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전장의 주역은 전열병이었지만 아무래도 관심은 기병에 몰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관련 그림을 봐도 압도적으로 기병이 많고 훨씬 역동적입니다.
기병은 3개 병과 중 가장 비용이 많이 들고 강력했고 원정에 없어서는 안될 전력이었다. 반도전쟁을 제외한 나머지 거의 모든 전장에서 총 전력 중 10~20%를 차지했다. 반도전쟁에서는 이보다 많이 낮았다.
기병은 소대, 중대, 기병대Troop, 대대, 연대(3~4개 대대Squadron, 보병은 Battalion)로 편성했고 전투에는 연대단위로 투입했다. 그렇지만 기병대대는 보병보다 상당히 독립적이었고 다양한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기병연대는 보병연대와 상당히 달랐다.
2~3개 연대으로 여단, 보통 2개 여단으로 사단, 2~3개 사단으로 기병군단을 편성했다. 중간을 건너뛰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바그람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그루시Grouchy와 풀리Pully는 용기병Dragoon사단들을 지휘했는데 여단을 생략하고 3개 연대로 편성했다.
프랑스군은 기병여단이나 사단에 견인포대를 편성했지만 다른 국가에서는 다르게 편성했고 프로이센과 영국군은 여단급 정도로만 편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용기병은 원래 보병을 말에 태워 기동력과 화력을 보완한 부대였는데 나폴레옹전쟁에서는 그냥 경기병이 되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말에서 내려 전열병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됩니다.
기병연대는 800~1500기 이상으로 국가과 시기 별로 차이가 컸다. 실전에서는 그보다 훨씬 적어서 중앙유럽은 500기, 반도전쟁에서는 3~400기 정도였다.
바그람전투에서 프랑스군 최강 기병연대는 제9 흉갑기병Cuirassier(776기)과 제국근위대연기병Chasseurs a Cheval of the Imperial Guard(1,109기)였고 최약 기병연대는 작센Saxon군단의 알베르트왕세자 경기병Prince Albert Chevau Leger대대(142기)였다.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군은 왕립독일인군단King's German Legion의 제3 경기병Hussar(875기)가 최강이었고 제2 경호근위대Life Guard(265기)가 최약체였다. 반대로 살라망카에서는 왕립독일인군단의 제2 용기병이 겨우 407기였고 영국과 독일기병 10개 연대는 평균 354기였다. 포르투갈기병 2개 연대는 500명 정도로 더 많았다.
기병은 역할과 기능이 겹치는데도 서로 다르게 편성하고 구분했다. 중기병은 전장에서 돌격하는 역할이었고 프랑스 흉갑기병이 가장 유명했다. 매년 징집병 중 가장 체격이 좋은 병사를 선발해 체격이 큰 말에 태웠고 제국근위대Imperial Guard 다음가는 정예였다.
군마부족 문제에 시달리다가 프랑스군이 1807년에 독일과 폴란드를 점령하면서 풍부한 공급원을 얻었다. 러시아원정에서 극심한 손실을 입었지만 1814~15년 평화기에 복구했다.
강철흉갑, 투구, 두터운 가죽장갑과 긴 장화를 착용해 칼, 창과 권총을 막아냈다. 중장갑을 착용하려면 체력과 경험이 필요했는데 워털루에서 부상당한 흉갑기병이 중장갑을 벗어버리고 후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마몽Marmont원수는 ‘보병을 상대하려면 중장갑기병이 필요하다. 총격에 충분히 버틸 수 있어서 보병을 무섭게 덥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일부는 경기병을 선호하며 중장갑은 속도를 늦춰 적의 사격을 더 오래 받는다고 반박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흉갑으로 총탄을 막아냈습니다. 흉갑이 없었다면 이 기병은 즉사했겠죠.
중기병이라고 모두 장갑을 착용하지는 않았다. 프랑스군에 총기병Carabineer 2개 연대가 있었는데 흉갑기병보다 정예라고 자신했고 1810년까지 특별한 장갑을 입지 않았다. 제국근위대연기병은 아예 장갑을 착용하지 않았지만 독특한 복장을 갖췄고 가치를 입증했다.
다른 국가의 중기병은 대부분 흉갑을 착용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가슴장갑만 착용하다가 1809년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은 워털루 이전에는 장갑을 착용하지 않다가 런던관광객을 위해 경호근위대Life Guard가 갖춰 입었다.
관광객용 복장입니다.
중기병의 진정한 위력은 중장갑이 아니라 규모, 전력과 자신감에서 나왔다. 진로에 어떤 적이 가로 막아도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고 실제로도 훌륭히 해내서 심리적인 공포심을 안겨주었다.
중기병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대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구 투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거꾸로 기병을 무시했고 전투에 무차별적으로 투입하다가 1809년에서야 흉갑기병사단에 경기병 1개 연대를 두어 정찰, 산병전, 지휘관경호, 추격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중기병 손실을 막을 수 있는 이 계획은 생각보다 효과가 떨어졌고 1815년에는 취소되었다.
반도전쟁에서는 프랑스중기병이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이 떠나고 흉갑기병 1개 연대만 피레네Pyrenees남쪽에 남았다. 동쪽 해안의 제13 흉갑기병은 1811년 10월 25일의 사군툼Saguntum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반도전쟁에서 프랑스군 기병 대부분은 조미니Jomini가 전천후 동물이라고 부른 용기병이었다. 용기병은 어중간한 기병이었다. 기병으로 선별되지 않았으면서도 기병역할을 했다. 중기병처럼 정예도 아니었고 경기병의 영광도 없는 전천후로 사용할 수 있는 전열병이었다.
나폴레옹은 1805~7년, 특히 아우스터리츠에서 용기병에 실망해서 그 이후에는 반도전쟁과 같은 제2 전선에 투입했다. 1813년에 기병을 재건하면서 다시 불러들였다.
스페인게릴라에게 프랑스창기병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기병은 경기병이었다. 검기병Hussar, 엽기병Chasseurs a cheval, 경용기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 중기병은 위용이 넘쳤고 경기병은 매력이 넘쳤다. 경기병은 화려한 군복과 모험이야기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모든 곳에서 여성의 사랑을 받고 남성의 증오를 받는다는 이미지를 즐겼다. 그렇지만 군대 내에서는 술을 즐기고 자원을 낭비하고 규율을 무너트린다고 욕을 먹었다.
검기병의 화려한 군복입니다.
프랑스군은 보병군단에 경기병 여단 1개를 편성했고 중기병과 용기병은 기병사단으로 편성했다. 바그람전투에서 중기병이 기병전체의 1/3, 용기병과 근위기병이 10%씩, 경기병이 50%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최정예병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바그람전투에서는 중기병과 근위기병의 비율이 높았다.
오스트리아군의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바그람전투에서 흉갑기병 연대 5개, 용기병 4개 그리고 경기병 연대를 16개 이상 투입했다. 중기병과 용기병연대의 병력이 더 적었기 때문에 실제 병력은 경기병이 훨씬 많았다.
1815년, 프로이센군은 기병연대를 36개 편성했는데, 근위기병 4개, 흉갑기병 4개, 용기병 8개, 검기병과 창기병Uhlan 20개였다. 그리고 향토기병Landwehr 33개 연대가 있었다.
경기병은 전장 안팎에서 산병전을 벌이고, 정찰하고 거점을 지키고, 전투에서는 전면돌격을 감행했다. 보병을 근접지원하고 전선의 위기를 봉쇄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반대로 퇴각하는 아군을 엄호했다.
돌파력은 중기병에 못 미쳤지만 중기병의 숫자가 적었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대기했던 반면에 경기병은 전투 초반부터 종반까지 아주 요긴한 전력이었다.
러시아군의 코사크Cossack는 적과 산병전을 벌이고 교란시키는 비정규군으로 전세가 유리할 경우에만 근접전을 벌였다.
두 그림 모두 왼쪽이 코사크입니다. 코사크는 러시아의 통치를 벗어나 우크라이나 동부 등을 개척한 무장민병들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외부세력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다가 러시아에 완전히 통합되었습니다.
기병은 모두 칼을 소지했는데 불만이 컸다. 한 영국군장교는 경용기병의 세이버Sabre(사브르)의 살상력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중기병의 칼은 너무 무겁고 짧고 넓었다.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기술부족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지만,
‘영국기병은 우리가 사브르로 공격하면 무척 두려워했다. 우리는 사브르 끝으로 찌르는 반면에 영국군은 폭이 8cm 밖에 안되는 칼로 베려고 한다. 그러니 20번 휘둘러도 19번이 빗나갔다. 칼끝으로 1번만 제대로 찌르면 치명타가 되었고 몸통에서 팔 하나를 떨어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프랑스중기병도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칼끝이 윗면에 있어서 기병전에서 무용지물이었고 칼을 갈아서 칼끝을 중앙에 오게 만든 기병이 많았다.
칼과 창을 여러번 맞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았다. 워털루전투에서 왕립기마근위연대Royal Horse Guards병은 16군데나 부상당하고 살아남았는데 심지어 두개골 골절까지 있었다. 부상당한 용기병과 포로가 되었던 병사들이 전선에서 돌아오면서 상처를 보여주었는데 칼 상처가 의외로 얕았고 총상과 프랑스용기병의 찌르기 상처가 훨씬 치명적이었다.
기병은 말을 몰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없었고 당연히 총탄보다 위력이 약했다. 적이 달아나거나 완전히 무너져서 저항하지 않는 경우에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
의외로 타격이 크지 않다고 해서 기병의 역할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기습으로 적 대열을 끊고 사기를 떨어트리고 공포를 퍼트리는 효과가 컸다.
기병은 다양한 화기를 무장했는데 실전에서는 권총 2정과 기병총Carbine 1정을 소지하기도 했다. 전선 밖이나 원정 중에 경기병과 용기병이 말에서 내려 보병역할을 했다. 심지어 보병으로 적 기병을 상대했다.
영국군은 대열 중에 사격을 금지시켰지만 산병전을 벌일 때에는 연대 앞 200m까지 나가 사격하는 것은 허용했다. 왼팔 위에 기병총을 올리고 조준했는데 가끔은 앞으로 내밀거나 오른팔 위에 올리기도 했다. 말이 놀라지 않게 그리고 말 머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했다. 사격하기 위해 멈출 필요는 없었다.
나폴레옹전쟁 당시가 아니라 훨씬 후이지만 이런 사격자세입니다.
몇 개 연대는 창으로 무장했다. 2.7m 길이에 3kg 정도 무게였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창기병을 중용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폴란드창기병에 깊은 인상을 받고 1811년에 용기병 6개 연대를 창기병으로 바꿔 계속 투입했다.
창기병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알부에라전투에서 콜보른여단의 측면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고 카츠바흐Katzbach전투에서는 비 때문에 사격할 수 없었던 프로이센군 방진을 무너트렸었다.
영국군 일부는 보병에게 창기병이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했지만 검을 지닌 용기병이 훨씬 가치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코사크와 경기병의 대결이기는 하지만 근접전에서는 창기병이 불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이 너무 길고 불편했기 때문에 근접전에서 정말로 효과적이었는 지에 대해 의문이 많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폴란드기병을 모방해 전열은 기병총 대신에 창을 무장하고 후열은 기병총과 칼을 무장했다.
1741년, 프로이센군의 백병전 기록도 이런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창이 오히려 불리했다. 긴창을 옆으로 뉘웠다가 옆 동료의 말을 찌르거나 땅을 찔러 안장에서 떨어질 뻔 했다.’
프랑스군은 해결방법을 찾았다. 워털루전투에서 프랑스창기병은 창을 발에 기대 놓았다가 영국군이 접근하면 앞으로 내밀었다. 그걸 피하지 못하면 그냥 꿰뚫렸다. 창 끝에 깃발을 달았는데 영국군용기병의 말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놀라 멈칫거리면 창기병이 순식간에 창으로 찔렀다.
너무나도 상반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창기병의 가치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대열이 누무너졌거나 달아나는 적에게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심리적 효과도 컸다는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대열을 잘 갖춘 적기병에게는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창기병은 창다루는 특수훈련을 했고 흉갑기병은 장갑착용에 적응하는 등, 전장에 가기 전에 보병보다 훨씬 많은 훈련을 했다. 1793년, 한 프랑스전문가는 과장을 섞어 보병은 6개월만 훈련받으면 고참과 보조를 맞출 수 있지만 기병은 3~4년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먼저 승마교육을 받고 군마가 대열을 유지하고 전장의 소음과 위협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 했다. 그 다음에 달리고 회전하는 고급교육 과정을 거쳤다. 속도를 점점 높이려는 본능을 억제하는 훈련이 중요했다.
기병대가 대열을 맞춰 속도를 유지하기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에 연대가 한꺼번에 움직일 경우에도 대대가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가졌다. 160기의 대대가 2열로 움직이면 90m의 폭밖에 안되기 때문에 공간이 매우 비좁았다.
연대공격은 1개 대대가 선두에 서고 다른 대대가 뒤따르는 사다리꼴Echelon대형이었는데 선두대대의 측면을 보호하고 적에게 연거푸 충격을 주는 동시에 아군의 혼란을 줄이는 장점이 있었다.
기병대대장도 보병중대장보다 훨씬 자유로운 결정권을 가졌고 위기와 기회에 따라 공격을 가하거나 늦췄다.
프랑스군은 군마를 이렇게 훈련시켰다.
‘군마가 밀을 먹고 있을 때에 마굿간 문에서 권총을 쏘아 적응시켰다. 처음에는 시간간격을 두었다가 말이 적응하면 사격빈도를 높였다.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깃발, 보병, 드럼소리에 적응시켰다.’
그렇지만 실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전방의 포격소리에도 침착하던 말이 후방의 총격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반도전쟁 당시, 영국군 제14 경용기병연대는 5년 반동안 1,564마리를 잃었는데 처음 도착했을 당시의 2배였고 말 1마리가 평균 2~3년을 버틴 셈이었다. 프랑스군은 유럽전역에서 말을 동원했는데도 충분한 군마를 마련하지 못했다.
군마소모율이 높았고 기병은 새로 받은 말과 호흡을 맞추는데 애를 먹었다.
영화 워털루에서 영국중기병과 프랑스창기병의 장군멍군, 그리고 프랑스기병과 영국보병 방진의 전투장면입니다.
이런 스케일의 영화는 다시 나올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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