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6부 - 사부아의 변절과 교착상태

uesgi2003 2018. 1. 12. 00:47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6부 - 회흐슈테트 전투


말버러는 프랑스군을 결전에서 격파하지 못했어도 브라반트Brabant와 라인강 하류에서 몰아내는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네덜란드공화국은 위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전을 펼칠 수 있게된 반면에 이제는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위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전지역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군의 실질적인 사령관 바덴변경백Margrave of Baden 루트비히 빌헬름Ludwig Wilhelm17029월에 란다우Landau요새를 점령했지만 바바리아선제후가 공식적으로 프랑스연합군에 가담하자 소수의 수비대만 남기고 라인강을 다시 건너가야 했다. 프랑스군이 빈으로 향하는 길목이 열렸다.

루이 14세는 독일남부의 동맹과 맺은 지원약속 때문에 저지대국가나 이탈리아북부에 투입되어야 할 병력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바바리아군은 상당한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외젠과 사촌인 루트비히 빌헴름은 제국의 방패 또는 붉은 왕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주로 오스만 투르크군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이런 초상화가 남아 있습니다. 

입장이 계속 바뀌던 당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빌헬름은 프랑스를 상대로 말년을 보냈는데 그의 딸은 나중에 프랑스 왕가와 결혼해서 후손이 프랑스왕위에 오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170334, 바바리아군은 제국군과 파사우Passau 부근에서 격전을 벌였다. 제국군 지휘관 폰 슐리크von Schlick는 폭설을 뚫고 아직 진영에 머무르고 있는 바바리아군을 기습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진영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바바리아군이 기습해왔다.

프랑스군 대령은 이렇게 기록했다.

양쪽의 기병이 오랫동안 승부를 내지 못했다. 선제후의 흉갑기병은 정말로 대단한 부대였기 때문에 격전이 벌어졌다. 아군 보병은 그런 격전을 치르지 않았다. 아군은 적의 초탄을 버틴 후에 총검을 앞세워 돌격했고 모든 저항을 무너트렸다. 적의 기병이 물러나면서 전체가 달아났다. 슐리크는 한줌의 패잔병만 데리고 달아났다.‘

이 프랑스대령은 바바리아 장교용 철제투구 장식을 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백병전에서 두 머리를 두 번이나 칼에 맞았지만 모두 튕겨냈다고 한다.



바바리아의 흉갑기병입니다. 사무라이 투구와 비슷한 투구를 쓰고 있는데 북구일대까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래는 외젠공의 흉갑기병입니다. 



아래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의 프랑스기병인데 용기병(상황에 따라 보병으로 전투참여)입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제국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준 후에 라티스본Ratisbon에 무혈입성했고 노이부르크Neuburg로 이동해 다뉴브강 일대를 장악했다. 바바리아군의 공격을 예상한 제국군은 오래된 성벽을 보강했지만 겨우 5일만에 함락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방돔Vendôme이 제국군사령관 귀도 폰 슈타르헴베르크Guido von Starhemberg를 잘 상대하고 있었고 라인강에서는 170359, 프랑스 역사상 손꼽히는 지휘관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Claude-Louis-Hector de Villars가 슈트라스부르크Strasburg에서 강을 건너 켈Kehl을 함락시켰다.

빌라르원수는 검은 숲Black Forest(현재의 슈바르츠발트)을 통과해 바바리아군의 다뉴브작전을 지원했다.



노이부르크와 검은 숲입니다. 프랑스에서 독일남부로 병력과 보급을 보내려면 반드시 검은 숲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헝가리는 제국에 반대하는 소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연합군이 제국군을 격파하고 빈을 점령한다면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이 동맹진영에서 사라질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에 머무르고 있는 병력을 돌려 네덜란드 남부를 회복하고 스페인제국의 영토를 왕위계승문제가 발발하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바바리아선제후는 빈으로 들어가 레오폴트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를 생각이었다. 너무 원대한 꿈이었지만 강력한 루이 14세의 지원을 계속 받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17036, 빌라르는 프랑스-바바리아연합군 약 70,000명을 이끌고 빈으로 바로 진격하려고 했다. 방비가 허술한 빈은 단 하루면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반면에 선제후는 티롤로 진격해서 이탈리아에서 올라오는 방돔과 합류하자고 고집부렸다.

루이 14세는 그 장관을 기대했지만 티롤의 맹렬한 저항에 가로막힌 데다가 방돔은 이탈리아 북부의 트렌토Trentino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중해는 이제 동맹군함대의 바다나 마찬가지였고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방돔은 그가 언젠가는 변절해서 자신의 보급과 통신로를 위협할 것으로 예상해서 무척 신중하게 움직였는데 3개월 후에 그의 염려가 맞았다.

방돔은 불안한 등 뒤를 두고 북진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합류하지 않아도 티롤은 쉽게 점령할 수 있다며 루이 14세에게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8, 제국군은 바바리아의 아우구스트August 자유도시를 포위했고 선제후는 티롤에서 병력을 빼내 빌라르와 합류했다.

바덴군은 다뉴브 남쪽에, 제국군의 별동대 18,000명은 아직 강 북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림뷔르흐 스티럼Limburg Styrum의 제국군은 바덴군과 합류하기 위해 급하게 내려가다가 뒤처진 포병대 때문에 회흐슈테트Höchstädt에서 하루 지체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1703920, 프랑스연합군은 제국군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스티럼은 대부분의 병력과 보급품을 버리고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쳤고 남쪽에서 지원군을 기다리던 바덴군도 바로 진영을 거두고 라인강으로 퇴각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반격은 무참하게 실패했고 루이 14세는 귀공이 선두에 서면 아군은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입니다라며 막시밀리안 2Maximilian II선제후를 칭찬했다.



 

탈라르는 알사스에 새로 구축된 뇌프브히사슈Neuf-Brisach를 점령하려고 이동했다. 이번에도 루이 14세는 손자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했지만 실제 지휘는 탈라르가 맡았다. 당연히 연대장들은 형식적으로 총사령관에게 보고하고 명령은 탈라르에게 받는 불편한 상황을 겪었다. 

보방원수의 조언을 받은 루이 14세는 뇌프브히사슈 공격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보방원수는 라인강물이 줄어들기 전까지 함락시키기 힘들텐데 탈라르가 9월 전에 무리해서 공격하면 창피를 당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차라리 란다우나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루이는 손자의 불명예를 염려하면서도 탈라르의 선택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823, 탈라르는 요새도시를 포위했고 겨우 2주 만에 함락시켰다. 보방의 조언과 달리, 강물이 넘치면서 요새의 방어선이 침수된 덕분이었다. 뇌프브히사슈를 장악하면서 바바리아 깊숙이 침투한 프랑스군의 보급로가 안전해졌고 탈라르도 등뒤를 걱정하지 않고 란다우를 포위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빌라르와 선제후는 서로 심한 갈등을 빚었고 루이가 빌라르에게 배경이 든든한 사람과는 충돌하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루이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선제후의 의견을 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남부의 세벤느Cevennes 반란진압을 이유로 빌라르를 소환하고 페르디낭 마르생Ferdinand Marsin을 새 지휘관으로 파견했다.



원수에 올라 독일원정군을 이끈 마르생입니다. 하필이면 말버러공을 만나 블렌하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저 그런 지휘관이라는 이름을 남겼습니다. 

 

제국군의 헤센카셀공Prince of Hesse-Cassel이 란다우 구원에 나섰다가 170311, 슈파이어바흐Speyerbach강에서 탈라르에게 참패를 당했다. 란다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루이 14세는 자신만만했다. 다가올 새해에는 전역에 배치된 8개 야전군 저지대국가의 빌레루이, 사부아의 라 페이야드La Feuillaide, 세벤느의 빌라르, 스페인의 베르비크, 바바리아의 마르생, 라인강 상류의 탈라르, 롬바르디Lombardy와 이탈리아 북부의 방돔공작 필리프Philippe, Duke of Vendôme 만으로 동맹군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동맹군은 동상이몽 중이었다. 네덜란드공화국은 국경이 안전해지자 더 이상 나가려 하지 않았고 영국의회는 늘어가는 전쟁비용을 염려했고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북부와 라인강 상류뿐만 아니라 빈까지 사정권에 두고 있었다. 동맹군이 해상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전쟁은 보병으로 끝내야 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동맹군에게 빈을 보호할 병력을 보내달라고 계속 요청했는데, 네덜란드은 1개 군단만 지원한데다가 바덴변경백과 심각한 의견충돌을 빚었다. 바덴변경백은 네덜란드 지휘관을 해임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가 그럴 경우 1개 군단도 모두 본국으로 소환시키겠다는 강경한 태도에 잠시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프랑스도 속사정은 겉보기와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군은 지나치게 많은 전장에 분산되어 있었고 마르생은 특히 검은 숲을 통과하는 보급로 끝에 있었다. 바바리아군을 지원하는 프랑스군은 다른 전장에 훨씬 필요한 중요한 병력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바리아선제후의 약속과 달리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리고 1703912일에 카를대공은 빈에서 스페인 카를로스Carlos 3세를 자칭하며 스페인국민에게 확실한 대안을 제시했다. 6주 후에는 사부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가 그동안의 조약과 정략결혼에도 불구하고 대동맹으로 이탈했다. 생시몽St Sim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부아공은 언제나 불안했는데 황제편을 들었다. 왕은 당연히 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군대를 보내 사부아를 침공했다. 사부아가 카를대공의 참칭(함부로 왕을 칭하다)을 지지한 것도 놀랍지 않다.’

사부아의 변절로 프랑스군은 알프스산맥을 두고 양분되어 프랑스-바바리아군으로 바덴변경백과 제국군 모두를 상대하는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사부아공은 두 딸을 루이 14세의 손자와 펠리페 5세와 결혼시켜 이중으로 단단히 맺어진 사이였다. 그리고 라 페이야드의 병력이 피에몬테Piedmont와 사부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절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부아공은 독립국왕이 되고 싶은 야심이 있었고 영국이 약속한 매달 800,000 크라운도 욕심이 났다. 그리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더 많은 것을 받아내고 싶었다.

 

170312월 말, 레오폴트황제는 마지못해 카를대공을 영국으로 보냈다. 카를은 저지대국가의 향후 작전과 동맹군의 포르투갈상륙에 대해 협의한 후에 170436, HMS 로얄 캐서린Royal Katherine을 타고 포르투갈에 도착했다.

이베리아반도원정군 사령관으로 헤센-다름슈타트Hesse-Darmstadt의 게오르크공을 임명했다. 그는 스페인을 잘 알았고 반도지형에서의 군사작전에 능숙했다.

 

루이 14세의 기대와 달리 1704년은 말버러의 해였다. 빈이 위험했고 다뉴브강 일대의 제국군을 지원해야 했지만 네덜란드공화국은 국경 부근만 지키려 했다. 말버러는 연합작전에서 필수적인 설득, 강압과 눈속임을 부렸다. 말버러와 브라티슬라프Wratislaw백작은 비밀계획을 세우고 17043월에 앤여왕에게서 독일남부로 내려가서 프랑스연합군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말버러와 영국군이 사라지면 네덜란드 남부가 위험해지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반발은 상당했다.

말버러는 자신이 남진하면 프랑스군이 그대로 있지 않고 대응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오버크리크Overkrik의 네덜란드군은 국경선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무방비상태로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말버러의 남진은 모젤Moselle계곡의 베드마르와 알사스의 탈라르 등의 프랑스거점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강행군해서 말버러의 의도를 숨겨야했다. 만약 중간에 프랑스군이 요격에 나선다면 영국군은 행군상태에 보급창마저 먼 후방에 있기 때문에 참패를 당할 수 있었다.

1704419~21, 말버러는 헤이그를 방문해 여름에 모젤계곡의 베드마르를 상대하겠다고 밝혔다. 셸란Zealand대표단이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말버러는 이미 여왕의 허가를 받아냈기 때문에 네덜란드공화국의 동의가 필요없었다.

54, 통령은 마지못해 말버러의 계획에 동의했고 15일 후에 영국군 19,000(용병포함)이 베드부르크Bedburg에서 남진하기 시작했다



말버러공의 기가 막힌 기동전입니다.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면서도 강행군으로 프랑스군을 대혼란에 빠트렸습니다. 

빌레루이를 끌어내려 네덜란드국경을 안전하게 하게, 프랑스군 보급로를 노려 알사스를 공격하는 것처럼 기만해 빌레루이와 탈라르가 선제공격에 나서지 못하게 묶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