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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11부)

by uesgi2003 2012. 12. 3.

 

이제 11부입니다. 저도 몰랐던 인물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되어 좋기는 합니다만, 이제 슬슬 지루해지고 있습니다.

빨리 마무리하고 미루어 두었던 미국 남북전쟁이나 이탈리아 또는 독일 통일전쟁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처음오신 분들을 위해...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되고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

33. 나폴레옹 (Napoleon I)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9부

36.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37.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38. 샘 휴스톤(Sam Houston)
39.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40.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0부
41.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42.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
43. 도고 헤이하치로(Togo Heihachiro)

 

11부

44.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
45.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46.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47. 야마모토 이소로쿠(Yamamoto Isoroku)


12부 예정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44.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 - 1869년~1930년 

이탈리아 전술공군의 창시자.

포병장교로서 훈련을 받은 뒤 1912~15년 이탈리아 최초의 비행대대 사령관을 지냈다. 그의 지대한 노력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할 때 3발 엔진 카프로니 폭격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군의 잠재력을 곧바로 파악한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이론을 상세히 설명했다. 상부의 군사작전을 너무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수감되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17년 카포레토에서의 패전으로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판명되자, 그에 대한 판결은 번복되었고 다시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가장 유명한 저서로 〈제공권 Il dominio dell'aria〉(1921)이 있다. 전술공군이 군사력의 일부로 수용되기까지 이 이론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기술의 개발로 그의 몇몇 이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적의 전쟁도발을 무력화시키고 근절시키는 데 있어 폭격전력이 중요하다는 그의 이론은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미래의 군사계획으로 정립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독립적인 공군의 창설, 육군 및 해군의 축소 군사력의 통합 등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 강대국들이 채택했다. 

 

두에는 자신의 책에서, 공군력은 3차원의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비행기는 지상군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하늘을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격만이 최선이며, 적의 항공기를 전멸시킨 후에는 적을 마음대로 폭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제공권은 승리로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두에는 폭격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공군력으로 한 국가의 수도를 파괴해서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으며, 폭격기는 언제나 제 효과를 가져온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 원칙에 따라 정부, 군사, 산업 중심지를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폭격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공군 지휘관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데, 첫 번째 기본 목표는 산업, 교통, 통신, 정부 그리고 국민의 의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의지라는 목표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총력전에서는 그것만큼 중요한 목표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이 폭격을 당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공포에 질리게 되면, 정부에게 항복이나 평화협상하라는 요구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전략폭격에 대해 강조하느라 대공방어망이나 육군의 전술적 지원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데, 제공권 두번 째 판에서는 육군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장거리 폭격대를 독립적으로 운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폭격기 요격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호위전투기로 요격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격은 정밀하지 않아도 되며, 목표물을 부술 고폭탄, 파괴된 건물을 불태울 소이탄, 소방관과 구조요원을 죽일 독가스탄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도에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강력한 반론이 잇달았다. 1942년 공군원수 아더 "폭격기" 해리스Arthur "Bomber" Harris)는 2차세계대전 기간 중 도에의 이론에 따라 4년 동안 영국 폭격대는 독일의 주요 도시를 파괴시켰고 1944–1945년에는 대규모 폭격(Combined Bomber Offensive)을 했지만 폭격에 노출된 독일국민은 정부에게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고 거꾸로 독일국민은 연합군에 증오를 품고 정부를 더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연합군이 수도에 들어설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더 강화시킨 두 번째 판은 육군과 해군 지휘관에게서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향후 20년 동안 그의 이론을 증명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갑론을박에 그쳤다.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의 이론은 폭격기의 효과에 대해서도 너무 낙관적이며, 대공 기술의 발달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허점이 드러났다.

1928년 당시, 그는 적의 수도에 300톤의 폭탄만 투하하면 한 달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2차대전 기간 동안 유럽 주요 도시에 2천 5백만 톤의 폭탄을 투하하고도 종전시키지 못했었다.

 

그의 이론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다양했다. 영국은 공군사관학교의 필독서로 지정하지 않았던 반면에, 프랑스, 독일과 미국은 보다 적극적으로 이론을 연구했다.

1930년 심장병으로 죽기 전까지 그는 많은 이론을 주장했는데, 기술발전을 간과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제공권 확보의 중요성, 폭격의 효과, 전략목표 폭격의 필요성과 같은 이론은 지금까지도 공군 전략의 기본이 되고 있다.


45.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 1889년~1945년

독일의 정치가로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 총통이었다. 

뛰어난 웅변술과 정치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 발전이라는 그의 치적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시행한 계획을 시행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후 독일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침공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태인이라 모함하여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강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했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독약을 먹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까지 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된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다가 1913년 5월에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삶은 자료가 거의 없으며 구술증거가 전부일 뿐이다.

그의 유년시절의 자료에서와 달리 비교적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더 나아지는 그의 수입은 심지어 선생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히틀러가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들의 영향을 받아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뒤섞인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징집을 거부하고 뮌헨으로 갔다. 얼마 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 당원증 제555번을 받았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 나치당)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당 로마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지만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전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여 1,340만 표(36.8%)까지 득표했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 후보에게 패했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초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고.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좌파 세력,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인사 등 반대파를 감금, 납치, 암살, 고문, 불법적인 재판과 처벌 등의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존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함을 강조하여 인기를 모은 뒤 일당독재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었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라고 불렀다.

전권 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에는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한 데 이어서 바르톨로메오의 밤 사건을 일으켜 권력 등 모든 비밀을 알고 있던 전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을 제거하면서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당원에 합병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민족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 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우에스기 왈: 히틀러에 대한 영화는 Hitler - the Rise of Evil 이라는 영화가 미니시리즈도 좋고 Downfall 이라는 영화도 좋습니다. 모두 한글자막이 있는 동영상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는 저작권 문제때문에 유투브 동영상 링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Hitler - the Rise of Evil  http://www.youtube.com/watch?v=d42GhnKowwc

Downfall http://www.youtube.com/watch?v=XKwJjrYklgc)


46.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 1888년~1954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군인, 군사이론가.

제1차 대전 때 참전 후, 소모전을 타개할 기갑전술과 전격전(Blitzkrieg) 이론을 창안하여 독일군의 제2차 대전 초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1940년 7월 프랑스 작전의 전공으로 상급대장(Generaloberst)으로 승진했으나 에르빈 롬멜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는 달리 원수로 진급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코프렌츠 제3통신대대에 근무하여 무선 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대전 뒤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참모본부, 군학교, 항공기, 잠수함, 전차보유가 금지되고, 병력도 10만 명으로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게 되었다. 병무국이 설치되어 철도 전송, 통신, 자동차 전송을 관할하는 교통병감부(독일어: Inspektion der Verkehrstruppen)에 근무했다.

선견지명이 있던 상관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아래에서 자동차 부대와 전차 부대를 이용하는 혁신적인 전술을 개발하기 위해 헝겊이나 합판를 씌운 모형 전차로 전술 연구를 했다. 독소 비밀군사협력에 따라 연합군의 감시를 피해 소련 오지에서 독일군 장교의 전차 전술의 교육, 훈련에도 관여했다.

시대를 앞선 자동차의 장래성을 이해하고, 나치스당이 국가사회주의자동차단(NSKK)을 창설하고, 자동차 운전자, 수리 기술자를 대량으로 육성한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의 집중 운용에 주목하여 보병의 보조 역할에만 사용해야 한다고 고집하던 보수적인 육군 상층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구데리안을 후원했다.

구데리안은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 아래에서 신설된 제2기갑사단의 사단장에 임명되어, 1937년 저서 [Achtung Panzer!]을 출판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에서 구데리안은 제2기갑사단과 자동차화된 LSSAH 연대를 이끌고 단시간에 빈에 진군하여 자신의 이론의 유용성을 입증했다. 제2기갑사단은 독일 남부의 뷜츠부르크에서 670km, LSSAH 연대는 베를린에서 1,000km을 48시간 만에 주파하여 빈에 도착했다.

제16기갑군단장(2개 기갑사단+1개 자동차화 보병사단)이 된 구데리안은 체코의 즈덴덴 지방에 신속히 진군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는 독일 본토와 동 프러시아 지방을 갈라놓았던 단지히 회랑을 빠른 속도로 횡단하여 브레스트-리트브스크까지 진격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는 당초 슐리펜 계획이 준비되었으나, 기밀 누출 사건으로 말미암아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따라 돌격대가 되어, 아르덴느 고지를 돌파한 뒤 아미앙에서 덩케르크까지 쾌속 진격을 실시했다. 이러한 진격에 놀란 독일군 상층부에서 여러 차례 정지 명령이 내려왔다. 덩케르크에 이르러 공격은 금지되어, 덩케르크의 기적을 눈앞에 보고만 있어야 했고,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남하하여 알프스까지 진격해 프랑스군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만든 전차부대의 집중 운용과 항공 지원에 기초한 전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뒤에 폴란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독소전 초기까지 독일에게 대승리을 안겨주었다. 구데리안은 1940년 12월부터 1941년 4월까지 독일을 방문했던 일본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인솔한 육군 군사 시찰단에게 전격전에 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1941년 6월에 시작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중부 집단군에 참가한 제2기갑집단(후에 보급조직이 추가되어 제2기갑군으로 승격)을 지휘해 동료인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이끄는 제3기갑집단과 함께 집단군의 주력으로 진격하였다. 주로 집단군 남쪽을 담당해 호트의 부대와 함께 민스크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대전과를 올렸다. 그가 지휘하는 전차에는 그의 이름의 첫글자 G가 새겨져(호트의 전차에는 H가 새겨져 있다) 위대한 하인츠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음 전략에서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으나 프리하치 소택지 동쪽을 북쪽에서 남하해 남부 집단군과 함께 키에프의 대포위전을 성공시켰다. 이 키에프 전투는 “야전군의 격멸”과 “중요 거점(모스크바) 탈취”라는 상반된 목표에서 야전군의 격멸을 우선시한 작전에 대해 구데리안 자신은 후에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했다고 술회했으나, 당시에는 남부 집단군의 이후 진격이 곤란하게 된 일, 또 보급 조직이 스몰렌스크 동쪽으로의 진격에 대해 미정비된 상태라는 이유도 있었기에 실제로는 히틀러가 선택한 야전군 격멸이 정확했다는 의견도 많았다.

다음 모스크바 진격을 재개해 10월에는 브랸스크, 비얀지마에서 2중 포위전에서도 대전과를 쌓아 11월에는 제3기갑군의 게오르그 한스 라인할트 상급대장, 제4기갑군의 에리히 호프너 상급대장과 함께 모스크바 공략을 개시했다. 구데리안은 소(小)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모스크바의 남쪽 문에 해당하는 요새화된 툴라를 우회해 남쪽에서 모스크바를 노렸다. 

그러나 병력, 보급, 준비 등 모든 것이 부족했고, 특히 투라를 우회하는 동안 받은 피해(후에 공격을 실행하는 데 실패), 돌출되었던 남쪽의 개방부의 존재(담당한 제2군은 보병 중심으로 쫓아올 수 없었다), 북쪽의 2개의 기갑군과 남쪽과 서쪽에서 진격했던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과의 사이를 메우는 일과 제4군의 귄터 폰 클루게 원수와 공격이 연동될 수밖에 없는 일, 거기에 소련군이 극동 시베리아에서 일본과의 전투에 대비해 배치했던 다수의 정예부대를 불러와 충분한 예비 전력을 확보한 것 때문에 공격은 곤란하게 되었다. 12월 구데리안은 작전을 중지하고 후방에서 월동 준비를 할 것을 히틀러에게 직접 상신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1943년 3월 1일에 기갑병총감에 임명되었다. 그 직책은 부대 지휘권을 갖고 있지 않은 휴직이었으나, 기갑부대의 재건을 위해 구데리안은 열심히 분주하게 일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부상당한 쿨트 자인츠러 상급대장의 후임으로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작전에 대한 간섭을 저지하고 독일 방위의 중책을 맡았으나, 국경을 압박하던 소련군에 대한 방어 전략을 둘러싸고 히틀러와의 대립이 정점에 달해 히틀러로부터 6주간의 휴가을 명령받았으며, 이것은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구데리안은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항복해 포로가 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시작되자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는 전쟁 범죄자로서 구데리안을 기소했으나 결국 기소는 중지되어 재판에서 군사 작전에 대한(특히 폴란드 침공에 대해서) 증언을 남겼다. 1948년에 석방된 뒤 미군 육군 기갑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회상록을 집필했다. 1954년 서독에서 사망했다.


47. 야마모토 이소로쿠(Yamamoto Isoroku) - 1884년~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는 거함거포주의가 주류였던 당시 분위기에서 일찌감치 항공기 분야에 힘을 쏟은 기술에 밝은 기술관료이기도 했다. 육군과는 서로 적이라 부를 정도로 적대적이었던 일본 해군은 육군과는 전혀 다른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전투용 항공기 또한 별개의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야마모토는 일찌감치 해군 항공대 육성과 전술 능력 배양에 전력을 쏟았고, 그의 노력은 태영양전선의 특징이 되는 항공모함 간 항공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시키고, 거함거포주의를 침몰시키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해군 항공대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숙련된 조종사의 상실과 신형 미국제 전투기들이 기술적 우위를 점함으로써 서서히 몰락하여 전쟁 후반에는 자살특공대(카미카제 작전)로까지 몰렸다.

야마모토는 미국 유학 및 주미 일본 대사관 무관 근무 시절에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직접 확인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경제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야마모토는 미국과 전쟁을 주장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에 맞서 전쟁을 반대했다. 

당시 고노에 수상이 승리 가능성을 물어오자 "진다"고 잘라 말하고, 승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길어봐야 6개월에서 1년이라고 덧붙인 일화가 있을 정도다.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인 해군 대신에게도 대본영에서 회의때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육군 강경파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해군 대신이 되어야 할 시점에 연합함대사령관으로 취임한 것도 군함함대사령관실에 있으면서 육군 강경파들의 암살 시도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결정되고, 일본 천황이 승인하자 야마모토는 이왕 전쟁을 할 것이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선제 기습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목표물은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었다. 

1940년 말부터 8월까지 야마모토는 작전 계획 수립과 부대 훈련에 매달렸다. 특히 진주만의 수심이 얕은 것을 고려하여 뇌격기에서 사용할 어뢰의 개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99식 산소어뢰는 당시 어뢰들 중에서는 최고 성능이었지만, 진주만의 수심이 너무 얕아 사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프로펠러 추진부에 간단한 목제 부품을 달아 사용이 가능하도록 개량했고, 이 어뢰로 진주만과 비슷한 지형의 가고시마에서 수행한 모의 훈련 결과 충분히 성능을 발휘하였다.

야마모토는 11월 26일 연합함대를 이끌고 진주만으로 출발했다. 함대는 함재기 4백14대를 적재한 6척의 항공모함, 2척의 전함, 순양함 4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과 유조선 8척으로 편성되었다. 12월 7일 함재기들은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기습하여 공격을 성공리에 마무리했으나 2가지 실수를 범하였다. 하나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고(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진주만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유류 저장소를 고스란히 남겨둔 것이었다.

공격 후 야마모토는 환호하는 부하들 사이에서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1942년 미군이 둘리틀 공습으로 도쿄를 폭격하자 미 해군이 일본 본토에 접근할 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전초기지가 미드웨이 섬이었다. 미드웨이는 본래 무인도였으나, 섬에 활주로를 닦아 비행기지를 건설하여 섬 전체가 불침 항공모함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야마모토는 실패를 겪었다. 항공모함 4척과 오랜 시간 단련된 많은 조종사들을 잃은 것이다. 작전은 실패하고 야마모토는 귀항한다.

미드웨이 해전 종료 후 미군은 솔로몬 군도의 작은 섬인 과달카날 섬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일본군의 전략은 한편으로는 야마모토를 중심으로 첫 번째, 중부 태평양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두 번째는 남태평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병참선을 끊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략을 위해 일본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이 완공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간 병참선이 끊어지고 사실상 태평양에서 일본에 반격하기가 쉽지 않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과달카날 작전은 1년여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수회의 해전과 육상전투를 통해 과달카날 장악에 성공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이 하나의 계기였다면, 전세의 역전은 과달카날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 올바른 평가다. 야마모토 제독도 이 전선을 소홀히 할 수 없어서 가능한 함대를 이쪽 방면으로 보냈고, 자기 자신도 전선 시찰을 위해 라바울로 향했다.

1943년 4월 18일, 부건빌 섬의 일본군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비행기로 출발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시간 관념이 너무 철저했다는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를 연상시키는 그 철저한 시간 준수때문에 목숨을 잃은 흔치 않은 몇 안되는 사람이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최고 사령관이 전선에서 전사한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당시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하고 있었고,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도 미리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육군 항공대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P-38 라이트닝 전투기로 야마모토 제독을 공격하기로 했다. 야마모토는 미군이 가장 무서워 했던 군인이었다.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전에 미군은 시찰일자 며칠 전부터 P-38 편대를 라바울 상공으로 출격시켰다. 즉, 일상적인 전투 초계 활동 중에 우연히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미군 편대는 호위기들을 공격할 편대와 야마모토 탑승기를 공격할 공격조로 나뉘어 출격했다. 호위조가 일본군 호위기들과 전투를 시작한 사이, 공격조가 호위기들의 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야마모토의 탑승기에 명중탄을 날렸고, 탑승기는 추락하였다. 시신은 일본군이 발견하여 거두어갔고, 기체는 1990년대까지 격추된 장소에 남아 있었다.


(우에스기 왈: 일본군은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를 알리지 않고 해군갑사건이라고만 불렀고 미군도 암호해독을 들킬까봐 제독을 죽인 사실

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독의 폭격기를 누가 격추시켰는지에 대해 전후에 조종사들이 법정소송을 벌였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림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비록 우리에게 잊지 못할 시기의 일제군인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조국이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빠져드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기회가 된다면 번역본을 출간하려고 합니다.

워낙 인기가 없는 인물이라 상당한 모험이 되겠지만요. 


야마모토 제독이 격추되는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39-yZ_2aao0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가 진주만을 기습하는 영화는 여러 편이 있지만 가장 최근의 Pearl Harbor가 가장 화려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RNMbOqYOuM에 전체 영화를 올려두었군요. 그러나 진주만 폭격장면만 골라서 보시고 정식 다운로드나 DVD로 즐겨주실 것을 권합니다. 

작년 12월에 일본에서 그의 전기영화가 개봉된 모양인데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예고편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聯合艦隊司令長官 山本五十六http://www.youtube.com/watch?v=jefoskxAt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