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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7부 - 방돔의 반격

uesgi2003 2018. 5. 31. 01:11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7부 - 방돔의 반격


스페인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왕국과 프랑스는 비밀협상을 재개했다. 1710년, 반전주의 토리Tory당이 의회를 장악했다. 그렇지만 이전의 조항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스페인전선에서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영국협상단은 상황을 지켜 보기로 했다. 

네덜란드도 지난 8년의 전투에서 인력과 예산소비가 막대했고 프랑스 못지않게 조언을 원했다. 1690년대에는 빌럼William 3세가 영국과 네덜란드 모두를 위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양국의 입장이 달랐다. 

네덜란드의 이익은 이미 협상안에 모두 반영되어 있었다. 카를대공과 스탠호프가 1707년에 맺은 영국의 교역독점도 파기되어 네덜란드상선이 교역에 참가할 수 있었다. 미노르카섬은 카를대공 소유가 되어서 지브랄타를 제외하면 영국의 지중해거점은 더 이상 없었다. 네덜란드남부의 스페인령과 프랑스 점령지도 모두 네덜란드 소유가 될 수 있었다.

영국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오슈텐트Ostend정도만 네덜란드의 이익과 어긋났다. 대신에 프로이센왕에게 약속했던 헬데를란트Guelderland북부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은 1707년 영국왕국과 스코틀랜드왕국이 합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영국왕국(아래)과 스코틀랜드왕국(그 아래)이 별도로 존재했습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도 합병합니다. 





1710년 동맹군의 플랑드르공세는 승리의 연속이었다. 어쩔 수 없이 치뤘던 말플라크전투와 달리, 빌라르는 방어선을 떠나지 않았고 요새라인에 의존했다. 말버러와 외젠이 연거푸 프랑스요새를 점령했지만 프랑스군은 현명하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며 용감하게 저항해서 동맹군의 귀중한 시간과 전력을 갉아먹었다. 

자연스럽게 런던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에Douai가 포위되자 빌라르는 루이 14세에게 조언을 구했고 루이 14세는 적의 전력이 막강하면 절대로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보냈다. 

6월 말, 두에의 수비대가 명예항복했다. 2주 후에 베튄Bethune, 에르쉬르라리스Aire-sur-la-Ly, 셍브넝St Venant을 점령했지만 가을이 다가왔고 무려 19,000명을 잃었다. 그리고 수천명이 야전병원에 누워 있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약 6,000명을 잃었다. 

빌라르는 무릎총상 때문에 온천에서 치료 중에 다르쿠르d’Harcourt원수로 교체되었다. 


루이 14세가 스페인전선을 방치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이제는 스페인귀족이 점차 카를대공진영으로 변절하기 시작했다. 방돔과 8,000명의 병사를 급히 파병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탄약과 식량을 충분히 보냈다. 

9월 20일, 방돔은 바야도리드에 도착해서 펠리페 5세를 알현하고 전세를 뒤집을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스페인군의 수준에 대해 놀라며 베르사이유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스페인군이 포르투갈과 카탈루냐 병력을 막는 동안 방돔은 카스티야에 있는 동맹군본대를 우회해 타구스Tagus강에 있는 스탠호프 별동대를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1710년 10월 6일, 방돔은 14,000명을 이끌고 살라망카Salamanca에 입성한 후에 알마라스Almaraz로 바로 진격해 타구스강의 다리를 끊었다. 

스탠호프는 톨레도Toledo로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그 뒤를 추격했다. 방돔의 병력은 25,000명까지 불어난 데다가 스탠호프가 동쪽으로 크게 퇴각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에서 오는 증원군이나 보급품을 받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른 한 편으로 슈타르함베르크는 카탈루냐로 이어지는 보급과 교통로가 위험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에 카스티야에서 겨울을 넘길 것인지 고민했다. 카를대공은 마드리드의 차가운 반응에 크게 실망하고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초기의 승전을 이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린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슈타르함베르크는 병력을 이끌고 마드리드를 떠났고 펠리페 5세는 4,000기의 기병과 함께 수도를 탈환했다. 

‘거리는 환영인파로 가득차서 폐하의 마차가 통과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다시 한 번 스페인국민은 펠리페와 카를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펠리페는 12월 6일에 마드리드를 떠나 방돔과 합류했다. 


슈타르함베르크는 친촌Chinchon에서 스탠호프와 합류한 후에 3개 종대로 카탈루냐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슈타르함베르크가 중앙을 이끌고 스탠호프와 아탈라야Atalaya후작이 양쪽을 지휘했다. 1개 종대로 한 도로만 이용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방돔의 추격에 바로 따라 잡히기 때문에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지휘와 협조였다. 스탠호프는 프랑스기병과 지역민병의 공격에 시달렸고 행군 중에 계속 멈추며 공격을 막아야했다. 

12월 8일, 기병 4개와 보병 8개연대 4,000명은 타후나Tajuna강 오른쪽 강변의 브리후에가Brihuega에서 프랑스군에 따라 잡혔다. 스탠호프는 곡식을 갈아 빵을 만들기 위해 잠시 멈췄는데 적이 근거리까지 좁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급히 슈타르함베르크에게 구원요청을 보냈지만 20km 밖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브리후에가 재현쇼에 참가한 영국군입니다. 죽어있는 사람은 한동안 누워있었겠군요. 이 전투에서 스탠호프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12월 9일, 방돔의 날카로운 포격이 날아들면서 마을의 벽이 무너져 내렸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영국용기병은 이렇게 기록했다. 

‘장교가 마을방어 취약점이라고 생각한 마을입구 문에 배치되었다. 적도 이 사실을 당연히 알았고 세번이나 포격해왔다. 우리는 물러나지 않았지만 야포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탄약도 거의 떨어져 가서 신중하게 사격해야 했다.’

마을입구 전투에서만 150명의 병사가 죽었을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적이 협상을 제안해왔다. 방벽으로 다가와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슈타르함베르크장군이 구원하러 오고 있다는 것을 적도 알고 있었다.’

슈타르함베르크는 지원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지만 전투소음 때문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스탠호프는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항복제안을 받아들였고 약 3,000명이 그대로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도 1,300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방돔은 바로 다음날 비야비시오사Villaviciosa에서 슈타르함베르크의 본대와 충돌했다. 펠리페 5세가 프랑스-스페인군의 우익을 지휘하면서 기병돌격으로 동맹군진영을 관통하며 네덜란드장군 두 명을 죽였다. 

슈타르함베르크는 침착하게 군대를 지휘하며 방돔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다가 밤을 지새운 후에 이튿날 오전에 퇴각했다. 연합군은 4,000명을 잃고 대부분의 대포를 전장에 버리는 큰 손실을 입었다. 대포는 이전의 전투에서 노획했던 것으로 버리기 전에 점화구에 나무못을 박고 운반대는 모조리 부쉈다. 

방돔도 거의 비슷한 피해를 입었지만 전장을 지배했다. 연합군을 추격하지 않아 나중에 비난을 샀는데, 연 이틀의 전투의 피로와 피해 때문에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펠리페는 루이 14세에게 ‘패잔병이 상처를 핥으며 급하게 달아났다’고 편지를 보냈다. 



방돔이 노획한 연대기를 펠리페 5세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양측의 피해는 거의 비슷했지만 모처럼의 반격이었고 전장을 지배했기 때문에 이런 그림도 그렸던 모양입니다. 



12월 23일, 연합군은 질서정연하게 사라고사로 들어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군수품을 불태웠다. 1711년 1월 6일, 7,000명으로 줄어든 연합군은 아라곤을 버리고 바르셀로나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방돔은 손쉽게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탈환했다. 

카탈루냐를 책임진 노아이으Noailles백작의 19,000명은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12월 15일에 헤로나Gerona(지도참조)를 포위했다. 수비대가 격렬하게 저항하고 폭우가 쏟아져서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다가 1711년 1월 23일에 성벽 일부를 무너트리고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연합군수비대는 그제서야 항복했다. 



영국의회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궁정도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스페인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주장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영국은 미노르카유지에 더 신경 쓰는 분위기였다. 

1711년 2월에 존 캠벨John Campbell이 스탠호프의 후임으로 왔고 5월 중순에는 황제군 8,000명이 배를 타고 건너왔다. 존 캠벨은 앤여왕에게 간청해서 군자금을 지원받았고 6월 말이 되자 동맹군병력은 18,000명까지 늘어났다. 이제 뜨거운 여름이어서 다른 전선과 달리 스페인전선은 휴식기에 들어갔다. 양측은 정찰과 탐색전 정도만 벌이며 병력증원에 집중했다. 

1712년 초에 존 캠벨이 떠나고 웨담Whetham이 영국군을 지휘했다. 


신대륙도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5족 연합Five Nations을 대표하는 모하크Mohawk추장들이 1710년에 런던을 방문한 후에 1710년에는 영국군을 지원해 아카디아Acadia의 포트 로얄Port Royal을 공격했고 퀘벡Quebec의 프랑스정착지도 공격할 계획이었다. 

앤여왕은 뉴욕총독에게 프랑스군을 퀘벡에서 몰아내고 여러 인디안부족이 영국에 복종할 것이며 영국은 가죽 등의 교역권을 차지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작전에 대해서는 심지어 함대제독도 알지 못할 정도로 비밀을 유지했다.

호벤던 워커Hovenden Walker제독이 함대를 지휘했고 리차드 힐Richard Hill장군이 상륙부대를 지휘했다. 그의 아내 아비개일Abigail은 앤여왕의 측근이었다. 영국원정군은 평화협상을 기다린 후에 그 결과에 따라 캐나다의 프랑스식민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제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0차대전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북미에서 중미까지 세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부분까지 정리하면 신대륙역사까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5족 연합은 모하크족 Kanienkehaka(부싯돌의 사람들), 오네이다족Onayotekaono(세워진 돌의 사람들), 오논다가족Onundagaono(언덕의 사람들), 카유가족Guyohkohnyo(큰 늪지의 사람들), 세네카족: onondowahgah(언덕 위의 사람들)이며 나중에 투스카로라족Ska Ru ren(대마를 채집하는 사람들)이 합류해서 6족 연합 또는 이로쿼이연합이라고 부릅니다. 




포트 로얄은 1707년에 이어 1710년에도 영국과 이로쿼이연합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북미인디안역사를 보면 안타깝게도 인디안부족은 영프 양쪽으로 갈렸는데 와바나키연합Wabanaki Confederacy은 프랑스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식민지당시 영화를 보면 영프 양쪽에 동원된 인디안부족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지도는 1702년 당시의 신대륙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북미의 극히 일부만 정착했고 절대적인 면적은 인디안과 자연의 것이었습니다.
스페인제국은 미국남부를 장악했으면서도 식민지경영에 실패해서 밀려나고 맙니다. 스페인이 종교전쟁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국왕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미국은 없고 스페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