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래간만에 장편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전투이고 온갖 자료가 널려 있지만 책 제목이 흥미로워서 정리를 시작합니다.
혹시 스탈린그라드전투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은 이미 출간된 다양한 책과 영화를 즐시기면 됩니다.
https://youtu.be/fRbOx5OITP0?si=QdUM8aL-Yv-lnED5
바르바로사Barbarossa실패
히틀러는 손가락을 턱 밑에 오므리고, 시선은 맞은편 벽에 집중한 채 책상 위에 놓인 문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측근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둥근 테 안경을 벗었는데, 무결점이라는 대중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진사도 안경 쓴 모습을 찍지 못했다.
보고서에는 프렘데 히레 오스트(Fremde Heere Ost FHO, 동부정보부)의 공식 직인이 찍혀 있었고,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len이 새로운 책임자로 부임했다. 전임 책임자 외눈박이 킨젤은 계속 러시아공군을 무시하고 T-34 탱크의 존재를 모르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고 무엇보다 모스크바가 단 2주만에 소총 두 자루와 바지 벨트 대신 밧줄로 무장한 수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전쟁 역사상 전례 없는 손실을 입었지만,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로 독일군을 무력화시켜 모스크바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공세인 타이푼 Operation Taifun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다.
독일군 중앙집단군Heeresgruppe Mitte은 탄약은 고사하고 겨울군복도 없이 겨울 눈 속에 갇혀 있었고,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바르바로사 침공군은 눈 속에서 궤멸된 채 죽어갔다.
히틀러는 장군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공황에 빠진 병사들에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들어가 그 자리에서 버티라고 명령했다. 그 결정으로 전선을 유지했지만 독일군의 사상자 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았고, 지휘관의 신뢰를 잃은 독재자가 고위 장교들을 무더기로 해임하면서 더 많은 손실이 발생했다.
이 중에는 비스마르크의 통일 전쟁 이전부터 군 중심이었던 옛 프로이센 군 계급의 수장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와 독일이 자랑하는 기갑군의 아버지인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Guderian같은 사람도 있었다. 룬트슈테트의 동료 군단장 페도르 폰 보크와 빌헬름 폰 리브, 그리고 구데리안과 같은 기갑군 사령관 에리히 회프너 등 40여 명의 지휘관도 물러나야 했다.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취Walther von Brauchitsch도 경질하고 그 자리를 자신이 대신했다. 자신의 직관과 상병 계급의 1차 세계대전 전선 경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자칭 독일군 최고사령관Oberkommandierender der Wehrmacht이 되었다.
사정이 급해진 히틀러는 룬트슈테트를 다시 불러 들이지만 이미 전황이 어두운 상태였고 룬트슈테트도 오판이나 태업에 가까운 결정을 내립니다.
1930년대에 그의 숙적이었던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히틀러는 이제 군대의 최고 지휘부를 숙청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에게 도전하지 않고 겁에 질린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한 룬트슈테트와 리브는 해임되기 전에 독일군이 옛 폴란드 국경으로 철수하고 모스크바와 모종의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히틀러조차 '영화관 직원의 두뇌'를 가졌다고 묘사한 알프레드 요들 Alfred Jodl과 빌헬름 케이텔 Wilhelm Keitel 등 측근들만 남은 상황에서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정도가 제 역할을 다했다. 철저한 군인정신의 할더는 완벽한 승리에 대한 황홀한 믿음과 파멸적인 패배의 예감 사이에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히틀러에 밀린 할더는 동부전선을 유지하고 전세를 굳히자는 조언을 듣지 않았다. 1942년 최종 결정은 히틀러의 독단이었고 그의 결정은 책상 위에 놓인 가죽 제본 보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러시아의 곰이 아직 동장군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금, 히틀러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프랑스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은 모두 안전했고, 영국 폭격기사령부의 제국상공 공습이 성가신 정도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빨치산이 격렬한 저항을 했지만, 현지에서 조직된 파시스트 민병대, 협력자, 이탈리아군이 전투를 맡고 있었다.
독일군이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교전 중인 유일한 전역은 북아프리카로,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군단 Panzerarmee Afrika이 지원군과 보급품 상황에 따라 이집트와 리비아 북부를 오가며 전진하고 있었다. 독일해군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영국의 중요한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러시아항구로 향하는 연합군 지원 수송선을 침몰시키려 했지만 독일군은 고래가 아니라 코끼리였기 때문에 확실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러시아는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게오르그 폰 퀴클러 Georg von Küchler의 북부집단군 Heeresgruppe Nord은 러시아군이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뚫으려는 볼호프 Volkhov강 전투에 휘말렸고, 귄터 폰 클루게의 중앙집단군은 아직도 전사자를 묻고 작전실패에 따른 대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결국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은 여러모로 이상한 형태로 남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키예프 전투에서 러시아군 대부분을 전멸시키며 바르바로사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이상했고, 잡다한 추축군으로 동부전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했다.
동부정보부는 모스크바의 군사력을 평가하고 분석했는데, 1941년 전역에서 러시아의 힘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독일군은 러시아 서부 공화국 전역에서 무려 22번의 대규모 전투를 치렀고 러시아군은 대포 25,000문과 전차 14,00대를 잃었다.
포로로 끌려가 굶주림과 갈증, 질병으로 죽어간 300만 명에 더해 최소 200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독일군부는 대학살 수준으로 포로를 방치했다. 러시아의 전선 병력이 약 400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이제 가용 인구가 200만 명 밖에 남지 않아 전력이 바닥났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이 분석에 확신을 갖고 베를린 전쟁사관학교 학생들에게 '적군은 더 이상 비알리스토크 Bialystok와 뱌즈마-브랸스크 Vyazma-Bryansk전투(1941년 6월과 10월)에서 입은 것과 같은 손실을 견딜 수 없다'고 브리핑했다. 그렇지만 당시 한 나치 친위대 고위장교는 '호가신에 찬 우리 친위대 지도자들은 ... 적군의 힘과 ... 러시아 대초원의 광대한 면적과 기후조건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정보부 보고서는 히틀러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전투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분석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대신 나치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믿고 싶었으며, 정보부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고위장교는 이 견해에 반박하며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가 한 달에 600대 이상의 전차를 생산해 독일을 앞지르고 있다고 히틀러에게 말하자, 독재자는 주먹을 탁자에 내리치며 '불가능하다!"라고 외쳤다. 그는 러시아를 몇 대만 세게 치면 된다... 그러면 러시아의 거인이 진흙탕에 쓰러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정말 엄청난 숫자를 죽였습니다.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굶겨서 말려죽였습니다. 포로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엄청나게 죽이고 끌어가서 값싼 노동력으로 부려 먹었습니다.
서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감정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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