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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종결자, 세키가하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는 다이묘들 간의 전투로 유명하다. 17세기 초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향후 250년 동안 일본을 통치할 가문이 결정된다.
1598년 불세출의 영웅, 아니 군사독재자인 도요또미 히데요시(風臣秀吉)가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원정을 떠났던 봉건영주(다이묘)와 사무라이들도 귀국을 한다. 1592년과 1597년 두 번에 걸친 원정은 노신(老臣)들 간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의 상처를 남겼다. 바로 유능한 행정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오만한 태도가 분열의 원인이었다. 미쓰나리는 차 접대에서 워낙 뛰어난 솜씨를 발휘해서 히데요시에게 발탁된 후에 남다른 행정실력으로 5부교 자리에 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워낙 재능이 뛰어나다 보니 무장들과의 사이가 극히 안 좋았고, 히데요시의 충복이자 조선원정을 이끌었던 전형적인 무장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그를 가르켜 “문관주제에 군무까지 아는 척하는 놈”이라고 반감을 드러냈다.
(우에스기 왈: 5부교는 토요토미 정권말에 내정을 책임지는 최고 행정관으로, 사법, 행정, 토목, 재정, 종교 담당이 있었는데 이 중에 미쓰나리가 행정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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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 마에다 도시이에와 가또 기요마사. 마에다 도시이에는 히데요시와 가장 절친한 친구로 미쓰나리가 가장 필요로 할 때에 사망한다.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공했던 두 선봉장 중 하나로 축성의 귀재로 알려져있다. 울산성이 그가 임진왜란 때에 지은 성이다.
오른쪽 그림: 구로다 나가사마와 엑스트라 무사. 나가마사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했었으며, 기요마사 등과 함께 원정 중에 미쓰나리에게 많은 망신을 당한다. 두 사람 모두 히데요시의 절대적인 충복이었음에도 히데요시를 버리고 동군의 이에야스를 선택할 정도로 원한이 깊었다.
천민에서 쇼군의 자리까지 오른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대신해 일본을 통치할 5부교 체제를 구성한다. 그렇지만 중세 영국의 섭정에서도 그랬듯이, 그가 죽자마자 강력한 다이묘들이 서로 세력을 지어 파벌을 만들게 된다. 그 중에도 조선원정에 참가하지 않아 막강한 전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9명의 아들과 딸을 동원해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가장 큰 세력(동군)을 이루며 노골적인 권력찬탈의 의지를 드러낸다. 자신을 히데요시의 재림으로 생각했던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반대 세력구축(서군)에 나서면서 일본 역사상 가장 크고 결정적인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우에스기 왈: 여기에서 잠깐 일본의 세 영웅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논밭을 일구고, 히데요시가 추수를 하고, 이에야스가 밥을 해먹었다는 말이 전해지듯이 앞의 두 영웅이 평생을 바쳐 닦아놓은 길을 이에야스가 행차하게 된다. 세 영웅의 성격도 완전히 다른데,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뻐꾸기는 죽이라고 했고, 히데요시는 울지 않으면 울게 구슬리라고 했고,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이에야스가 평생 굴욕의 세월을 참아가며 기다렸던 최고의 권력이 가장 가까이 온 시기가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다.)
평생 남다른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던 이에야스는 100회가 넘는 전투를 치른 맹장인 동시에 권모술수에 능한 간웅이기도 했다. 동군에 합류한 많은 다이묘 중에는 다떼 마사무네 (독안룡-외눈박이 용으로 알려진, 어릴 때의 천연두로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과 같은 무시무시한 다이묘들이 많았다. 미쓰나리의 서군에도 그에 못지않게 유력한 다이묘들이 참가했는데, 1578년에 암살당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뒤를 이은 우에스기 가게가쓰가 참여하고 있었다. 가게가쓰의 영토는 도꾸가와의 영토와 인접해 있어서 마치 그의 심장인 에도(현재의 도쿄)에 단검을 겨누고 있는 형상이었다. 가게가쓰가 이에야스의 사절을 암살하려고 하자, 마사무네는 전략요충지인 시로이시를 점령해서 가게가쓰의 대군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못박아 두면서 이에야스가 배후를 걱정하지 않고 원정을 떠날 수 있게 해준다.
왼쪽 그림: 세키하가라 본진의 이에야스와 혼다 다다까쓰. 이에야스는 서양식 갑옷을 입고 있는데, 다이묘들은 포루투칼을 통해 전해진 서양갑옷을 즐겨 입었다. 다다까쓰는 이이 나오마사와 함께 이에야스의 3대 용장으로 꼽힌다.
오른쪽 그림: 조선원정 당시의 다떼 마사무네와 이이 나오따까(나오마사의 아들). 마사무네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나다 유끼무라와 함께 설문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다.
(우에스기 왈: 드디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우에스기 겐신! 그가 얼마나대단한 인물인지는 가와나까지마 전투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가게가쓰는 겐신 공의 양자로 일본 역대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던 선친과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로 알려진다. 겐신 공의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심지어는 그가 한 달마다 정기적으로 두문불출했고 여자를 전혀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자였다는 설도 있다. 테로리가와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군대를 크게 이긴 후에 본격적으로 한 판 벌이기 직전에 사망한다. 가게가쓰가 선친의 피를 조금이라도 물려받았다면 이에야스의 뒤를 충분히 위협해서 이에야스가 영지에서 감히 30,000명의 대군을 빼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게가쓰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마사무네에게 묶여서 아무런 행동도 못 취하다가 120만석의 영지에서 30만석으로 감봉 당하고 가문이 몰락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전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져 일본의 전국토를 마치 체스판처럼 사용한 두뇌싸움이 치열했다는 점이다. 1회전은 혼슈를 관통하는 두 개의 주요 도로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도로는 토카이도(동해 도로)로 황실수도 교토에서 이에야스의 에도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하나였고 다른 도로는 나카센도로 산맥을 관통하는 도로였다. 이에야스가 서쪽으로 진출해 미쓰나리를 치려면 두 도로를 먼저 장악해야 했고,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의 동군이 진출하는 것을 막으면서 교토를 장악하려면 두 도로를 봉쇄해야만 했다. 교토 장악이 중요했던 것은 실제 권력은 없지만 상징적인 힘이 있었던 천황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천황에게서 어느 한쪽을 역적이라고 나무라는 교지를 받아낸다면 아직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군소 다이묘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선 1회전에서는 동군과 서군을 원하는 지점에 배치하기 위해 체스게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성따먹기 싸움이 벌어진다.
동군과 서군의 세력도: 동군이 모두 동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전국 곳곳에 산재해있었다. 그들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는 것을 맞지 못했던 것을 보면 당시 서군의 지휘체계가 치밀하지 못했고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전국의 다이묘가 총출동한 사상 유례없는 전투였다.
히데요시가 건설하고 이에야스의 봉신인 도리 마또타다가 주둔하고 있던 후시미 성을 둘러싼 전투는 양쪽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지 잘 알려주는 예다. 1600년 8월 27일, 미쓰나리의 서군이 이 성을 공격하는데, 마오타다는 10일간 저항했지만 함락이 임박하자 아들에게 무사도의 가치를 가르치는 편지를 몰래 보낸다. “나는 성 안에서 죽을 생각이다. 포위한 적을 뚫고 탈출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무라이의 참된 마음가짐이 아니고 주군에 대한 충성도 아니다. 수치스럽지 않게 죽어야 무사도라고 할 수 있다.” 마또타다를 비롯한 수비병 3,000명이 모두 전멸했고 공격하던 서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
동군은 후시미 성을 잃었지만 마사무네가 가게가쓰를 성공적으로 묶어두면서 이에야스와의 1회전은 무승부로 채점된다. 9월 28일, 동군의 이께다 데루마사의 1,800명 병사가 기후 성의 수비병을 제압한다. 이에야스는 가지 게임(Go game, 다이묘들이 전투기술을 갈고 닦았던 보드게임의 일종)을 하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만 취한다면 상대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던 전혀 상관이 없어. 다 필요없는 것들이니까”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에야스가 반드시 필요했던 말이 바로 기후 성이었는데 이 성을 점령하면서 나카센도 도로를 수중에 넣게 되었고 미쓰나리의 영토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10월 7일, 이에야스는 약 30,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에도를 나선다. 이와 동시에 (무능한) 아들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전략요충지만 취하는 계획과 달리 우에다 성(서군 사나다 마사유끼와 그의 아들 사나다 유끼무라가 지키는)을 포위한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아버지와 합류해야 했는데도 쓸데없이 시간을 끌었고 그나마 사나다 군의 저항이 워낙 거세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서 무능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우에스기 왈: 이 녀석의 대군은 아버지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나자 모습을 나타낸다. 사나다 가문도 상당히 우여곡절이 있는 전략전술의 대가들이다. 안타깝게도 가문이 위치한 지역이 우에스기 겐신의 영지와 가까웠고 모시던 주군도 요절하면서 제대로 꽃이 피지 못했지만 설문조사에서 1,2위를 다투는 가문으로 꼽힌다. 사나다 가문에 대해서는 오사까 공방전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자.)
10월 20일, 이에야스가 아카사카에 진출한다. 5km 떨어진 오가끼 성은 서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수비군을 몰아내지만 미쓰나리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이었다. 이에야스가 동쪽에 묶어두는데 실패한 이상 더 이상 성따먹기는 소용이 없고 단 한 번의 야전에서 승부를 보기로 한 미쓰나리는 한니발이 로마군을 전멸시켰던 칸나에 전략을 일본에서 재현할 생각이었다. 그 날 자정에 후꾸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에게서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그리고는 후꾸시마는 휘하 부대에게 “이제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피흘리는 적의 머리를 들고 오던가 아니면 우리 머리를 내주던지”라고 소리치며 사기를 북돋운다.
새벽 2시 이에야스는 동군의 75,000명 병사를 이끌고 미쓰나리를 향해 진군한다. 미쓰나리는 당시 80,000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새벽 4시에 후꾸시마가 이끄는 선봉대가 서군의 우끼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첫 번째 전투를 벌이면서 2회전이 벌어진다. 서군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전군을 동원한 야습을 제안하지만, 미쓰나리의 측근인 시마 사꼰(島清興)이 “야습은 강력한 부대를 상대로 할 때나 하는 전술입니다. 병력은 우리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라면서 반대를 해서 무산된다.” 사꼰은 요시히로가 이에야스에게 맞설 배짱이 없다고 은근히 비꼬는 것으로, 전투 후에 미쓰나리가 후회했을 대목이다. 미쓰나리의 본진은 야습을 펼치지 않고 서군의 좌익에 있는 사사오 산으로 물러난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면, 진영을 너무 넓게 펼친다는 단점도 있겠지만 전장터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모모쿠바리 산에서 진영을 세우고 휴식을 취한다. 세키하가라를 관통하는 중요한 도로에 본진을 펼쳐 동군이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우에스기 왈: 요시히로도 이름을 떨친 용장이었는데, 지방사람이어서 그런지 고집이 대단했다. 아마도 동군의 적과 마찬가지로 무관인 미쓰나리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는데, 나중에 재미있는 코미디가 벌어지니까 위의 말싸움을 잘 기억해두자.)
미쓰나리는 자신의 본진에 대나무 목책을 세우고 조총부대를 배치시킨다. 이에야스의 본진을 끌어들이기 위해 최전위에 가모 비추와 시마 사꼰의 소부대를 배치시켰고 근접지원을 위해 5문의 대포도 동원한다. 서군의 고바야까와 히데아끼(小早川秀秋)가 반대편 마츠오 산에 진영을 펼쳐 우익을 담당했는데, 다른 서군처럼 산에서 내려와 동군을 향해 포진한 것이 아니어서 상당히 이상한 진영이 되어버렸다. 히데야키는 서군으로 참전했지만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다짐한 터라 전투의 행방을 알기 위해 일부러 여기에 포진한 것이었다. 조선원정에서 미쓰나리가 히데야끼의 행동에 대해 너무나도 나쁜 평가를 해서 히데요시가 그의 336,000석 영토를 120,000석으로 줄여버렸기 때문에 미쓰나리를 미워하는 감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눈치빠른 미쓰나리가 그의 음모를 모를 리 없었지만 개전을 앞두고 그를 공공연하게 비난해서 그가 거느린 16,000명의 병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배반하기 전에 승패를 결정짓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야스의 배후를 봉쇄하기로 되어 있는 모리 데루모또의 15,000명 파견군과 함께 있던 깃까와 히로이에(吉川廣家) 3,000명도 개전과 동시에 이에야스에게 배반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에스기 왈: 테루모토의 파견군도 애매한 행동을 취하는데, 히로이에가 모리 가문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와 내통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전후 처리에서 이에야스가 취한 행동을 보면 판세를 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정국의 안정을 바라는 이에야스가 초대형 다이묘를 그대로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세키가하라에서는 지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세 개의 우뚝 솟은 산이 계곡을 둘러 싼 지형이다. 서군의 우익인 마쓰오 산에는 고바야까와 히데아끼가, 좌익인 사사오 산에는 미쓰나리 본진이, 그리고 배후에 멀리 떨어진 난구 산에 30,000명의 대군을 거느린 모리 히데모토가 이끄는 파견부대가 넓게 퍼진 형태로 포진했던 반면에, 이에야스의 동군은 중앙 계곡에 밀집된 형태로 동군은 미쓰나리 본진을 향한 정면돌파로 속전속결을, 서군은 우회포위를 통한 동군의 전멸을 노리는 작전이었다. 지저분한 배반과 감정싸움을 배제하고, 포진만 놓고 보면 이에야스가 포위된 계곡으로 찾아 들어가 패배를 자초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히데아끼가 배반을 하면서 한 순간에 우익이 사라져버리고, 동군의 배후를 압박하기로 되어 있던 모리 군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투에 전혀 참가하지 않아 오히려 미쓰나리의 칸나에 재현은 완전 실패로 돌아갔지만, 개전 전까지의 양군의 포진만 볼 때에는 이에야스가 미쓰나리의 유인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라는 목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대를 밀집대형으로 배치시킨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가 재능을 믿고 무장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다이묘들의 자부심을 한껏 치켜주며 신뢰를 하는 성격(울지 않는 뻐꾸기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이었고 휘하 무장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을 했는데, 세카가하라 전투와 같이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이에야스의 신뢰우선 전략이 더 적중하게 된다.
전날 내린 비로 새벽부터 짙은 안개가 산과 계곡을 덮고 있었다. 안개로 앞을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양쪽 모두 말 울음소리와 고함소리로 전투가 곧 벌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개가 잠시 걷혔다가 다시 자욱해졌을 때, 이에야스의 유명한 무장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3,600명 붉은 기병이 돌격을 시작한다.
이에야스의 아들과 함께 슬그머니 선봉으로 나서는 나오마사. 당연히 영화의 한 장면이다.
(우에스기 왈: 나오마사의 군대는 붉은 갑옷을 입어 井伊赤備라는 붉은 악마로도 알려져 있다. 선창을 지른다고 하는 최전위 부대는 그만큼 위험하지만 전국시대 무장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임무다. 나오마사는 전투계획과 달리 이에야스의 아들을 호위한다는 핑계로 새치기로 선공을 펼치면서 맹활약하는데 이 전투에서 당한 부상으로 사망한다.)
전투를 자신이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였던 만큼 이이 나오마사가 후꾸시마 마사노리의 부대를 재빨리 지나 공격에 나서자, 선공을 맡기로 했던 마사노리의 카노 사이조는 “선공은 마사노리 공의 몫이요. 어느 누구도 앞장서서는 안되오”라고 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공격에 참가한다. 미쓰나리에게 조선원정에서 모욕을 당해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다나카 요시마사도 덩달아 공격에 나서면서 한 번에 20,000명의 대부대가 서군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서군의 우끼다 히데이에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18,000명이 동군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지만 주로 히데이에의 부대가 그 공격을 받아내고 요시히로는 거의 방관하는 태도를 보인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무라이는 그 치열함을 “적과 아군 모두 서로를 밀어냈다. 총소리와 고함이 하늘을 덮었고 땅을 흔들었다. 검은 연기 때문에 밤처럼 깜깜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동군의 공격은 매서웠다. 미쓰나리의 대포 5문도 포문을 열었지만, 소리만 요란했을 뿐 실제로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이 지난 오전 10시까지도 양쪽 모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 못했고, 단 한치도 물러나지 않는 교전상황은 두 지휘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나오마사와 마사노리의 공격이 적의 방어선을 궤멸시킬 것으로 자신한 이에야스는 본진을 좀 더 앞으로 이동시켜 전투상황을 보다 잘 파악하려고 한다. 일본의 다이묘는 후방에 머무르면서 전투전개에 따라 작전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보통 때 같으면 침착했을 이에야스도 가신이 자신의 앞에서 시야를 방해하면 칼을 휘둘렀을 정도로 긴장했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스트레스에 무너지는 모습을 극도로 꺼렸는데 전투가 얼마나 박빙이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에야스가 본진을 앞으로 이동시키고 있을 때에, 이에야스가 가장 총애하는 혼다 다다카쓰가 외곽을 우회해서 서군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요시히로 군 사이를 파고 든다. 500여명 밖에 안되는 다다카쓰의 별동대(적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역할)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하나로 뭉쳐 다니며 그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나무 방책과 조총병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미쓰나리. 역시 영화의 한 장면.
미쓰나리의 방어선은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지만 문관의 부대답지 않게 잘 막아내고 있었으며 우끼다와 다른 서군 지휘관들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며 처음의 충격에서 벗어나 동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전투의 중심과 멀리 떨어져있던 난구 산에서도 전투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아사노 유끼나가가 이끄는 동군이 나카센 도로를 가로질러 산에 주둔하고 있는 모리의 부대에 접근한 것이다. 이 때까지도 모리의 대군은 전투에 전혀 참가하지 않고 있었는데 전위부대인 깃까와 히로이에가 고바야까와 히데아끼와 마찬가지로 전투의 행방을 지켜보며 행동을 참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가볍게 물리치고 더 이상 확전하지 않는다.
11시 30분이 되자, 이에야스는 박빙의 전투에 승부수를 던지기로 하고 본진을 더욱 앞으로 전진시켜 미쓰나리가 노리는 그물 안으로 들어간다. 고니시 유끼무라가 점차 본대로 밀려나면서 서군의 진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그 때까지도 후꾸시마와의 전투에 정신이 없는 히데이에의 좌측을 더욱 압박한다. 여기에서 균형이 무너지면 서군에서 배반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미쓰나리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직접 달려가 공세를 취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렇지만 전날 사꼰에게서 모욕을 당했던 요시히로는 “이번 전투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책임진 바를 다하면 됩니다. 다른 부대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라고 싸늘한 대답을 한다.
이제 전투의 승패는 균형이 언제 무너지느냐에 달려있었다. 아직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고바야까와 히데아끼는 여전히 마쓰오 산에서 시체를 노리는 독수리마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미쓰나리가 거의 3시간이나 동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그가 부대를 움직였다면 이날의 승자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요시히로도 미쓰나리의 간청에 못 이겨 나오마사의 지쳐있던 부대를 몰아내면서 약간이나마 서군으로 균형이 기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나병환자인 오타니 요시츠구는 히데이에의 우측에서 소수의 별동대를 이끌며 이리 저리 이에야스의 부대를 공격하고 다닌다.
고바야까와 히데야끼에게 신호를 보내는 미쓰나리. 영화의 한 장면.
전투를 반전시킬 수 있다고 느낀 미쓰나리는 횃불을 올려 고바야까와에게 마쓰오 산에서 내려와 동군의 좌측을 찔러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 횃불은 배후의 난구 산에 있던 깃까와 히로이에에게도 군대를 끌고 다가와 이에야스의 배후를 찔러달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러나 히로이에는 움직이지 않고 고바야까와 히데아끼의 깃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대군이 어디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날의 승부가 결정 나기 때문이었다.
미쓰나리의 반격이 의외로 성공하자, 히데아끼는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동군을 공격하자니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을 약속했던 데다가 미쓰나리에게 오래 전에 당했던 수모가 잊혀지지 않았다. 영지를 몰수당할 때에 이에야스가 옹호를 해줬던 기억도 났다. 위기에 몰린 이에야스는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사람을 보내 히데아끼가 자신에게 넘어올 것 같은지 묻는다. 이 질문에 짜증이 난 나가마사는 “당신만큼이나 나도 모르오. 그가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냥 미쓰나리 놈부터 잡으면 히데아끼나 히데이에는 더 쉽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말은 그렇게 했던 나가마사도 조바심이 나서 부하장수 오꼬부 이노스께를 보내 히데아끼의 움직임이 어떤지 알아보게 한다. 산을 힘들여 올라간 이노스께는 히데야끼의 측근인 히라오카 요리까쓰를 만난 자리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 찌를 듯한 위협을 하며, “전투가 이미 시작되었소이다. 이제 승패만 남았습니다. 귀공은 아직도 진영을 결정하지 못한 듯 한데, 나가마사 공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여기에서 당장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고 소리치고서는, 산을 급하게 뛰어내려가 다시 전투에 참가한다.
(우에스기 왈: 당시 미적거리며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히데아끼는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이 전투에서 가장 유유자적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히데아끼의 미적거리는 모습에 화가 난 이에야스는 조총부대에게 히데아끼를 향해 위협사격을 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임을 알아챈 히데아끼는 결국 이에야스에게 운명을 던지기로 결정하고 12시 15분에 부대를 산 아래로 내려 보낸다. “우리의 목표는 오타니 요시쓰구다!”
이미 배반을 짐작하고 있던 요시쓰구는 전투 중에 병력의 일부를 마쓰오 산을 향해 포진했었지만 16,000명의 대군 앞에 600명의 병력은 순식간에 포위당한다. 문둥병 때문에 온몸을 천으로 감싸고 있던 그는 도망가더라도 결국에는 이에야스 앞에 사로 잡혀 전리품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가신인 유아사 고로에게 목을 벤 후에 아무도 모르게 묻어줄 것을 명령한다. 고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군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단 한 칼에 목을 벤다.
히데아끼의 배반을 넋이 나가 쳐다보는 서군. 영화의 한 장면.
(우에스기 왈: 오타니 요시츠구의 병력은 겨우 6백명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사실 전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해도 될 정도인데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아마도 기초가 되는 자료를 처음에 정리했던 일본 역사가가 그의 병과 용맹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 그만큼 서군의 전투 태도가 우끼다 히데이에와 미쓰나리를 제외하고는 미적지근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서군의 우익이 갑작스럽게 적으로 돌변하면서 중앙의 부대들이 밀려나기 시작한다. 요시쓰구는 히데아끼의 배반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지만, 다른 다이묘들은 그가 배신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전쟁에서 성장한 서군의 다이묘들이라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칠 때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에야스가 도가와 미찌야스의 부대를 서군의 치명상 사이에 찔러 넣는다. 가뜩이나 우군의 배반으로 견딜 수 없던 서군은 새로운 동군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각자가 알아서 챙기면 된다고 했던 요시히로의 말처럼, 이제 서군의 다이묘와 병사들은 전멸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투를 포기하고 마구 후퇴한다. 우끼다 히데이에만이 배반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전장터에 남으려고 하지만 그의 가신들이 강제로 말에 태워 달아난다.
이제 시마즈 요시히로는 전투 초기에 자신의 오만한 침묵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정작 패배로 결정된 순간에야 탈출이라는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에스기 왈: 전투내내 존재감이 없었던 요시히로의 부대이지만, 그 자신도 그렇고 휘하부대도 당시 일본 최고라고 알려져 있었던 만큼 한 번에 떨쳐 일어난 그의 부대를 동군은 막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탈출방향이 다른 서군과 달리 동군을 거꾸로 거슬리기로 한 것이다. 이리 저리 난전을 펼치면서 달아나다가 그만 도꾸가와의 본진 앞을 지나치는데, 너무나도 기가 막힌 이에야스가 나오마사의 부대를 불러 반드시 잡으라고 명령한다.)
동군과 서군의 배반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이제 겨우 80명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요시히로는 탈출하려고 했지만 악마라는 이이 나오마사가 뒤를 따라잡는다. 거의 따라 잡힌 요시히로는 조총수를 뒤로 돌려 적을 막게 하는데, 마구잡이로 쏜 총에 나오마사가 어깨를 맞고 부상을 입는다. 그 상처가 낫지 않아 그는 18개월 후에 죽고 만다. 요시히로와 패잔병이 난구 산을 지나쳐 달아나자 이 모습을 지켜본 모리의 대군은 그대로 진영을 거두고 함께 도망한다.
(우에스기 왈: 미쓰나리의 본진이 무너질 때까지만 해도 무승부의 기회는 남아 있었다. 실제 기획과 지휘는 미쓰나리가 했지만, 서군의 명목상 지도자는 모리 데루모또였고 그가 파견한 15,000명이 이에야스의 배후에서 전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배후를 쳤다면 동군도 위기에 몰렸을 수 있었다. 만약 사전 배반의 밀약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내부에 적이 있었던 데다가 전황을 알 수 없는 난구 산에 포진한 것이 문제였다. 패잔병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미쓰나리가 죽었고 서군은 끝났다고 외치면서 모리의 대군도 그대로 달아난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모리 가문은 121만석의 초대형 다이묘에서 37만석의 다이묘로 목숨만 부지한다.)
이이 나오마사가 붉은 악마를 이끌고 시작했던 전투가 6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 이에야스가 승리를 선언하면서 역사적인 전투가 완전히 끝난다.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사무라이들이 막 들고 돌아온 적의 머리들을 검사하는 의식을 치른다.
다이묘의 최고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갔던 미쓰나리는 사사오 산에서 자살하지 않고 고향을 향해 달아나지만 탈출로가 막힌 그는 이부키 산을 향해 북서쪽으로 향한다. 아마도 서쪽에서 다시 병사를 일으킬 생각이었을 것이다. 3일 후에 동군의 추격대에 잡힌 그는 왜 자살하지 않았냐는 심문에 자신의 운명을 옭아맸던 오만함을 전혀 잃지 않고 “오타니 요시쓰구는 어차피 몇 년 동안 별 도움도 안되었고 어차피 병 때문에 죽을 거였잖아”라는 대답을 한다.
며칠 후 교토에 처형장이 마련되고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끼나가가 처형된다. 우끼다 히데이에도 사형당할 예정이었지만 끝까지 보여준 그의 용맹에 감탄한 이에야스가 영지만 몰수하고 살려준다. 공교롭게도 히데이에는 84세로 1655년에 죽어 세키가하라에 참전했던 다른 모든 다이묘보다 오래 산다. 이에야스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서군의 배반자 고바야까와 히데아끼에게는 형식적인 감사의 뜻만 전달했을 뿐 평생 그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3년 후 이에야스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쇼군을 직함을 받고 평생의 꿈을 이룬다. 그의 통치 하에 일본은 처음으로 250년간 전쟁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전후처리 (위키백과 내용 인용)
서군
이시다 미쓰나리는 옛 친구였던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에 체포되고, 고니시 유끼나가는 9월 19일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이후 오사카, 사카이로 끌려다니다가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고니시 유끼나가의 영지는 가또 기요마사에게 준다.
우끼다 히데이에는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년 말 시마즈 다다쓰네(島津忠恒)가 이에야스에게 끌고갔다. 스루가 구능 산에서 유폐된 후, 4대 쇼군 이에쓰나의 치세 때까지 살았고, 그의 자손은 마에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지켰다.
나쓰가 마사이에는 오우미 미즈구치 성으로 도망쳤으나, 동군의 이께다 데루마사 부대의 추격을 받자 10월 3일 자결했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고바야까와 히데아끼의 배신으로 인해 공격을 받던 중 포위당해 자결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처벌은 여러 방면의 회유 끝에 1602년 4월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행동은 당주가 인정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에 대해 영지를 인정해주고, 가문을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죄를 용서했다.
모리 데루모또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에, 깃까와 히로이에의 영지 안전의 약속은 파기되었고, 모리 가문의 영지가 몰수되는 대신 히로이에에게는 스오와 나가토의 2개 지역이 영지로 내려졌다. 이에 놀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영지를 모리 가문의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로이에의 간청은 수락되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영지를 삭감당한 것이 되어, 깃까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으로부터 본가를 팔았다는 비난을 받고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되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마에다 도시나가를 통쾌하게 격파했던 니와 나가시게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나중에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꾸가와 히데타다의 계획에 따라 다이묘로 복귀하고, 무네시게는 옛 영지까지 돌려받게 되었다.
조소카베 모리찌까는 사죄했지만, 오해와 가신의 참언이 원인이 되어 형 쓰노 찌까따(津野親忠)를 살해하여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서 영지를 몰수당했다.
우에스기 가게가쓰는 아이즈(会津) 120만 석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영지였던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사타케 요시노부도 히타치(常陸) 미토(水戸) 54만 석에서 데와(出羽) 아키다(秋田) 18만 석으로 크게 삭감되었다.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으로 돌아섰던 고바야까와 히데아끼는 지쿠젠(筑前) 나지마(名島) 36만 석에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57만 석으로 증감하여 옮겼다. 그러나 히데아끼는 1602년에 겨우 21살의 젊은 나이로 미쳐서 죽었고, 후사가 없어 가문은 단절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 번(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250년 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동군
호소까와 다다오키는 단고 미야쓰 18만 석 -> 부젠 오구라 40만 석
다나까 요시마사는 미카와 오카자키 10만 석 -> 치쿠고 야나가와 32만 5천 석
구로다 나가마사는 부젠 나카쓰 18만 석 -> 치쿠젠 나지마 53만 석
가또 요시아끼라는 이요 마쓰마에 10만 석 -> 같은 마쓰야마 20만 석
도도 다까또라는 이요 사카시마 8만 석 -> 같은 이마하루 20만 석
데자와 히로따까는 히젠(肥前) 가라쓰(唐津) 8만 3천 석 -> 12만 3천 석
야마우치 가즈또요는 도오토미 가쓰가와 7만 석 -> 도사 우라토 24만 석
후꾸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기요스 20만 석 -> 아키-빙고 히로시마 49만 8천 석
이꼬마 가쓰마사는 사누키 다카마쓰 6만 5천 석 -> 17만 1천 석
이께다 데루마사는 미카와 요시다 15만 2천 석 -> 하리마 히메지 52만 석
아사노 요시나가는 가이 부츄 22만 석 -> 기이 와카야마 37만 6천 석
가또 기요마사는 히고 구마모토 19만 5천 석 -> 51만 5천 석
모가미 요시아끼는 데와 야마가타 24만 석 -> 57만 석
다테 마사무네는 무츠 이와테야마 57만 석 -> 62만 석
도요또미 히데요시 가문의 영토에 대해선 히데요시 시대 222만 석에서 65만 석으로 크게 삭감했다. 재정을 지탱하던 사카이와 나가사키의 교역항 등도 도꾸가와 직할이 되면서 역전되고 말았다.
동군의 전력
도꾸가와 이에야스: 30,000명
마에다 도시나가:정치적 후원
다떼 마사무네:후방지원
가또 기요마사: 3,000명
후꾸시마 마사노리: 6,000명
호소까와 다다오끼: 5,000명
아사노 유끼나가: 6,510명
이께다 데루마사: 4,560명
구로다 나가마사: 5,400명
가또 요시아끼: 3,000명
다나까 요시마사: 3,000명
도도 다까도라: 2,490명
모가미 요시아끼
야마우치 가쓰또요: 2,058 명
혼다 다다까쓰: 500 명
데라사와 히로따까: 2,400 명
이꼬마 가즈마사: 1,830 명
이이 나오마사: 3,600 명
마쓰다리아 다다요시: 3,000 명
오다 나가마스: 450명
쓰쓰이 사다쓰구: 2,850명
사나모리 나가찌까: 1,140명
후루따 시게까쓰: 1,200명
아리마 도요우지: 900명
총 75,000~85,000명 정확하지 않음
서군의 전력
모리 데루모또 (공식 지휘관, 전투에는 불참)
우에스기 가게가쓰: 후방지원
마에다 도시마사
우끼다 히데이에: 17,000명
시마즈 요시히로: 1,500명
고바야까와 히데아끼(배반): 15,600명
이시다 미쓰나리(실제 지휘관): 4,000명
고니시 유끼나가: 4,000명
마시따 나가모리
오가와 스께따다(배반): 2,100명
오타니 요시쓰구: 600명
와끼사까 요스하루(배반): 990명
아노꾸지 에께이: 1,800명
사따께 요시노부
오다 히데노부
조소까베 모리찌까: 6,600명
구쓰끼 모또쓰나(배반): 600명
아까자 나오야스(배반): 600명
깃까와 히로이에(배반): 3,000명
나쓰까 마사이에: 1,500명
모리 히데모또: 15,000명
도다 가쓰시게: 1,500명
사나다 마사유끼: 후방지원
사나다 유끼무라: 후방지원
시마 사꼰: 1,000명
총 80,000~90,000명 정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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