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이 분만 따로 정리해야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귀중한 분입니다.
너무 잘 알려져 있고 신격화되어 있어서 섣불리 설명하려고 했다가는 온갖 비난의 화살을 다 맞을 분이죠.
바로 성웅 이 순신 장군님입니다.
이 분이 없었다면 우리는 500년 전에 일본의 통치를 경험했을 것이고, 이 분이 없었다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은 다른 나라의 전설이나 영화 속에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자료가 흘러 넘치지만 그래도 제 서재에 놀러오시는 분들을 위해, 그 분에게 감사드리면서 위키 자료를 중심으로 요약하고,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수군이 왜 그렇게 강력했는지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의외로 받아들일 조선수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정리될 예정입니다.
25. 성웅 이 순신 - 1545년~1598년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무과급제 후, 만포첨사,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행하고 효심을 가진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뒤 선무공신 1등관에 추록되고 정도 때에는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영향으로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했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설은 설득력이 없다.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했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1576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32세 나이가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나가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7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만호란? 조선시대 각도(各道)의 진(鎭)에 딸린 종사품(從四品) 무관직(武官職)으로 몽골(蒙古)의 병제(兵制)를 모방한 고려의 군직이었다. 개경(開京)의 순군만호(巡軍萬戶)를 비롯하여 합포(合浦: 마산)‧전라(全羅)‧탐라(耽羅)‧서경(西京) 등에 5개 만호가 증설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만호는 거느리는 군대도 없이 금부(金符)만을 차고 다니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본래 만호‧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은 그 관할하는 민호(民戶)의 수를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그 민호의 수효와는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를 나타내는 말로 변하였다. 육군에서보다는 수군(水軍)에서 이 관직명이 오래 남아 있었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의 모함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고 1589년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 해 12월에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에 정읍현감이 되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했고 1590년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1591년 선조는 이천·이억기·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가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임명했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전력을 강화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오판하고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20여 척(최소 26척 최대 29척)의 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옥포해전은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했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시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부쉈는데 바로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대첩(그림 참조)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이자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1592년 음력 7월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음력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는데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리고 때로 적함에 승선해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했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논란이 있다.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했고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교착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1597년 음력 2월 25일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사형을 모면했으나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음력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졸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 해전에서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공식기록상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그림 참조)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그림 참조)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한편, 일부에서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근거가 없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과 좌의정으로 올렸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우에스기의 그것이 알고 싶다?
먼저 이순신장군을 비롯한 조선수군의 해전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칠천량전투에서 궤멸된 패배 한 번을 제외하고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위키에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그대로 가져와봅니다.
(그런데... 오류가 상당하군요. 일단 급한대로 약간만 수정했습니다.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날짜 | 해전 | 장소 | 조선군 | 일본군 | 조선군 피해 | 일본군 피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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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음력 5월 4일 | 옥포 해전 | 거제시 옥포 | 이순신 원균 권준 정운 이영남 이운룡 무의공 이순신 송희립 어영담 한백록 우치적 91척 (판옥선 29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
도도 다카토라 호리노우치 우지요사 전선 50척 |
1명 부상 | 전선 26척 격침, 4080명 전사 | 조선군의 첫 승리 |
1592년 음력 5월 7일 | 합포 해전 |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 이순신 원균 전선 92척 |
전선 5척 | 없음 | 5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5월 8일 | 적진포 해전 | 고성군 거류면 통영시 광도면 | 이순신 원균 전선 92척 |
전선 13척 | 없음 | 11척 격침, 2840명 전사 | |
1592년 음력 5월 29일 | 사천 해전 | 사천시 용현면 | 이순신 원균 권준 무의공 이순신 정운 이영남 송희립 나대용 어영담 김완 한백록 이언량 이기남 전선 26척 |
구루시마 미치유키 도도 다카토라 카메이 코레노리 전선 13척 |
이순신 피격, 나대용 피격 | 13척 모두 격침, 2600명 전사 | 처음으로 거북선을 사용 |
1592년 음력 6월 2일 | 당포 해전 | 통영시 산양읍 | 이순신 권준 |
카메이 코레노리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선 21척 |
불명 |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전선 21척 모두 격침, 2820명 전사 | |
1592년 음력 6월 5일 |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원균 전선 51척 |
전선 26척 |
불명 | 전선 26척 모두 격침, 2720명 전사 | |
1592년 음력 6월 7일 | 율포 해전 | 거제시 장목면 | 이순신 | 전선 10척 | 전사 11명, 부상 47명(사천, 당포, 당항포 총계) | 10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통영시 한산면 |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정운 무의공 이순신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황세득 한백록 전선 56척 |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주 전선 73척, 병력 1만 명 |
19명 전사, 116명 부상 | 전선 59척 격침, 전선 14척 나포, 8980명 전사, 와키자카 사헤에,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주 할복(자살) | |
1592년 음력 7월 10일 | 안골포 해전 |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전선 42척 |
없음 | 전선 42척 모두 격침, 250명 전사 | |
1592년 음력 8월 29일 | 장림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 이순신 이억기 원균 전선 173척 |
전선 6척, 병력 30명 | 없음 | 6척 모두 격침, 30명 도주 | |
1592년 음력 9월 1일 | 화준구미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몰운대 인근 | 이순신 | 전선 5척 | 없음 | 5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9월 1일 | 다대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 이순신 | 전선 8척 | 없음 | 전선 8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9월 1일 | 서평포 해전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 이순신 | 전선 9척 | 없음 | 전선 9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9월 1일 | 절영도 해전 | 부산시 영도구 | 이순신 | 전선 2척 | 없음 | 2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9월 1일 | 초량목 해전 | 부산시 동구 초량동 | 이순신 | 전선 4척 | 없음 | 전선 4척 모두 격침 | |
1592년 음력 9월 1일 | 부산포 해전 | 부산시 동구 좌천동 |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권준 송희립 무의공 이순신 김완 이영남 어영담 우치적 전선 170척 |
도도 다카토라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전선 470척, 병력 7만 명 |
정운 전사, 6명 전사, 25명 부상 | 128척 격침, 3800명 전사 | |
1593년 음력 2월 1일 | 웅포 해전 |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 이순신 이억기 원균 전선 89척 |
전선 40척 | 전선 4척 전복 | 왜군 100명 전사 | |
1594년 음력 3월 4일 | 제2차 당항포 해전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리 | 이순신 이억기 원균 어영담 전선 124척 |
나가오카 다다오키 전선 31척 |
없음 | 31척 모두 격침 | |
1594년 음력 10월 4일 | 장문포 해전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 이순신 | 불명 | 없음 | 2척 격침 | |
1597년 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 | 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최호 배설 김완 배흥립 우치적 전선 300척 |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다다유타 고니시 유키나가 전선 1000척 |
원균, 이억기, 최호 전사, 김완 적군의 포로가 됨, 판옥선,(거북선 포함) 288척 격침
조선수군 20,000명 궤멸 |
소수, 가토 요시아키 왼팔 부상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
1597년 음력 8월 27일 | 어란포 해전 |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포 | 이순신 김억추 전선 12척 |
전선 8척 | 없음 | 도주함 | |
1597년 음력 9월 7일 | 벽파진 해전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 이순신 김억추 전선 12척 |
전선 13척 | 없음 | 도주함 | |
1597년 음력 9월 16일 | 명량 해전 | 전남 해남군 문내면, 진도군 녹진리 | 이순신 권준 이영남 무의공 이순신 안위 김응함 송여종 김억추 정응두 황세득 송희립 우치적 이응표 전선 13척, 병력 1170명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소 요시토시 전선 333척, 병력 2만 6600명 |
없음 |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31척 격침, 92척 파손 및 도주, 18466명 전사 | |
1598년 음력 7월 19일 | 절이도 해전 |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촌리 고라금해수욕장 | 이순신(충무공) 권준 이순신(무의공) 이영남 우치적 황세득 송희립 진린 등자룡 판옥선 170척, 병력 1만 7000명 명 호선 128척, 병력 2만 60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만 3000명 |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아타케부네 100여척 |
30여명 사상 | 50여척 격침, 50척 파손 | |
1598년 음력 10월 2일 - 음력 10월 4일 | 장도 해전 | 전남 순천시 장도 | 이순신 진린 조선 수군 170척, 병력 1만 7000명 명 수군 128척, 병력 2만 6000명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만 3000명 |
고니시 유키나가 | 명 수군 62척 격침, 2300명 전사, 조선군 360명 사상 | 30척 파손, 11척 나포 | |
1598년 음력 11월 19일) | 노량 해전 |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이순신(충무공) 진린 등자룡 이영남 권준 이순신(무의공) 송희립 김완 우치적 나대용 이언량 이완 고득장 방덕룡 손문욱 조선 수군 170척, 병력 1만 6640명 명수군 66척, 병력 2만 3700명 총병력 전선 236척, 병력 4만 340명 |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와키사카 야스하루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시게 전선 500척 |
이순신, 이영남, 방덕룡, 고득장, 등자룡, 이언량 전사, 10명 전사, 300명 부상 | 200척 격침, 150척 파손, 100척 나포, 4만 명 전사, 1만 3000명 부상, 50척 도주 | |
총계 | 26전 25승 1패 |
총 피해 2348명 전사(명군 포함), 492명 부상, 불명 390명, 전선 211척 격침(명군 포함), 총 사상자 3230명 (칠천량 해전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 20,000명이 궤멸되었으나 사상자는 불명) |
총 피해 7만 6170명 전사, 1만 3000명 부상, 전선 1039척 격침, 170척 파손, 131척 나포, 총 사상자 8만 9170명, 전선 1493척 피해 |
26번의 전투에서 왜선을 무려 1,493척이나 부쉈는데, 이 정도면 일본 내에 배가 모자라 병사나 군수품을 보내지 못했다는 말이 우리들만의 과장이 아닙니다. 조선수군이 물러서지 않고 전선을 지키고 오히려 왜군을 항로를 위협하면서 조선을 패전의 위기에서 구해냈습니다.
- 7만 명에 이르는 왜군을 전투에서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습니다.
-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 왜군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냈습니다.
-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왜군이 대거 증원되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 왜군의 병력과 군수품이 서해를 거쳐 최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아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육상전투와 비교하면 조선 수군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육군이 패전한 대표적인 두 전투, 탄금대 전투와 를 한 번 가져와보겠습니다. 먼저 용인 전투는 조선의 병력이 50,000명은 확인되지 않은 숫자이고 20,000명 이상이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탄금대 전투와 달리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와해되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충주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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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신립† 도순변사 변기† 조방장 김여물† 종사관 이종장† 충주 목사 이일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 ||
병력 | |||
8000명 | 1만 8700명 | ||
피해 규모 | |||
전멸 이일도주 |
150여 명 사상 |
용인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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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
지휘관 | |||
이광 전라도 순찰사 곽영 전라도 방어사 윤선각 충청도 순찰사 김수 경상도 순찰사 권율 광주 목사 백광언† 방어사 이지시† 이지례† 윤국형 황진 |
와키사카 야스하루 와키사카 사헤이 | ||
병력 | |||
5만 명 | 1600명 |
개전초기 육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지만 수군은 서전부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조선 수군은 어떻게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흔히 이 순신장군과 거북선으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만 실제로는 조선의 육군과 달리 수군의 전력은 왜군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전력이 압도적이었지만 경상도 좌우수사를 비롯한 지도부가 막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반면에 이 순신장군은 왜군의 약점까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순신장군 휘하의 수군은 100%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 조선과 왜군의 전함부터 비교해보겠습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니까 큰 그림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그림과 같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노송에 나무못을 연결해서 왜선에 비해 상당히 튼튼했습니다.
그리고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선저)이 평평해 제자리에서 좌우로 회전하며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반면에 왜선은 V자 형으로 선회하기 힘든 구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선은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고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었고 달아나는 왜선을 추적하지 못한다는 문구를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기이도 합니다.
왜군의 주력은 안택선으로 알려져 있지만 안택선은 주로 지휘관이나 중심 전함이었고 대부분은 관선(세키부네)입니다. 그림에서 중심에 있는 것이 안택선이고 주변이 세키부네입니다.
왜선은 구하기 쉬운 삼나무와 철못을 사용해 만들었지만 삼나무 자체가 약한데다가 항해를 오래하면 연결부위가 녹이 슬어 충격에 약했습니다.
판옥선이 왜군의 관선에 비해 크고 높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쏘는 사격이 가능해 해전에 상당히 유리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조선 주력함의 크기와 규모입니다. 판옥선이 어느 정도로 큰 배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원거리 화력전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육지에서는 왜군이 조총 원거리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반면에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화포로 왜군의 사정거리 밖에서 화력전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진과 같은 대완구, 천자총통 등의 대형화기를 10문 이상씩 장착하고 장거리 화력전을 벌였습니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모형이 많이 전시되어 있으니까 직접 보시면 위용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요즘 무기에 익숙한 분은 '이 정도로 무슨...'하며 가볍게 생각하실 수 있을텐데, 당시 조선은 예상 외로 화약제조 기술이 발전해 있었서 상당한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거리까지요.
물론 유효사거리라는 것이 있으니까 이 거리보다는 훨씬 짧아졌겠지만 조총 유효사거리 50m 이내로 좁혀들어야 했던 왜군의 입장에서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초대형 무기들을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판옥선이 높았기 때문에 훨씬 유리한 위치였고 기동력이 떨어지는 전함에게 쏘는 것이라 명중률은 우리가 우습게 보는 것보다는 훨씬 높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돌덩이나 대형화살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군은 이런 대형화기를 왜 사용하지 못했을까요?
왜군에게도 화포와 같은 대형무기는 있었습니다.
일본 수군의 출발은 해적이고 전국시대에 해전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수군은 해전보다는 수송이나 호위 개념이 컸습니다.
그래서 전국시대 당시의 해전 그대로 조총 유효사거리에서 화력전을 벌이고 적의 함선에 올라타서 육박전을 벌이는 해전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오다 노부나가가 모리 수군을 상대로 화력전을 벌이던 기즈가와구치 해전입니다. 대형 안택선으로 관선을 상대로 화력전을 펼치는 장면인데, 안택선의 무장은 주로 화승총과 투척용 폭약입니다.
관선은 아예 화포가 실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고 안택선도 앞 뒤로 2문 정도의 화포를 장착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판옥선은 평저선으로 선회를 자유롭게 하며 좌우에 장착한 대형화포를 번갈아가며 쏠 수 있었던 반면에 안택선은 화포를 쏘기 위해서는 전면에 있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비해 화포의 구경도 작고 화약기술도 뒤떨어졌던데다가 전용포가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임시방책을 사용하거나 못걸이로 꽂아 사용했기 때문에 신뢰성이나 정확도에서 크게 뒤떨어졌습니다.
전국시대에 사용된 화포는 그림과 같은 손대포보다 약간 큰 정도로 튼튼한 판옥선을 상대로는 위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물론 조선과 마찬가지로 서양식 최신대포인 블랑기포(프랑크포, 카트리지 교체식)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수가 워낙 적었고 포가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볼 수 없습니다.
한 때 논란이 일었던 칠천량전투의 한 장면으로 왜군이 포를 사용하던 방식입니다.
이 포가 블랑기 포인데, 제대로된 포가가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묶어서 사용하거나 임시 거치대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왜군의 화포사용에 대해 다른 사이트에서 이미 비난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로 원시적이었을리 없다'라고 막연한 주장을 하기 보다는 근거자료를 제시한 후에 반박을 해야겠죠.
제가 지금까지 봐온 일본자료에서는 전용포가에 앉힌 대형화포를 본 적이 없습니다.
블랑기포는 보기에는 위력이 더 세 보입니다. 그런데 탄창 교체식으로 사격속도는 빠르지만, 밀폐형이었던 조선화포에 비해 밖으로 새나가는 에너지 손실이 커서 사거리나 위력면에서 크게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25년 후에 일본에서 벌어졌던 오사카 성 공방전에서는 화포가 대거 동원되었습니다만 그 때 조차도 영국 상인에게서 사들인 서양식 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용포가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비록 현대에 그린 그림이지만 나름 일본역사에 정통했다는 역사학자의 자료에 따라 그려진 그림입니다. 블랑기포를 꽂을대에 끼워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군의 육상포대 장면입니다.
위 흑백그림에서와 같이 임시 포가를 만들어서 발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은 그냥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역사기록에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위 흑백그림을 재현한 것입니다.
왜군이 화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나마 있는 화포도 조선 수군에 비해 상당히 어설프게 사용했다는 기록은 이 밖에도 많습니다.
그리고 오사카 전투 당시에도 화약제조 기술이 뒤떨어져서 영국 상인에게서 화약을 사들이는 기록이 있습니다.
... 내가 가지고 있던 화약은 모두 히라도(중간 물류지)로 돌려보냈다... 여기(오사카)에서는 아무도 안사기 때문에 보내는 수 밖에 없다... 황제(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라도에서 피컬(pecul, 중국식 단위 약 60kg)당 6타이(일본 단위)에 샀으니까 네덜란드인이 가진 것까지 합쳐서 황제에게 모두 팔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기록은...)
내가 편지에 썼듯이 여기(오사카)에서 화약을 급하게 원하고 있다. 지난 번에 되돌려보낸 화약이 모두 팔리지 않았거나 상태가 좋으면 특급으로 사카이(히데요리 소유의 무역항)로 보내기 바란다... 화약 가격이 이제는 피컬 당 26 타이로 치솟았지만 아마도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다. ...
왜군이 거리를 붙는다고 해도 질려탄과 같은 대형 투척폭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 외에도 지연신관과 파편이 위력적인 비격천진뢰도 사용되었습니다.
왜군도 투척용 폭탄을 사용했지만 화약기술이 워낙 떨어져서 조선 수군에 비해 상당히 작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회능력이 뛰어난 함선과 사거리가 월등한 대형화기가 있었기 때문에 해전에서는 보기 드문 진형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왜군의 전력이 약해 전투를 기피할 때에는 소형 전선을 투입해 싸움을 걸고 위장후퇴하며 유인해내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왜군의 전력이 대등하거나 우위에 있을 때에는 거북선을 투입해 적의 기함(안택선)을 먼저 전열에서 빠지게 만들어서 왜군이 진형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만든 후에 학익진과 같은 정교한 진형전술로 적의 주력을 궤멸시켰습니다.
드디어 거북선이 등장했는데, 과연 해전에서 거북선은 어느 정도의 비중이었을까요?
임진왜란 이후에는 너무 많은 거북선이 만들어져 파기되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겨우 3척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의 전과는 상당한 과장이 분명합니다.
적의 기함을 잡는 돌격선으로 투입되었을 뿐 적의 주력과의 치열한 전투는 모두 판옥선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거북선의 모습도 실제와 다를 수 있는 예상일 뿐입니다.
거북선의 외양에 대해 막연한 서술만 존재하고 실제 잔해나 그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2층이었을지 아니면 전투력이 훨씬 높은 3층 구조였을지, 선수의 거북 머리가 목적이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다양할 뿐만 아니라...
학계를 긴장시켰던 이 그림에서는 매우 다양한 거북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임진왜란 50~100년 후에 우리의 자료를 보고 일본인이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흔히들 오해하고 있듯이 이 순신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만든 분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200여년 전에 이미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나올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3척의 거북선 중에 이 순신장군이 진수한 것은 한 척뿐이고 나머지 2척은 이미 전라좌수영에 있었다고 합니다.
훨씬 더 많은 그림자료와 설명을 이어가고 싶지만 이번 이야기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끝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조선수군은 이미 왜군을 압도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이었고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활용하신 분이 이 순신장군입니다. 제가 조선수군 전력을 설명한 것만 가지고 이 순신장군의 전과를 낮춰서 다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력을 가지고 다른 분들은 패전을 당했고, 이 순신장군은 공포에 질린 패잔병과 13척만 가지고 다시 전선을 복구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의 함선이 튼튼해도, 화기가 위력적이었어도, 군사가 사기가 높았어도 이 순신장군이었기 때문에 그 3박자를 제대로 활용하고 100%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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