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은 전략게임 문명의 여전사 부디카입니다. 문명이 출시되었을
때에 등장인물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이제 절반 정도가 완성된 것 같군요.
우리는 승자 그리고 미국과 서유럽의 역사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각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전설과 추측에 가깝다고 해도 이런 기회에 사라진 문명의 주인공에 대해 알고 기억하도록 하죠.
문명4에 비해 5에서는 상당히 거친 모습으로 등장한 부디카입니다.
그녀는 로마군을 학살했고 론디니움Londinium을 불태워 50cm정도의 재를 남겼는데 지금도 런던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카투스Cornelius Tacitus에 따르면 그녀의 군대는 론디니움, 베룰라미움Verulamium, 카물로둔움Camulodunum에서 70,000명의 시민을 목자르고 매달고 태우고 말뚝에 박아 죽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리고 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했을까?
부디카의 삶은 전설에 가깝다. 그녀는 25년, 켈트 브리테인Celtic Britain의 왕족가문에서 태어나 프라수타구스Prasutagus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나중에 이케니Iceni족의 왕(또는 족장. 지도참조)이 되었다. 43년, 로마의 점령이 시작된 지 얼마 안 지나서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녀가 이케니족이며 프라수타구스의 사촌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심지어 머리색도 불분명하다.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는 그녀가 죽고 오랜 후에 통역을 통해 머리색이 새빨갛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붉은 색이 도는 금발이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부디카라는 이름은 승리를 뜻한다.
켈트족은 원래 로마군을 환영했다. 10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처음으로 브리타니아Britania를 침공했을 당시(아래 그림참조)에, 이케니족은 그에게 동맹을 제안한 6개 부족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거친 바다로 배후가 끊긴데다가 다른 켈트족의 게릴라 전술에 고생을 한 카이사르는 켈트족의 항복과 연공을 받은 후에 브리타니아를 빠져나갔다.
97년 동안 브리타니아에 발을 들여놓은 로마군은 없었다. 이케니의 남쪽에 인접한 카투벨라우니Catuvellauni는 로마로 곡식, 가축, 가죽, 철, 귀금속, 노예와 사냥개를 수출하며 점차 부유해졌다. 로마에서는 포도주, 올리브유, 도자기, 은과 동제 컵이 수입되었고 심지어 상당한 양의 금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동안 여러 명의 로마황제가 교체되었고 41년, 클라우디우스 네로Claudius Nero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브리타니아를 합병해야 할 이유가 많았다. 먼저 이 섬나라는 로마군에게 반드시 필요한 곡식과 귀금속 산지였는데 광물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리고 골Gaul족의 소요사태의 배후에 브리타니아 드루이드가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그는 몸과 말이 불편한 상태로 태어나 바보로 여겨져 대중의 눈을 전혀 끌지 못하다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로마시민이 인정하는 대단한 전과가 필요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칼리굴라가 암살되면서 근위대에 의해 옹립되어 권력이나 인기가 매우 약했습니다.
아내에게 독살되어 네로가 다음 황제로 오르게 됩니다.
영토분쟁에서 패한 켈트 부족장이 로마에 도착해서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브리타니아를 정치적 희생물로 삼기로 했다.
부디카는 43년에 18살 정도로 보이는데 클라우디우스의 침공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만한 나이였다. 그녀는 프라수타구스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아직 이케니의 왕은 안테디오스Antedios (프라수타구스의 친인척)였다. 안테디오스는 로마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고 로마군을 노골적으로 환영한 부족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상당한 적대감을 보였다.
이케니 남쪽의 카락독Caradoc의 카투벨라우니Catuvellauni(로마식 이름은 카락타쿠스Caractacus)왕과 다른 형제는 로마군에 맞서 다른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로마군이 남동쪽 끝에 상륙하자 카투벨라우니와 동맹군은 조금씩 맞서다가 메드웨이Medway강 건너편에 병력을 모으고 결전을 벌였다. 로마군은 대승을 거뒀고 카투벨라우니 형제를 죽이거나 중상을 입혔다.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로 건너와서 카물로두눔Camulodunum(지금의 콜체스터Colchester) 승전에 이어 11개 부족의 공식항복을 받아 정복을 마무리 지었다. 여기에는 이케니족의 안테디오스도 있었다. 부디카와 이케니족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로마군이 물러나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카물로두눔에 군단요새를 짓고 병력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브리타니아 동부 곳곳에 요새를 늘려갔다. 그는 원정군 사령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를 첫 번째 속주총독으로 임명했다. 카락타쿠스는 서쪽으로 물러나 병력을 모으고 로마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47년, 의욕만 앞서는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Ostorius Scapula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카락타쿠스는 총독교체 시기를 틈타 몇 차례의 습격을 했고 오스토리우스는 부임과 함께 전투에 휘말렸다. 그는 이미 병 중이었거나 부족의 습격을 견딜 수 없었던지 이케니족을 포함해 부족 대부분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켈트족은 사냥용을 제외한 모든 무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켈트족의 관습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조치였다.
이케니족은 당장 저항했지만 패배했다. 안테디오스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그 후에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오스토리우스는 프라수타구스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고 부디카는 이케니족 왕비가 되었다.
49년, 오스토리우스는 카물로두눔 부근의 땅을 몰수해서 식민지Colonia를 만들기 시작했다. 로마 전역병은 이 땅을 받아서 가정을 꾸리게 되는데 속주를 안정적으로 다질 수 있는 동시에 고참병을 즉시 징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현지부족이 로마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연결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카물로두눔 식민지는 안정보다 문제를 불러왔다.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더 많은 부족이 땅을 빼앗겼고 일부는 노예가 되거나 목이 잘려 벽에 걸리는 신세가 되었다.
콜체스터에 지금도 남아있는 로마시대의 벽입니다.
이테니족은 로마와의 교역을 기피한 반면에 카투벨라우니는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었는데 이케니는 이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는 로마에 저항했다가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오스토리우스는 52년에 카락타쿠스를 결국 붙잡았지만 자신도 그 해에 죽었다. 로마는 디디우스 칼루스Didius Gallus를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항복한 부족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점령지의 서쪽 부족과만 상대했다.
클라우디우스는 54년에 독살당했고 네로(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라수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Drasus Germaniocus)가 그 뒤를 이었다. 선황의 독살에 자신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를 신으로 추앙하면서 카물로두눔에 신전을 지었다.
켈트족장은 이제 자신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은 침략자의 신전을 짓고 일년에 한 번씩 숭배해야 했다.
로마는 부족에게 주거나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요구해 갈등의 씨를 뿌렸다. 클라우디우스가 안테디오스에게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도 모를 돈을 프라수타구스가 갚아야 했다. 프라수타구스도 로마 철학자이자 네로의 스승인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Seneca에게서 요청하지도 않은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세네카는 나중에 이자를 단단히 받을 생각으로 부족장들에게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Sesteretius를 빌려주었다.
브리타니아 징수관은 이 돈을 모두 갚을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세네카도 대출금과 이자를 받아내려고 무력을 동원했다. 세네카의 대리인은 병사를 이끌고 왕의 집에 쳐들어와 돈을 요구했고 부디카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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