포도 포격전이나 장거리 이동 후에는 반드시 포신조정을 해야 했다. 포탑이 탄을 맞거나 험한 지형을 달린 후에는 조준경과 주포가 어긋나서 정확한 포격이 어려웠다.

 

 

 

전차병은 매주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들여다보고 쇳가루가 있는 지를 세밀하게 확인하고 배터리, 스프링, 완충과 제동장치도 검사했다. 사진에서는 힘들어보이는 주포 청소작업은 5~10분 밖에 안 걸린 반면에 토션바 교체는 가장 험난한 작업이었다. 여러 개의 로드 휠을 떼어낸 후에 큰 해머로 부숴진 부분을 떼어냈는데 최소한 4~6시간은 족히 걸리는 중노동이었다. 토션바가 한 개라도 부러져 있다면 옆의 토션바에 무게가 실려서 연이어 부러지기 쉬웠다. 이렇게 되면 전차는 벙커로 전락했다.

유지보수 작업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전차대대에서는 회수전차와 연료트럭이 가장 귀중한 존재였다.

 

 

 

 

 

전쟁 중후반 독일중전차의 복잡한 로드휠과 토션바 구조입니다. 

 

전차장은 보통 포탑 큐폴라에 있었는데 독일군은 전차를 제대로 알고 과감한 장교나 부사관을 전차장으로 임명했다. 반대로 적군은 하급장교와 부사관 교육에 워낙 부실해서 과감한 전차장이 드물었다.

안타깝게도 스탈린의 숙청때문에 하급장교는 명령만 따르는 수동적인 태도가 지배적이었고 전쟁 발발 첫 해의 소련전차부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지만 1943~44년 적군도 독일군에게서 교훈을 얻었고 하급장교도 공격적인 지휘를 한 반면에 독일군 전차장의 수준은 1942년을 고비로 계속 떨어져갔다.

 

전투가 벌어져 큐폴라를 닫으면 승무원은 밀폐된 공간에 갇혀 주변의 아군 전차와 보병을 간신히 알아볼 뿐이었다. 독일전차장은 큐폴라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전장을 주시하도록 훈련을 받았는데 무척 위험했고 부상위험도 컸다.

소련전차장은 큐폴라를 꼭 닫고 관측창만 사용했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병사의 목숨 따위는 중요시하지 않던 소련이 큐폴라를 닫고 포탑 안에만 있게 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수의 소련전차가 소수의 독일전차에게 압도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영화 퓨리에서는 보병의 접근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황당한 장면이 나오지만 내부에서는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옆이나 뒤의 시계는 거의 장님에 가깝죠.

  

소련은 독일전차의 엄청난 전투력에 대해서는 집중하면서도 소련의 전차전 전술의 한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전장을 잘 파악한 독일전차는 선공으로 큰 피해를 입혔고 살아 남은 소련전차는 뒤늦게 대응했다.

주포를 발사할 때에 포탑 안에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고 암모니아 연기로 숨이 막혔다. 능숙한 승무원은 발사 전에 미리 환풍기를 켜지만 훈련이 안된 소련승무원은 연기를 참고 있다가 6발 정도 발사한 후에 차내에 토했다.

 

독일전차는 너무 부정확한 이동중 사격은 피했고 차체를 숨길 수 있는 엄폐물을 찾아 접근하는 적을 노렸다. 반대로 적군은 주포안정기gun stabilizer를 개발했기 때문에 이동중 사격을 권장했다. 야간에는 조명탄이 터지지 않고서는 100m 이상의 목표물을 맞출 수 없었고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전투를 피했다.

유지보수와 전투만 없다면 전차병의 삶은 보병과 달리 안락했다. 그러다 보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다. 194110, 오렐Orel로 진입했던 독일전차부대는 근처 건물에서 잠을 자다가 소련전차의 야습을 받고 혼비백산했던 적이 있었다. 소련의 한 장교는 부하를 데리고 헛간에서 자다가 T-34를 다른 부대에게 도난당했고 징벌부대 처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대규모 작전이 벌어질 경우, 전차병은 며칠 치의 식량을 배급받는데 모자라기 일쑤였고 며칠, 몇 주씩 보급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독일과 소련전차 모두 이동 중에 지역 주민에게서 음식을 구했다.

소련전차병은 할머니의 보급품이라고 불렀고 독일전차병은 약탈이라고 불렀다. 야간전투를 벌이지 않더라도 공습을 피하기 위해 야간기동이 다반사였고 잠이 모자란 운전병의 실수로 교통사고가 많이 났다. 밤에 숲을 지날 때에는 큐폴라를 열고 졸던 전차장이 나뭇가지에 얻어 맞아 깨면 인터콤으로 부하들에게 계속 말을 걸어 졸지 못하게 했다.

 

전투에서는 적탄을 맞아도 25% 정도만이 불이 붙었다. 양쪽 독소 모두 포탄을 맞추면 격파라고 주장했지만 보통은 튕겨 나가거나 장갑을 뚫지 못했다. 전후에 양쪽의 기록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독일은 200% 정도 전과를 부풀렸고 소련은 무려 500%를 부풀렸다.

격파된 전차라고 해도 철갑탄 피해는 일부에 국한되기 때문에 수리해서 다시 투입할 수 있었다. 전차가 격파되어도 승무원 피해는 0~2명에 그쳤고 나머지는 경상을 입는 경우가 많아서 몇 차례나 전차를 바꿔 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전쟁 초반, 적군은 탄에 맞기만 하면 전차를 버리고 돌아오는 일이 너무 많아서 살아 돌아온 전차병을 징벌부대로 보냈고 그 다음부터는 전차병이 파손된 전차를 지켰다.

 

(타이거의 철갑탄 위력이 너무 대단해서 M4의 차체를 그대로 관통했고 살아남은 전차병이 증언하는 영상도 있었죠.

실제 교전 이야기가 너무 없어서 전쟁초반 독일군이 무척 고전했던 작은 전투 하나를 정리해봤습니다.)

 

4전차집단Panzergruppe의 정찰기가 케다이니아이Kedainiai에서 접근 중인 소련전차를 포착했는데도 6전차사단은 이상하리만큼 소련기갑부대의 대대적인 반격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624일 오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대규모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신형전차가 3종이나 나타났다.

2 전차사단 에고르 솔랸킨Egor N. Solyankin2개 전차연대와 1개 자동차보병연대로 제켄도르프Seckendorff 전투단을 공격했다. BTT-26 경전차가 앞에 서고 T-34KV 중전차가 따르며 그 뒤를 독일군을 공격했다. 독일군 전차엽병부대는 처음 보는 T-34, KV-I KV-II 전차에 놀랐지만 전투교리에 따라 침착하게 소련전차가 200m 이내로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3.7cm (사진 참조)5cm 대전차포문을 열었다

 

 

 

(원래 솔랸킨은 KV-1 32, KV-2 19, T-34 50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100km를 달려오던 중에 절반 정도가 낙오되었고 나머지도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튿날에야 투입되었습니다. 만약 사단전력 고스란히 보병과 함께 투입되었다면 6전차사단은 개전 초에 전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철갑탄은 장갑을 뚫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 나갔고 소련중전차는 전차엽병부대를 궤멸시켰다. 2차대전 발발 후 처음으로 독일보병이 전차부대에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공포의 전투였다. 드미트리 오사드치Dmitry I. Osadchy소령이 이끄는 KV 중전차 3대는 제켄도르프 전투단을 뚫고 두비사Dubysa강을 건너 114연대를 공격했다.

소련전차 기습을 받은 독일군은 15cm 곡사포까지 동원해 직격탄을 쏘았다. 15cm 포탄도 KV 전차의 두터운 장갑을 뚫지는 못했지만 궤도를 망가트리고 주저 앉혀 간신히 막아냈다. 6전차사단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6전차사단장인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위 사진 참조)의 라세이니아이Raseiniai전투기록은 배후로 침투해 보급로를 끊은 KV-2 한 대(사진 참조)를 처리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제켄도르프 전투단의 피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 제3 전차연대 연대장이 파편에 전사하고 연료와 탄약이 바닥나면서 독일군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보급부대가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다가 소련폭격기의 공습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4전차집단8.8cm 대공포를 후방에 남겨둔 상태였고 라세이니아이 부근에는 대구경 대전차포가 전혀 없었다.

 

 

 

라인하르트Reinhardt는 즉시 대공포대를 불러 6전차사단을 지원하게 하고 11전차연대의 Pz. 35(t)와 약간의 4호 전차로 114연대를 공격하는 소련전차에게 반격했지만 심각한 피해만 입었다.

라세이니아이전투에서 또 하나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독일공군의 지원이 없었다. 만약 수투카의 근접지원이 있었다면 소련전차의 공격을 막아냈겠지만 공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솔랸킨은 624일에 6번 공격해서 독일군을 상당히 곤란한 지경으로 몰았지만 탄약과 연료가 바닥났다. 보급부대와 단절되었고 T-26BT-7 경전차, 자동화 보병을 반격초반에 모두 잃었기 때문에 KVT-34만으로는 더 이상의 전투가 불가능했다.

 

솔랸킨은 남은 전차로 라세이니아이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급하게 호출한 8.8cm 대공포대와 10cm 중포대(사진 참조)가 도착해 여러 대를 잃고 공격이 무산되었다.

라인하르트는 공황상태를 수습하고 1전차사단과 36보병사단을 솔랸킨의 노출된 옆구리에 투입했다. 만슈타인의 8전차사단도 케다이니아이를 점령해서 솔랸킨의 배후를 끊었다. 24일 저녁이 되자 소련 2전차사단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튿날 아침, 솔랸킨은 남은 중전차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돌파했는데 이번에도 전차엽병의 대전차포는 무용지물이어서 급하게 8.8cm10cm 포를 대전차포로 돌렸다. 라인하르트는 포위망에 갇힌 2전차사단을 공격했고 솔랸킨은 26일에 전사했다.

 

라세이니아이전투에서 소련전차부대는 패했지만 2전차사단만으로 라인하르트의 군단전체를 3일 동안 꼼짝도 못하게 묶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