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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4부) - 전차시대의 진화

by uesgi2003 2023. 6. 11.

긴 설명을 줄이다 보니 조금 혼동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국은 세계최초의 기계화부대를 편성하고 전차부대에 대한 혁신이론을 정리했지만 결국에는 보병지원 무기로 남게 되었고, 반대로 독일은 히틀러와 구데리안 등이 전차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2차대전 전격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가속화된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동안, 직업군인들은 기존 장비와 줄어든 예산으로 만족해야 했다. 공장에서 값싼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면서 말과 마차보다 더 많은 수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1924년 헨리 포드의 모델 T 생산량은 2,400만 대까지 늘어났지만, 종전후 전차는 반대로 20개 대대에서 4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1919년 12월 17일, 군수부 참호전 및 보급 책임자였던 루이스 잭슨소장은 청중들에게 '전차는 괴물이었다'고 선언했다. '참호전투가 발생하게 된 상황은 매우 이례적이었으며 재발할 가능성이 없다. 만약 재발한다면 다른 수단으로 대처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전차를 평시에는 불필요한 비용으로 여겼다. 
1919년 승전기념 퍼레이드에서 휘펫 탱크 4대가 세노탑을 지나가면서 굉음을 냈지만, 영국군은 이후 5년 동안 전차를 정식병기로 도입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였다. 1923년 10월 18일, 왕실은 4개 대대로 구성된 전차군단을 승인했다. 
유럽에는 위협이 없었고 군대는 부족한 자원을 놓고 경쟁해야 했다. 패전국 독일은 휴전 후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전차, 항공기, 전함을 제조할 수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차군단을 공식창설했지만 전차의 용도에 대해서는 진전이 없었다. 

대전당시 전차의 진격속도가 워낙 느려서 독일군은 예비병력을 모으고 전선을 재편할 수 있었다. 4일간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전차의 72%를 잃었다. 프랑스군이나 미군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프랑스는 아르곤-샹파뉴전선에서 367대, 미군은 70대의 전차를 잃었고 승무원의 40퍼센트가 사망했다. 

 


더구나 전차는 원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았다. 스윈튼은 최소한의 포격과 함께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대규모 전차돌격으로 독일군의 막대한 방어자원을 묶어두어서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인 목표와 부실한 계획때문에 전면공격으로 결정되었다. 
리델-하트Liddell-Hart대위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장소나 방법, 즉 '간접적 접근'이 항상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전선을 돌파해 내륙으로 진격하면 군지휘계통이 붕괴하고 결국에는 적 정부까지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 후반, 영국은 전차 기술개발을 선도하며 실험 부대를 창설해 이론을 시험했다. 영국은 1921년까지 비커스 마크 IVickers Mark 전차를 개발했다. 이 전차는 스프링식 서스펜션과 회전식 3파운더(47mm) 포탑,  기관총을 장착한 현대식 전차였다. 대전차전을 염두에 두고 고속의 직사포를 장착했다. 전투격실과 전체적인 성능, 특히 240km 작전반경과 기계적 신뢰성은 당시 다른 어떤 전투차량보다 훨씬 앞섰다.

 

그동안 리델하트가 현대식 전차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꽤 있습니다. 리델하트는 군사이론가이자 유명한 전사가였습니다. 

 

비커스 6톤 경전차입니다. 재미있게도 영국은 전력화하지 않았지만 러시아와 폴란드 주력전차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핀란드군은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장착했습니다. 


1927년 솔즈베리 평야에 실험 기계화부대가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전차, 장갑차, 비커스전차, 반궤도 차량의 보병대대, 엔지니어, 18파운더포 포병 연대로 편성되었다. 1930년대 초만 해도 영국이 기계화부대의 훈련과 전술에서 세계최고였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미래의 영국 기계화 군대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신생 왕립전차부대의 노골적인 야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새로운 실험부대가 정예 기병 및 보병부대와 대결하는 훈련에서, 감독관의 결과보정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솔즈베리 평원에서 벌어진 가상전투에서 기계화부대의 원동력은 무선 송수신 통제였다. 음성으로 주고 받는 무전덕분에 기계화부대는 훨씬 빠르게 이동하고 대응할 수 있었다. 지휘전차에는 진공관무전기가 장착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율하기 쉬웠고 이전의 모스 전신보다 몇 년이나 앞섰다.

 

오디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거대한 진공관이 있군요. 여름에는 못 견딜 온도일겁니다. 

 


한 전차 운전병은 '보병과 협력하는 대규모 기동이 몇 주 동안 지속되었다'며 전차운전에 익숙해지면 놀랍도록 짜릿할 수 있고’ 열광할 정도로 빠른 템포의 훈련을 즐겼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땅 위를 천둥소리를 내며 질주하고, 경사면을 빠르게 내려가고, 가파른 언덕을 굉음을 내며 오르고, 엔진이 악마처럼 비명을 지르며 고랑이 난 들판 위를 흔들리고, 뛰어오르고, 튀어 오르고, 얼굴에 공기가 밀려오면 스릴까지 느껴졌다.
풀러는 전차전투의 잠재력에 매료되어 징집군대가 전차능력을 중심으로 구축된 '신모델 군대'로 대체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전차관련 주요 언론대변인이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기고자였던 리델-하트도 전차가 보병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아예 전차만으로 기계화부대를 편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훈련에 참여한 전차병들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전차운전병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몇 시에 끝날지, 지휘관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랐다. 실제 전쟁이 벌어져 전차들이 포격으로 산산조각이 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곤 했다. 전차 승무원 중 어느 누구도 후퇴할지, 전진할지, 숨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전시에 지금과 같이 답답한 체계가 적용된다면 극심한 혼란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정적으로 기술은 변했지만 사람이 변하지 않았다. 훈련에 참가했던 전차 운전병은 '실제 전장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고 회상했다. 지휘전차들은 참모장교의 무선명령을 받은 후 '무전이 없는 전차들에게 깃발로 명령을 전달했는데 온갖 실수가 벌어졌다. 당연히 엉망진창이 되었다. 정지와 전진명령이 동시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이 깃발 신호가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전의 전서구(비둘기 통신)에 비하면 혁신적인 진전이었습니다만. 

 


1928년 훈련 시즌이 끝나자 기계화부대가 해체되었다가 1931년에 실험적인 전차여단이 창설되었다. 변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직책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에, 기병에 집착하는 구시대 사상이 여전했다. 남부사령부 총사령관 아치볼드 몽고메리-매싱버드장군은 기계화부대가 '실험적 목적에서는 귀중하지만 ... 기병과 보병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병은 당연히 보병 진격속도에 맞춰 보병의 통제를 받는 중전차를 원했다. 
영국에서 기계화부대로 실험하는 동안, 독일 베를린의 철도플랫폼에는 동방특급열차를 타기 위해 공무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클라우스 뮐러소령은 매년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규모의 그룹이 민간인 복장을 한 채 베를린 중앙역에서 같은 열차를 탔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같은 크기와 색상의 번호가 매겨진 여행 가방을 가지고 여행했다. 이 때문에 역무원과 짐꾼들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그들은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1932년까지만 해도 독일 기갑병들이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받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 기갑군 또는 판처바페Panzerwaffe는 9개 부대, 전차 45대를 보유했었다. 1920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전후 초대 총사령관인 한스 폰 시크장군은 독일군을 소규모 직업군인 중심의 국가방위군으로 전환했다. 
그는 국제연합군 통제위원회의 감시아래 독일군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기술적 우위에 집중했다. 1922년, 소련과 비밀협정을 맺어 소련 중공업을 지원하는 대가로 러시아에서 독일기갑 및 공군요원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1925년에 점령군이 떠난 후 독일의 취약성을 제대로 분석한 폰 시크는 동서 양쪽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기동전략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동부대가 필요했다.

 

전차를 보유할 수 없었던 독일군의 전차훈련 모습입니다. 독일은 전차를 연구훈련할 수 있는 공간을, 소련은 귀중한 전차기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34살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대위가 독일전차부대의 미래를 제시했다. 그는 1922년에 수송부대 감찰단 참모로 발탁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중무선 기지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무선통신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빌레르 브레토뇌에서 전차전을 목격한 에른스트 볼크하임의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주로 영국인인 풀러, 리델-하트, 마르텔의 책과 논문이 나의 흥미를 자극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고 회상했다. 

 

독일전차군단의 아버지 구데리안입니다. 초기와 달리 히틀러와 반목한 덕분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군사이론가였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실무형 참모장교였던 구데리안은 그들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깊은 감명을 받아 영국군보다 훨씬 열악했던 우리 군대에 실용적인 의미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1927년 3월, 다임러-벤츠, 크루프, 라인메탈 세 회사은 '육군 차량 20'이라는 코드명으로 두 대의 실험용 전차를 설계 및 생산하는 계약을 맺었다. 라인메탈은 회전포탑에 75mm 주포를 장착한 6대의 '대형 트랙터Grosstraktor’를 비밀리에 제작해, 1929년 소련 카잔에 설치된 비밀시험장에 납품했다. 그 뒤에는 37mm 주포로 무장한 6톤짜리 '경트랙터Leichttracktor’ 4대를 완성했다. 크루프는 기관총으로만 무장한 '소형 트랙터Kleintracktor’에 영국의 카든-로이드 차체를 얹는 지름길을 선택했고 그렇게 1호전차가 탄생했다.

 

암호명 대형, 경, 소형트랙터 순서입니다. 

 

1932년, 구데리안이 실험용 차량을 시운전하기 위해 방문했고 주행장비에 대한 기술시험이 진행되었다. 카잔에서는 사격훈련, 승무원 전투격실 설계, 광학장치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했다. 러시아군 일부가 과정에 참석했고, 러시아전차를 운전하고 독일군과 친목을 다졌다. 계급장을 달지 않았고 양측 모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철저한 감독과 조직을 중시하는 독일군에게 러시아의 사격훈련은 너무 경솔한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통역사는 '총성이 울리면 모두 비키라고'라고 설명했다. 한 러시아 훈련병은 높은 각도로 사격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이웃 공장에 기관총탄 1천발을 쏟아부어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1933년, 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되면서 러시아는 교육과정에 참석할 수 없었고 프로그램이 폐쇄되었다. 모든 시설물이 해체되었고, 모든 관리요원들은 호위아래 레닌그라드로 이송되었다. 독일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보병으로 참전했던 히틀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국가사회주의 당조직이 군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미래의 공군조종사와 전차운전병을 대상으로 비밀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구데리안과 함께 쿠머스도르프Kummersdorf 육군병기시험장(사진 참조)을 방문한 히틀러는 처음으로 전차의 잠재력을 발견했다. '저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1935년 10월, 대령이 된 구데리안은 새로 창설된 전차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히틀러는 1934년 비밀리에 군대를 재건하라고 지시했다. 구데리안은 주변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했다. 독일군에서는 영국처럼 전차 대 말이나 보병에 대한 전차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없었다. 구데리안은 전사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영국군의 훈련을 관찰하고, 최근의 전차훈련을 통합한 결과 '속도와 기동성을 강조해야 전차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연합군과 독일군은 전차전술과 대전차전술을 구체화하고 있었지만 전투에서 검증되지 않은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제안이었다. 그 당시 전차개발은 승무원의 편안함과 전투지속 가능성보다는 무기의 우월함이 우선이었다. 대전차전도 선례가 없었고 모든 것이 세계최초였다. 
1916년 빅윌리가 험지를 힘겹게 횡단한 것과 가장 유사한 사례는 기원전 3세기 알렉산더대왕과 2세기 전 한니발이 사용했던 고대 전쟁코끼리였다. 코끼리는 충격효과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빠르고 강했다. 코끼리는 불에도 쉽게 멈추지 않았고 전열을 무너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가스처럼 코끼리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1차 세계대전 전차와 마찬가지로 한계와 장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초, 설계자들은 시속 32~45km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전차를 생산했다. 이 정도 기동성을 낼 수 있는 전쟁기계는 고대전차 밖에 없었다. 전차설계는 서스펜션과 주행장치의 기동성, 장갑두께와 차체형태로 결정되는 방어력, 화력이라는 세 가지 기본요소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한 영역에서 설계를 개선하면 다른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술적 한계는 승무원의 생존가능성에 영향을 미쳤다. 전차에 사용된 기술도 당시로서는 무척 복잡했고 전차운전병은 전문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기술 전문가라는 독특한 유형의 전사였다. 1930년대에 전차의 험지기동성을 극복하기 위해 스프링 서스펜션이 개발되었다. 덕분에 1918년 전차부대의 발목을 잡던 승무원의 피로가 비교도 안되게 개선되었다. 

두세 명의 동료가 타는 고대전차로 전투를 벌이려면 팀워크가 필수였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전사 아시오스Asius는 '전차 앞에서 걸어서 이동했는데,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어깨 뒤로 말의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전차운전병은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전차가 포격하거나 엄폐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예측해야 했다. 전차병은 고대전차의 360도 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좁은 금속상자 안에서 싸웠다. 어둡고 밀실공포증이 생기는 전차내부에서 대전차 발사체의 무시무시한 충격을 예측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험이었다. 
지형을 읽는 능력, 팀워크, 빠른 사고와 반응 외에도 전차병은 기술적 전문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대량의 전차가 협력전투를 벌이고, 전차병이 전차제어, 유지보수와 응급수리를 배우려면 별도의 특수조직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전차와 전차병의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