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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4부)

by uesgi2003 2012. 11. 5.

이번 이야기는 제가 궁금해서 위키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잔다르크 분량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명단을 가져온 책은 저작권때문에 인용할 수 없어서 위키와 다른 웹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료는 IE에서 포맷이 제대로 연결되며, 대부분의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발음은 불편하다는 분들이 많아서 현지어가 아닌 외국어 표기법을 따르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에르난 코르테스 같은 경우는... 영어식 헤르난 코르테스로 하던가 아니면 스페인어 에르난 꼬르떼스로 하던가 해야 할텐데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불편하다고 하니 안타깝지만 널리 알려진 표기 관행을 따라야겠죠.

 

5부에서는 이순신장군님이 드디어 등장하시는데... 워낙 대단한 인물이어서 따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예정

24. Ivan IV
25. Yi Sun-sin
26. Tokugawa Ieyasu
27. Maurice of Nassau
28. 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Peter the Great
30. Robert Clive
31. George Washington
32. Benedict Arnold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19. 잔다르크(Joan of Arc) -  1412년~1431년

프랑스의 국민영웅이자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린다.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부르고뉴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잉글랜드 측에 넘겨졌고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과 이단혐의를 씌워 화형에 처했다. 당시 나이 19세였다.  그로부터 25년 후에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무죄라는 최종 판결을 내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다.

현재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차대전 당시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라퓌셀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와 만화, 소설, 회화 등의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잔 다르크는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여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왕국 간에 백년전쟁이 벌어졌다.  거의 모든 전투는 프랑스 영토 내에서 일어났으며, 잉글랜드군의 공격과 횡포로 인하여 프랑스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프랑스 인구수는 이전 세기에 휩쓸었던 흑사병 피해 이후 아직 회복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으며, 상인들은 외국 시장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에 영국은 프랑스 영토를 거의 점령하였으며, 프랑스는 거의 30년 동안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었다(그림 참조).

잔 다르크가 태어난 당시 프랑스 국왕은 샤를 6세였는데, 종종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기 어려웠고 샤를 6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샤를 6세의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장 간에 프랑스 섭정 및 샤를 6세의 자녀들에 대한 법정 후견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 간의 다툼은 샤를 6세의 왕비인 바이에른의 이자보와의 간통 및 왕손들의 납치 혐의 고소로까지 격화되었다. 결국 1407년 부르고뉴 공작의 지시로 오를레앙 공작은 암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오를레앙 공을 따르던 세력과 부르고뉴 공작을 따르던 세력은 각각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라는 이름의 파당을 결성하였다. 프랑스 내에서 이처럼 권력 다툼이 심화되자 영국왕 헨리 5세는 이를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로 여겼다. 1415년 영국군은 아쟁쿠르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북부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샤를 7세는 형들이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14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제1왕위계승자인 도팽(왕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첫 번째 정치적 행보는 1419년 부르고뉴 공작과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이 조약은 아르마냐크파 사람들이 도팽 샤를이 안전을 직접 보증하고 열린 회담장에서 부르고뉴 공작 장을 암살함으로써 재앙으로 끝났다. 새 부르고뉴 공작이 된 필리프는 부친이자 전직 부르고뉴 공작의 암살 문제로 도팽 샤를을 배척하고 영국과 손을 잡았다. 프랑스 영토의 상당 부분이 영국-부르고뉴 동맹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1420년 프랑스 왕비 이자보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아들인 도팽 샤를 대신에 영국 헨리 5세 국왕과 그의 후계자에게 넘긴다는 내용의 트루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이자보 왕비와 사망한 오를레앙 공작 사이에 일어났던 스캔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도팽 샤를이 샤를 6세의 친자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헨리 5세와 샤를 6세는 1422년에 각자 후사를 남긴 채 2개월 간격을 두고 사망하였으며, 헨리 5세의 아들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헨리 6세는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존(베드포드 공작)이 섭정을 했다.

1429년 초에는 프랑스 북부의 거의 모든 지역과 남서부의 일부 지역이 모두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부르고뉴파가 랭스를, 영국은 파리를 거점으로 통치하였는데, 랭스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장소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아직 어느 쪽 프랑스 왕위 주장자도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프랑스 왕실을 지지하는 얼마 안 남은 도시 가운데 한 곳이자 루아르 강을 따라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공격했고, 오를레앙은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성이었다. 어떤 현대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프랑스 왕국 전체의 운명이 오를레앙에 달려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12살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적대 세력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 성으로 가서 샤를 왕세자를 만났다. 반신반의하던 도팽은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에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팽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도팽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잔 다르크는 샤를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역사학자 스티븐 W. 리키는 프랑스 왕실이 잔 다르크의 주장에 동조하여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유에 대해서 당시 거의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왕실에 있어서 잔 다르크가 이러한 난국을 타개해줄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잔 다르크는 도착하자마자 장기간에 걸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분쟁을 종교전쟁으로 효과적으로 전환시켰다.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받은 오를레앙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지키는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전투회의에서 배제시키고 적군과 교전할 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하기 일쑤였다. 잔 다르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의 및 전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전통적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잔 다르크가 순전히 앞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잔 다르크가 군 지휘관으로서 통솔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수준급의 전략가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양쪽 모두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 지휘관들의 신중한 전략들을 전면 거부했다. 잔이 오기 전 5개월간의 포위 기간 중에 오를레앙을 방어하던 프랑스 군사들은 딱 한번 공격적으로 나섰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그해 5월 4일 프랑스군은 생루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했다. 뒤이어 5월 5일에는 생장르블랑 요새로 진격했다. 다음날 잔 다르크는 참모회의에서 장 도를레앙의 의견에 반대하고, 적군을 재차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장 도를레앙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라고 지시했지만, 잔 다르크는 성내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주에게 가서 문을 열라고 요구했다. 장군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생아구스탱 요새를 탈환했다. 그날 밤 오를레앙에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참모회의에서 잔 다르크를 배제한 채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잔은 5월 7일에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인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전투 도중에 목에 화살을 맞고서도 살아남아 전투를 지휘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영웅으로 보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을 거두었다(그림 참조). 영국군은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이 파리나 노르망디를 재탈환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잔 다르크는 예상을 깨고 도팽 샤를의 대관식을 위해 랭스를 탈환하려고 했고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샤를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2일에 자제오를, 6월 15일에 멍서르와르를, 그리고 6월 17일에는 보장시를 탈환했다. 처음에는 잔을 못미더워하던 장 도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오를레앙에서의 그녀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고 결국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6월 18일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구원군이 도착해서 잉글랜드 방어군에 합류하였다. 파타이 전투는 흡사 아쟁쿠르 전투와 비견될 수 있는데, 결말은 정반대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수비 준비를 채마치기도 전에 프랑스 선발대가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군의 주요 전력이 모조리 분쇄되고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지원하러 온 존 패스톨프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나버렸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6월 29일에 지앙수루아르에서 랭스로 진격하였으며, 7월 3일 부르고뉴파가 장악하던 오세르에게서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다른 도시들도 프랑스가 탈환했고 7월 16일 랭스는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그림 참조-잔다르크의 랭스입성). 도팽 샤를의 대관식은 다음날 아침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샤를 7세는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이 기세를 몰아 신속하게 파리로 진군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왕실은 전쟁보다는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을 통해 휴전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역이용하여 파리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지연 술책으로 프랑스 왕실과 평화 협상을 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은 파리 인근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항복들을 받아냈다.

9월 8일에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하였다. 잔은 적진의 석궁에서 날아온 화살을 다리에 맞고서도 끝까지 군대를 계속 지휘하였다.

 

11월과 12월에 라샤리테쉬르루아르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은 후, 이듬해 4월에 잔은 콩피에뉴가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1430년 5월 23일 잔은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가 되었다. 부르고뉴파에서 6천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신하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당시에는 포로자의 국가나 집안에서 몸값을 주고 포로자를 돌려받는 것이 관례였지만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에 억류당한 잔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며, 훗날 많은 역사학자의 비난을 샀다. 영국은 거액을 주고 잔을 포로로 인도받았다.

잔은 비합법적인 종교재판을 받은 후에 1431년 5월 29일에 화형당했다.

 

(우에스기 왈: 프랑스 사람들이 왜 잔다르크를 영국에 넘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잔다르크 영화를 봐도 혼란스럽지 않겠군요.

백년전쟁의 주요 전투에 대해서는 크레시 전투 http://blog.daum.net/uesgi2003/114

푸아티에와 아쟁쿠르 전투 http://blog.daum.net/uesgi2003/115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잔다르크 영화 중에 오를레앙 전투만 제대로 올려둔 동영상이 없군요. 편집본이지만 아쉬운대로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U3O2FyiTlM&feature=related 

같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오를레앙 부근에서 영국군을 전투없이 몰아내는 장면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xcM8ilpHsfQ&feature=fvwrel)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 1432년~1481년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며 초대황제로, 1444년~1446년까지 2년간 통치하다가 퇴위한 후에 1451년 다시 즉위해 죽을 때까지 통치했다. 젊은 나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혀 ‘정복자(Fatih)’란 별명으로 불렸다.

 

메흐메트 2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에디르네에서 술탄 무라트 2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당시 세르비아의 흄 지방(현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그리스도교 노예로 알려져 있다. 메흐메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맏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마시아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둘째형이 아마시아 총독으로, 메흐메트는 마니사 총독으로 바뀌었다. 

둘째형이 죽자 메흐메트는 술탄의 계승자가 되었고 다음해 아버지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연합군과 평화협정을 맺고나서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12살의 메흐메트에게 술탄의 지위를 넘겨주고 남부 아나톨리아도 돌아가서 은둔했다.

메흐메트는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헝가리군과 싸워주길 바랐는데 아버지 무라트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결국 무라트는 전장으로 돌아와 바르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고 2년 후 아들 메흐메트를 퇴위시키고 다시 술탄에 복귀한다. 그러한 무라트 복귀의 배후에는 재상 할릴 파샤가 있었는데 그와 메흐메트는 서로 반목했다고 전해지며 나중에 메흐메트가 다시 정권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 동로마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당했다.

퇴위당한 메흐메트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니사에 머물면서 남색과 여색을 불문하고 난행에 젖어 지내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1451년 아버지 무라트가 죽자, 그는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정식으로 다시 술탄에 즉위했다. 두 번째로 치세를 시작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의 카라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귀환하던 도중 보스포루스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Rumelihisari, '유럽의 성')라는 요새를 건설하고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1453년 재상 할릴 파샤의 반대를 물리치고 출병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그림 참조)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는 다시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에 남아있던 비잔틴계 제후국들을 차례차례 정복했다.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흐메트는 새로운 로마제국의 황제로 자처하고 나섰다. 

 

발칸반도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등 유럽국가와 싸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세르비아를 합병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룸 셀주크 왕조의 해체 이후 각지에 할거한 여러 제후국을 정복하고 현재의 터키 국토라 할 수 있는 아나톨리아 전부를 손안에 넣었다.

1475년, 크림반도의 몽골제국의 일부인 크리미아 칸국을 정복하고 흑해를 오스만 제국의 바다로 만들었다. 30년에 걸친 두 번의 치세에 이르러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발칸 반도의 여러 왕국,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여러 세력을 정복해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오스만 왕조는 제국이라 불릴 수 있는 내실을 획득할 수 있었다.

 

소아시아가 안정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힘을 얻은 메흐메트는 그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의 계승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1480년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로마를 점령해 로마제국을 재통합하려고 했으나 알바니아의 반란으로 배후를 차단당하고 교황 식스토 4세가 이끈 강력한 군대에 밀려 퇴각했다. 그러나 그는 발칸 지방에서 작은 군주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지방으로 확대하고 베오그라드까지 진출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유대인 의사가 가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메흐메트 2세 자신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짓고, 아라비아어로 풀이할 정도로 경건하고 교양있는 무슬림이었으나, 동시에 전통적인 이슬람 만을 고집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모았고, 자신의 초상화를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젠틸레 벨리니에게 그리게 하는 등 고전적인 이슬람 국가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제국의 군주로써 군림했다.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 1450년~1510년 

포르투칼의 군인이자 초대 인도총독으로, 1505년에 인도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슬람계 상인을 추방하고 포르투갈의 주권을 인도 서해안에 확립하기 위해 싸웠으며 요새를 구축했다. 1509년 디우전투가 끝난 후 알부케르크에게 총독을 물려주고 귀국하던 중에 아프리카 서해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은 1508년 차울 전투에서 죽었다.

 

당시 사회지도급 인사는 모두 그랬듯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했고 1476년 토로전투(Battle of Toro)에 참전했고, 모로코, 그라나다의 성전(Christian conquest)에도 참전했다.  

1505년, 포루투칼 왕 마누엘은 인도의 남서 해안에 4개의 요새를 건설한다는 조건을 붙이고 50대 중반의 알메이다를 포루투칼 인도령의 첫 번째 총독으로 임명했다. 22척의 전함, 1,000명의 선원과 1,500명의 병사와 함께 알메이다는 리스본을 3월 25일에 떠났다. 함대의 임무는 향신료 무역로를 포루투칼이 장악하고 동아프리카와 인도 해안에 요새를 구축하고 무역소를 열어 지역 원주민과 향신료 교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희망봉을 돈 알메이다는 킬와(Kilwa) 항구를 점령했다. 500톤 전함이 충분히 정박할 수 있는 훌륭한 항구였기 때문에 전함 한 척과 80명의 병사를 남겼다.  

1505년 8월, 북쪽의 몸바사 항구로 진격해 몸바사의 적인 멜린데 술탄의 지원을 받아 아랍 시크교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점령했다. 항해로를 따라 요새를 건설하고 병사를 남겨둔 탓에 10월 31일 코친(Cochin)에 도착했을 때에는 8척의 전함밖에 없었는데, 현지 원주민은 이미 포루투칼 상인을 죽인 후였다. 그는 아들에게 6척의 전함을 주어 퀼론(Quilon) 항의 배 27척을 불태우고 코친에 요새를 세웠다.  

 

칼리쿠트(Calicut)의 자모린(Zamorin)은 200척의 배를 준비해 포루투칼 함대에 맞서려고  했지만 알메이다의 아들 로렌쿠 드 알메이다( Lourenço de Almeida)가 칸난노레 항구 입구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자모린의 함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Battle of Cannanore (1506)) 승리를 거둔 로렌쿠는 남쪽 콜롬보(현재의 스리랑카)까지 항해했고 그동안 자모린은 칸난노레 영주를 설득해 포루투칼 함대에 맞섰다.

1508년 3월, 포루투칼 함대의 공격에 피해를 입은 이슬람 상선의 요청에 따라 맘룩 이집트 함대가 포루투칼의 함대를 인도에서 밀어냈다. 차울전투(Battle of Chaul)에서 로렌코가 전사했다. 1508년 말에 알메이다 대신에 총독에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은 아폰소(Afonso de Albuquerque)가 합류했지만 아들의 복수와 포로로 잡힌 부하들을 되찾으려는 알메이다는 명령을 거부하고 아폰소를 체포했다.

 

1509년 알메이다는 봄베이까지 항해해 2월 3일 벌어진 디우전투(Battle of Diu)에서 베니스와 라구사의 지원을 받아 맘룩 이집트, 오토만 제국과 자모린의 연합함대를 궤멸시켰다. 패배를 당한 이집트와 오토만제국이 인도해에서 물러났고 포루투칼은 100년 넘게 인도항로를 독점할 수 있었다. 1509년 포루투칼 총사령관이 대함대를 이끌고 오면서 아폰소는 3개월 동안의 감금에서 풀려났다(그림은 디우와 포루투칼 요새).

알메이다는 1509년 12월에 귀향항해에 올랐고 1560년 2월 희망봉 근처의 테이블만에 도착해 식수보급을 위해 상륙했다. 지역 원주민과 처음에는 정상적인 교역을 했지만 다음 날 부하들의 약탈을 해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상륙정이 철수해 후퇴할 방법이 없는 것을 본 원주민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 알메이다와 선원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알메이다의 시체는 그 날 오후에 되찾아 케이프타운의 해안에 뭍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초로 죽은 유럽인으로 기록된다.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 1484년~1547년

멕시코 지역의 아즈텍 문명을 정복한 스페인 탐험가. 하급 귀족 출신으로 살라망카 대학에서 수학 후 19세 때인 1504년 대서양을 건너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근무하였다. 1511년 총독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휘하에 있으면서 쿠바를 점령하였고 이 전투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다.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지만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틀락스칼라인들은 한번의 전투후 코르테스에게 항복했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아즈텍 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 왕국에 들어갔으나 황제 몬테수마2세가 베라크루즈를 기습해 오히려 황제를 사로잡을 구실을 만들어주었고, 황제는 포로신세로 변하게된다. 그의 행동을 좋지않게본

쿠바총독 벨라스케스가 판필로 나르에바스에게 900명의 스페인 병사와 500명의 흑인노예를주어 코르테스를 토벌하라고한다. 결국 수비대장 후안 데 에스칼란데가 전사하자 부관이자 친구였던 알바라도에게 100명의 군대를 남겨주고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떠난다. 그는 우이칠포로치틀리 봄축제를 즐기는 아스텍귀족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판단, 군대를 이끌고와서 귀족 1만명을 학살했다.

 

코르테스일행이 승리를거두고 돌아왔을때 분위기가 심상치않았고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도시를 빠져나가려하지만 포위당한다. 그래서 황제로 하여금 설득하라고하지만, 황제는 흥분한 관중들의 돌과 화살을맞고 사망한다. 코르테스는 일행을 데리고 6월 30일 탈출을 시도하지만, 아스텍인들의 공격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석궁과 대포, 철갑옷, 철검, 철투구, 화승총 등의 무기들을 탈취당한다. 동맹국 틀락스칼라까지 150마일의 지옥의 행군을 해야했다.

그들은 7월7일 오툼바에서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타쿠바 [아즈텍 삼각동맹]군 4만을 보게된다. 모든병사들이 크고작은 부상을입은상태였고, 석궁이나 화승총도 없었다. 스페인 400명과 1~2000명의 틀락스칼라인뿐이었다. 코르테스는 단단한 사각진형을짜고 에스파냐인 뒤에 틀락스칼라인들을 배치했다. 틀락스칼라인들은 크게 환영했는데, 그들은 아즈텍군을 크게 두려워했고, 스페인군과 전투를한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무기의 강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병은 부관에게 맡긴뒤 자신은 23기의 대부분 부관출신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를 이끈다. 그는 후방에서 적을 지휘하는 시우아코아틀[나우나틀어로 군사지휘관]을 죽였고 나머지 아즈텍 부관들은 그의 기병대가 살해했다. 시우아코아틀이 죽은걸 안 아즈텍군은 모두 달아났다. 사상자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으나, 몇 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코르테스와 부관들이 죽인 지휘관들은 몇안되는 나머지 아스텍 귀족들이므로, 아스텍의 피해는 매우 컸다.

 

9월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옮겨온 천연두가 창궐하자 엄청난 아즈텍인들이 죽었고 황제마저 병사하자 마지막 황제 쿠아우테목이 즉위한다. 그는 몬테주마의 직계도 아니었고 몬테주마의 자식들을 죽여 많은 귀족들의 반감을사게 된다. 쿠아우테목은 틀라텔롤코에서 최후의 항전의지를 보이고 모든 국경수비대를 모두 불러들이고,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파괴하고 한 개만 남긴다. 하지만 텍스코코호수를 관장하던 텍스코코가 코르테스에 항복하면서 호수의 소유권도 코르테스군이, 게다가 텍스코코인들도 아즈텍에 대한 반감때문에 코르테스에 군대를 지원하게되고, 결국 1521년 8월 13일 아즈텍은 항복하고, 테노치티틀란은 점령당하게 된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26년 월권혐의로 파면되었고,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왕을 설득해 재차 멕시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만을 발견했다. 1540년 귀국한 후,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냉대를 받아 실의 속에 죽었다.

 

(우에스기 왈 : 금으로 된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스페인 탐험가들은 멕시코의 화려한 문명을 발견했고 스페인은 여기에서 발견한 엄청난 양의 황금을 바탕으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에르난 코르테스의 원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uesgi2003/21

멕시코 원주민의 복장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22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다양한 관점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위키 자료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 1471년 또는 1476년~1541년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탐험가. 스페인 트루히요에서 태어난 곤잘레스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글을 읽지 못했으며 헤르난 코르테스와는 사촌이었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출생년도가 불분명하다. 

 

 

1509 11 10 신세계를 향한 항해에 나서 1513년에는 발보아의 태평양 원정에 동참했다. 1514, 발보아를 체포한 공으로 파나마 시티 시장으로 1519~1523 4 동안 재직했다.

멕시코에서의 코르테스의 성공과 페루의 보물 소식에 자극을 받은 그는, 1524년과 26 차례에 걸쳐 잉카제국 원정에 나섰지만 원주민의 저항, 충분하지 않은 보급, 나쁜 날씨때문에 실패했다.

파나마 총독은 피사로를 소환했지만 그는 거부했고 1528 4 페루 북부에 도착해 귀금속을 가진 원주민을 만나게 되면서 페루를 정복할 번째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총독은 원정을 허가하지 않았고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카를 1세에게 계획을 설명해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1530 원정을 떠날 있었다.

 

 

적대적인 원주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내륙으로 들어가 페루의 미겔 피우라(San Miguel de Piura) 번째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했다. 잉카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 스페인 원정대와 1532 11 16일에 벌인 카하마르카 전투(Battle of Cajamarca)에서 포로가 되었고 몸값으로 엄청난 황금을 제시했지만 피사로는 1533 7 26 황제를 처형해 원정대의 반감을 샀다.

 

같은 ,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Cuzco) 점령하면서 페루 정복을 완성했다. 1535 1, 피사로는 리마를 건설했지만 오랜 동안 동료로 지냈던 디에고 알마그로(Diego Almagro) 사이가 벌어져서 라스 살리나스 전투(Battle of Las Salinas) 벌어졌다. 알마그로가 1541 6 26 처형되자, 그의 아들이 피사로를 리마에서 암살했다. 피사로는 리마 수도원에 뭍혔다.

 

역사가들이 피사로와 코르테스의 페루와 멕시코 정복을 비교하면서 피사로의 성과를 높이 사는데, 피사로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했고 스페인 정착지에서 훨씬 멀리까지 원정을 떠났기 때문이다.

 

피사로의 유족은 트루히요에 정복자를 기리는 궁전을 지었지만, 페루인은 그를 고유 문화, 언어, 종교를 말살한 정복자로 생각하고 있다.

 

(우에스기 왈: 피사로와 관련된 영화로는 'Aguirre, the wrath of god'이 유명한데, 이 영화는 감독의 고집이나 주연의 열연으로 영화사에 손꼽히는 명작 중 하나입니다.

다행히 유투브에 전편이 올라가 있는데 40년 전 영화이니까 요즘 취향으로는 상당히 지루할 수 있지만, 어떻게 저런 고생을 해가며 영화를 찍었는지 감탄하게 만듭니다. 영화 속에서도 고생이 보이는데 실제 원정대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겠죠.

처음 5분 정도는 꼭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8zFqHXUBzX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