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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예정
19. Joan of Arc
20. Mehmed II
21. Franciso de Almeida
22. Hernán Cortés
23. Francisco Pizarro
24. Ivan IV
25. Yi Sun-sin
26. Tokugawa Ieyasu
27. Maurice of Nassau
28. 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Peter the Great
30. Robert Clive
31. George Washington
32. Benedict Arnold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15.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 1028년~1087년
윌리엄 1세 또는 서자왕 윌리엄(William the Bastard)라고도 불리며 영국에서 노르만 왕조를 연 시조였다. 1035년 노르망디 공작이 된 후에 노르망디 공국을 서 프랑크 왕국과 비교될 정도로 확장했다.
1066년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했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 왕 해럴드 2세에게 크게 승리해 노르만 왕조가 되었다.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위탄회의(Witangemot)는 즉각 해럴드 2세를 영국 왕으로 선출했다. 해럴드는 선왕의 처남이었는데, 당시 노르망디를 통치하던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생전에 자신에게 영국 왕위를 약속했었고, 해럴드 또한 자신의 가신이 되기를 서약했었다고 주장했다다.
그러나 당시 웨섹스 가문의 영국은 위탄회의에서 왕을 선출하는 구조였기에 해럴드의 왕위계승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해럴드가 윌리엄의 가신이 되기로 서약하였다는 것은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억지로 한 것이었으므로 무효였다. 윌리엄은 영국 왕실과 혈연관계(옆의 그림 참조)가 없었기 때문에 영국민은 해럴드를 지지했다.
윌리엄은 결코 잉글랜드 왕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윌리엄은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해럴드의 왕위계승이 부적절함을 탄원하였다. 당시 영국교회는 지리적 위치로 로마보다는 왕권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로마의 권위아래 통일된 법률과 관행을 통용시키려는 교황에게는 좋지않은 징조였다. 교황은 영국교회를 자신의 통제권에 두기 위해 즉각 윌리엄을 지지하였다. 이에 고무된 윌리엄은 즉각 영주들을 소집했지만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정을 거부했다. 이에 윌리암은 프랑스 내에 원정군을 모집하는 초청장을 뿌리며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이에 호응하여 8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자원하여 원정군을 편성할 수 있었다.
윌리엄이 원정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잉글랜드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해럴드의 형 토스티그(Tostig)가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영국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해럴드는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침입에 대비하여 소집해 놓은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신속하게 북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킨 해럴드는 요크셔의 스템포드 브리지(Stamford Bridge)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토스티그를 격멸한 해럴드는 쉴 틈도 없이 윌리엄의 상륙을 방어하기 위해 급히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토스티그의 침입은 해럴드에게는 불운이었지만 윌리엄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해럴드가 토스티그와 싸워 승리를 거둔 3일 후, 1066년 9월 28일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영국 남부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윌리엄은 헤이스팅즈로 진격해 진지를 구축했고 토스티그와의 전투로 손실된 군사를 마구잡이로 충원한 해럴드는 헤이스팅즈에서 11㎞ 떨어진 지점에 진을 치고 윌리엄의 군대와 대치했다. 해럴드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가까운 혼성부대였지만 윌리엄이 쉽게 격파할 수 없었다.
10월 14일 새벽, 노르만 기사단이 영국군이 기습했고 노르만 기사단은 해럴드군을 헤이스팅스에서 북서쪽으로 16km 지점까지 몰아붙이며 전투에서 승리했다. 윌리엄은 해럴드의 어머니와 평화를 맺은 다음에 1066년 성탄절에 왕이 되었다.
영국교회의 축하를 받으며 왕위에 앉은 윌리엄은 제일 먼저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지역을 원정에 함께 나선 영주들에게 줬는데 윌리엄은 제후들이 봉토로 하사받은 영지를 그들의 봉신(subvassal)들에게 다시 줄 수 있게 허락해 기사들이 자신의 영지를 가지는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통치자인 노르만인은 1만 명이었고 영국인은 2백만 명 정도여서 언제라도 내전이 발생할 수 있었고 윌리엄은 자신이 노르망디 출신인데도 참회왕 에드워드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포했다. 윌리엄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옛 관습과 앵글로-색슨의 법을 유지하고 존중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결과 법정은 계속 관습법을 시행했지만 대륙의 관습에 따라 성속聖俗으로 분리하게 되었고 주교는 더 이상 주장관과 함께 세속의 법정에 배석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법정을 갖게 되었다.
(그림 설명: 1087년 윌리엄이 죽을 당시의 영토. 스코틀랜드는 아들 윌리엄 2세가 합병한다.)
사법권을 정리한 윌리엄은 권력층에서 영국인을 몰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당시 앵글로-색슨 계통의 영국귀족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귀족은 단 2명에 불과했고 윌리엄으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은 노르만 제후 200여명이 영국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다스렸다. 지도층을 정비한 윌리암은 1070년경부터 교회의 주교와 수도원장을 노르만인으로 교체해 이후 영국에서는 앵글로-색슨인을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하지 않아 평민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와 수도회도 장악했다.
이와 함께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봉건관행을 영국에 도입해 조정(朝廷, curia)이 위탄회의를 대체하였다. 그리고 유력한 노르만 제후들에게 영지에 대한 경찰재판권(sac and soc)이 허락했고 심지어 사형선고권도 주었다. 그리고 1086년 윌리엄은 대 제후들에게 분봉받은 봉신(subvassal)들을 소집하여 직속주군에 대한 충성보다 왕인 자신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는 충성서약을 하게 함으로써 영국은 11세기의 혼란스런 유럽대륙에 비해 평화스럽고 질서잡힌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평화가 지속되자 윌리엄과 제후들 사이에 유지되었던 일체감이 사라지고 긴장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앵글로-색슨 왕들이 누렸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 반면에 잉글랜드의 제후들은 노르망디의 제후들이 누리고 있는 자치권을 원했다. 제후들은 왕권을 약화시키려고 애썼고 윌리암은 왕의 대리인인 주장관의 세력이 제후들을 견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러나 제후들도 윌리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노골적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윌리엄이 죽고 둘째 아들 윌리엄 2세가 즉위하자 내전이 일어났고 교회와도 심각한 불화가 일어나게 된다.
16. 살라딘(Saladin) - 1138년~1193년
본명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는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유럽의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등지를 통치하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그는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1138년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Najm ad-Din Ayyub, ? - 1173년)가 1139년에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삼촌 아사드 알딘 시르쿠(Asad al-Din Shirkuh)와 함께 모술로 갔다. 그의 아버지는 이마드 앗딘 장기(Imad ad-Din Zengi)의 부하가 되어 바알베크(Baalbek) 요새 수비대장이 되었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딘은 그의 삼촌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이집트 파티마 왕조와의 전투에 승리해 1169년부터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집트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시리아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딘은 이름뿐인 칼리프 알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부터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면서 이집트 칼리프에 오른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했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하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영토를 넓혔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그림 참조).
살라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으며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했지만 1177년 11월 25일,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 맞닥뜨린 살라딘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본국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178년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은 후에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샤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자,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날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딘은 바이트 알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했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무력으로 함락시키려고 했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이 5천 명 정도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유럽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했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딘은 리처드와 싸워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살라딘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보고 놀랐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있으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은 유럽에 너그러웠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는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다른 많은 작품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리처드 1세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우에스기 왈: 역사상 최고의 기품을 지닌 위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평생을 분열된 이슬람 왕조를 통일하고 십자군과 같은 외세를 막아내면서 보냈는데, 만약 그가 평화시에 왕위에 올랐다면 이슬람 왕조는 가장 영광스러운 한 세대를 보냈을 것입니다.
살라딘에 대한 영화는 '킹덤 오브 헤븐(Kindom of Heaven)에 잘 표현되었는데 스콧 감독의 고증과 균형에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하틴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http://blog.daum.net/uesgi2003/19
아르수프 전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본편은 http://blog.daum.net/uesgi2003/12
보충편은 http://blog.daum.net/uesgi2003/13 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 1162년~1227년
징기스 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정복한 몽골제국의 창업자이자 초대 대칸이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합리적 인사제도인 능력주의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군사,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징기스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해,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했다.
그는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열었다.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라크,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쿠웨이트, 터키, 키프로스, 시리아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당시 고려와는 오랜 전쟁끝에 강화를 하고 고려의 자주권을 인정하는데, 이는 고려의 저항이 40여년 동안 지속되고 산악 지대가 많은 고려 정벌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끝까지 저항하는 고려인들을 힘만으로는 더이상 굴복시키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몽골군은 베트남 정벌에 실패했는데, 이는 밀림 지대인 베트남에서 몽골군의 주력인 기병이 제대로 힘을 쓸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우에스기 왈: 보통 위인은 국력을 확장하면서 피해를 주는 동시에 혜택도 준 인물들이지만 일부는 자국만을 위한 철저한 약탈과 압제를 한 악인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인간승리, 자국의 분열을 통합한 뛰어난 정치와 군사 행위 중에는 후세에 배워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나머지는 악인이 하는 악행에 불과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징기스칸인데 초원의 야만족에 불과했던 몽골을 통일하고 역사기록이 시작된 후로 가장 방대한 영토를 점령했지만 그들이 지나간 곳은 시체와 잔해가 전부였습니다.
몽골인의 전략/전술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6
몽골인의 유럽원정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4
징기스칸의 호라즘 원정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uesgi2003/76 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 1107년~1205년
1193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고 제4차 십자군의 비잔티움 제국의 침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도제는 천여 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했던 최고 지도자의 명칭이다. 이 명칭은 라틴어로 ‘지도자’란 뜻의 둑스(Dux)로부터 유래되었고, 현대 이탈리아어에서도 ‘지도자’란 뜻의 두체(Duce)와 영어의 ‘지도자’, 혹은 ‘공작'을 뜻하는 듀크(Duke)와 상통하는 말이다. 한국어로는 이탈리아어를 그대로 말한 ‘도제’란 말이 가장 일반적이고, 그밖에 ‘통령’과 ‘원수’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이 선출했다.
일반적으로 도제로 선출되는 시민은 베네치아 공화국 내에서 가장 명민하고 통찰력 있는 원로였다. 종신 임기의 도제가 존재하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화국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군주제적인 요소가 섞인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비탈레 단돌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있지 않다. 엔리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1172년 비잔티움과 베네치아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때 공화국의 사절단으로 비잔티움제국으로 가서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와의 실패한 강화협상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설에 의하면 엔리코 단돌로는 이때 실명을 당했다고도 하며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가졌다고 한다
단돌로는 두번이나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의 베네치아 대사로 파견되었고 언제나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193년 1월 1일,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39대 도제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미 시력을 잃고 노인이었으나 단돌로는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야심만만하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1202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비롯한 십자군기사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십자군원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단돌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네치아의 이익을 취하기로하고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선단을 빌려줌과 동시에 베네치아군도 출진하기로 하였다. 원래 십자군의 의도는 이슬람 세력의 배후인 이집트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무역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단돌로는 원래 인원의 3분의 1밖에 오지 않아 베네치아 배의 수송비를 대지 못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무역 기지였다가 얼마전에 헝가리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자라를 되찾아줄 것을 제의했고 십자군은 자라를 공격했다(그림 참조).
당시 헝가리 왕국은 이미 기독교 왕국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 전체를 파문해 버렸다. 십자군은 사절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여 파문을 풀었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베네치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한데 만족하지 않고 다시한번 십자군을 베네치아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조정했다. 다음 목표는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부유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비잔티움의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자신의 삼촌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눈이 먼 아버지 이사키우스 앙겔루스 의 복위를 십자군에 제의했고 단돌로는 십자군을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게 했다. 1203년 6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시작했는데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좀처럼 정복할 수 없었다. 이때 장님에다 노인인 단돌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상륙을 지휘하고 자신이 직접 산마르코 깃발(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을 땅에 꽂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에게 배상금을 요구했고 결국 알렉시우스는 반란으로 쫓겨났다. 1205년 초, 십자군은 엔리코 단돌로의 선동으로 다시한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이번에는 엄청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 때도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고 결국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정복한 땅을 거래하여 크레타 등의 무역 기지를 얻는다.
또한 단돌로는 라틴 제국의 초대황제의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되면 공화국에게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후보가 되지 않았으며, 동료 베네치아인들을 설득해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제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황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들을 마치고, 단돌로는 병에 의해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다.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중세의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팔순의 노인에다 장님이 된 상태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당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베네치아에서는 이 위대한 도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공화제의 정신에 해가 가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 베네치아의 전통에 의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조차 하기아 소피아 성당(그림 참조)에 있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과 개인적인 야심으로 인해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십자군 약탈자들의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 엔리코 단돌로는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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