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는 What If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그 당시 역사팩트를 정리하고 통찰력을 얻는 귀중한 셀프 스파링입니다.
이번 이야기도 BBC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주요 전투, 러시아원정과 워털루전투는 이미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알란 포레스트Alan Forrest교슈는 혁명기와 나폴레옹 프랑스 전문가이 Napoleon, Life, Legacy, and Image: A Biography를 출간했다. 본문은 그가 프리랜서 작가 조니 윌키스Jonny Wilkes에게 설명한 대안역사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승리했다면?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는 벨기에 워털루에서 7차 대프랑스동맹Seventh Coalition에게 패전하면서 마지막 운명이 다했다. 만약 승리를 거뒀다면?
조니 윌키스와 알란 포레스트교수가 워털루 승전으로 전성기를 되찾을 수 있었는지 아니면 운명의 시간을 잠시 멈췄을 뿐인지를 설명한다.
워털루전투의 승패가 갈렸다. 참혹한 전투였고 대혼전이었다. 양측이 승기를 잡았다가 놓쳤고 승패는 다르게 흐를 수 있었다. 1815년 6월 18일 날이 저물자, 수많은 시신이 땅위에 남겨졌고 승자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전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월링턴Wellington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을 격파한 후에 폰 블뤼허von Blücher원수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해서 7차 대프랑스동맹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니폴레옹은 1년 전에 유배당했다가 프랑스권좌에 복귀했고 귀중한 승리를 거뒀다. 그렇지만 전쟁이 계속되었고 다음 목표를 결정해야 했다. 나폴레옹시기의 프랑스전문가인 알란 포레스트교수는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영국과 프로이센군을 궤멸시켰다면 브뤼셀Brussels로 진군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쪽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프랑스로 귀국해 국내상황을 정리하고 수비전략을 선택했다면 다음 전투를 좀 더 미룰 수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혁명, 공포정치, 프랑스제국의 탄생과 몰락으로 전국이 황폐해졌고 국민 중 상당수는 공화국이나 왕정을 원하고 있었다. 포레스트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남으려면, 계속 전쟁을 벌여야 했다. 군대가 그의 지지배경이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1814년까지 프랑스황제였던 그는 유럽전역의 자원을 모아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엘바Elba유배에서 복귀한 후에는 프랑스가 고작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여전히 그를 따랐지만 자원이 부족했는데 특히 유능한 지휘관이 크게 부족했다. ‘미셀 네Michel Ney는 용감한 지휘관이었지만 무모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군대를 소모했다.’
반면에 동맹국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더욱 강하게 집결했다. 나폴레옹은 바로 군사작전에 나섰고,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오히려 유럽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반드시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정을 굳혔다. 그의 복귀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나폴레옹 때문에 죽은 수십만 명의 인명과 막대한 피해를 반드시 보복하고 싶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승리를 거뒀더라도, 이전처럼 공세에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1815년에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합법성이 없는 무법자였고, 다시 유럽을 전쟁에 몰아넣었다.’
동맹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했고 군주들은 나폴레옹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복귀를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나폴레옹이 궤멸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패배한 웰링턴공은 더 이상 최전선에 나서지 않고 파리와 빈의회에서 동맹군의 결속을 다지는 외교관 역할을 하면서 실제역사와 달리 오명이 남았을 것이다. 워털루승전 이후의 애국주의 열풍으로 수상까지 올랐지만, 대안역사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전쟁 덕분에 국운이 상승했지만 워털루에서 패전해도 유럽대륙처럼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고 영향력이 줄어든 정도에서 해상강국으로 남았을 것이다. ‘대프랑스동맹 4개국은 1814년에 부대 대부분을 해산시켰고 영국이 가장 빨리 해산시켰다. 영국은 평시에 주로 해군만 유지했기 때문에 대규모 육군동원에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영국은 워털루에 승부를 걸었다.’
영국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나폴레옹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다. 워털루에서 프로이센과 영국군이 궤멸했지만 오스트리아군 15만명과 훨씬 많은 러시아군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격전을 거듭했고 7차대프랑스동맹군을 계속 상대하가다 결국에는 패전했다. 워털루승전으로 잠시 운명을 바꿨을 뿐이고 나폴레옹의 몰락은 변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누구에게 포로가 되었는 지에 따라 최후가 달라졌을 것이다. 1815년, 그가 영국을 선택했다면 더 관대한 처분을 기대했을 것이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자체의 처분보다 더 나쁠 것은 없었다. ‘왕당파monarchist는 그의 피를 원했다. 그는 배반자이며 왕위찬탈자였다. 많은 사람이 사형을 요구했다.’ 프랑스의 처분을 받았다면 유배가 아니라 처형대에 묶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기에 병사에서 이탈리아와 이집트원정 사령관으로 출세했고 1799년에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후에 1804년, 황제를 칭했다.
나폴레옹은 전장에서 불패의 존재처럼 보였다가 1812년 러시아원정의 참패를 극복하지 못했다. 1814년에 지중해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1815년, 프랑스로 복귀해서 다시 정권을 잡았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와 영국 등은 프랑스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고 그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이번에는 영광이 오래가지 않았다. 100일만인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전투에서 패전하고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다시 대서양 세인트 헬레나섬으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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