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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12부)

by uesgi2003 2012. 12. 4.


이제 드디어 마지막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명단을 정리한 윌리엄 바이르는 마지막 인물로 맥아더 대신에 리지웨이를 선택했군요. 

우리는 6.25 전쟁때문에 맥아더에 대해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는 의외로 냉정한 평가를 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

33. 나폴레옹 (Napoleon I) 
34.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35.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9부

36.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 
37.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38. 샘 휴스톤(Sam Houston) 
39.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40.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0부 
41.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42.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Alfred Thayer Mahan) 
43. 도고 헤이하치로(Togo Heihachiro) 

 

11부

44.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 
45.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46.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47. 야마모토 이소로쿠(Yamamoto Isoroku)


12부 예정 
48. 레이몬드 스프루언스(Raymond Spruance) 
49. 마오 쩌둥(Mao Zedong) 
50.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48. 레이몬드 스프루언스(Raymond Spruance) - 1886년~1969년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을 승리로 이끈 해군제독.


 

1903년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함 아이오와 호의 승무원이 되었으며, 1907년 아이오와가 퇴역하자 신예함 미네소타 호에 전속되어 1907년 12월부터 세계 순항을 떠나 최초 기항지 일본에서 벌어진 가든 파티에서 러일 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을 만났다.

1910년 소위가 되어 코네티컷 호에 탑승했고 1913년 구축함 베인브릿지 호의 함장 등으로 승진했다. 

여러 요직들을 거치다가 1941년 태평양 함대 소속 제5순양함 전대 사령관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 5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제16기동부대 사령관직을 맡아 항모 엔터프라이즈에 승함하여 일본군 항공모함들을 침몰시켜 태평양 함대 총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의 참모장이 되었다.

1942년 10월 과달카날 전투 중부 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년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퇴시켜 미군의 사이판 상륙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레이테만 해전에서도 큰 승리를 거뒀다.

1945년 1월에는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고 오키나와 전투도 지휘했다. 종전 후 필리핀에서 더글라스 맥아더와 만나 각종 해군사령관 직무에 종사하다가 퇴역했다.

은퇴 생활을 하다가 1952년 1월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었고 1969년 12월 자택에서 사망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의 클래스 네임과 그 1번함(DD-963), 알버레이크급 미사일 구축함의 61번함(DDG-111)은 그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우에스기 왈: 이 분의 최대 전공은 아무래도 미드웨이 해전일 것 같은데, http://www.necrosant.net/zbxe/7690 사이트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른 태평양 전투도 아주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49. 마오 쩌둥(Mao Zedong) - 1893년~1976년

 

중국의 정치인, 군인, 교육자, 혁명가, 사상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정치가이자 초대 국가 주석이며, 공산주의자이다. 그는 이른바 '모택동주의'를 창시한 사상가로 족적을 남겼으며 시인이나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초기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으며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에게 연합정부론을 제의하였으나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장제스와 국민당 일파를 대만으로 축출했으며, 잔여 군벌들을 숙청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1949년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과 1950년 임시 국가수반을 거쳐 1959년까지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주석으로 재직했다. 

국가주석 재직 중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1959년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뒤에는 후임 주석으로 오른 류사오치와 갈등하다가 린뱌오 등을 사주하여 류샤오치를 실각시키고 사망 직전까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논쟁이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장제스를 격파하고 중국을 강대국으로 이끈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지만,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약 2천 5백만 명, 문화대혁명으로 약 2천~3천만 명의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급진적인 정책이 중국의 문화, 사회, 경제, 외교관계에 입힌 물적, 인적 피해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밖에 국공 내전과 한국전쟁 당시 기아로 사망한 약3천 5백여만 명의 사망자까지 초래함으로써 악명높은 학살자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1923년 제3차 전당대회에 출석하여 5명의 책임비서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공산당은 국민당과 함께 항일연대를 위해 국공합작을 추진했고 곧 성사되었다.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1924년에 중국 국민당의 제1기 중앙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 공산당 선전부장 대리, 중화민국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말, 마오는 고향인 후난 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농민운동을 살펴본 그는 가까운 장래에 수억 명의 중국 농민들이 '폭풍우처럼' 봉기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농민의 힘이 너무나 엄청나고 폭발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커다란 세력이라도 그것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으나, 그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장제스는 노동자·농민 혁명에 등을 돌렸고, 1927년 4월에는 국민당의 상하이 입성을 도와주었던 상하이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국민당과 제휴해 혁명을 완수하려는 스탈린의 전략이 수포로 돌아갔고 중국공산당은 도시에서 거의 전멸, 지방에서는 1/10 이상이 파괴되었다. 국공합작은 실패했고 1927년 마오는 후난의 추수봉기에서 살아 남은 수백 명의 농민운동가들 이끌고 피신, 장시성(江西)과 후난성 접경지역에 있는 징강 산(井崗山)으로 퇴각, 한동안 은신하며 농민부대를 재정비했다.

1927년 마오는 창샤에서 추수 봉기를 이끌었다. 여기서 그는 "중국공농혁명군"이라고 이름붙은 무장병력을 이끌었지만, 토벌군에게 진압당하여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성의 싼완으로 도주했다. 여기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다시 장시 성의 징강 산으로 옮겼다. 마오의 군대에 지역 토비와, 또다른 공산당 지도자인 주더의 군대가 합류하여 "중국공농홍군"(약칭 홍군) 제4방면군을 구성하였다.

1934년까지 홍군은 영향력을 넓혀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을 건설하고 마오는 소비에트공화국 주석겸 중국 공산당 중앙집회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마오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던 주더의 도움을 받아 매우 효율적인 부대를 조직하였으며, 특히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정한 군율로 농민을 지지세력으로 삼아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전략으로 계속되는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분쇄하였다.

 

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장개석)는 이러한 소비에트를 분쇄하기 위해 4번의 토벌전을 펼쳤으나, 번번이 홍군에 패했고, 국민당군이 버리고 도주한 군사물자는 오히려 홍군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1932년 6월까지 홍군은 45만 명의 정규병력과 보조병력으로 20만 명의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불법화된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의 체포와 탄압을 피해 이곳 장시 소비에트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시 소비에트로 피난해온 중국공산당 고위급들이 많아지면서 마오의 지도력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돌아온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아 당권을 장악하였고, 그들은 유격전을 중심으로 한 마오의 전략을 버리고 정규전을 결정했다. 

 

한편 국민당군은 100만의 병력을 동원해 제5차 토벌전을 시작하였다. 국민당에 파견된 독일 군사고문단의 한스 폰 젝트의 조언으로 진지와 토치카를 구축하면서 천천히 진격했고, 이에 마오를 대신해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다가 커다란 인명손실을 내었다. (양측이 모두 독일인 군사고문의 조언에 의해 움직였다) 

또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배후 촌락이 모두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 소비에트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 성에 있는 근거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만킬로미터를 걸어 결국 산시에 도착하였다. 장정 도중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붕괴하고, 마오에게 절대적인 지도권이 넘어왔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이끄는 부대는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했고,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피해 이동을 개시한 나머지 부대들도 이곳에 합류하였다.

1936년 장제스는 만주사변이후 일본군에게 근거지를 잃고 근처에 주둔한 장쉐량(장학량)의 군대에게 도주해온 공산군의 토벌을 명령했다. 토벌전을 독전하기 위해 장제스는 장쉐량이 주둔해 있던 시안을 방문하였다. 공산당에 동정적이었던 장쉐량은 일본제국의 침략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도 공산군 토벌만 주장하는 장제스에 불만을 품고 도리어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 사태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풀려나는 조건으로 항일을 위한 공산당과의 휴전과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형식상 국민당군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이후 공산당은 일본군이 점령한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은 미국의 중재로 공동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고, 이어 본격적인 내전을 시작했다. 초기 국민당군은 병력수에 있어서 공산군측에 우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초기에 유리한 국면을 선점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20만명의 병력이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점령지를 늘린 국민당군은 지나치게 병력이 분산되는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민당 정부의 총체적 부패,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붕괴, 그리고 이미 떠난 민심이 어우러져 1948년부터는 공산당측에 유리하게 내전이 전개되었다.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이어 파죽지세로 4월에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이어 5월에는 최대도시 상하이를 함락시켰고 10월에는 국민당손에 남아있던 최후의 대도시인 청두마저 함락되어 장제스과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도피하였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1972년부터 병으로 고생하였다. 암살과 테러를 의심했던 그는 고층 건물에 오르는 것과 비행기 탑승을 주저하거나 꺼렸다고 한다. 와병 중이던 1976년 제1차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이 발생했다. 이는 대규모의 민중봉기였다. 플래카드에는 마오쩌둥의 부인을 비롯한 4인방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구호와 시가 많이 게재되어 있었고, 뒤에는 마오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까지 올라왔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었으며, 마오는 이를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겸 국무원 부총리를 제거할 기회로 삼고 덩샤오핑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그러나 소요사태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마오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가 격화되며사태가 확산되어 가던 중 그는 진압을 시도했으나 군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그는 완전히 고립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76년 9월 그는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83세였다. 그의 유해는 자신의 시체를 매장하라는 유언과는 상당히 다르게, 화장하라는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레닌과 마찬가지로 시신 보존되어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


(우에스기 왈: 최근에 중화사상이 부활하면서 중국 역사에 대한 영화가 대거 제작되고 있습니다.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내전영화도 제작되었는데 그 중 전투장면 http://www.youtube.com/watch?v=maaM8Ix8NLo 과 http://www.youtube.com/watch?v=qmIpofVmhhc를 소리 높여 보시기 바랍니다. )


50.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 1895년~1993년

1932년 필리핀 총독의 기술 고문을 지냈고, 2차대전 중 82 공수사단장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아섬, 이탈리아 본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1944년 18 공수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독일에서 전투중 적의 수류탄에 의해 어깨에 부상을 입기도 한다. 

유럽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중장으로 진급한 리지웨이는 태평양에서 전투중이던 맥아더 휘하로 가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커의 후임으로 참전했다. 1951년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연합군 최고 사령관,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NATO 사령관, 미육군참모총장등을 거쳐 퇴역하였다. 

퇴역후 자서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1993년 사망후 알링텅 국립 묘지에 안장 되었다.

 

 

  

 

오래 걸렸다고 하면 오래 걸렸고, 날로 먹었다고 하면 날로 먹었던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가 끝났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 명단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계속 강조했듯이, 미국 출판이 목적인 책이라 전형적인 미국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저자 나름대로의 신선한 시각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50명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50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사가 아니라 예술사, 과학사, 인류사에서 이들보다 훨씬 위대한 지도자가 수 백 명이 더 있을 것입니다.

50명의 이야기를 마친 저는 항상 고민하고 안타까워 하던 의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제 이야기를 계속 놓치지 않고 읽어 오신 분이라면 지금쯤이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실 겁니다.

 

'왜 우리나라는 뛰어난 리더가 그렇게도 드물었을까?'

'만약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은 왜 뛰어난 리더가 계속 나오는 것일까?'

 

우리와 역사를 함께 해 온 사이 나쁜 이웃, 일본이 우리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겨우 40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전국이 전장이었고, 경제, 정치, 문화, 군사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뒤처지는 봉건국가였습니다.

우리에게서 넘어간 도자기가 국보 취급을 받았고, 조선 통신사가 써준 글이 부적처럼 모셔졌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요즘의 한류와 같은 대중적인 인기가 아니라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앞서게 되었을까요?

 

지정학적, 인류학적 배경이 있지만, 저는 뛰어난 리더 덕분이라고 분석합니다. 뛰어난 리더가 한 명도 아니고 연달아 세 명이 이어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바로 그들입니다. 서로 반목했다면 전쟁이 100년은 더 지속되고 일본은 계속 후진국으로 남았을텐데 서로 절묘하게 도와가며 패권을 넘겨받으며 200년 넘게 내전을 벌이던 일본을 안정시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슴아픈 비극이지만, 조선원정을 통해 조선의 선진기술과 엄청난 기술인력을 한 번에 흡수해 도약하게 됩니다.

 

일본이 동북아 강대국을 넘어 세계 열강에 나선 것은 겨우 15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한단계 발전했다고는 해도 독특한 형태의 봉건국가로 통일된 이후, 도쿠가와 집안의 어리석은 리더들이 통치하면서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나갔고 청나라의 경우처럼 서양의 식민지나 협력국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다시 사카모토 료마, 오쿠보 모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사상과 정치 지도자들이 연달아 나타나면서, 내전의 위기를 개방기회로 바꾸고 과거중심에서 미래지향적인 일본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신은 루마니아에게 기후, 국토, 자연자원(석유와 가스)를 모두 줬지만 리더만 주지 않았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배경만 놓고 보면 대단한 국력인데도 뛰어난 지도자가 태어나지 않아서 유럽의 한 구석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기후, 국토, 자연자원조차도 없고 단지 뛰어난 국민만이 있었다고 자평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로 뛰어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을 정도로 인내심 강하고 중심회전력이 강한 것이 아닌 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 역사에 뛰어난 리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리더를 싫어하고 오히려 훼방을 놓았던 것은 아닐까요?

왕정국가, 봉건국가 시절에는 리더가 자생적으로 태어났다가 사라졌지만, 현대는 수 많은 리더를 길러내고 그 중에서 적격자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뛰어난 리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리더를 알아보고 선택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