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 겨울추위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알려져 있죠. 해외자료가 드문 시절 서프라이즈급 어설픈 자료 그리고 그 자료로 어설프게 공부한 연예강사들이 원인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심지어 저를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세한 자료를 보여주어도 아예 안보고 콘크리트 속에 박제된 오류를 고집부립니다.
아무리 기본이 안된 지휘관이라고 해도 겨울을 목전에 두고 원정을 떠나는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나폴레옹과 같은 군사천재는 더욱 그렇죠.
먼저 프랑스자료입니다. 출발시기와 병력 그리고 모스크바 탈출시기와 병력을 잘 확인해보세요. 모스크바를 입성할 때부터 이미 패배한 상태였고 탈출시기는 겨울이 오기 전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모두 번역해서 공유했었는데 그래봤자 왜곡시켰다고 비난해서 그냥 영문으로 올립니다.
모스크바를 겨우 10만명으로 입성하죠? 그리고 탈출한 것도 10월 18일입니다.
스몰렌스크 부분의 설명을 보면 탈영, 질병, 아사, 포로 등으로 병력이 굉장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이 되니까 잘 살펴보세요. 나폴레옹의 본대 외에 남과 북으로도 진격했는데 주력이 아니다보니 지지부진했고 병력손실도 꽤 컸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한 두 번의 전투 후에 모스크바로 진입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러시아군의 초토화작전과 별도로 무수한 전투가 연이어졌습니다. 오늘은 그 전투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래 목록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탈출하기 전까지 벌어진 주요 전투입니다. 프랑스군이 승리했어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군도 꽤 승리를 거뒀습니다.
잘 안보일텐데 이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napoleon-series.org/military/listings/c_russia.html
이 정도 설명했는데도 자료에 눈감고 제 설명에 귀닫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냥 쉽게 이 질문에 대답하면 됩니다.
"나폴레옹이 봄에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면 전쟁에 이겼을 것 같나요?"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서 굶주리고 병든 10만 명이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나폴레옹이 실제 역사에서 왜 겨울을 앞두고 모스크바를 탈출했을까요? 겨울을 보내려면 일부러라도 모스크바에 머물러야했습니다만."
아! 저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지명이나 인명이 이야기마다 틀립니다. 너무 늘어지다 보니 집중을 못해서 자주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부터는 정말로 화악 줄이고 건너뜁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9부) - 전투의 연속
살타노프카전투는 라에프스키가 물러나면서 끝났다. 그루시Grouchy는 오르샤Orsha를 기습해서 막대한 보급품을 손에 넣었다. 수비대는 보급품에 불을 지르지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 그루시는 드니에페르Dnieper강을 건너 스몰렌스크와 비테브스크 방향을 정찰했다.
제롬의 7군단은 방담Vandamme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타로Tharreau에게 넘어갔다. 바그라티온을
추격하던 부대들은 바그라티온을 잡는데 실패했다.
살타노프카전투에서 돌격하는 러시아군입니다. 실제로 연대장과 사단장도 직접 선두에서 지휘했고 그래서 큰 전투에서는 수십명의 장군이 전사했습니다.
남쪽의 레이니에르Reynier는 토르마소프Tormassov의 3군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겨우 10,600명이 전부여서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3군 병력을 10,000명 내외로 오판하고 일부 병력을 본대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레이니에르에게 볼히니아Volhynia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토르마소프는 7월 중순에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주력을 코브린Kobrin으로 움직였다. 코브린은 도로교차로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로 석조건물은 교회 단 한 채뿐이었다. 그 아래에는 스웨덴 카를 12세가 침공하던 시절부터 버려진 방책이 있었다. 마을 주변은 개방되어 있었고 마을을 관통하는 강은 얕고 좁아서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마을을 차지한 작센여단은 2,433명이었는데 수송마차가 뒤처져서 군량이 부족했다. 다리가 끊어져 다른 경로로 접근하던 수송마차는 코사크에게 모두 빼앗겼다.
7월 27일 오전, 칼무크Kalmuck 기병이 대거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외곽의 기병은 이들에게 쫓겨 들어왔는데 그 뒤를 따라 러시아기병이 나타났다. 토르마소프의 주력이 접근하자 외곽의 보병과 포대도 모두 마을로 후퇴했다.
(중략) 코브린전투에서 러시아군은 600명 정도를 잃은 반면에 작센군 장교 62명과 사병 1,992명을 포로로 잡았다.
대육군 북쪽에서는 맥도날드Macdonald원수와 우디노Oudinot원수가 리가Riga를 향해 전진 중이었다. 러시아군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군단으로 우디노를 견제하면서 리가수비대를 구원하게 했다.
러시아군에게 항복한 작센부대입니다.
양측은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7월 30일~8월 1일 이틀간 클랴스티치Klyastitsy(일명 야쿠보보Yakubovo)에서 대회전이 있었다. 러시아군은 쿨니에프Kulnieff장군이 전사하며 4,300명(포로 1,300명 포함)을 잃었지만 프랑스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고 프랑스군도 4,000명을 잃었다.
8월 11일 우디노 2군단 10,000명은 러시아 오브레Auvray의 9,000명과 스볼나Svolna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번에도 러시아군의 판정승이었다. 프랑스군은 1,200명을 잃고 300명이 포로가 된 반면에 러시아군은 겨우 800명을 잃었다.
코사크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프랑스 2군단은 계속 퇴각하다가 7군단과 합류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열세인 전력인데도 폴로츠크Polotsk에 있는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1군단은 수비대까지 소환해서 20,000명으로 불어났고 우디노 2군단은 24,000명의 기존병력에 7군단의 바바리아 사단 2개의 지원을 받았다. 바바리아 사단은 개전 초에 심각한 피해를 입어 6,000명이 줄었다고 해도 20,000명이었기 때문에 총 44,000명으로 늘어났다, 포병과 수송대를 포함하면 전력은 그보다 훨씬 막강했다.
첫날 전투에서 2,500명을 잃은 러시아군은 이틀 째에도 퇴각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프랑스군이 공세에 나섰다. 새벽 3시부터 벌어진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격전에 지친 프랑스군은 다리너머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제대로 추격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포로를 포함해 2,5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포로를 포함해 3,000명을 잃었다.
7월 31일, 남쪽의 고로데츠츠나Gorodetschna(또는 프루자니Prujany)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는 프루자니에 있는 러시아군의 보급창을 노렸다. 슈바르첸베르크와 레이니에르의 오스트리아-작센군이전진하자 토르마소프Tormassov는 프루자니와 코브린 사이에 자리잡았다. 작센군 13,000명과 오스트리아군 25,000명이 러시아군 18,000명을 상대로 코브린패배를 보복하려고 했다.
토르마소프는 위기의 순간에 예비대 13,000명의 지원을 받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밤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포로를 포함해 4,50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2,000명, 작센군은 약 900명을 잃었다.
7월 16일, 무라Murat는 나폴레옹이 바라던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공격움직임이있다고 보고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와 6군단을 불려 들여 드리사Drissa에서 나오는 러시아군을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18일, 예상과 달리 러시아군은 드리사를 소개했고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군수품을 불태웠다. 그리고 또 한 번 나폴레옹의 예상과 다르게 비테브스크Vitebsk(현재 벨로루스 비쳅스크. 지도 참조)로 이동했다. 다부는 모힐레프Mohilev 부근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해 바그라티온의 접근을 막았다.
붙잡은 러시아병사들에 따르면 바클라이Barclay가 비테브스크에 있다고 했다.
7월 25일, 무라는 오스트로프노Ostrovno로 전진하다가 오스테르만Ostermann의 선봉대와 전투를 벌였다(아래 그림참조). 150명이 포로가 되고 포 8문을 빼앗긴 오스테르만은 퇴각해 보병대를 기다렸다. 양쪽 병력이 계속 투입되면서 격전이 벌어졌고 전투 중에 무라는 제8 폴란드 울란연대 앞에 서서 응원의 몇 마디를 했다. 러시아군을 본 폴란드기병대는 너무 흥분해서 마구 달려나갔고 적당한 순간에 빠져나왔어야 할 무라가 선봉에 서서 러시아군에 돌격하는 위험한 순간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혼전 중에 무라와 외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순간, 나폴레옹이 도착했고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프랑스경보병이 숲을 통과해 비테브스크 외곽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숲을 통과하면서 대열이 흐트러졌고 어둠까지 내려 전투를 중지하고 휴식을 취했고 러시아군도 반대편에 텐트를 치고 횃불을 밝혔다.
러시아군은 첫날 전투에서 2,500명을 잃었고 프랑스군은 3,300명을 잃었다.
이튿날 이른 오전부터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제16 엽기병Chasseur à Cheval(그림참조)이 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자 무라는 참모장교단을 이끌고 직접 구원에 나섰다. 혼전 중에 무라를 노린 코사크의 칼을 장교가 간신히 막아내는 일도 있었다.
코사크는 심지어 나폴레옹이 있는 고지 부근까지 돌격해 들어갔고 근위엽기병이 급하게 반격에 나서 더 이상의 위기는 없었다. 퇴각하던 코사크기병대는 하필이면 관목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보병연대에 뛰어 들었고 거의 모두 사살당했다.
러시아군은 강반대편에 20,000명을 집결시키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강력한 방어태세를 지켜본 후에 오전 11시에 전투를 중단시켰다. 나머지 시간 동안 전장을 검토하며 지원부대를 기다렸다.
러시아군은 또다시 나폴레옹의 기대와 달리 비테브스크를 버리고 퇴각했다. 러시아군은 이틀째 전투에서 2,700명을 잃고 1,1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나폴레옹은 8일 동안 비테브스크를 목전에 두고 움직이지 않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 동안 주노Junot가 제롬 대신에 베스트팔리아 8군단을 지휘했다. 그리고 주노, 외젠과 다부의 병력이 본대와 합류했다.
프랑스군은 행군, 질병과 전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점령한 전략거점에 수비대를 남겨두어 전력이 계속 약해졌다. 8월 3일이 되자 나폴레옹의 본대는 겨우 185,000명까지 줄어들었다.
원정 초 375,000명 중에 90,000명은 우디노와 레이니에르에게 떼어 주어 285,000명이 남아 있어야 했다. 100,000명이라는 대군이 사라져 버렸다.
바그라티온은 8월 4일에 스몰렌스크Smolensk에 도착했고 바로 바클라이에 대해 공작을 펼쳤다. 차르 알렉산드르는 바클라이에게 나폴레옹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바클라이는 프랑스군의 배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는 병력을 합쳐 루드니아Rudnia로 진격한 후에 외젠의 측면으로 돌아 외젠을 격파하고 달려오는 프랑스 구원군을 차례로 격파한다는 계획이었다.
나폴레옹은 우디노에게 공세로 나서 비트겐슈타인이 바클라이를 지원하지 못하게 막고 스몰렌스크 기동에 나섰다. 대육군을 러시아군 배후로 돌려 모스크바로 퇴각하지 못하게 차단한 후에 대회전을 벌이려 했다.
바클라이의 판단은 실수의 연속이었다. 외젠의 2개 군단이 포르예체Poryeche에 있다는 엉터리 보고를 받고 병력 절반을 북쪽으로 돌렸는데 4일이나 지나서야 프랑스군이 이미 퇴각한 것을 알았다. 바그라티온은 다부의 공격을 우려해서 바클라이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병력이 병들고 굶주렸다며 스몰렌스크로 퇴각시키는 명령불복종을 저질렀다.
바클라이는 어쩔 수 없이 바그라티온의 반대를 수용하고 자신의 병력으로 빈자리를 메웠다. 8월 15일은 나폴레옹의 생일이어서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서 병력을 후방으로 후퇴시켰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예상하고 진격을 멈추고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지만 8월 10일이 되어서도 바클라이가 공세에 나서지 않자 바로 스몰렌스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부는 드니에페르강Dnieper을 건너고, 주노는 로마노보Romanovo로, 무라, 네와 외젠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나폴레옹은 바클라이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로 예감에 따라 결정했다. 전군을 25km 넓이로 펼쳐 드니에페르강을 건넜다.
8월 13~14일, 175,000명이 한낮에 강을 건너는데도 바클라이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드니에페르강을 건너는 프랑스군입니다.
오후 2시 30분, 프랑스 선봉대가 크라스노에Krasnoe에 이르러 러시아군과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클라이는 네베로프스키Neverovski 27사단 7,200명과 코사크, 폴란드 울란, 하르코프 용기병 연대 1,500명을 배치해 두었다.
프랑스기병은 돌격해 들어가 러시아기병을 밀어냈다. 오후 3시, 경보병이 도착해 러시아보병을 밀어내고 포 2문을 노획했다. 하르코프 용기병까지 밀려나자, 네베로프스키는 병력을 밀집대형으로 편성하고 뒤로 물렸다.
무라는 군단장이 아닌 연대장처럼 행동했다. 기병전체를 한 번에 움직이지 않고 마구잡이로 투입했고 당연히 러시아군의 대열을 뚫지 못했다. 심지어 잘못된 보고를 받고 그루시Grouchy의 기병 대부분을 엘니아Elnia로 보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남은 병력만으로는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네베로프스키를 잡을 수 없었다.
러시아군은 1,500명을 잃고 800명이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군은 500명을 잃었지만 네베로프스키는 스몰렌스크로 안전하게 들어갔다. 프랑스군은 스몰렌스크에 무혈입성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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