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데리안의 전투, 9월 30일~10월 16일
예레멘코Yeremenko의 반격이 실패한 후, 에르마콥Ermakov의 잔여병력은 후퇴해서 재정비했다. 보병 3개 사단과 기병 2개 사단이 글루콥에서 오렐로 이어지는 도로에 얇은 방어선을 폈고 전차여단 2개가 예비군으로 남았다.
150전차여단은 T-34 12대와 T-50 8대가 전부였다. 14톤짜리 T-50은 T-26 대신 이제 막 생산되기 시작한 경전차로 T-34의 디젤엔진과 경사장갑으로 괜찮은 성능이었지만 겨우 48대만 생산되었고 보다 저렴한 T-60이 그 뒤를 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두 대 중의 한대로 핀란드 노획전차입니다. 경전차답지 않은 45mm 주포, 최대 37mm와 경사장갑, 최대시속 60km의 고성능뿐만 아니라 모두 라디오와 개량형 큐폴라를 장착했지만 전용엔진의 결함이 심각해서 결국 생산중단되었습니다.
T-60은 경전차에 맞게 무게와 장갑을 크게 줄였고 20mm 기관포가 주포였습니다. 6,300대가 제작되었고 이후에 설명할 폭격기에 실려 후방침투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노획한 T-60의 포탑대신에 76mm를 올린 대전차 자주포 타캄Takam(두 번째 흑백사진)을 만들었습니다.
독일군도 초반에 대량 노획한 소련군 76mm 포와 용도폐기된 전차로 대전차 자주포를 계속 생산했습니다.
121전차여단은 KV-1 6대, T-34 18대, T-26 46대로 드미트리옙Dmitriyev 부근에 있었는데 넓은 평지가 이어져서 수비보다는 공격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구데리안의 전차집단 2(또는 2 전차집단)는 오렐-> 툴라->모스크바 진격을 맡았습니다.
9월 30일 오전 6시 35분, 에스만Essman 부근의 소련 283보병사단에게 짧은 포격과 수투카 폭격을 한 후에 구데리안이 태풍작전을 시작했다. 24군군단Armeekorps이 주공을 맡아 에르마콥 방어선 중심을 공격했고 47군군단이 에르마콥과 13군 사이를 지원공격했다.
개전 당시의 부대구성이라 좀 달라졌지만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구데리안의 부대구성을 눈여겨 봐두시기 바랍니다.
4전차사단의 에버바흐 전투단Eberbach Kampfgruppe이 283사단을 쉽게 돌파한 후에 150전차여단의 경전차 여러 대를 격파했다. 그 후에는 T-34 2대가 차체를 낮춘 채로 가로 막은 데다가 동부전선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목재 TMD-40 대전차 지뢰까지 매설되어 있어서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3호 전차를 뒤로 보내 T-34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격파당했고 Bf-110을 호출한 후에야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40 이후에 만들어진 목함지뢰이지만 비슷한 구조입니다. 나무판 아래에 뇌관이 있습니다.
에르마콥은 공격규모를 잘못 보고해서 예레멘코가 구데리안의 공세를 기만공격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에르마콥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150전차여단은 동쪽으로 후퇴했고 오렐로 향하는 길이 그대로 열렸다.
반면에 에버바흐 전투단의 측면을 노려야 했던 121전차여단은 5일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에버바흐는 소련 보병뿐만 아니라 포대까지 유린한 후에 세브스크Sevsk를 점령했다.
24군단도 서쪽 측면의 보병방어선을 돌파한 후에 141전차여단의 반격도 막아냈다. 독일군은 전차대대마다 10.5cm 곡사포와 8.8cm 대공포를 지원해서 소련 중전차를 처리했다.
독일군 표준 사단곡사포인 10.5cm leFH 18입니다. 개전 당시 독일군의 대전차포가 워낙 한심스러웠기 때문에 대공포와 곡사포가 대전차포로 동원되었습니다. 덕분에 88mm의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구데리안은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예레멘코의 전선을 붕괴시켰고 13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구데리안의 전차는 모처럼 파죽지세의 돌파를 했다. 선봉부대는 100km를 달려 다리를 확보했고 에버바흐는 오렐에 근접했는데 11만 명의 전략요충지에는 소수의 소련군만 남아 있었다.
오후 4시, 전차 중대 하나가 오렐 도심으로 진입했다가 대전차포에 3대를 잃었지만 저항은 미미했다. 때마침 비행장에서 5공수군단을 수송하던 TB-3 폭격기를 공격했다.
브랸스크전선군에게 오렐함락은 치명타였다. 예레멘코는 각 부대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와도 통신할 방법이 없었다. 4일 만에 4전차사단은 240km를 전진했고 2,200명 사살, 전차 16대와 포 24문 노획의 전과를 올렸다. 손실은 겨우 41명 전사와 120명 부상에 불과했다.
구데리안의 2개 군단은 모두 10,000명을 사살하고 2개 전차여단에 큰 피해를 입혔다.
투폴렙Tupolev TB-3 폭격기는 4발엔진 폭격기의 원형으로 1932년부터 사용되다가 1939년에 퇴역했지만 다급한 사정 때문에 폭격기와 수송기로 종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의외로 창조적이었던(?) 러시아는 전차나 전투기를 매달고 후방에 침투하는 공중모함으로도 활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구데리안의 기세는 이어지지 않았다. 24군단은 연료가 완전히 바닥나서 오렐에도 제대로진입하지 못했다. 4전차사단은 오렐 2~40km 지점에서 멈췄다. 흔한 오해와 달리 구데리안의 선봉대는 첫눈이 아니라 연료부족으로 4일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탄약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구데리안은 공군에게 Ju-52로 연료를 수송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소련 전투기 때문에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다. 결국 수송대를 후방으로 돌려 연료를 가져오게 했는데 4일이나 걸렸고 그나마도 다음 목표지인 툴라Tula까지 전투를 벌이며 전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선봉대가 멈춰 있는 동안 소련 최고사령부는 구데리안의 공세에 대응할 시간을 가졌다. 드미트리 렐류센코Dmitri Lelyushenko를 오렐로 급파해 예비부대를 동원해서 오렐을 탈환하거나 북쪽에 새 방어선을 만들게 했다.
때마침 스탈린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기차에 실려 이동 중이던 4전차여단도 오렐 북쪽의 므텐스크Mtensk 기차역으로 보냈다. 렐류센코는 10월 4일, 4전차여단의 KV 7대, T-34 22대, BT-2/5/7 31대를 손에 넣었고 11전차여단의 50대도 모스크바에서 이동 중이었다.
렐류센코와 4여단잔 카투콥Katukov 모두 경험 많은 전차 전문가여서 소련은 처음으로 전차부대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카투콥은 전차가 채 하역되지도 않았는데 19대의 T-34를 오렐방면으로 보냈다.
구데리안이 한 방 맞은 므테스크입니다. 원래는 므첸스크과 오률이 맞습니다만 항상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발음선택이 난감합니다. 현지어 발음이 원칙이지만 영어식 발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대로 이어가겠습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예레멘코가 통신중심망 단절로 구데리안의 돌파를 알지 못했고 덕분에 독일군은 손쉽게 회피기동할 수 있었다. 예레멘코의 마지막 전차병력인 141전차여단이 독일 2개 전차사단에 맞서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밀려났다.
17전차사단은 중대규모의 전투단(2호전차 7대, 3호전차 6대, 보병 1개 분대와 2cm 대공포 2문)을 배후로 돌게 했는데 예레멘코는 전차가 사령부를 공격할 때까지도 그 상황을 전혀 몰랐다. 부상은 입은 예레멘코는 서둘러 달아났고 전투단은 그대로 다리를 돌파해 인구 87,000명의 브랸스크를 기습해 10월 7일 오전에 점령했다. 심지어 1,000명의 적군, 포병 1개 대대, 14대의 전차(KV-1 4대)까지 포로로 잡았다.
일개 중대가 단 한 방에 브랸스크전선군의 지휘체계를 무너트리고, 주요 도시를 점령해 소련군 14개 사단을 대혼란에 빠트렸다. 2군이 서쪽에서 압박하면서 큰 포위망이 완성될 뻔 했지만 구데리안은 트룹쳅스크Trubchevsk 포위망을 완성시킬 병력을 지원하지 않아 큰 기회를 놓쳤다.
소련군 3군과 13군은 5일 후에 혼란을 수습하고 탈출을 시도해 7개 보병사단이 툴라 부근의 러시아 방어선으로 달아났다. 구데리안은 트룹쳅스크 포위망보다는 모스크바가 더 중요했고 패잔병 섬멸에 시간과 병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2군만으로도 포위망을 완성할 줄 알았지만 다시 한 번 보급이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에버바흐 전투단의 툴라진격을 위해 우선보급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완성할 2군은 보급난에 시달리며 도망가는 소련군을 가로막지 못했다.
구데리안은 에르마콥을 손쉽게 궤멸시키고 브랸스크를 점령하자 모스크바까지 별다른 방어선이 없다고 착각했고 최대한 빨리 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차중대 1개를 오렐 북쪽 15km까지 정찰보냈다가 카투콥의 T-34를 만났다.
T-34 19대에게 독일 전차중대 정도는 가벼운 상대였고 뒤에 남겨진 부상병에게서 4전차사단이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받아냈다. 카투콥은 전 병력을 리시자Lisiza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지에 배치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지켜보면서 저지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오전 9시, 전날 전투가 있었던 지역은 텅 빈 상태였고 소련군은 모두 후퇴한 것처럼 보였다. 4전차사단 선봉 전차중대가 리시자강의 다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카투콥은 다리의 북쪽 면에 보병 일부, 45mm 대전차포와 BT 경전차 4대를 배치해서 마치 주 방어선인 것처럼 속였다.
맹렬한 포격과 전차의 공격에 방어선은 쉽게 무너졌고 전차 2개 중대가 11시 30분에 오토바이 보병, 8.8cm 2문, 10cm 1문, 10.5cm 4문과 함께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 후에 다리를 내려다 보는 고지를 점령하려고 했다.
카투콥은 이미 2개 전차대대를 숨겨두었고 독일군 전차가 다가오자 길 양쪽의 나무 뒤에 숨어있던 KV-1과 T-34의 76.2mm 포가 불을 뿜었다.
3호전차도 곧바로 5cm 포로 응사했지만 유효사거리 밖이어서 소련전차의 중장갑을 뚫지 못했다. 이전의 소련군은 위치선정도 엉망이었고 무분별한 돌격으로 자멸했지만 이번에는 기습효과를 제대로 누렸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전차를 뒤로 물린 후에 8.8cm 대공포를 호출했다. 8톤 Sd.Kfz. 7 반궤도 트럭이 견인하는 8.8cm 포는 원래 대공포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쉽게 눈에 띄었고 전개해서 발사하는 데까지 10분이 필요했다.
8.8cm 한 문이 T-34를 선제공격하는데 성공했지만 파괴시키지는 못했고 곧바로 다른 전차의 직격탄을 맞았다. 두 번째 포도 3발을 발사한 후에 8톤 트럭과 함께 파괴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이 당시의 3/4호 전차 주포관통능력입니다. 아예 후면관통이라고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8.8cm의 포격을 맞고도 구사일생한 이반 류부슈킨Lyubushkin 하사가 차례로 5대의 독일전차를 격파하자 오토바이 보병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후퇴하는 것을 본 소련군이 다리를 향해 전진했다. 10cm 곡사포가 T-34 한 대를 격파했지만 곧바로 파괴되었다. 이제 25대의 중전차가 10.5cm 4문에게 달려들었다.
뻔한 승부였다. 3대를 잃고 2문을 격파했다. KV-1 한 대가 트랜스미션 고장으로 주저앉자 독일보병이 달려들어 연료캔을 엔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카투콥은 귀중한 전차를 잃고 싶지 않아 후퇴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의 도강을 막아냈고 독일전차의 사거리 밖에서 상대할 수 있었다.
독일군이 다리를 건너 후퇴하자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전차 10대, 포 5문을 잃었고 카투콥은 중전차 3대와 BT 4대를 잃었다. 손상된 T-34 4대는 회수해 수리했다.
10월 6일, 므테스크 부근에서 벌어진 전차전은 겨우 전차대대끼리 맞붙은 소규모 전투였지만 앞으로 있을 동부전선 기갑전의 양상을 예언했다.
독일군은 개전 당시부터 월등한 소련 중전차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어떤 전차부대도 패한 적이 없었다. 6월 27일에 노획한 중전차를 조사한 최고사령부는 8.8cm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므테스크전투에서는 순식간에 유린당했다.
소련군은 처음으로 중전차를 충분히 투입했고 전술면에서도 독일군을 압도했다. 비록 인명손실은 7명에 불과했다고 해도 독일군 1개 전차중대가 박살났다. 구데리안은 전투결과에 충격을 받고 ‘당분간 툴라로 돌격하려던 계획을 미뤄야 했다’고 기록했다.
적군은 벌써 전차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독일군 주력의 3호전차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최고사령부에게 전투결과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독일전차 개선방안에 대해 제안했다. 그렇지만 최고사령부는 태풍작전으로 정신이 없었고 조사팀은 6주 후에나 파견되었다.
3호전차의 개량과정입니다. J형이 T-34와 상대할 주포를 갖추게 됩니다.
구데리안은 적의 저항, 겨울, 보급난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계속 수행해야했다. 3전차사단이 연료부족으로 오렐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4전차사단만으로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카투콥을 우회해 배후로 돌았고, 카투콥은 5km를 후퇴해 둠치노Dumchino 부근에 새 방어선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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