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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2부) - 프랑스 보병의 편성

by uesgi2003 2018. 8. 13.


자료를 잘못 나누어서 1부와 2부가 어중간하게 나뉘어졌습니다. 프랑스 기병과 포병까지 다루면 너무 길어져서 2부에서는 보병까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2부) - 프랑스 보병의 편성


맹렬한 주전파 필립 스타디오Philip Stadion백작이 오스트리아재상에 올랐고 국가영웅 카를Charles대공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카를은 군대를 개혁하고 애국주의를 불어 넣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정규군 300,000명과 민병 200,000명으로 불어났다. 

빈주재 프랑스대사는 “신문에는 오로지 오스트리아 영웅이야기와 프랑스 험담 밖에 안 실립니다”라고 보고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가 프랑스와 맺은 협정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실제로 그 협정을 지킬 의사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에 상실한 영토와 권위를 되찾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요한 요제프 라우렌티우스 폰 외스터라이히입니다. 당시 대프랑스동맹 지휘관 중에서는 손에 꼽는 명장이었고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지만 바그람에서 참패한 후에 프랑스와의 평화를 지지했다가 정적에게 밀려났습니다.  


1809년 바바리아Bavaria에서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나폴레옹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보병 2개 사단과 근위대를 빼내 프랑스의 예비군과 함께 전선으로 바로 보냈다. 그리고 최대한 신병을 징집했다. 

그렇게 모은 200,000명으로 오스트리아군을 다뉴브(도나우)강 건너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1805년 당시의 정예가 아니었고 다뉴브강 도강작전은 참담한 실패였다.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다시 한번 무적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러시아군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참전했지만 동부지방을 일부 점령한 후에는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아스페른-에슬링전투에서 2일차에 프랑스군 66,000명과 오스트리아군 91,000명이 전투를 벌여 양측 모두 2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의 진격을 막았고 사상자에는 수천명의 행방불명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승리를 거뒀습니다. 

나폴레옹이 믿는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장 란Jean Lannes원수는 포탄에 맞아 9일 후에 숨을 거뒀습니다. 



나폴레옹은 약 40일 후에 다뉴브강을 다시 건너 바그람Wagram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 프란츠왕은 휴전을 간청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의심스러웠고 영국군이 발트해 해안에 상륙할까봐 염려했다. 영국군은 발트해 대신에 네덜란드 스헬더Scheldt 하구에 상륙했지만 작전은 엉망진창이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진군을 막았고 영국원정군 사이에 말라리아가 퍼졌다. 생존자는 간신히 본토로 돌아갔다.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와 같이 애국주의와 독립열망이 지배적이었고 페르디난트 폰 쉴Ferdinand von Schill의 봉기가 일어났다. 





나폴레옹이 대활약한 3군단을 따라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페르디난트 폰 쉴의 데스마스크입니다. 그는 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의 저항을 이끌었다가 프랑스지휘를 받는 덴마크와 네덜란드 8,000명의 공격을 받고 실패했습니다. 독일의 국민영웅 중 한 명입니다. 


1809년 10월 14일에 빈 조약이 체결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 번 수모를 당하며 3,500,000명의 국민을 바바리아에 넘겨주었다. 아드리아해 동쪽의 트리에스트Triest와 전략요충지도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영국은 이제 남부유럽과 직접 교역할 방법이 사라졌다. 

갈라티아Galacia는 바르샤바대공국의 땅이 되었고 알렉산드르는 크게 당황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에게 폴란드왕국을 부활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에 두 국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이탈리아에 얼마 남지 않은 오스트리아의 영토도 프랑스의 차지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Charlemagne의 신성로마제국을 다시 건설하고 있었다. 교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추기경을 이탈리아 외부에서도 선출하겠지만 1/3은 프랑스제국 출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비오 7세Pius VII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나폴레옹이 추천한 주교후보들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교황령을 합병하고 교황을 체포해 사보나Savona에 감금했다. 



1810년, 나폴레옹은 네덜란드가 전쟁지원과 대륙봉쇄령에 소극적이자, 홀란트Holland왕이자 동생인 루이Louis를 퇴위시키고 네덜란드를 본토 프랑스Metropolitan France에 합병했다. 

알렉산드르는 폴란드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인 투르크와 프랑스의 관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남동부유럽에 대해 나폴레옹의 확실한 생각을 계속 요구했다. 나폴레옹이 독일영주국을 모아 라인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만들었듯이 발칸영주국도 하나의 동맹체로 만들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폴레옹의 실제 생각과 상관없이,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차지하게 방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보다 엄격한 대륙봉쇄를 요구해왔다. 러시아항에 들어온 중립선박을 몰수하라는 요구였는데 러시아경제에 치명타였다. 



당시 메트로폴리탄 프랑스입니다. 홀란트, 더치, 네덜란드 등이 혼용되고 있는데 홀란트는 네덜란드공화국의 한 지역이었지만 국가명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산 밀, 재목, 삼의 최대시장이었다. 교역 중단으로 러시아는 심각한 상황에 몰렸기 때문에 알렉산드르는 나폴레옹의 요구를 거절했다. 나폴레옹이 발칸반도나 폴란드에 대해 양보했다면 알렉산드르도 대륙봉쇄를 감수했을 수 있다. 

러시아는 영국제품을 계속 받아들였고 두 나라의 동맹은 계속 악화되었다. 1810년 12월 31일, 알렉산드르는 중립선박의 입항을 환영한 반면에 프랑스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 와인과 브랜드 수입을 금지시키는 법령을 발표했다. 

향후 1년 반 동안 두 황제는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했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고급장교를 대대적으로 채용했다. 알렉산드르는 1806년과 같이 독일을 전장으로 삼고 싶었지만 바르샤바를 배후에 둘 수 없었다. 


1812년 2월 24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조약을 체결하고 대육군Grande Armee에 프로이센 20,000명을 합류시켰다. 프랑스군은 슐레지아Silesia요새를 차지하고 프로이센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1812년 3월 14일, 오스트리아와도 비슷한 조약을 맺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바리아에 양도했던 영토 일부를 반환 받는 조건으로 30,000명을 지원했다. 그리고 7년 전쟁 패전으로 프리드리히대왕Frederick the Great에게 빼앗겼던 슐레지아도 되돌려 받기로 했다. 


투르크와 스웨덴과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스웨덴은 프랑스장군 출신의 베르나도테Bernadotte가 칼 14세로 즉위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스웨덴내 기반이 취약했다. 대륙봉쇄 때문에 스웨덴경제가 침체했고 칼 14세는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할 수 없었다. 

1812년 4월, 칼 14세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끝내고 전쟁이 발발하면 독일북부에 스웨덴군단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신에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스웨덴 마음대로 한다는 보장을 받았다. 



프랑스 원수 당시의 베르나도테입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18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웨덴-노르웨이 왕국을 통치했습니다. 


러시아와 투르크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 대한 분쟁을 끝내고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이 급진전되었다. 1812년 5월 12일 부차레스트Bucharest조약으로 투르크는 왈라치아와 몰다비아를 수복하고 대신에 베사라비아Bessarabia를 내주었다. 러시아는 이제 프랑스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서 철수하면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 비스와Vistula강으로 진군했고 1812년 6월 23일에는 대육군 선봉대가 리투아니아 Niemen강에 도착해 러시아국경을 위협했다. 

아직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없었다. 선봉대는 3일 동안 강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고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이집트, 크로아티아,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바바리아, 헤센, 작센 등의 부대가 러시아로 향했다. 이렇게 1812년 러시아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핵심은 보병부대였다. 중대, 대대, 연대 단위로 구성되었고 1812년 당시의 보병중대는 장교 3명, 준사관 14명, 드러머 2명, 사병 121명으로 140명이 총원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40~160명을 오갔다. 

보병은 전열Line병과 경Light보병이 있었고 각 대대는 6개 중대(정예중대 2개, 일반중대 4개)로 구성되었다. 전열대대의 경우 수석총fusilier중대 4개, 척탄병grenadier중대 1개, 유격병voltigeur중대 1개였다. 경보병대대는 카빈소총병carabiniers, 엽병chasseurs, 유격병중대로 구성되었다. 척탄병과 카빈소총병이 고참중대였고 유격병이 그 다음 고참이었다. 

1811년과 1812년 징집이 예상과 달리 대성공을 거둬서 많은 연대가 7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왼쪽이 척탄병, 오른쪽이 유격병입니다. 유격병은 원래 기병의 말을 타고 승부처에 급히 투입되는 보병이었지만 그 용도가 폐기되었는데도 그대로 불렀습니다. 전열병과 달리 비교적 자유롭게 적의 대열을 공격하며 교란시켰습니다.  


프랑스군은 정규군 외에 국민위병Garde Nationale이라는 예비군을 편성했다. 20~60세의 남성 중 나이와 건강상태에 따라 구분해서 편성했다. 

그리고 징벌연대Penal Regiment를 편성했다. 어느 군대나 예외가 없듯이, 프랑스군도 탈영병이 속출했다. 제12 사단의 경우, 이동 중이었던 840명 중 88명이 탈영했고 규율을 잡기 위해 병사들 앞에서 탈영병을 처형했는데도 다시 26명이 더 탈영했다.

탈영은 처형이 원칙이었지만 복귀할 경우 징벌연대로 편성되었다. 징벌연대의 하사와 상사는 규율을 회복하기 위해 황제근위대 출신이었다. 징벌연대는 정규부대 결원을 보충했고 그 숫자가 38,351명이나 되어 나폴레옹에게는 귀중한 전력이었다. 


보병중대는 30cm 간격을 두고 3줄로 섰다. 키가 큰 병사들이 앞에 섰고 가장 작은 병사들이 두번째 줄에 섰고 세번째 줄은 앞 열이 무너지면 그 자리를 메웠다. 

신병은 병사학교école du soldat에서 3단계 훈련을 받았다. 먼저 무기를 수령해 소지하는 방법, 총기를 발사하고 관리하는 방법 그리고 다양한 행진과 대형변경 방법을 배웠다. 

기본적인 행군 속도는 분당 76보, 속보는 분당 100보, 돌격은 분당 120보였는데 나폴레옹은 속보를 선호했다. 


1764년 교리에서는 3열 사격이 기본이었지만 백팩을 메고 있는 경우에 세번째 열은 사격이 어려웠기 때문에 소총을 장전하고 앞 열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사격을 하는 앞 열은 원래 무릎을 꿇고 사격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실전에서는 무릎을 꿇지 못하게 했다. 무릎사격 후에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1791년 교리부터는 세번째 열이 우측으로 17cm 정도 비켜 서 있다가 앞 열의 틈사이로 먼저 발사하고 두번째 열과 첫번째 열이 차례로 발사했다. 개별적인 사격은 엄금했기 때문에 언제나 추가사격 여력이 있었고 갑작스런 기병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영국군의 2열 사격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 같지만 프로이센과 같은 군대는 경기병을 먼저 투입해서 부정확한 사격을 유도한 후에 전열병이 장전하는 동안 경기병 뒤에 있던 중기병이 보병대열을 덮쳤다. 

수평으로 발사한 소총탄은 400보 정도를 날아갔다. 800보 이상의 목표물은 목표물보다 높게 조준해야 했다. 훈련 중에는 조준사격을 요구했지만 실제전투에서는 조준사격이 무척 드물었다. 장전하고 목표물 위치나 지형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발사했다. 

이 당시 사격은 개인능력과 상관없이 무척 부정확했다. 소총의 내구성은 조악했고 총열 안에서 굴러 나온 총탄은 직선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정확한 조준이 어려웠기 때문에 밀집대형으로 마구잡이 사격을 퍼부었다.

양측의 밀집대형 사격이 아니라 포탄과 유탄으로 죽는 병사가 훨씬 많았다. 


수석총Musket은 정확도 말고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화약을 점화시키는 부싯돌Flint는 20발 정도를 사격 후에 닳거나 자리를 벗어나서 교체해야 했다. 점화화약은 가끔 불발이 나는데 병사들은 제대로 발사된 것으로 착각했다. 기계적으로 총열 안으로 화약과 총탄을 재장전하면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분당 3~4발을 발사할 수 있었지만 총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화약찌꺼기를 긁어내야 했다. 치열한 전투로 사격이 계속된다면 정확도는 크게 떨어진다. 어차피 연속 사격은 불가능했다. 주변은 연기로 가득차서 적이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 장군은 계획은 최대한 치밀하게 하되 행동은 신속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교통로와 퇴각로가 확보되지 않으면 절대로 공격에 나서지 말고 즉시 전투를 중단하고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군단, 사단 심지어 여단까지도 상호 협력해야 했다.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라도 다른 부대를 지원하지 않아 위험에 빠트린 경우에는 신임을 잃었다.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면 경기병을 투입해 패주하는 적을 추격했다. 다른 부대는 상황이 정리되고 대열을 정비할 때까지 추격전에 나서지 않았다. 추격에 나설 때에도 적의 반격이나 저항을 대비해서 신중하게 전진했다. 


지금이나 1812년 당시나 보병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전투가 아니라 보급이었다. 준사관과 일반병은 매일 빵이나 비스킷을 배급받았다. 빵은 상당히 품질이 좋았다. 원정 중에는 빵대신에 비스킬 550g, 쌀 30g이나 말린 야채 60g, 신선한 고기 240g이나 소금에 절인 소고기 200g, 소금 16g, 약간의 술을 배급받았다. 

겨울에는 한 명당 나무 2,4kg 또는 석탄 1.2kg이 나왔다. 전쟁이 계속되면 배급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5일마다 한 명당 짚 15kg이 배분되었다. 

장교는 다양한 배급을 받았는데 고급장교는 직급에 맞는 여분의 배급을 받았다. 


배급다음으로 무기가 중요했다. 1812년 당시 가장 일반적인 무기는 샤를빌Charville 1777형이었다. 수석총병과 척탄병의 주력무기였고 유격병은 좀 더 가벼운 용기병수석총을 사용했다. 

화약은 카트리지 형태에 담아 13개를 탄약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화약은 탄알과 비슷한 무게였다. 카트리지는 큰 종이를 말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말이다. 

보병은 평상시에는 탄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전투 당일에 드럼 소령과 드러머가 자신의 연대의 카트리지를 가져왔다. 전투 중에는 대열 뒤에 카트리지를 쌓아 두었다.  




무려 772만정이나 생산된 샤를빌수석총입니다. 1763과 1766형은 미국으로 대거 수출되어 미국독립전쟁에서 귀중하게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