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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7부) - 기병 대 전차 논쟁

by uesgi2003 2023. 6. 26.

대전 초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국내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너무 늘어져서 많이 줄이고 뛰어 넘어갑니다. 

 

24살의 버트 렌델은 1936년에 인도된 56대의 신형 비커스 마크 VI (6톤 또는 마크 E)경전차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접차병 2명이 탑승했는데 '사수와 운전병은 무전기를 조작하고 장전 및 사격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부실한 설계에도 좌절했다. 렌델은 '이전 전차들에 비해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폴란드군은 이미 1931년에 비커스전차 38대를 영국에 주문했고 아예 생산 라이센스를 구입했을 정도로 전차전력 보강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래의 7TP 전차때문에 자체생산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퍼진 일부 왜곡때문에 폴란드 창기병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2차대전 최초의 전차 에이스가 폴란드군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더군요. 독일군은 폴란드침공에서 상당한 전차뿐만 아니라 항공기까지 잃었는데 창맞고 떨어지는 비행기는 없습니다. 


1934년 2월 국방위원회는 정부에 5년 동안 군대재정비를 위해 4천만 파운드를 지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은 정부가 '재정적으로 수행이 불가능한' 제안에 직면해 있다고 답했다. 육군이 제안한 예산배분안은 절반으로 줄었고, 해군은 그대로 둔 채 공군예산을 크게 늘렸다. 
체임벌린은 1914~18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대중이 또 다른 영국원정군(BEF)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육군전력을 가장 뒤로 미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항공기설계자들을 더 대우했다. 
1930년 전차 계 과정에 투입된 18살의 견습생 버트 푸어드는 '전차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울위치 조병창 밖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탄약을 출하하는 일을 자주 했다. 실무견습생이 되는 것이 당연했고, '특허공장의 목공라인에 들어가' 전차모형을 만들었다. 영국전차개발 프로세스는 체계적이지 못했다. 자금부족때문에 비커스전차와 왕실병기공장 설계부서만 예산을 받았다. 두 부서는 전차설계에 대해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두 부서 모두 참모부와 접촉하지 않아서 군의 요구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버트 푸어드는 '최고위층이 관심이 없다'고 느꼈다. G. 맥레오드 로스소령은 도면 사무실 끝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그곳에서 근무했는데 1933년~1936년 사이에 전차를 개발할 수 있는 인력이 극소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공학 교육을 받지 못한 참모진과의 소통부재를 한탄했다. '일부는 이해도 못하면서 편견을 고집해서 설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년 이후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영국내각 때문에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돈이 매우 부족했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전차시험에 사용할 수 있는 연예산이 22,500~93,750파운드까지 다양했는데, 22,500파운드는 시험용 전차 한 대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비용도 안되었다. 

리델-하트 대위가 전차운용에 대한 책을 썼는데, 독일군만 이를 주목하고 연구했다. 1936년 초기 영국 전차 개발에 참여했던 기파르 르 퀘네 마르텔 대령은 아치볼드 웨이벨 소장과 함께 러시아에서 열린 적군훈련을 참관했다. 그들은 전시된 전차의 엄청난 수에 놀랐고, 한 번은 지나가면서 1,000대의 전차를 세기도 했다. 소련의 BT 전차는 최고 시속 50km라는 놀라운 속도를 자랑했으며, 미국 디자이너 J.W. 크리스티가 발명한 서스펜션을 사용하여 험지에서도 30km 속도로 쉽게 달릴 수 있었다. 

 

러시아의 탁월한 선택 2가지, 크리스티 서스펜션과 디젤엔진입니다. T-26은 가솔린엔진이었지만 T-34는 디젤엔진을 장착해서 독일군의 가솔린엔진보다 2차화재 위험성이 낮았습니다. 

 

독일군은 토션바 서스펜션을 사용했는데 무엇보다 유지보수가 무척 어렵고, 심한 부하를 받아서 아래처럼 절단되면 차체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마르텔은 ‘A9[크루저Cruiser전차]를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소련전차보다 열등한 전차를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생각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르텔은 귀국 후 크리스티 원형 중 한 대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정부는 금지된 전쟁물자 수출을 꺼려했기 때문에 주요 부품을 '트랙터'와 '자몽'이라고 적힌 상자에 넣어 영국으로 밀반입했고 크루저 전차를 완성할 영국 군수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너필드 기계화 Nuffield Mechanisation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저자인 로버트 커쇼가 영국인이어서 그런지 영국전차와 전술에 대해 무척 냉정한 분석을 하는데, 영국전차는 독일군에게 악몽같은 존재였습니다. 독일군 1/2호전차는 물론이고 3호나 4호 단포신으로는 1:1 전차전에서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88mm 대공포의 전설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영국이나 프랑스군이 전차부대를 보병부대에서 독립시켜 투입했다면 프랑스침공은 양상이 다르게 흘러갔을겁니다. 


전차는 일관성있는 프로세스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자문을 구해 설계되었고 어느 누구도 명확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1936년 10월 17일, 전쟁부 장관은 내각에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우리는 현대적 디자인의 경전차가 부족하다. 새로운 모델이 시험 중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 투입할 중형 전차도 없다. 보병전차도 설계에 머물러서 아직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상업용 부품, 특히 엔진이 결정적인 프로젝트가 보류되면서 기술개발에 차질이 생겼다. 1936년 영국 정부는 재무장을 결정했지만 18개월 후 동부사령관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재무장에 관한 서류가 들어왔다. 정말 끔찍한 내용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믿을 수 없다'고 적었다. 그는 아직 기계화되지 않은 기병연대, 구형 중형전차, 순항전차, 보병전차, 구형 장갑차, 경전차 등 실패의 연속을 기록했다. '이것이 2년 후 우리 군대의 모습이다"라고 불평했다. 

독일전차부대는 1939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쟁 전 위기와 대규모 군사기동으로 큰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36년 2월 25일 이른 아침, 창설된 지 4개월 된 제5기갑연대를 소집해서 수송열차에 실었다. 표면적으로는 젠라거에서 열리는 대규모 훈련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작전개시였다. 열흘 후 독일군은 비무장 상태였던 라인란트Rhineland를 재점령했다. 1938년 3월 초, 제2기갑사단은 사전예고없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안슐루스Anschluss작전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세계 최초의 기갑군단사령관으로 임명된 구데리안준장은 기존 기갑 사단과 나치 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친위대SS Leibstandarte Adolf Hitler Regiment를 이끌고 선봉에 서는 임무를 맡았다. 장갑차는 퍼레이드를 상징하기 위해 녹색위장을 하지 않았다. 

 

1차대전 후 알자스-로렌지역은 프랑스로 돌려주고 나머지 라인란트 지역은 비무장 완충지대로 만들었는데 여기를 합병합니다. 

 

당연히 엄청난 환영을 받았고 군사작전인데도 꽃이 난무해서 꽃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래는 국경선을 없애고 있습니다. 

 


구데리안은 '정차할 때마다 전차에는 꽃이 장식되었고 병사들에게 음식이 쏟아졌다'고 기록했다. 문제는 뷔르츠부르크에서 파사우를 거쳐 비엔나까지 680km를 이동하는 동안 20~30%가 고장나서 중간에 계속 멈춰야 했다. 헬무트 리트겐 중위의 회고에 따르면, 전차전력의 대부분이었던 1호전차가 도로를 따라 덜컹거리며 달릴 때 종종 멈춰 섰다. 이 경우 전차에서 내려 관련부품을 수리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야 했다. 
손가락과 얼굴이 검게 타거나 멍이 드는 대가를 치르면서 점화플러그를 교체하거나 연료펌프를 손으로 조작하면 엔진이 큰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였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비창으로 향해야 했다. 이동식 연료 공급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파사우에서 연료를 징발해야 했다. 심지어 한 군용 연료저장소에서는 작전에 대한 갑자기 폭력이 발생하기도 했다. 
구데리안은 '대원들이 관광용 경로를 이용해 이동하는 동안, 진격로에 있는 오스트리아 주유소들에게 계속 영업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전차부대의 경계, 이동, 보급에서 결정적인 경험을 쌓았다. 전투부대가 3~5일 분량의 연료, 식량, 탄약을 보충할 수 있도록 기갑사단 내에 보급부대를 배치했다.  
정확한 부대이동 순서대로 차량을 도로에 배치하는 간단한 운영절차와 전차병의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조치 등을 미리 경험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필수 보급품을 운반하고, 적재하고, 도로 장애물을 처리하는 경험을 미리 얻은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실전을 치르면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실제로 제2기갑사단이 680km, 아돌프히틀러친위대가 900km를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에 실전에서도 적진으로 빠르고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적의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하면 적의 저항의지가 무너질 수 있다. 10월 뮌헨협정 이후 주데텐란트Sudetenland로 진격하면서 전략전술이 더욱 완성되었다. 
총통의 외교캠프 덕분에 전투를 치를 필요는 없었지만, 실전에 대비한 혹독한 훈련이었다. 체코전차는 대부분의 독일전차와 비슷한 성능이었다. 폰 멜렌틴은 ‘우리가 체코의 강력한 요새를 지나 행진할 때 피비린내 나는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며 상당한 안도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 병사들은 모든 마을에서 감동적인 환영을 받았고 깃발과 꽃으로 환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구데리안은 제1기갑사단과 제13자동차화사단이 두 차례에 걸쳐 270km를 야간이동한 것을 훌륭한 성과라고 평가했다. 리트겐 중위의 말을 빌리자면, '필젠Pilsen 근처에서 벌어진 며칠 간의 꽃전쟁Blumenkrieg은 훌륭한 맥주와 함께’, 부대원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에 큰 도움이 되었다. 꽃전쟁, 블루멘크리그는 값싸고 화려한 성공을 묘사하는 새로운 표현이었다. 

 

체코의 서부 지역인 주데텐란트도 독일인 거주지역이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무혈입성했습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더 이상 합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6개월 후에 체코 전체를 합병했습니다. 

그리고 38t라는 귀중한 전차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껴쓰고 돌려쓰고 다시쓰는 독일답게 온갖 파생형을 만들어가며 대전말까지 1,400대나 생산했을 정도로 독일전차부대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꽃전쟁에 대한 훈장이 수여되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콘도르군단 병사 몇 명을 제외하고는 훈장을 받아 본 병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운전병 한스 베커는 곧 그 장점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위대한 영웅으로 인정받았고, 이제 참전병사들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느꼈다. 

 


검은 제복을 입은 멋진 전차병들은 다른 장점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은색 군복은 소녀들에게 마법과도 같았다. 데이트를 즐기면 댄스클럽과 영화관에서 급여를 모두 바닥냈다. 
그 후 몇 달 동안 제3기갑사단은 혹독한 겨울 날씨를 뚫고 프라하를 점령하기 위한 5일간의 행군,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의 또 다른 승리행진, 콘도르군단의 공적과 스페인에서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한 6월 9일 베를린 퍼레이드,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 축하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이어졌다. 
폴란드, 스위스, 러시아, 프랑스, 영국에서 온 무관들은 새로운 무기와 장비의 화려한 행렬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생일축하 행사에서는 6개 사단, 10만명이 4시간에 걸쳐서 퍼레이드를 벌였다. 군중들은 전차대열이 지나갈 때마다 감탄의 함성을 질렀다. 외교석의 감정은 엇갈렸다. 

 

아래는 대전후반 전차장 군복인데 소련군과 비교해서 멋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독일기갑부대가 대규모 무혈 작전을 통해 얻은 풍부한 실전 지식과 경험을 통합하고 통합하고 있을 때,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지루한 말 대 전차논쟁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말의 시대가 끝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3년 기병대 자료는 '전차가 전장에서 기병을 몰아내지는 못할 것'이라며 '앞으로 전차의 행동반경이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군은 폴란드와 러시아처럼 전쟁 초기까지 기병을 유지했는데, 특정 지형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914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과 기계화 전쟁을 주장하는 새로운 지지자들 사이에 사활을 건 논쟁이 벌어졌다. 전 기병대 감찰관이었던 하워드-비세소장은 '비교적 빠른 동물인 말과의 지속적인 교감'이 기병에게 유익한 효과를 가져와 탄력적인 전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기병 자료에는 '기병에 비해 원래 문제가 많은 전차는, 무력화시킬 틴약이 발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전차는 대전차포, 지뢰, 포병에 취약했다. 독일참모부는 목표에 집중한 방식으로 기계화에 성공했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모든 군이 각자의 역할을 인식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반면에 영국은 연대별 고유문화에 집착했고 변화를 시도했을 때에는 너무 늦었다. 전쟁발발  4개월 전에야 여러 부대를 하나의 왕립기갑군단(RAC)으로 통합했다. 그 사이 독일군은 사단을 완성하고 네 차례의 훈련을 마쳤다. 
다가오는 전쟁에서 양측 모두 공군과 기계화부대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 외에는 전쟁이 어떻게 치러질지 알지 못했다. 퍼시 호바트준장은 전차부대의 사용 가능성을 예상하면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공군과 기계화가 큰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1차대전과 같은 병력집중과 전략전술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독일군도 마찬가지로 불확실했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한스 폰 럭은 1930년대 초 슐레지아Silesia의 한 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가 갑자기 제1자동차화대대로 전출되었다. 기병대를 엘리트 부대로 여겼고 말을 좋아했기 때문에 매우 실망했다. 
기계화 기병부대에서도 여전히 기병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1938년 제10경기병대에서 복무하던 브라운하사는 비커스전차 운전법을 배웠다. 그는 말을 더 이상 탈 수 없어서 몹시 슬펐다고 기억한다. ‘전차훈련을 위해 보빙턴에 온 기병대원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은 승마복 차림으로 전차에 탑승하면서 많은 지적을 받았다.’여우사냥이 취미였던 마이클 포프는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도 마지막 기마부대인 기병대에 입대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20세기 기계화 과정에서 주저하는 기병대 장교와 병사들을 '당나귀 월러퍼donkey walloper'라고 조롱했다. 기병 장교는 전차장교와 비교했을 때 괴팍했으며 전차장교들은 자신의 임무에 훨씬 더 집중하고 공부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중에는 공립학교 장교출신도 많았다. 
전통과 혁신적인 진보가 동시에 존재했고 잔혹한 전쟁을 준비하는 데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에이단 스프롯은 연대에 도착했을 때 '말 20마리와 비커스전차 2대가 남아 있었다'고 했다. 이 전차들은 내부 통신이 안되어서 운전병의 어깨에 끈을 묶어 말처럼 조종했기 때문에 무척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전차가 오른쪽으로 가려면 오른쪽 고삐를 당겨야 했다. 반면에 독일전차병들은 4년 전부터 무전기를 장착했고, 그 후로도 계속 무전기로 훈련해왔다.

영국은 재정 압박으로 기병부대의 기계화전환이 지연되었고 이미 전차학교의 학습과정에 혼란을 주었다. 순항전차는 엔진의 출력부족 때문에 장갑을 희생했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보병지원용 중장갑전차를 새로 개발했다. 
1935년 마틸다Matilda전차를 생산했지만, 70마력 포드 V8 엔진으로는 시속 13km가 고작이었다. 대신에 60~65mm의 장갑을 둘러 당시의 어떤 대전차포로도 파괴할 수 없었다. 중전차와 경전차 개발의 차이로 인해 보병전차와 순항전차 이분법이 시작되었고, 후속 전차개발과 부대편성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로는 도저히 파괴할 수 없었던 마틸다중전차입니다. 

 

당시 주력 대전차포였던 37mm는 '안에 사람있어요?'라는 도어노커Door Knocker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번에도 아껴쓰고 돌려쓰고 다시쓰는 독일군답게 성형작약탄을 붙여서 대전말까지 생산하며 장갑차나 벙커공격에 사용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본능적으로 같은 속도로 함께 움직이는 전차를 선택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전차 부대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예비 전력은 1938년과 1939년에 급하게 전환한 전구육군Theater Army 대대뿐이었다. 프레드 고다드는 ‘계속 안 좋은 소식뿐이었다. 1938년과 마찬가지로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1939년 4월 징병령이 발표되었고 7월 1일에 첫 소집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안 해머튼은 소집되자마자 수천 명의 다른 병사들과 함께 혼란을 겪었다. 지급된 군복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았다. 보건교육도 혼란스러웠고 새로운 전구육군 전차대대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고다드는 ‘더 많은 신병들이 보빙턴에 도착했고 훈련강도가 높아졌다’고 회상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작전보다는 행사분위기가 강했다. 고향에서 서로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함께 우정과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