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의 빚 8조원의 원금상황과 이자지급도 버거워서 내년부터 예산안에 3,790억원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죠? 제 나이가 있다보니 주변에 묻지마 지지를 했고 지금도 하는 노년층이 많습니다.
그 분들... 4대강 자연파괴와 예산낭비에 대해 일체의 의심도 하지 않고 광신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었습니다. 지겹게 싸웠죠. 제가 경영학 석사에 거대기업의 부장 그것도 마케팅인데도 제 의견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심지어 제게 사람은 나이 먹어서도 배워야 한다며 일장연설을 하던 택시운전사(노인)도 기억이 납니다.
이제 자신의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는 기사를 보고서는, 왜 이명박을 처벌하지 않느냐는 말을 합니다... 대통령선거, 총선과 지방선거 때마다 정권이 바뀌어야 이명박의 실정과 비리를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다고 그렇게 설득했을 때에는 듣기싫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왜 처벌하지 못하냐고 합니다.
금강에 이어 영산강에 태형벌레가 대거 등장했고, 작년보다 더 심각한 녹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49%의 국민이 건강위협을 받아야 하고 강바닥에 돈을 쏟아부은 책임을 져야 할까요?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의 아이들이 콘크리트 강줄기를 책임져야 할까요?
이제 취수정까지 녹조가 들어왔다는군요. 장마에 잠시 호전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계속 보의 물을 흘러보내면서 녹조를 없애야겠죠. 결국 보를 왜 만들었느냐 하는 원론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총력전 - 스페인
프랑스 혁명정부가 1972년 봄에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민들에게 단기전의 압승을 약속했었다. 그렇지만 1792년은 길고도 잔인한 장기전의 시작이 되었고 유럽의 모든 국가를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다가 무려 23년 후의 워털루 전투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패전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연속으로 벌어진 전쟁은 서유럽 역사를 바꿔 놓았고 최초의 총력전으로 불리고 있다. 1792년 이전에도 유럽의 강대국은 빈번한 전쟁을 벌였지만 전장은 국한되어 있었다. 군대는 가능하다면 대회전을 피했다. 민간인은 관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적의 지휘관은 계급이나 신분대로 대접을 받았다. 왕정과 군대는 왕가나 귀족이 지배했고 전쟁에도 아직은 귀족의 의식이 남아 있었다. 전투가 절대로 가볍게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귀족과 명예를 엄격하게 따졌다.
프랑스 혁명은 이런 전통을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혁명은 왕정과 귀족의 기반을 뿌리째 뽑아버렸고 (젊고 유능한 나폴레옹을 비롯해) 새로운 지휘관을 불러들였다. 1793년이 되자 군대는 전국민 동원령을 내렸다. 젊은이 뿐만 아니라 여성과 노인 그리고 심지어 청소년까지 무기, 군복과 보급품을 만들며 전쟁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는 적대국을 인류의 적이라고 부르며 범죄자로 처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국 적대감은 멈출 줄 몰랐고 극단적인 혁명분위기가 사라지고 1799년에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에도 적대국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계속되었다.
숫자를 보면 알 수 있다. 1490~1815년 기간 동안 유럽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 중 20%는 1790년 이후에 벌어졌다. 1790년 전만 해도 100,000명 이상 참전한 전투를 손에 꼽았지만 1809년 바그람Wagram 전투(http://blog.daum.net/uesgi2003/414 참조)에서는 무려 300,000명이 참전했다. 4년 후에 벌어진 라이프치히Leipzig 전투에서는 500,000명이 참전해서 150,000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 기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는 100만 명에 가까운 병사를 잃었고 로마의 카이사르에 맞먹는 대제국을 일으켰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 기간은 잔인하게 억압하는 프랑스 점령군에 대해 대대적인 저항이 확산되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카톨릭과 왕당파는 프랑스 혁명정부와 내전을 벌였다. 그렇지만 유럽지도에 떨어트린 잉크자욱처럼 프랑스 점령지가 확산되면서 벨기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티롤Tyrolian 알프스에서도 저항이 시작되었다.
최악의 폭력과 저항은 스페인에서 1808~1814년 독립전쟁 형태로 벌어졌고 게릴라Guerrilla(스페인 발음 게리야, 작은 전쟁)라는 용어가 유럽에 사용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 게릴라를 진압하려고 무자비한 원정을 벌이면서 총력전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 초기만 해도 스페인은 프랑스의 동맹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폴레옹이 황제자리를 차지하면서 스페인 부르봉Bourbon 왕조(1700년에 왕위에 오른 펠리페 5세부터 프랑스 혈통이 시작됨)를 전복시키려고 마음 먹었고 1805년의 트라팔가 해전의 참패책임을 스페인 왕가에 물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넬슨의 함대에게 참패를 당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 왕가는 멜로드라마와 코미디를 오가며 일을 악화시켰다. 현명하지 못했던 카를로스Carlos 4세는 측근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카를로스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22살의 후계자 페르난도Fernando 왕세자는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킬 생각으로 나폴레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에게 보낸 편지가 들통하면서 왕세자는 체포되었다. 고도이는 프랑스 황제의 구미를 맞추느라 애를 썼다. 페르난도가 체포되던 날, 스페인과 프랑스는 퐁텐블로Fontainebleu 조약을 맺었다. 영국에 대한 대륙봉쇄를 어긴 포르투칼로 프랑스가 침공할 수 있도록 스페인 국경을 열어준다는 내용이었다.
11월, 쟝 앙도슈 쥐노Andoche Junot 장군이 28,000명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포르투칼을 침공했고 12월 초에 리스본을 공격했다. 포르투칼 왕가는 브라질 식민지로 달아났다.
(쟝 앙도슈 쥐노는 나폴레옹을 초기(1793년 툴롱전투)에 만났지만 온갖 부상에 시달려 진급이 늦은 불운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장군들이 화려한 전적을 뽐내며 원수로 진급하는 동안, 쥐노는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영국군 그리고 스페인의 지독한 게릴라전에 온갖 수모를 당하며 프랑스로 쫓겨났습니다.)
나폴레옹은 1808년 봄까지 스페인 원정군을 12만 명까지 늘렸고 중요 거점만 차지하고 조용히 지냈다. 조아생 뮈라Joachim Murat 원수(그림 참조)는 말에 탄 채로 마드리드에 들어섰는데, 그의 뒤에는 요란스러운 군악대와 97명의 이집트 맘루크 기병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촌인 그는 스페인 왕좌를 기대하고 있었고 파리에 이런 편지를 보내 야심을 드러냈다.
"이곳은 폐하를 메시아로 반기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는 과장이었다. 스페인 국민은 프랑스군을 침략자로 보지 않았다. 뮈라가 도착하기 전에, 페르디난드는 아란후에스Aranjuez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고도이와 카를로스 왕정을 전복시켰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페르디난드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부자를 불러들였다.
그동안 스페인국민은 계속 늘어가는 프랑스군의 존재에 불안을 느꼈고 뮈라가 페르디난드 왕세자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드리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군은 시가전을 벌여 폭동을 진압했고 이튿날에 수백 명의 시민을 처형했다. 유명한 화가 프란시스 데 고야Goya는 5월 이틀동안 벌어진 사건을 그림으로 남겼다.
5월 2일에 벌어진 마드리드 봉기를 그린 The Second of May 1808입니다. 뮈라가 이집트 원정을 자랑하려고 데리고 다닌 맘루크 기병이 보입니다. 아래는 The Third of May 1808입니다. 마드리드 시민을 처형하고 있습니다. 두 사건은 스페인 독립전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국경 너머의 바욘Bayonne에서는, 나폴레옹이 카를로스와 아들에게 양위를 하라며 달래고 윽박지르다가 결국에는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특히 페르디난드를 혐오했는데 "너무 멍청해서 제대로 된 말을 들을 수가 없어. 야단을 치든 칭찬을 하든 항상 멍한 얼굴이야"라는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협박이 통했다. 부자는 양위를 하고 프랑스로 도피 길에 올랐다. 나폴레옹은 이제 본격적인 스페인 점령을 시작하면서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당시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에게 마드리드로 가라고 명령하고 뮈라에게는 이탈리아 남부를 주었다.
1808년 늦은 봄에 조제프가 스페인에 들어설 때만 해도 오만과 자신감은 대단했다.
그들은 무능하고 활기없는 스페인이 로마 아래 최고의 제국에게 감히 저항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편지와 기록을 살펴보면 제국군과 관리 모두 같은 인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더럽고 오래된 스페인 가옥, 거리에서 흔히 보는 수도승, 이를 달고 사는 사람들의 어둡고 사나운 표정. 나폴레옹의 군대는 스페인 국민을 폄하하고 얕잡아 보았다.
프랑스는 스페인을 너무 무시했다. 스페인 장군 마누엘 프레이레 데 카스트리욘Castrillon이 쓴 시는 프랑스에 저항하는 선전물에 인용되었고 저항에 불을 질렀다.
"오 행복한 야만인 그리고 광적인 스페인인이여! 수도승과 종교재판에 만족한 나머지 다른 국가보다 100년은 뒤쳐졌네. 오, 200년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일부 지식인은 프랑스군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묘사해서 국민감정에 호소했다.
"프랑스인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반인반수의 뭐라 말할 수 없는 존재다. 어느 누구라도 이 난폭한 괴물을 죽여도 된다."
이렇게 저항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오비에도, 세비예, 발렌시아, 마드리드 등등으로. 반도전쟁으로도 불리는 스페인 독립전쟁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정규군이 프랑스군에게 대항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게릴라전은 대단했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1808년 6월 165,000명의 병력을 10월에는 300,000명으로 늘렸고 1811년 7월에는 다시 50,000명을 더 늘려야했다.
1813년 7월에 러시아 원정에 나서면서 스페인 주둔병력을 대부분 빼내가면서 100,000명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스페인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최대 180,000명이 죽어갔다(자료마다 큰 차이가 있음).
원래 전쟁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지만 스페인 독립전쟁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만행이 벌어졌다. 먼저 앞에서 설명한 마드리드 시민 처형이 있었고 피카소의 궤르니카Guernica까지 그 흔적이 남았다. 반대로 1808년 6월 5일, 발렌시아에서는 프랑스인 330명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1809년 가을, 프랑스군은 마드리드까지 잔인한 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마을까지 모조리 약탈하고 불태웠다.
부르고스Burgos에 대한 기록을 보자. "교회는 약탈당했고 거리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로 끔찍했다. 실제로 모든 형태의 공포를 목격했는데 심지어 무방비 상태의 마을까지 약탈했다! 프랑스 병사는 싸우고 약탈하는 것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고야는 스페인 독립전쟁, 특히 프랑스군의 만행에 대한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여기에서는 그 중 수위가 낮은 것만 가져오겠습니다. 일본군이 독립군을 처형하던 만행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구 왕정의 전통적인 공성전 그리고 정규군의 전투였다. 1808년 봄, 에브로Ebro강변의 사라고사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대리석 기둥 위에 현신해서 침략자 왕에 대한 저항을 선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라고사는 겨우 1,000명의 정규군이 있는 허술한 요새도시였고 6월 15일, 프랑스군이 도시를 공격해왔다.
프랑스군의 기대와 달리, 사라고사 시민은 맹렬한 저항을 했는데 독실한 카톨릭국가답게 공회당 위로 왕관모양의 야자수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큰 힘을 주었다. 수 천 명의 남녀가 성벽으로 올라가 신의 뜻에 따라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프랑스군은 황급히 달아났다.
6월 28일, 프랑스군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저항을 진압한 쟝 베르디Verdier였다. 다시 한 번 사라고사는 공격을 막아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구스티나 사라고사Zaragoza라는 소녀가 죽어가는 연인을 대신해서 대포에 불을 붙여 결정적인 순간에 프랑스군을 몰아냈다고 한다. 베르디는 공격을 멈추고 맹렬한 포격을 시작했다.
스페인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 때문에 사라고사에 대한 그림은 상당히 많습니다. 1부는 여기에서 정리하니까 그림을 천천히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소녀에서 여전사까지... 그런데 모델 포즈는 좀 심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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