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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전차병 이야기 (9부) - 폴란드 침공 (2)

by uesgi2003 2023. 7. 14.

이번 캠페인에서 전차병 개인의 실력이 점점 중요해졌다. 운전병은 무거운 전차를 조종하고 기어를 신속하고 자주 변경하고, 계기판을 계속 주시하고 차량을 정비해야 했고 전차장은 지형을 통과하는 길을 찾고 포수에게 최적의 사격 위치를 지시하고 목표물 식별에 도움을 주었다. 엄격한 훈련과 협업경험이 쌓여 실전에서 차이가 드러났다. 
폰 뷔나우 소령은 ‘8일 동안 쉬지 않고 작전을 수행했다. 밤낮으로, 밤낮으로 정찰을 계속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피로가 극에 달했다. 정찰대는 전차부대 선봉에 앞서 끊임없이 지상을 정찰했다. '병사들은 피곤하고 운전병들은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흙먼지로 뒤덮여 있고 9월의 더운 날씨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제3기갑사단과 제5기갑연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부크Bug강 지점의 거대한 협공 작전을 위해 경로를 변경한 후 3일 동안 380km를 주행했다. 제4기갑사단과 함께 바르샤바에 가장 먼저 도착한 제35기갑연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험한' 도로를 지나 400km를 달렸다. 
전차병들은 교전과 교전이 벌이면서 길고 험난한 도로행군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단치히 회랑을 차단하고 바르샤바를 점령한 후 이제 부크에 접근한 전차부대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후속 보병사단이 폴란드 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묶어두었다. 

 


폰 에세벡은 구데리안의 진격명령을 떠올렸다. 지도를 건네 달라는 요청을 받은 폰 에세벡은 밀폐된 포탑 안에서 보기 쉽도록 접은 지도를 건넸지만, 구데리안은 '아니, 지도를 통째로 펼쳐라'고 했다. 구데리안은 바닥에 펼쳐진 지도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며 자신이 원하는 부크강 다리를 가리켰다.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가라니, 내 귀를 믿을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모래밭이 이어졌기 때문에 1단 또는 2단 기어로 밤을 운전해야 했다. 전차장들은 깜깜한 밤에 앞 전차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뿌연 먼지와 흐릿한 고글의 불분명한 시야 때문에 눈이 몹시 피로했다. 
'지휘전차 운전병이 내게 잠시 운전대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승무원 교대만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폰 에세벡은 '운전병의 팔이 통나무처럼 옆구리에 매달려 있었다. 더 이상 팔을 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독일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보다 훨씬 전에 실전을 치렀다. 
1930년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보나 자전거로 이동하고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는 사실상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폴란드는 즉시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 전차병들은 폴란드 지원이 아니라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3군단 참모로 근무하던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소령은 폴란드작전이 '우리 병사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고 평시 훈련과 실탄을 사용하는 실제 전쟁의 차이를 가르치는 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제5기갑연대는 침공 전에 그로스본 훈련장의 모든 전차를 정렬하고 포탑 사방에 피라 인식용 흰색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그렇지만 폴란드 대전차포에게 훌륭한 조준점이 되었고 병사들은 생존에 더 치중하면서 점차 휘장을 검게 칠하거나 지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얇은 흰색 윤곽선이 있는 검은색 십자가가 새로운 휘장이 되었다. 

 

대전차포에는 더없이 좋은 표적이었습니다. 

 


독일군은 침공 초기에 엄청난 긴장감에 시달렸다. 작전기간 내내 민간인 명사수들의 총격을 받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폰 멜렌틴은 ‘잘 훈련된 부대도 전쟁상황에서는 얼마나 불안해 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했다. 공군지휘관이 정찰기를 타고 군단본부 상공을 선회했는데 모든 병사가 총기를 들고 튀어나와 달려갔고, 공군연락장교는 뛰어다니며 흥분한 병사들에게 독일군 지휘기라고 외쳤다. 

 

바르샤바를 폭격중인 He111 폭격기입니다. 

제6기갑연대에 소속된 프리츠소령은 투헬-슈베츠 도로를 따라 비스와Vistula강으로 진격하던 중 구데리안과 함께 아돌프 히틀러가 기습방문했던 일을 떠올렸다. 죽은 폴란드 시신이 짐수레와 자동차, 수많은 총기류와 뒤엉켜 쓰레기들 사이에 쌓여 있었고, 말들은 마구간에 갇혀 죽어 있었다. 암울하고 파멸로 가득 찬 광경이었다. 히틀러는 박살난 포대를 바라보며 구데리안에게 ‘우리 폭격기가 그랬습니까?’라고 물었다. 구데리안은 ‘아닙니다. 우리 전차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히틀러는 깜짝 놀랐다. 폴란드군의 몰살은 민간인의 끔찍한 상황이 떠올라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폴란드행 비행기를 타기 전의 히틀러입니다. 

 

쿠르트 마이어는 9월 10일 바르샤바 인근 올타르제프 도로에서 전멸한 폴란드군과 함께 있던 난민들을 회상했다. 그는 ‘더 이상 군인과 민간인의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현대식 무기가 그들을 모두 파괴했다. 마구간에서 죽거나 다친 말들 사이에는 전쟁의 광풍에 휩쓸린 여성과 아이들이 있었다. 칭얼대는 아이들은 죽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아이에게 매달려 있었다. 폴란드인과 독일인 모두 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피난민들이 포센을 탈출하던 중에 총격전에 휘말린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마이어는 '올타르제우의 죽음의 길에서 어떤 독일병사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며 공포에 억눌렸다고 했다. 9월의 태양이 피로 뒤덮인 도로를 환하게 비추며 파괴의 현장은 파리떼로 뒤덮였다. 병사들은 정서적 방어 메커니즘으로 끔찍한 현장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폰 에세벡의 정찰부대는 폴란드의 저항을 제거하기 위해 포탄 한 발은 집 모서리에 낮게 조준하고, 한 발은 건물 중앙에, 한 발은 지붕에 조준했다. 건물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바르샤바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전차병은 시가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먼지와 지하실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관총 사격, 고층과 지하실에서 쏟아지는 수류탄으로 전차와 보병이 분리되었다. 그 후에 은폐된 대전차포가 1호와 2호전차를 노렸다. 전차는 폐허때문에 빨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전소된 독일군 2호전차입니다. 


선두 중대장 클라스소령의 전차는 숨어 있던 대전차포에 맞았는데, 주저하는 운전병에게 계속 운전하라고 명령했지만 다시 한 발을 더 맞아 불탔다. 그와 무전병은 중상을 입고 탈출했다. 8중대를 지휘하던 모건로스소령도 비슷한 부상을 입었다가 다른 전차에 올라탄 지 몇 분 만에 또 다른 공격으로 사망했다. 전차 2개 소대가 나무가 우거진 공원으로 돌격했지만 돌아온 것은 단 3대뿐이었다. 전차들은 집결지로 후퇴했는데, 그날 오전에 출발한 120대의 전차 중 57대만 움직일 수 있었다. 8명 전사에 15명 부상이었고 전차 30대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전차만으로는 바르샤바를 점령할 수 없었다. 

 

독일군 포로들입니다. 

폴란드침공에서는 새로운 기계화 전투방식과 구식 전투방식이 맞붙는 일이 벌어졌다. 수왈키 폴란드 기병여단의 소대장이었던 카밀 드지완스키중위는 독일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부대가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상황을 기억한다. 그들은 '추격, 매복, 유인'이라는 전술을 사용했다. 전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수류탄으로 전차궤도를 부수거나 핀란드인들이 나중에 화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던지기도 했다. 
여단은 말이 끄는 소형 대전차포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31대의 장갑차도 보유하고 있었다. 광활한 삼림지대에서 어쩌다 볼 수 있었던 폴란드 기병대의 사나운 모습은 전설적이었다. 쿠르트 마이어의 부대는 연막을 뚫고 돌진하는 폴란드 기병대에 기습을 당했는데 그들은 소총 사격에도 멈추지 않았다. 모터사이클 소대가 총을 쏘아 몇 마리의 말을 쓰러뜨린 후에야 기병대가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드지와노프스키 중위는 치고 빠지기 전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숲 속 길을 개척하며 적의 기갑대열을 괴롭혔다. 전차나 공중지원이 없다는 점만 빼면 독일군 기갑부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폴란드 기병대 소대장은 먼지 구름 사이로 적군이 긴 뱀처럼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9월 9일 바르샤바 인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이던 독일 보병 1개 대대였다. 
드지와노프스키는 속보전진 명령들었다.  독일군들은 아직 폴란드기병을 보지 못했고, 기병대가 전진하자 숲 속에 숨어 있던 중기관총이 독일보병 대열을 흔들어 놓았다. 기병대는 3열 대형으로 칼을 뽑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일군 일부는 길가 도랑으로 몸을 피신했고 일부는 마차 뒤에 숨었다. 
폴란드기병은 순식간에 도로에 올라섰고 독일군에게 칼과 창세례를 퍼부었다. ‘우리는 숨이 차고 지칠 대로 지쳤지만 꿈에 그리던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많은 독일군이 항복했고 공황상태에 몰린 독일군의 반격은 정확도가 떨어졌다. 30~40마리의 말을 잃었지만 기병대 사망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드와노프스키는 ‘그렇지만 이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퇴각해야 했다’고 인정했다. 살아남은 기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대전차엽병부대로 배치되었다. 말은 기동성을 부여하고 중요한 병기를 운반하거나 견인할 수 있었다. 당연히 전차병과 기병이 예기치 않은 교전을 벌였을 수도 있는데, 구데리안은 제3기갑사단이 비스와강으로 진격하는 동안 대기병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했다. 
숲이 우거진 지형때문에 전투가 벌어졌을 수 있지만 구데리안의 주장과 다를 수 있다. 그는 '폴란드 포모르스카 기병여단이 우리 전차의 특성을 모르고 칼과 창을 들고 돌격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라이벨소령은 호프너의 제16군단과 함께 남쪽에서 전차를 이끌고 진격했다. 그의 전차중대는 불타는 마을로 접근했는데 수평선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갑자기 '폴란드 기병대가 왼쪽으로 접근한다!'라는 외침이 들렸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췄는데 오경보였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말 떼가 이리 저리 사람을 찾아 달리고 있었다. 불타는 가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어스름 속에서 말들이 뒤섞여 돌아다니는 모습은 전쟁에서 말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암시했다. 폴란드군은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독일군의 선봉에 앞서 슈투카 폭격기와 저공 공습이 폴란드군의 저항을 무너트렸다. 

 

공부가 심각하게 부족한 몇몇이 이런 사진만 보고 국내에 폴란드 창기병 이야기를 퍼트렸고 아직도 그걸 믿는 사람들이 좀 됩니다. 

여기에서도 설명하듯이 2차대전 초기에는 전세계가 기마부대를 대규모로 운용했고, 전차군단이라는 과장된 별명의 독일도 개존 초기는 물론이고 종전까지 군마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도 전쟁이라면 전사에서 빠지지 않는 국가였기 때문에 후진국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제국들의 침략에 시달렸을 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도 중무장하는 이유입니다. 

 

폴란드 자신도 영웅신화를 남기기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렸지만 실제로는 기병의 대전차 돌격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고 보병부대를 상대한 기습이었고 상당한 효과를 거뒀습니다. 


참전용사들의 기록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불타는 마을은 공습때문이었고 전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파괴되었다. 흔한 오해와 달리 폴란드공군은 개전 며칠 만에 지상에서 전멸당하지 않았다. 실제로 폭격기들은 9월 16일까지 독일군을 공습했고 폴란드 전투기와 폭격기는 독일 폭격기 70여 대를 격추했다. 

 

폴란드공군도 상당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독일공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위에는 미완성상태의 PZL.37 무스 폭격기입니다. 120기 정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폴란드공군은 독일공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늘을 완전히 장악한 슈투카 폭격기는 전차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제6기갑연대의 로센소령은 사기가 완전히 꺾인 폴란드 부상병들과 대화를 나누며 독일군 전차보다 항공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폴란드군, 특히 지원군, 탄약 및 보급품은 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 

 


병력과 보급에 큰 차질이 있었다. 병력은 거의 전진할 수 없었고 보급체계도 완전히 무너졌다. 폴란드 엔지니어 레오나드 위톨드 야스트르브스키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까지 기차를 탈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부대에 합류하려고 전차부대 장비를 운반하는 군용열차에 올라탔다. 독일공군의 폭격으로 자주 멈춰 섰다. 그는 9월 17일 해질녘에 열차가 다시 멈춘 후,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지 마세요, 볼셰비키(소련군)가 들어왔으니 소용없어요.' 정말 충격적이었다. 
이 무렵 폰 보크 장군의 북부집단군과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은 폴란드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독일군은 바르샤바 서쪽과 북서쪽에서 폴란드군을 포위했다. 외곽 날개들이 북쪽으로는 비알리스토크와 브레스트, 남쪽으로는 리보프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자 소련군이 국경을 넘었다. 2주간 전투가 더 이어졌지만 폴란드군 소탕전에 불과했다. 

폴란드군은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서쪽에 전력을 집중했고, 동부전선은 무인지경이었다. 20살 학생으로 제1 폴란드 창기병대에 입대한 안제이 보구슬라브스키는 소련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칼이 등에 꽂힌 것 같았다'고 씁쓸하게 회상했다. 그의 부대는 말을 타고 소련군 전차와 싸웠으며, 독일군에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치고 빠지기 전술을 썼다. 보구슬로브스키는 적 전차 22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많은 전차를 파괴했다! 동부전선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버틸 수 없었고 9월 25일경, 부대 전체가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어 도망쳐야 했다. 러시아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을 무시하고 첫날 60km 이상 진격했다. 소련군 게오르그 안토노프중위는 폴란드군보다 보급이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고 회상했다. 스페인 내전 이후 전차사단을 보병부대에 분산 배치하기로 한 결정은 악영향을 미쳤다. 
안토노프는 ‘연료 보급소가 없어서 많은 전차와 트랙터, 기타 차량이 연료부족으로 움직일 수 없었고 도로와 들판에서 멈춰야 했다’고 불평했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합병 당시 경험 부족으로 인해 겪었던 그런 상황이었다. 
9월 22일 제3기갑사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러시아와 합동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 연대장교였던 한스 비엘렌버그박사는 '소련군전차가 기름기 가득한 고철 덩어리였다’고 기록했다. 

 

폴란드에게 착취당하는 우크라이나농부를 해방시키는 소련의 선전물입니다. 

바르샤바가 포위되었고 흩어져 있던 폴란드저항군은 10월 5일 마지막 항복까지 계속 저항했다. 전차운전병 한스 베커는 폴란드작전이 이전 작전처럼 소풍이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전차부대는 단 18일 동안만 참전하는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격전이었다. 독일군은 236대의 전차를 완전히 잃었고 전차의 기술적 결함 때문에 전차병 손실이 컸다. 소형 1/2호전차가 대형 주포를 장착한 3호와 4호전차를 견인하거나 기관총만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주로 경전차로 무장한 제5기갑연대는 38명의 승무원을 잃었다. 

 

조국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폴란드포로들입니다. 


구데리안의 제16기동군단은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전차사단 2개와 경전차사단 2개로 편성되어 있었다. 남부집단군은 전차부대를 여러 개의 군단으로 나누었는데 전차부대가 한 걸음 더 진화한 형태였다. 
구데리안은 전차사단 내에서 전차, 포병, 보병의 합동작전이 필요하고 공군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제 전차병들은 서로의 역할을 대신하고, 낯선 지형에서 지도를 읽고 신속하게 대형을 형성할 수 있었으며, 정규 작전수행에 정통하고 숙달되어 있었다. 
아직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열세였지만 더 강력한 신형전차가 조립되고 있었다. 전차병들은 혹독한 시험을 받았다. 베커는 훗날 '전쟁내내 우리는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집시 생활을 했다'며 '수염을 길러 친구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마지막 전투에서는 체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조차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4주 전과는 완전히 다른 베테랑들이었다. '마침내 진정한 영광이 찾아왔지만 포센에서 상처를 핥으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들뜨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미국 타임지는 '걷잡을 수 없는', '이것은 점령전쟁이 아니라 빠른 침투와 섬멸전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전격전(블리츠크리그)라고 불렀다.’ 이후 블리츠크리그는 현대 기동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전문가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조언했던 독일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장군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폴란드 작전은 서방에게 맞지 않고 잘 짜여진 군대를 상대로는 소용없다'. 
폴란드작전은 새로운 전략이나 작전계획의 결과가 아니었다. 독일군 사단은 전술적 독립성을 갖지 못했다. A군 참모총장 게오르그 폰 소덴슈테른장군은 '폴란드에서 우리 전차부대의 공로를 인정하지만, 전차가 서방의 방어에 대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썼다. 폴란드에서 독일군의 탄약이 바닥났기 때문에 신속한 작전종료 덕분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계화부대는 차량의 최대 50%를 잃었고 장교가 극도로 부족했다. 
전차운전병 한스 베커는 '폴란드 전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프랑스, 영국과도 전쟁 중인 것을 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장병들도 마찬가지로 불안해했다. 제7전차사단의 한스 폰 럭중위는 '폴란드에서처럼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혀 다른 상대다.' 

프랑스기병대는 1930년대에 경기계화사단인 레제르 메카니끄(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 DLM) 사단 3개로 재편되었다. 이 사단에는 영국이나 독일이 보유한 그 어떤 전차보다 정교한 유럽 최고의 전차가 배치되었습. 소무아Somua S-35, 르노Renault R-35, 호치키스Hotchkiss H-35는 완전히 새로운 전차로, 45-55mm 중장갑과 우수한 37mm 및 47mm 주포를 장착했다. 

 

 

고스란히 독일군에게 넘어간 소뮤아전차입니다. 커다란 흰색 십자가표식이 바뀐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36년에는 60mm 장갑과 75mm 및 47mm 주포를 장착한 강력한 Char-B가 등장했다. 조향시스템은 다른 어떤 전차보다 뛰어났다. 1940년 5월까지 3,400대의 프랑스전차가 배치되었고, 이 중 2,900대가 우수한 현대식 전차였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이런 기술발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체 전력의 거의 절반이 보병지휘 아래 50대 미만의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보병보다 앞서 정찰하고 소규모 방어막을 형성하는 구시대 기병의 역할로만 제한되었다. 그리고 이런 구시대적 사고때문에 다시 전차의 기술발전이 제한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왼쪽이 개전 초반의 프랑스 전차와 장갑차이고 오른쪽은 프랑스해방 후의 장갑차와 전차입니다.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두가 영국과 미국 것입니다. 

보병지원 전차는 장거리 이동용이 아니기 때문에 연료탱크가 작았고, 무전기도 부족했고, 전차장과 포수의 역할이 구분되는 포탑의 보급도 늦어졌다. 프랑스전차병들은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생각하며 충격흡수 헬멧을 쓰고 고급스러운 가죽 상의를 입었지만, 훈련은 엉성하고 완전히 어긋난 방향이었다.

 


영국의 재무장 프로그램은 프랑스에 영국 원정군(BEF)을 파견하는 합의과정이 지연되어 절실히 필요한 신형전차를 아주 천천히 생산하고 있었다. 1940년 5월까지 BEF의 주요 기갑부대는 육군 제1전차여단으로, 마틸다 77대, 마크 II 23대, 마크 VI 경전차 및 유니버설 캐리어, 기계화기병연대 7개로 구성되었다. 기병연대는 각각 구형 기관총으로 무장한 마크 VI 경전차 28대와 유니버설 캐리어 44대를 갖췄다. 한 연대는 모리스Morris 장갑차 38대를 보유했다. 모든 기계화기병연대 전투차량은 독일군의 1호전차 말고는 다른 전차에 열세였다. 
그래서 마틸다를 제외한 영국전차 300대는 프랑스 중전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은 프영 연합군이 보병만 투입하지 않을 것을 알았고 대응할 전략을 세워야 했다. 그렇지만 전쟁에 투입된 157개 사단 중 기계화사단은 16개에 불과했다. 독일군은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기마부대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은 1차 세계대전의 140만 마리의 2배인 270만 마리를 동원했다. 프영 연합군은 기계화사단을 갖췄는데도 여전히 말과 철도로 보급품을 운송했고 보병중심의 전투 교리를 고수했다. 
베르사유조약 때문에 개발경쟁에서 뒤처진 독일은 두 가지 유형의 군대를 보유했다. 기동전력 중 전차사단 10개와 기계화사단 6개가 10%였고 나머지 90%는 기마사단이었다. 그래서 16개 정예 사단만이 전격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전차 2,439대로 프랑스전차 3,254대(영국전차 600대 별도)를 상대해야 했다. 
독일전차 중 2/3만이 프랑스전차와 교전을 벌일 성능이었다. 프영연합군의 전쟁선포는 히틀러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실제보다는 허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프랑스를 침공하기 전에 ‘우리의 적은 작은 벌레’라고 말했다. 

연합군의 선전포고에 우울해 하던 히틀러는 폴란드작전의 성공에 고무되어 도박꾼답게 프랑스를 바로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겁에 질린 참모진은 계획연기를 주장했고, 1940년 5월 10일까지 29차례나 연기된 끝에 작전계획을 포기했다. 
독일군은 원래 프랑스 마지노Maginot선을 우회한 후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작전계획을 담은 일급 기밀문서가 프랑스 군사정보국에 넘어갔고, 폰 만슈타인장군의 급진적인 지셀슈니트Sichelschnitt, '낫 절단' 계획으로 대체되었다. 
전차사단 7개가 프랑스 내륙으로 진입해 해협연안으로 향하는 기습공격이었고 성공한다면 벨기에로 진격한 연합군은 배후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 기습공격을 위해 전차부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전차부대가 빠른 기동력을 살려 보병보다 먼저 국경을 돌파하기로 했다. 
이 임무를 맡은 A집단군의 선봉은 클라이스트의 제1전차사단이었다. A집단군은 전차 1,222대를 포함해 차량 41,140대와 134,370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고 전차부대는 자체적으로 연료와 탄약을 운반했다. 이런 규모의 전차부대는 역사상 처음이었다. 

 

프랑스침공 편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영국의 전차병훈련은 혼란 그 자체였다. 로저 블랭클리는 1940년 초 첫 번째 마틸다 전차가 도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우리는 전차를 바라보기만 하고 만질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군사기밀이었다.’ 
그리고 야간훈련 중 민간차량과 교통사고를 일으키거나 옥수수밭 등을 지나가는 다른 전차와도 충돌할 뻔했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교관들이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장비도 부실했다. '우리는 실제로 많은 전차로 훈련한 적이 없었다.' 전차모형 위에 22구경 공기총을 달고 풍경그림 표적으로 시뮬레이션 훈련을 했다. 
1940년까지 프랑스 파병군은 237,319명의 병력을 보유한 3개 군단, 10개 사단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제1군단과 제7군단 사이에 투입되었는데, 새로 도착한 전차병들은 사기가 높았다. 전차를 기다리는 3~4일 동안 생애 처음으로 외국도시를 경험했다. 1930년대 해외 여행은 부유층의 특권이었다. 전쟁덕분에 군사관광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프랑스는 젊은 병사들에게 환상의 땅이었고, 모두들 유흥업소를 찾았다. 그들은 하루 일당으로 신발도 신지 않은 나체 차림의 여자들을 즐겼다. '들어와라, 얘들아. 여기가 너희 아빠들이 왔던 곳이야'라는 유혹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국전역의 마을에서 온 병사들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인간애를 발휘하며 지역사회에 녹아들었다. 

그해 봄에 일부 전차주행 훈련이 있었지만 전차 사격연습은 거의 없었다. 3월과 4월에는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영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대다수는 실제와 달리 전쟁을 빨리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전차병들은 지금이 바로 전쟁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확신했다. 
5월 9일 목요일 저녁, 독일어로 가짜 전쟁Phony War을 뜻하는 시츠크리그Sitzkrieg가 끝났다. 루르Ruhr강 근처 크레펠트에 있던 제3기갑사단 본부는 2103시에 '단치히'라는 암호어를 수신했다. '1940년 5월 10일 0700시에 즉시 이동준비'라고 적혀 있었다. 
오토바이대원들이 주변 마을의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며 병사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긴급소집은 자주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종종 연습경보도 없이 야간행군과 사격, 탑승훈련을 했었다. 밤은 짧았고, 병사들은 재빨리 막사로 향하거나 숙소에서 나와 차가운 회색빛 새벽을 맞이할 때, 머리 위에서 항공기 무리가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훈련이 아니었다. 사단은 1000시에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다음날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국경에서 교통정체가 벌어졌고 움직일 수 없었다. 전설적인 전격전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39년 9월~1940년 5월을 가짜 전쟁이라고 불렀는데, 양측이 전쟁을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은 뭔가 나사빠진 상황을 말합니다. 과감한 도박을 준비 중이던 독일과 달리 연합국은 구태의연 그 자체였습니다. 

프랑스 단독으로도 독일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어서 방심에 한심을 끼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