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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전쟁 (8부) - 백병전

by uesgi2003 2022. 4. 25.

이번 이야기는 무척 짧습니다. 

역시나 우리의 오해와 달리, 당시 전투에서는 백병전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는군요.

다음에는 기병을 정리할 예정입니다.  

 

모든 보병은 소총총구 주변에 35cm 길이의 총검을 장착했다. 장전과 사격하는데 불편했지만 180cm짜리 창으로 사용해서 기병의 돌격을 막았다. 백병전에도 사용했는데 실제로는 총검부상의 증거가 많지 않아서 논란의 여지가 많다. 

 

1705년 소총은 총구자체를 막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고 나머지도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한 장착방식이었습니다. 

 


라레Larrey의사는 백병전 부상을 조사했는데 119명이 총상인 반면에 총검은 5명과 그쳤고, 1762년 입원부상자 조사에서는 생존가능 부상병 중 2.4%만이 총검부상이었다. 

 


총검은 살상보다는 적에게 공포를 주어 달아나게 만들고 실제 전투가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대형을 갖춘 보병은 평지에서 총검으로 백병전을 벌이지 않았다. 
백병전이 벌어지기 전에 어느 한쪽이 물러나거나 공격측이 퇴각하거나 총격전을 벌였다. 맹렬한 백병전 기록은 과장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백병전은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는군요. 


예를 들어, 마이다Maida전투에서 영국군지휘관 존 스튜어트John Stuart는 아주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적을 완전히 무너트렸다며 집에 편지를 보냈지만 현장에 있었던 영국군 병사는 백병전이 벌어졌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총검전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아예 듣지 못했다고 부인했다. 
다른 병사는 ‘전투에서 양측이 한 번도 총검을 맞댄 적이 없었다. 마이다전투에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믿지 않았다. 49연대 우리 대대를 지휘했던 제임스 켐프는 백병전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내게 단언했었다. 프랑스군은 머뭇거리다가 등을 돌려 달아났는데 너무 늦어서 아군이 달려가 따라잡힌 300명 정도를 총검으로 찔러 죽었다.’ 
다이닐리Dyneley중위는 몇 주 후에 편지를 썼는데 달아다는 프랑스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했다. 

 


찰스 오만Charles Oman은 많은 전투를 조사했고 1813년 7월 25일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전투에서 보기드문 진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을 찾아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좁은 길을 전진하다가 10m 거리에서 마주쳤다. 
프랑스군은 본능적으로 한 발 물러났다. 일부가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는데 장교들이 기를 쓰고 막았다. 프랑스군이 총검을 앞세우고 돌격자세를 취했고 영국군도 그랬다. 몇 초 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살폈다. 프랑스장교 1명이 앞으로 튀어나어 영국군 대열 중간에 뛰어 들었다가 총검을 찔려 죽었고 양측이 조심스럽게 총검을 찔러댔다. 그렇지만 총검술 연습 수준이었다. 
양측 모두 20명 안되는 피해가 발생했고 1분 후에 프랑스지원군이 다가오자 영국군은 재빨리 퇴각했다. 보통은 적이 달아나거나 위험하지 않을 때에만 적에게 달려들었다. 

백병전은 숲, 마을, 방벽 등 백병전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지형에서 훨씬 많이 일어났다. 보병대가 질서정연하게 총검을 앞세우지 않았고, 불편하고 불안정한 총검보다는 개머리판, 나무막대기, 주먹, 이빨과 발길질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병력을 투입할 때마다 기세가 뒤집혔다.  
개활지 백병전은 드물었지만 마이다전투처럼 적이 달아나거나 동요하고 있을 경우에 총검돌격을 했다. 워털루전투에서도 영국군병사는 ‘총검전투라면 한 건도 보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돌격이라고 하면 집합해서 대형을 갖추고 전진하는 정도다. 그래서 총검부상이 없는 것이다. 

 


총검돌격은 용기와 사기의 대결이었고 공포에 질린 쪽이 먼저 무너졌다. 아무래도 공격측이 처음에는 주도권을 가졌다. 그렇지만 수비측의 사격이 치명적이어서 전진속도가 느려지고 정체되면 주도권은 바로 수비측에 넘어갔고 반격할 기회를 잡았다. 
열(종)대형은 전진속도를 높이고 장교와 부사관을 집중시켜 대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에 횡대형은 화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만약 산병과 포병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공격측은 사격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수비측도 총검으로 반격할 생각이 없다면 지루하고도 치명적인 총격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전력이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나폴레옹은 군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다. 바그람Wagram전투의 프랑스군은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전투 수준이 아니었고 드레스덴Dresden전투에서는 훨씬 악화되었다. 전력약화는 전술적 경직성으로 이어졌고 포병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연합군도 변하고 있었다. 더 효과적인 대형을 개발했고 여단, 사단과 군단급의 장교들이 전투경험을 축적했다. 그렇지만 일반보병의 수준은 악화되었고 신병이 대거 징집되었다. 1813년 오스트리아참모장 라데츠키Radetzky도 1/3 정도만 제대로 훈련받았고 나머지는 군복입은 농민 수준이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런 수준의 군대를 크게 혁신시킬 수 없었고 복잡한 대형을 적시에 변형할 수도 없었다. 단순하고 뻔한 전술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이 워낙 불안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프랑스의 사단과 군단편제를 채택해서 1열이 무너지면 2열, 3열, 4열 부대가 더 이상의 위기를 막았다. 
군대수준과 전술이 비슷해졌고 양측은 지리한 소모전을 펼쳤다. 

나폴레옹전투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기록이 마치 전장에 혼란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실제로는 훨씬 혼란스러웠다. 보병대형은 이론과 달리 완벽하지 않았고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고함을 치다가 장교를 공격하거나 대열에서 달아나려고 했다. 
깔끔하고 승패가 분명했던 반도전쟁도 기록이 상반되었고 오류가 많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고 원거리에서 산병전투를 벌이거나 적과 수백 미터 거리까지만 마지못해 나아갔다. 
드루에dErlon군단의 장교는 워털루전투의 후반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큰 피해를 입었던 평원을 다시 공격하려고 내려갔다. 기다리던 적도 우리만큼이나 만신창이였고 산발적인 산병전투가 되었다. 별 다른 전과가 없었고 다른 곳의 전투가 전황을 결정지었다.’ 

격전이 이어지면서 양측군대의 유기적인 협동이 깨졌고 예비병력까지 소진시켰다. 목표가 사라지고 규율이 무너진 쪽이 패배를 인정하고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