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에 참가했던 장군의 회고록을 읽다가 중단했는데, 기회가 있다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러시아원정에 대해 반대한 사람이 많았더군요. 나폴레옹의 과욕때문에 러시아와의 연합도 실패하고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워털루전투 (2부)
1815년 6월 18일 오전 11시 35분경(정확한 시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려있다), 나폴레옹의 대포가 연합군에서 포문을 열면서 워털루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웰링턴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브뤼셀Brussel을 점령하면 영국이 평화협상에 나설 것으로 믿었다.
반대편의 웰링턴공작은 프랑스군의 벨기에침공을 막은 후에 프랑스 황제를 완전히 폐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두 지휘관은 전투경험이 누구보다 많다는 점을 빼고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공세를 선호했다.
그의 천재성은 이론의여지가 없었지만 백일천하Hundred Days 당시에는 쇠퇴기였다. 피로와 과체중이 겹쳐서 이전처럼 날카롭지도 정력적이지도 않았다. 웰링턴은 신중한 성격대로 병력을 아끼는 수비전술을 선호했다. 영국군 특유의 인내심을 잘 살려 반도전쟁Peninsular War(그림 참조)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무척 복잡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주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만.
웰링턴은 이미 일년 전에 몽셍장Mont-Saint-Jean(지도 참조)을 정찰해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해 두었다. 작은 농담 주변의 완만한 경사와 언덕은 프랑스군의 대포를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피셰몽Fichermont, 파펠로트Papelotte, 라 에이 셍트La Haye Sainte와 우구몽Hougoumont 농장 네 곳을 요새로 만들어 프랑스군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6월 17일, 쿠크Cooke장군에게 1사단의 근위대대 4개로 우구몽을 방어하라고 명령했고 맥도넬Macdonnell대령이 수비대 지휘관을 맡았다. 영국군은 밤새 농장을 보강했고 농원과 과수원 뒤의 벽에 총구를 파고 벽 위에 올라설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했다. 2여단의 몇 개 중대가 농장과 농원에 자리잡았고 1여단은 과수원과 숲에 자리잡았다.
워털루전투의 전황을 미리 잘 봐두시길.
아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연합군 우익의 우구몽농장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차단하는 전략요충지였습니다.
프랑스군이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했기 때문에, 프랑스군 좌익(제롬)이 불필요한 교전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연합군의 대열을 무너트릴 수도 있었습니다.
1815년 6월 18일 이른 오전, 웰링턴, 오랴네공Prince of Orange, 힐Hill, 욱스브릿지Ubridge, 프로이센 장교와 함께 연합군전열을 사열했다. 오랴네공은 농장을 자세히 검사한 후에 300명을 추가로 증원했다. 웰링턴도 경보병중대 등을 더 보내 우구몽의 서쪽을 보강했다. 숲에는 나사우Nassau와 하노버Hanover병력을 추가로 배치했다.
오전 10시, 제2 나사우연대의 6개 중대 800명이 추가로 도착해 400명은 과수원에 나머지는 농장안으로 들어갔다.
우구몽농장은 귀족이 거주했던 곳이어서 평범한 농가가 아니라 성채와도 같았습니다. 연합군이 하루 전에 높은 벽으로 둘러친 농장을 요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군 1개 사단으로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우구몽농장이 보이지 않았다. 나폴레옹과 참모가 사용한 지도는 1770-1778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우구몽농장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두터운 벽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고 숲도 실제보다 훨씬 얕게 묘사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공병장군 아소Haxo에게 연합군의 전열을 정찰하라고 명령했다. 아소는 짧은 정찰을 마쳤고 우구몽은 물론이고 연합군이 선점한 경사면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자리잡은 곳에서는 요새화된 농장을 볼 수 없었고 농장의 두터운 벽은 숲과 관목에 가려져 가까이 접근 해서야 나타났다.
오전 11시, 프랑스 2군단의 레유Reille장군은 우구몽숲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우구몽농장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분명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웰링턴의 병력을 우구몽방면으로 유인한 후에 실제 공격은 중앙에 집중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웰링턴입장에서는 우구몽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였다. 만약 우구몽을 내주게 되면 우익이 프랑스군의 공격에 노출되고 전체 전선으로 위기가 확대될 수 있었다. 어떤 희생이 발생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했다.
레유는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Jerome공과 4개 연대를 투입했다. 우구몽방면으로 이동하는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2군단을 지원하는 사단포대가 포문을 열었다. 피어Pire기병사단의 견인포도 투입되었다.
그렇지만 야포는 농장을 직접 두들길 수 없었다. 영국군 포대 3개가 대응포격했다. 연합군의 우익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경보병 1연대가 숲으로 착검돌격해 들어갔고 보두앵Bauduin장군이 전사했다. 나사우 1대대와 왕립독일군단king's german legion 중대가 프랑스군의 맹렬한 돌격에 밀려나자 영국군이 합류했다.
프랑스군은 농장까지 남은 300m를 가기 위해 연대의 세 번째 전열까지 투입해야 했다. 병력이 크게 모자란 연합군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프랑스군을 저격했다. 프랑스군은 한시간 정도의 전투 끝에 나사우뿐만 아니라 증원된 영국군도 숲에서 몰아냈다.
그렇지만 제롬의 부대는 숲에서 벗어나 농장까지 불과 30m를 전진하는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레유는 제롬에게 농장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구몽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명령이 불명확했던지 아니면 제롬의 과욕때문이었는지 농장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니면 병사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적을 추격했을 수도 있다.
우구몽은 절대로 쉬운 목표물이 아니었다. 연합군 수비대는 미리 뚫어둔 총구로 천천히 접근하는 프랑스군을 노렸다. 워낙 근거리였기 때문에 빗나갈 수도 없었다. 프랑스군도 대응사격을 퍼부었지만 모두 벽에 막혔다. 영국군은 우구몽을 지원하기 위해 뒷 경사로에 포대를 더 투입했다.
왕립독일군단
1803년, 아르틀렌부르크Artlenbur조약으로 하노버Hanover선제후령이 사라지고 프랑스가 이 지역을 합병했다. 하노버장교와 병사들은 영국으로 건너가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영국왕 조지George3세(그림 참조)도 하노버선제후 출신이었다. 1803년 말에 왕립독일군단이 창설되었다.
대부분 독일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병, 경보병, 전열보병여단, 포병과 공병을 갖췄다. 이듬해부터 포메라니아Pomerania, 덴마크, 스페인,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전선에 참전했다.
워털루전투에서는 약 6,000명이 투입되었다. 1여단은 우구몽부근에, 2경보병대대는 라 에이 셍트에 배치되었다. 다른 부대는 여러 곳에 배치되었다.
오후 3시, 웰링턴은 1여단을 투입해 라 에이 셍트를 보강했고 1여단은 이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은 포화와 총탄을 맞아가며 30m를 전진해 남쪽 문에 도착했다. 개머리판으로 문을 부수려했지만 측면에서 또 다시 총탄이 쏟아졌다. 일부는 벽위로 기어오르다가 나사우병사의 총검세례를 받고 떨어졌다.
당시 전투를 제대로 그린 전쟁영화를 보면 건장한 체격의 병사가 도끼를 들고 있는 것이 기억날 겁니다. 전투공병은 적의 진지를 두들겨 부수는 무척 위험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돌입할 지점을 찾는 동안 시체가 쌓여갔다. 몇 명의 병사가 남쪽문을 열고 정원에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나사우의 빌더Wilder중위가 문을 닫다가 프랑스공병의 도끼에 맞아 손이 잘렸지만 문이 닫혔고 안에 들어간 프랑스병사는 모두 죽었다.
프랑스군은 피해가 너무 크자 숲으로 되돌아갔다.
우구몽농장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다는 프랑스측의 주장이 있다. 피에르Pierre대위는 첫 번째 공격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2군단은 영국군이 지키던 우구몽농장으로 향했다.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언덕에 있었고 바로 아래에는 숲이 있었다. 우리는 밀집대형으로 전진했다. 2군단을 지휘하는 레유백작은 농장을 점령하고 그 자리를 그대로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우리는 총검을 앞세우고 경사로를 올라갔다. 전투는 치열했고 양측은 큰 피해를 입었다. 아군이 농장을 점령하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실제는 많이 달랐다. 제롬의 참모장인 기유미노Guilleminot는 차라리 숲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공격을 말렸다. 레유도 나중에 기록했듯이 제롬에게 그 자리를 지키라고 명령했다.
‘1여단이 숲을 지키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여러 번 전령을 보냈는데도 다른 여단이 더 투입되었고 사단은 하루 종일 농장에 매달렸다.’
레유의 기록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워털루전투 전날 나폴레옹에게 자신은 반도전쟁에서 교훈을 얻었다며 ‘웰링턴은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며 영국보병은 화력과 인내심이 좋기 때문에 정면공격에 무적입니다. 총검을 맞대게 되면 병력 중 절반을 잃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노레 샤를 레유Honoré Charles Reille는 나폴레옹의 패전 후에도 살아남아 원수와 상원을 역임했습니다.
제롬공은 상관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농장을 공격했다. 그는 2여단을 투입해 보두앵군을 지원했다. 서쪽에서 농장으로 접근하던 2여단은 영국군의 포화를 뒤집어썼다.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어가며 오후 12~12시 30분 사이에 우구몽의 북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우구몽 북쪽에는 영국군 경보병 150명과 콜드스트림Coldstream경보병 일부가 있었다.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고 수비대는 물러나지 않았다. 프랑스공병 일부가 도끼로 북쪽문 걸쇠를 쪼개기 시작했고 30명 정도가 정원에 뛰어 들었다.
적의 고함소리를 들은 영국군은 곧바로 달려들어 문을 다시 닫은 후에 난입한 프랑스군을 모두 죽였다.
웰링턴은 우구몽이 격전의 초점이 된 것을 확인하고 콜드스트림근위대 4개 중대를 급히 투입하고 불Bull소령의 포대에게 숲을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증원군은 오후 1시에 도착해 벽에서 격전을 벌이던 나사우병력을 지원했다.
호레이스 세이머Horace Seymour경은 당시의 전투를 이렇게 회고했다.
‘18일 오후, 3근위대의 장교 몇 명이 화약과 총알을 급히 보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 직후에 보급마차를 타고 있던 사병을 만났다. 그에게 방향을 가리켰을 뿐인데 그는 용감하게 말을 몰더니 곧바로 언덕을 내려가 농장으로 향했다. 그에게 총탄이 집중되었고 말이 쓰러졌는데도 탄약을 날라 근위대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영국군의 반격을 받은 프랑스군의 피해는 상당했다. 장 루이 보Jean Louis Baux소령이 보낸 전령편지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이제 장교가 아무도 없습니다. 60명이상이 죽어서 신임장교를 임명해야 했습니다. 사관을 대위로 임명하고 농장으로 그냥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상사를 소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명령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군은 여러 번 밀고 밀리며 덤불과 과수원을 점차 내주기 시작했다.
오후 2시 30분, 농장에 알 수 없는 불이 번졌다. 웰링턴은 ‘불이 건초더미에서 시작되더니 건물지불까지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불이 채 번지지 않은 곳에서는 그대로 자리를 고수하라. 무너지는 건물 때문에 병사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건물이 무너지면 정원 안의 벽을 먼저 차지하라. 적이 건물잔해를 통과하지 못하라 막으라’는 명령을 보냈다.
연기가 수비대를 감쌌기 때문에 오히려 프랑스군에게 방해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다시 과수원을 향해 맹목적인 공격을 했고 양측 병력은 이제 더 이상 전투를 계속 할 기운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이제 지휘할 장교가 없었고 영국군도 간절히 지원병력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 웰링턴은 프랑스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왕립독일군단 뒤 플라Du Plat여단을 보냈지만 프랑스군의 포화에 노출되어 무척 위험한 결정이었다. 뒤 플라여단은 프랑스군을 덤불에서 밀어냈다가 곧바로 다시 밀려났고 두 플라대령이 전사했다.
오후 4시, 프랑스군이 남동쪽에서 다시 과수원을 공격했다가 3근위대의 반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오후 6시 30분에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과수원을 점령했지만 곧바로 다시 밀려났다. 프랑스군은 비슷한 시간에 라 에이 셍트를 점령했다.
오후 7시, 브룬스비크Brunswick 3개 대대와 왕립독일군단 1개 대대 등이 서쪽과 동쪽에서 협공해 프랑스군을 과수원과 숲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우구몽 안에 머물러 있던 병력도 추격에 나섰다. 연합군은 반격에 나서 황제근위대의 공격을 무산시켰고 우구몽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역사가들은 우구몽전투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다. 나폴레옹은 우구몽농장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숲점령을 명령했다. 반면에 제롬은 현장에서 요새화된 농장을 보고도 맹목적인 공격으로 귀한 전력을 낭비했다.
당시 기록을 봐도 제롬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측근에게 ‘제롬은 파티와 여자만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러시아원정 당시에 베스트팔리아Westphalia왕이었던 제롬은 ‘우익지휘관인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제께서 아셔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롬은 나폴레옹에게 프랑스 기병대를 맡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미쳤군. 왜 그래야 하지? 네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는 100명 정도만 지휘할 수준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를’이라고 대답했다.
제롬의 군사재능이 평범했는데도 나폴레옹은 1815년에 중책을 맡겼다. 고급장교를 믿지 못했고 반란기미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안사람을 불러 들여야 했다. 제롬에게 레유나 기유미노를 붙여주면 괜찮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제롬의 맹목적인 공격을 막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우구몽방면은 웰링턴의 병력을 유인하는 기만공격 정도로만 여기고 프랑스군 좌익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우구몽은 나폴레옹의 첫 번째 보고내용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예전의 그였다면 제롬에게 절대로 그런 중요한 위치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우구몽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제롬을 불러 들였다.
1815년 7월 15일, 제롬은 이런 편지를 썼다.
“점심에 부대가 정렬했고 공격명령을 받았다. 나는 좌익 끝에서 숲을 점령한 영국군을 마주보았다… 오후 12시 15분, 공격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숲으로 진격해 격전 끝에 숲을 점령했다. 적을 많이 죽였지만 아군도 비슷하게 죽었다.
오후 2시, 숲 전체를 장악했는데 전투가 전체 전선으로 확전되었다. 숲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적은 병력을 더 투입해서 재점령했다. 나는 사단전체를 투입했고 격전을 벌여 오후 3시에 탈환했다. 그 날 전투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고수했다. 아군은 우수한 장교를 포함해 2,000명이 죽었고 적은 6,000명이 죽었다.
1815년 6월 16일 리그니Ligny와 캬트흐 브하Quatre-Bras 전투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기 때문에 2개 대대만 투입할 수 있었다. 황제가 나를 호출하셨다. 그 어느 때보다 반갑게 맞이하시면서 ‘아주 훌륭하게 싸웠다. 더 이상 병력이 없으니 내 옆에 머물다가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편지는 워털루전투 후에 작성되었는데 과장과 오류 투성이였다. 우구몽농장을 공격하느라 치룬 대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레유의 명령을 무시한 사실을 은폐했다. 나중에 우구몽이 세상에 알려지자 황제가 이렇게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그루시Grouchy가 제 때에 도착하지 않거나 네가 우구몽을 점령하지 못하면 전투는 참패할 것이다. 그러니 우구몽을 반드시 점령하라.’
제롬은 사실을 왜곡하면서 자신의 오판과 고집을 정당화했다.
영국 역사가는 웰링턴의 말을 인용해 우구몽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설명해왔다. 워털루전투에서 가장 용맹했던 영국병사에게 500파운드 상금을 내려 달라고 하자, 웰링턴은 ‘우구몽농장의 문을 다시 닫는 순간에 워털루전투의 승패가 갈렸다. 제임스 맥도넬경이 안전을 신경쓰지 않고 찰나의 순간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웰링턴의 말은 과장되었다.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우구몽농장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웰링턴이 우무몽농장 부근을 지키기 위해 정예병 일부를 투입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기만공격은 성공한 셈이다.
많은 영국 역사가는 프랑스군의 피해를 높게 잡고 있다. 앤드류 필드Andrew Field는 프랑스군 약 7,500명이 우구몽농장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했고 농장 부근에서 시신 3,000구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제롬은 앞의 편지에서 프랑스가 2,000명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프랑스군의 피해는 줄이고 연합군의 피해는 과장했다. 연합군 기록을 보면 약 3,500명이 우무몽수비에 투입되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이 불필요한 목표물에 귀중한 전력을 낭비한 것은 사실이다. 명령을 무시했고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우구몽농장은 1815년 당시의 프랑스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러시아와 스페인전선에서 능력있는 지휘관을 많이 잃었고 루이 13세 편을 든 장교가 많았기 때문에 전장을 제대로 연결할 고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는 더 이상 마렝고Marengo전투 당시의 정예병사들도 남아 있지 않았다.
루이 18세는 나폴레옹과 대척점에 있는 왕족으로 나폴레옹이 실각했을 때에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워털루전투 후에 나폴레옹 2세에게서 정권을 넘겨받았습니다.
프랑스 최초의 입헌군주제를 실현하고 나름 합리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우구몽농장
우구몽이라는 단어의 뜻은 여전히 불분명하지만 배경은 잘 알려져 있다. 1637년, 한 귀족가문이 우구몽농장을 세웠고 워털루전투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장교 출신의 86세 Louville가 소유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임대했지만 버려진 상태였다.
워털루전투에서 크게 파괴되어 일대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숲이었던 지역에는 현재 3그루의 나무가 남아있는데 잘 살펴보면 당시의 총탄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부 수리되어 귀족가문이 소유하고 있다가 2006년에 왈룽Walloon자치부에 매각되었다. 워털루전투 2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모금을 거쳐 농장복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15년 6월, 두 명의 병사가 문을 두고 전투를 벌이는 기념물이 공개되었다. 건물 부근에는 당시 프랑스와 영국군부대를 기념하는 액자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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