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무엇으로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또 다시 장편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과 전투로만 제한한다면 속도가 나겠지만 주위배경까지 설명한다면 몇개월의 연재가 될 분량입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부) - 대륙봉쇄령
1812년 러시아 원정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군사충돌이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그 이전에 프랑스와 영국의 경제충돌이 있었고 1806년 대륙봉쇄령Continental System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영국해군에게 패배한 후에 영국을 궤멸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기획했다.
영국은 자급자족 국가가 아니었고 생존하기 위해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대륙시장으로 수출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대륙시장을 봉쇄해서 영국경제를 붕괴시키고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동시에 대륙국가가 프랑스의 수출품에 의존하게 만들어서 유럽을 군사와 경제 양면에서 지배하려고 했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동맹국과 함께 영국을 봉쇄하려고 했다. 그는 영국식민지정책과 해양정책을 비난하며 대륙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대륙봉쇄령은 1806년 5월 16일에 영국이 브레스트Brest에서 엘베Elbe에 이르는 대륙해안을 봉쇄하면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리슬란트Friesland 전체(지도 참조)를 봉쇄했다. 그는 1806년 말에 프로이센Prussia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 함부르크Hamburg, 브레멘Bremen, 루벡Lubeck 등의 주요 상업도시를 봉쇄했다. 영국물품이 독일의 대서양해안에 상륙하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 영국물품이 발견되면 압수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수출품이 유럽대륙에 들어가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에 여파가 상당했다.
막대한 영국물품을 압수해 프랑스 군자금을 채웠다. 나폴레옹은 5월 16일에 있었던 영국의 봉쇄령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하며 1806년 11월 12일에 베를린칙령을 선포했다. 영국제도 전체를 봉쇄하고 모든 영국물품 교역을 금지몰수하고 동맹국의 영국인을 체포하고 영국과 식민지를 거친 모든 선박의 접항을 금지시켰다.
베를린칙령은 포르투갈을 제외한 독일북부에서 이탈리아에 이르는 모든 프랑스동맹국을 대상으로 적용되었다. 프랑스는 해군력부족으로 영국을 봉쇄할 수 없었고 대신에 사략선으로 중립국가의 교역을 몰수했기 때문에 중립국이 받는 부담은 막대했다. 그리고 프랑스육군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영국은 최대한 봉쇄망에 구멍을 내며 대응했다. 1807년 1월 7일, 영국의회는 중립국과 프랑스동맹간의 교역을 금지시키면서 선박과 수하물몰수를 결정했다. 프랑스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반면에 영국해군이 지배하는 바다를 통하는 미국과 덴마크 등의 중립국이 영향을 받았다.
해군력이 부족한 국가가 민간인에게 공식적인 해상약탈권을 주었고 사략선Privateer Ship이 상선을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드는 영국전함이 프랑스 사략선을 찾아나선 이야기입니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는 불완전했다. 1805년~1807년에 벌어진 제4차 대프랑스동맹전쟁The War of the Fourth Coalition은 틸지트Tilsit조약으로 끝났다. 조약에 따라 베를린칙령이 강화되었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항구가 닫혔다.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일부 항구만이 영국과 교역을 계속했다.
영국은 발트해 입구의 전략거점인 덴마크에게 비밀동맹을 제안했다. 평화가 올 때까지 덴마크함대를 영국에게 넘긴다는 조건이 붙었고 덴마크는 당연히 모욕적인 조건을 거절했다. 영국은 1807년 9월 5일에 덴마크를 침공해 함대를 노획했다.
덴마크는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고 대륙봉쇄령에 동참했다.
예나-아우슈테트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행진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시민이 이렇게 환영할 리가 없었겠죠.
4차동맹전쟁은 영국-러시아-프로이센-작센-스웨덴-시실리 대프랑스동맹이 프랑스-스페인-라인연합-폴란드 등의 프랑스동맹과 벌인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영토 반을 잃었고 작센과 러시아는 진영을 바꾸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때만 해도 프랑스동맹으로 참전했던 스페인군은 나중에 대대적인 저항에 돌입합니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침공을 계획하는 동안, 러시아의 알렉산드르Alexnader짜르Czar(그림 참조)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는 영국과 직접 교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과 교역을 지속하는 스웨덴을 침공했다. 그리고 오랜 목표였던 핀란드도 점령했다.
핀란드가 항복하자 이제 유럽에서는 포르투갈만이 남았고 영국은 대륙봉쇄를 뚫을 다른 방법을 찾아야했다.
영국은 다시 의회결의를 통해 영국과의 통상을 끊은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영국함대가 다른 교역도 막겠다고 선언했다. 대륙봉쇄에 동참한 국가나 식민지의 모든 선박과 교역품을 몰수하겠다고 밝혀 중립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은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립국가가 영국항구와 적대국 식민지항구 사이를 오가는 교역은 막지 않았다. 대륙항으로 향하는 경우에는 중립국 선박이 일단 영국항에 들려서 수입관세를 지불하고 적대국항구로 향하게 했다.
영국산제품의 수요가 많고 재수출절차가 필요 없기 때문에 영국물품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대륙으로 향하는 모든 선박이 일단 영국항구를 거치게 하고 싶었다.
나폴레옹은 1807년 12월 17일에 밀란Milan칙령을 발표했다. 영국을 거치거나 영국함대의 검색을 받은 모든 선박은 국적을 상실하고 프랑스동맹 사략선의 대상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밀란칙령으로 이제 중립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극심한 경제타격을 입게 되었다. 미국은 1807년에 전면적인 대외교역을 금지하는 통상금지법Embargo Act을 발표했다가 역풍을 맞고 1809년 3월에 철폐했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와 그 식민지와만 교역을 금지하는 통상금지법으로 대체했다. 만약 두 국가 중 하나가 미국과의 교역을 자유롭게 재개한다면 미국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제 나폴레옹은 영국의 교역을 철저하게 틀어막고 대륙봉쇄에서 빠진 국가들을 압박한다는 생각으로 1808년에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두 나라 사이에서 난처해진 제퍼슨 대통령은 미국자체를 스스로 봉쇄하는 통상금지법을 실행했다가 오히려 미국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1808년은 대륙봉쇄령이 가장 빛을 발한 시기였다. 포르투갈은 바로 항복했고 오스트리아도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봉쇄에 동참했다. 투스카니Tuscany왕국, 코르시카Corsica와 엘바Elba를 합병했다. 프랑스는 아드리안해의 코르푸Corfu섬도 점령해 이탈리아 전역을 봉쇄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에게 투르크에게서 왈라키아Wallachia와 몰도비아Moldovia(현재의 루마니아)를 빼앗으라고 부추겼지만 러시아와 투르크의 협상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는 프랑스가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합병을 인정하고 프로이센에서 병력을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거절했고 처음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조에 금이 갔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점령은 러시아와 상관없는 별개의 조약결과이며 대신에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합병은 인정할 생각이 있다고 대답했다.
프랑스는 바르샤바Warwaw대공국을 만들어 중앙유럽를 장악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르는 이 제안에 응답하지 않고 다뉴브Danube강에 병력을 그대로 두었다. 나폴레옹은 덕분에 투르크에 다양한 제안을 하면서 러시아와 투르크 모두를 동맹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와 생각이 달랐지만 스페인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러시아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 스페인상황이 진정되면 투르크제국에 대해 다시 협의할 생각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대영국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요구하며 알렉산드르와 직접 만나 압박하려고 했다. 러시아 상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주재 프랑스대사에게 프랑스와 러시아의 대투르크 공조를 제안하라고 명령해서 차르를 달래고 시간을 벌려고 했다. 투르크를 분할한 후에 영국이 최근에 점령한 인도를 침공하자는 제안이었다.
알렉산드르는 제안에 관심을 보였지만 회담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바욘Bayonne으로 급히 달려가 스페인왕가와 협상해야 했다. 협상은 완전히 실패했고 스페인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러시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계속 기다려야 했다.
스페인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었고 나폴레옹이 중앙유럽에 배치해야 할 귀중한 전력을 6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
영국정부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페인지역정부에 지원을 약속하고 소규모 원정군을 파병했다. 스페인민병과 영국원정연합군은 유노Junot군을 격파하고 포르투갈에서 몰아냈다. 프랑스군은 바일렌Bailen에서도 참패를 당했다. 당시 유럽의 조롱거리였던 스페인군에게 프랑스 사단 1개 전체가 항복했다. 심지어 덴마크해안에 배치했던 스페인사단이 영국해군을 보고 본국으로 도망친 후에 나폴레옹에 반기를 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선왕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했던 스페인 카를로스 4세입니다. 아내와 측근에게 국정을 방치하다가 민중봉기로 왕위를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넘겨주고 나폴레옹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나폴레옹은 두 왕을 바욘으로 불러 모두 폐위시키고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국왕으로 임명했습니다.
바일렌전투에서 프랑스군 21,000명은 스페인군 27,000명에게 참패를 당하고 약 18,000명이 항복했습니다.
프랑스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프랑스가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반증이었고 오스트리아는 재무장을 서두르고 프로이센의 동참을 권유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다시 중앙유럽에 나서야 했다.
프로이센에 애국주의가 힘을 얻자 스페인에서 병력을 일부 빼냈고 1808년 9월에는 프로이센에 새 조약을 강요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 패전에 대해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부담하고 오데르Oder강의 요새를 비우고 전체 병력을 42,000명 아래로 제한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달래기 위해 프로이센에서 병력을 철수시켰고 두 사람의 회담이 급하게 진척되어 1808년 9월 2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진행되었다. 나폴레옹은 더 이상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àdt 전투 직후의 우월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만큼 스페인에서 입은 상처가 컸다.
알렉산드르는 이미 프랑스와의 관계단절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와 협력해서 프랑스와 균형을 맞출 생각이었다. 나폴레옹이 만약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다면 러시아가 다음 차례였다.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 복수를 꿈꾸는 오스트리아에게 대사를 보내 스페인이 프랑스전력을 갉아 먹도록 조용히 지켜보자고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황제의 회동은 계속 삐걱거렸다. 알렉산드르는 러시아의 참전과 다뉴브강에서의 철군 모두를 거부했다. 만약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인다면 러시아군이 지원하겠다는 정도만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합병을 인정했고 러시아도 스페인합병을 인정했다.
중앙유럽의 부담을 던 나폴레옹은 정예 200,000명을 스페인에 투입해 모든 스페인군을 격파했다. 영국원정군의 무어Moore는 코루나Corunna로 피신했다가 간신히 귀국했다.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가서 반황제파의 음모를 진압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주전파가 득세했고 프란츠Franci 2세 황제는 아우스테를리츠 참패 후에 치욕적으로 맺은 프레스부르크Pressburg조약을 무효로 돌렸다. 독일내에서는 애국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애국주의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였고 프랑스군이 독일에 주둔하면서 애국주의가 퍼져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되었다.
대중에게 프레스부르크조약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주요 해외영토를 프랑스에 내주고, 독일영주국의 왕위를 인정하고 4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제국이 해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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