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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벨기에 제28 SS 발로니에 사단장 디그렐 이야기 (1부)

by uesgi2003 2014. 8. 23.


이제 네이버에서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네이버는 안가려고 했는데...  다음도 별로 다르지 않고, 네이버 방문객이 많이 요청해서 이번 이야기부터 옮기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uesgi2003

 

오래간만에 2차대전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이번 이야기는 SS 친위대에 자진입대해서 사병에서 장군까지 진급했던 레옹 디그렐Leon Degrelle의 인터뷰입니다. 

 

먼저 염두에 두실 것은, 독일의 2차대전 침공은 전범행위이고 무장친위대SS는 광신도 집단으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옹 디그렐의 인터뷰 내용은 그쪽의 변함없는 변명정도로만 받아들이시고 무장친위대에 호감을 갖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심지어 국내의 재현놀이에서 SS 무장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나치식 경례까지 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한심스럽죠. 일부 늙은 놈(일부러 놈을 사용했습니다)이 그러는 것을 보면 우리가 과연 2차대전의 최대 피해국 중 하나인 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2차대전 역사의 한 기록이기 때문에 번역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벨기에 무장친위대 지원병 이야기

 

2차대전 당시에 조국을 점령한 독일군에게 협력했던 유럽 파시스트 지도자 중에서도, 레옹 디그렐은 최전선까지 달려갔을 정도로 특이한 경우였다.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정치학, 미학과 철학도 공부했고 20세의 나이에 5권의 책을 집필했다. 무능력한 벨기에 정부에 환멸을 느낀 그는 카톨릭 참여운동에 합류한 후에 사회주의 렉스당Rex Party를 만들어서 25살의 나이에 의원이 되었다(유럽에서 가장 어린 의원이었다.) 


 

1944년 브뤼셀에서 자신의 28 SS 기갑척탄병사단의 행진을 선도하는 디그렐입니다.  패전 직전인데도 표정은 마치 개선장군같습니다. 마치 자신은 상관없다는 것을 아는 듯한 모습입니다. 

 

1936년 5월 24일, 34명의 렉스당원이 벨기에 상원이나 하원에 진출했지만 더 이상 세력을 넓히지 못했다. 디그렐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를 공공연하게 지지했고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감옥에서 7주를 보냈다. 

 

독일이 프랑스와 벨기에 등을 점령하자, 디그렐은 나치 점령군을 응원하며 히틀러를 '반 볼세비키 십자군'의 지도자로 불렀다. 1941년 6월,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 그는 벨기에인 자원부대에 지원했다. 35세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총을 잡아본 적이 없었던 그는 독일군의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7번이나 부상을 당하면서 사병에서 제28 SS 기갑척탄병 사단 발로니에Wallonien 지휘관까지 진급했다. 그는 기사싶자훈장과 오크잎 훈장을 포함한 많은 훈장을 받았고 나치군에서 비독일인으로 가장 유명했다. 


디그렐은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에 나머지 여생을 스페인에서 보냈다. 벨기에는 그에게 3번이나 사형을 언도했지만 실제로 집행할 수 없었다. 그는 3권의 책과 다양한 수필을 썼는데 벨기에에서는 판금되었다. 그의 러시아 원정Campaign in Russia는 동부전선의 잔혹함을 잘 알려주는 좋은 자료다. 한 벨기에 군무관은 디그렐에 대해 "병사로는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용기에 존경을 표합니마. 벨기에 국민으로는, 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반역자로 기꺼이 처형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럽의 마지막 파시스트 지도자로 생존해 있던 그는 1994년 4월 1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수명을 거뒀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음은 1984년과 1993년, 2차례의 전화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이다. 

 

-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 1906년 6월 15일 벨기에 부용Bouill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조업자였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어머니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여성이었다. 

 

- 교육과정은?


- 가족은 몇 세대에 걸친 예수회 신자였고 나는 노트르담 대학에 입학해서 고전과 신학을 공부했지만 정치학에 빠지고 말았다. 법학을 공부한 후에 시험에 합격했다. 예수회는 마음을 열고 지식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주었었는데 나는 그대로 실천했다. 안타깝게도 내 정치사상에 대해 일부가 반대했기 때문에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 체포된 적이 있지 않은가?


- 그렇다. 1940년에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행당한 후에 축축한 감방 안에서 고문을 받다가 독일군덕분에 풀려났다. 나는 렉스당 당수(사진참조)였기 때문에 독일군은 나를 알아보았다. 벨기에 정부의 도움은 커녕, 어떤 구원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능한 정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무능한 정부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 어떻게 독일군에 입대하게 되었는가?


- 내 형제가 살해당했고, 부모님과 아내가 고문을 받은 후에 살해당했다. 아이들은 어디론가 끌려가서 찾을 수 없었다. 몇 가지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침공해서 조국을 점령할 때까지 내 몸도 제대로 간수하기 힘들었다. 벨기에는 군주국가로, 독일군이 승리해서 공산화를 막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플랑드르와 왈룽 지역에서 첫 번째 자원부대를 만들었고 대대로 편성되었다. 나중에 훈련소로 전출되었다가 중앙집단군에 배속되었다. 

 

- 러시아에는 언제 들어갔는가?


- 1941년 10월, 기본 군사교육과 산악전 훈련을 마친 후에 우크라이나로 전진했다. 일부는 데미얀스크로 가서 제9 군에 배치되었다가 이듬 해에 남부에서 다시 합류했다. 그들이 안드레이 블라솝 장군을 1942년 7월에 붙잡았고 블라솝은 나중에 독일 동맹으로 반공산주의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데미얀스크에 배치되었던 동료들은 나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제5 SS 기갑사단 뷔킹Wiking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4월에 제28 SS 기갑척탄병 사단 발로니에로 독립했다. 

 

브뤼셀의 사단 창단기념 행진에는 요제프 디트리히Dietrich를 포함해 많은 유명인사가 참석했었다. 우리는 1940년에 400명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약 15,000명까지 늘어났지만, 전후에는 400명만 남았다. 원래의 연대병력 6,000명 중에 2,500명이전사했다. 우리 사단은 대단한 전과를 기록했고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내게 오크잎 훈장을 수여했다. 외국인 부대 중에서 기사십자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부대였다고 생각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동부전선 전쟁은 어땠는가?


- 글쎄. 진짜 전쟁이었지. 공산주의 러시아가 가장 위험했는데도 서방연합군은 너무 늦게 알아챘다. 그래서 지금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인터뷰가 있던 1983년 당시는 여전히 동서냉전 중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기억은, 끔찍한 겨울과 끝없는 스텝평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그런 지역을 기대하지 않았다. 러시아인은 익숙했고 겨울을 보낼 옷을 입었다. 우리는 운이 좋은 경우에 러시아 시체를 뒤져 털옷과 부츠를 챙길 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스키전술에 매우 익숙했고 훈련을 받은 우리보다 월등했다. 


- 동부전선에서 최악은 무엇이었나?


- 파르티잔(소련 게릴라) 전쟁이 최악이었다. 상황은 늘 변했고 우리는 서둘러 적응해야 했다. 파르티잔은 군복없이 마을에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정말 곤란했다. 밤새 도보행군을 할 때면 늘 매복공격이 있었다. 소련군은 대포를 침투시켜 두었다가 우리가 포격지점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땅에 엎드려 포복을 하고 벗어나더라도 희생자가 발생했다. 

내가 겪었던, 제일 심했던 파르티잔 전투는 체르카시 부근에서 기병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병사들에게 추격하지 말라고 했다. 제4 기갑군에 합류하고서야 안전해졌지만 또 다른 위험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디그렐은 자신의 기록을 제대로 관리했던 모양입니다. 살아남아서 그런 것도 있고, 전장에서도 롬멜만큼이나 대중의 눈을 즐겼던 모양입니다. 평범한 사단장에 불과한데도 무척 많은 현장사진이 남아있습니다. 


- 당시의 저서에서 소련군의 만행에 대해 설명했었다. 전쟁 중 양쪽에서 저지른 만행을 직접 목격했는가?


- 파르티잔에게 잡히는 일은 피해야 했다. 그들은 포로 중 한 명의 눈을 파내고 손가락, 발가락과 성기를 자른 후에 나머지를 심문했다. 탈출한 포로나 전향해서 반 스탈린 전선에 가담한 파르티잔 모두 확인해준 사실이다. 한 번은 정찰 중에 사라진 병사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양다리는 무릎 아래가 톱으로 절단되었는데, 그 지경이 되어서도 몇 미터를 기어갔었다. 

또 다른 SS 병사는 잘린 성기를 입에 문 채로 못 박혀 있었다. 소련군과 파르티잔은 후퇴 중에도 우리 부상병을 골라가며 삽이나 도끼로 머리를 부수곤 했다. 당연히 우리게엑 잡힌 파르티잔 포로도 인간적인 대우를 바랄 수 없었다. 


- 다른 유럽 지원병과 함께 싸우는 분위기는 어땠는가?


- 러시아군은 이탈리아군을 정말로 싫어했다. 독일군보다도 더 싫어했는데 내 책에 설명해두었다. 이탈리아 포로는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한 번은 포로들이 옷을 벗고 한겨울에 얼음 물에 들어가 얼어죽을 때까지 있었다. 심지어 의사나 신부까지 죽였다. 몇몇 마을을 수복한 후에 발견한 사실이다. 정말로 끔찍했다. 


- 농부는 독일군을 어떻게 대했는가?


- 농부는 스탈린과 공산주의에 시달려온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우리를 반겼다. 종교 미사에 참석해보면 느낄 수 있는데 나는 카톨릭이었지만 늘 동방정교 미사에 참석했다. 감옥에서 풀려나거나 마을에 오랜동안 숨어있던 동방정교 신부가 미사를 진행했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자유를 보장했고 환대를 받았다.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세례를 받고 노인이 성상과 십자가를 들고 교회로 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동방정교는 아니고 카톨릭 미사에 참석한 디그렐 모습입니다. 


그들의 스탈린의 죽음을 기도했고 우리의 승기를 기원했다. 우리는 그들의 농사를 도와주었고 파르티잔의 보복에서 보호하고 일자를 만들어주었다(일부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독일은 슬라브계 민족을 열등민족으로 취급하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잔혹한 수탈이 있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후방지역의 파르티잔이 출몰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전이나 이후에 겪은 공산주의보다 우리와 함께 한 3년이 훨씬 좋은 삶이었다. 


우리에게 파르티잔과 적군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주었고 통역과 정찰 역할까지 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그런 일이 많았는데 가끔 그 지역을 맡은 독일부대가 우리가 힘들게 얻은 신뢰를 망치는 바보같은 짓을 했다. 바일부시라는 마을에서는 주민들과 정말 잘 지냈다. 코카서스에서는 반 러시아 감정이 대단했고 칼무크Kalmuk와 아르메니아인은 우리를 도와 맹렬하게 싸웠다. 


어떤 마을은 우리가 다가가자 모두 나와 환영했다. 성상을 들고 나와 음식을 주고 귀중한 정보도 숨기지 않았다. 지역주민을 잘 대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동맹이었고 두 번째 가족이 되었다. 우리가 떠날 때에는 몹시 슬퍼했다. 하우저 장군이 미사에 참석했던 적이 있는데, 그들은 마치 대주교인 것처럼 무릎을 꿇고 그의 방문을 축복하며 종교자유를 되찾아준 것에 감사했다. 촛불과 성상이 있었던 그 현장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흔히 동부전선을 독일, 이탈리아, 핀란드군과 러시아군의 전쟁으로만 오해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온갖 민족이 자원 또는 징용으로 참전했습니다. 아르메니아군은 전황에 따라 양쪽 모두에 동원되었습니다. 독일군에 동원된 숫자는 14,000~33,000으로 숫자가 불문명합니다. 히틀러는 무슬림 민족에 대해서는 강한 신뢰를 표시했지만 아르메니아를 포함한 구 소련 민족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한드샤르Handschar 제13 산악사단의 사진입니다. 히틀러는 터키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투르크의 역사때문이었는지 어쨌든 무슬림에 대해 신뢰가 대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