렐류센코는 카투콥에게 전차 대대, 국경근위대 약간과 BM-13 카츄샤 2개 대대를 지원했지만 독일군의 공격을 오랜 동안 막아낼 전력이 아니었다. 특히 보병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독일 24군군단은 2일 동안 연료와 탄약을 보충한 후에 다시 공격에 나섰고 이번에는 카투콥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 에버바흐 전투단이 공격을 맡기로 했다. 먼저 2개 연대를 보내 카투콥의 양 측면을 공격한 후에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기로 했다.
10월 9일, 6시 30분에 공격이 시작되었고 보병이 부족했던 카투콥의 측면은 쉽게 노출되었지만 이번에도 매복해 있던 T-34에 막혔다. 에버바흐는 수투카를 호출했는데 오히려 소련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러시아를 구한 3대 무기라고 하죠. 스탈린의 오르간이라는 별명이 있는 카츄샤입니다.
일반 야포에 비해 정확도나 파괴력이 크게 떨어지지만 기동력이 대단하고 대량으로 투입되면 위력이 대단했습니다.
카투콥은 독일군 전차 41대와 포 13문을 파괴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고 최소한 5대의 전차와 몇 문의 포가 파괴되었다. 카투콥은 약간의 피해만으로 구데리안의 정예사단을 하루 동안 붙잡아 두다가 어둠을 틈타 므텐스크 남쪽 3km 지점으로 후퇴했다.
에버바흐 전투단은 이제 30대의 전차 밖에 안 남은 데다가 격전으로 탄약 절반을 소비했다. 설상가상으로 폭설이 내리면서 도로는 진흙탕이 되어 수송차가 제대로 오갈 수 없게 변했다. 폭설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주었다.
므텐스크 남동쪽 주샤Zusha강의 부교가 파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폭설로 가시거리는 200m도 안되었다. 에버바흐는 전차와 보병 각각 1개 중대만으로 부교를 확보했다. 8.8cm 대공포가 건너가던 중에 부교가 부숴졌지만 그대로 므텐스크로 돌진해 BM-13 다연장 트럭 7대와 대공포 한 문을 파괴했다. 너무 적은 병력이라 므텐스크 전체를 점령하지는 못했어도 북쪽을 장악하며 카투콥의 배후를 끊었다.
카투콥은 8대의 전차를 보내 반격했지만 상황은 역전되었다. 독일군 전차는 집과 정원에 숨어 적이 접근하기를 기다린 후에 3대를 파괴했다. 나머지는 그냥 독일군을 지나 도시 밖으로 달아났다. 에버바흐는 공병을 재촉해 부교를 고치게 했다.
렐류센코는 KV-1 6대를 보내 므텐스크를 탈환하려고 했지만 그 때에는 이미 후속부대가 대전차 지뢰를 매설하고 10cm 곡사포를 배치한 상태였다. 역시 3대가 파괴되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이제 누가 더 빠르게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느냐의 시간싸움이었다.
에버바흐는 8.8cm와 보병 연대를 도시 진입시키는데 성공했고 렐류센코는 그 동안 병력을 모았다가 오후 3시에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8.8cm가 1km 거리에서 T-34 3대를 격파하자 마지막 공격은 무산되었다. 카투콥은 공격을 받으며 후퇴해 렐류센코 방어선에 도착했지만 많은 차량을 버릴 수 밖에 없었고 4전차여단은 KV-1 3대, T-34 7대, 경전차 20대만 남았다.
그래도 카투콥의 4전차여단은 외부지원없이 거의 일주일 동안 구데리안의 툴라 접근을 막아냈다. 그는 25대의 전차와 300명을 잃고 결국에는 므텐스크를 내줬지만 구데리안은 보급과 충원 때문에 2주 동안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직접 카투콥과 여단을 모스크바 방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카투콥은 독일군 차량이 진흙에 빠져 꼼짝 못하는 동안 360km 북쪽으로 이동했고 더구나 단 한대의 전차도 낙오되지 않았다.
구데리안이 알았다면 다시 한 번 최고사령부를 종용했겠지만 양쪽 모두에게 다행히도 나중에야 밝혀졌다.
호트의 서부전선군 궤멸, 10월 2~12일
10월 2일 오전 5시 30분, 호트의 전자집단 3과 회프너의 전차집단 4가 소련 서부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을 공격하면서부터 태풍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폰 보크는 두 집단으로 소련 방어선에 좁은 구멍을 내고 후방으로 깊게 진출한 후에 뱌즈마Vyazma 뒤에서 서로 연결해서 서부와 예비전선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전의 공격과 달리 화려한 우회기동이 없는 정면공격이었고 소련군도 충분히 예측하고 있는 공격이었다. 적군Red Army는 두 전선군이 KV 35대와 T-34 90대를 포함한 639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병지원 역할이어서 전선에 너무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 후방에 예비전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돌파당하면 대책이 없었다.
뱌즈(지)마는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의 중요한 길목입니다.
호트는 41과 56군군단Armeekorps으로 서부전선군의 보병으로만 구성된 19와 30군 사이를 노렸다. Km당 대전차포가 3문에 불과했고 50km 방어선에 일체의 기갑전력이 없었기 때문에 1, 6, 7 전차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많은 역사학자가 1941년 순식간에 동원한 보병사단에 대해 감탄했지만 실제 전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전쟁전 보병사단은 M1937 45mm 대전차포 18문을 갖춘 대전차 대대를 비롯해 총 44문의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었지만 7~8월에 급조된 보병사단은 아예 대전차대대도 없었고 18문의 45mm 포가 전부였다. 사단포도 60문에서 24문으로 줄었고 그나마도 전부 76.2mm F-22 포였다.
보크(왼쪽)와 협의 중인 호트입니다. 동부전선 전차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호트입니다. 그는 동부전선의 결정적인 전투마다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군사재판 15년형을 받았지만 7년 복역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독일군 37mm 대전차포와 비슷하죠? 독일과 분위기 좋았을 때에 얻어낸 37mm 포대에 45mm 포신을 얹은 것입니다. 1,000미터 거리에서 32mm 관통력이었으니까 독일군 전차 상대로는 나름 훌륭했고 1943년 생산중단까지 37,000문이 생산되었지만 태풍작전 당시에는 보급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포병은 훈련없이 전장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시야 밖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다. 여전히 무전기가 보급되지 않아서 야전전화에 의존했는데 제대로 연결되지도 않았고 기동전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2~3주의 준비만 거치고 투입된 급조사단은 숫자에 불과했고 티모센코의 8월 반격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면서 19와 30군은 30~35%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화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패잔병으로 채워진 서부전선군이 독일군의 대규모 기갑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폰 만슈타인의 후임으로 56군군단을 맡은 페르디난트 샬Ferdinand Schaal은 6과 7전차사단으로 선봉에 섰다. 300대의 전차가 있었지만 대부분이 35와 38(t)였고 StuG 3과 4.7cm의 Panzerjager I 대전차자주포가 소수였다. 35전차는 부품이 없어서 이미 한계였지만 호트는 태풍작전이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했고 어차피 연료와 보급상황이 그 이후를 생각할 수 없었다.
샬은 10월 1~2일 밤에 방어선을 관통한 후에 10km 너비로 진격했다. 네벨베르퍼 2개 대대의 포격 후에 6전차사단의 라우스Raus 전투단이 19군의 91보병사단을 공격했다. 91보병사단은 7월에 극동에서 옮겨온 시베리아 사단이었다.
91사단은 안전턱 정도에 불과했고 2일 밤까지 호트의 2개 군단은 소련군 방어선에 큰 구멍을 내고 동쪽과 서쪽으로 넓게 전진했다. 소련군 19와 30군은 호트가 바라는 대로 제자리를 고수하며 코넵Konev의 기갑지원군을 기다렸다.
라우스 전투단은 드니에페르Dnieper강을 건널 수 있는 2개의 작은 나무다리를 확보해서 뱌즈마로 향하는 교두보를 열었다.
전차강국 독일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부대찌개의 대명사가 바로 독일군이었습니다. 전쟁 초반부터 용도폐기된 전차와 노획무기를 조합해서 온갖 대전차 무기를 만들었는데 1호 대전차자주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미 전차라고 부를 수 없었던 1호전차 차대에 체코제 47mm포를 얹어 급하게 전장에 투입했지만 사진에서와 같이 간접포격에 너무 취약했고 차체가 높고 장갑이 너무 얇아서 소련군의 대전차무기에 좋은 목표물이었습니다.
3일 오전, 7전차사단 선봉대의 2호전차 소대가 대전차자주포와 보병 일부와 함께 교두보를 너머 동쪽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강 너머에 대전차 장애물Dragon Teeth와 T-34 벙커를 만들어 두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코넵은 19군의 포병연대 3개의 152mm 곡사포 100문으로 독일군 선봉대를 두들기라고 명령했지만 쉴 새없이 움직이는 전차부대를 포격만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143전차여단(T-34 9대, T-26 44대)에게도 반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엉뚱하게 53군군단의 보병을 공격하다가 물러났다.
10월 3일, 코넵은 기병부대와 서부전선군의 다른 전차부대로 호트의 선봉부대를 협공하려고 했다. 부관 이반 볼딘에게 101기계화사단, 126과 128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전술집단을 맡기고 라우스의 교두보 공격을 지시했다. 볼딘은 겨우 몇 시간 만에 전술집단을 모아야 했는데 그나마도 중전차는 KV 11대와 T-34 10대가 고작이었다.
라우스는 접근하는 적 전차부대를 발견하자 35전차 1개 대대를 미리 보내 시간을 번 후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배치했다. 볼딘의 전차는 숲을 통과하면서 나뉘어졌고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넓게 퍼져서 차례로 달려들다가 격파당했다. 100대가 넘는 전차를 투입했는데도 6전차사단의 발목을 겨우 몇 시간만 붙잡았을 뿐이다.
볼딘이 후퇴하자 샬의 전차사단은 후방의 소련 포대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며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코넵의 반격수단이 모두 사라졌다.
호트는 소련군보다 보급이 더 큰 적이었다. 공군의 공수로 7전차사단을 움직였지만 공군도 Ju-52 수송기를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호트를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귀중한 보급부대를 동시에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10월 6일, 태풍작전 5일차에 7전차사단 일부가 뱌즈마 북부를 통과한 후에 남쪽으로 선회해서 민스크Minsk 고속도로를 차단했다. 1전차사단은 벨리Belyy를 점령해 9군이 르젭Rzhev으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을 확보했다.
호트의 전차집단은 1,000명의 피해만으로 뱌즈마 북쪽 포위망을 완성하는 동시에 코넵의 기갑전력 대부분을 격파했다.
10월 5일, 전차집단은 전차군Panzerarmee로 개칭되었다. 이전에는 정규 야전군에 소속되었는데 이제는 독립부대로 다른 군과 동급이 되었다. 전차 지휘관도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전차군 3을 맡았던 호트는 남부집단군의 17군 지휘관이 되었고 그 자리는 한스 라인하르트Hans Reinhardt가 맡았다. 발터 모델Walter Model은 다시 라인하르트의 41군군단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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