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일본 전국시대하면 빠질 수 없는 성이야기입니다. 일본하면 빠질 수 없는 性은 다른 블로그를 찾아주시고, 저는 城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본 히메지 성을 네번째 방문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일본의 성을 방문하고 싶다면 무조건 히메지 성姫路城입니다. 전국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미적 아름다움까지 갖춘 유네스코 유산입니다.
다행히 지난 주에 5년간의 보수작업을 마치고 재개장하여 엄청난 인파를 모으고 있습니다.
히메지 성은 원래 벚꽃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에 4월 주말은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때문에 미술관처럼 줄서서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5년간 보수를 거친 천수각이 유달리 흰색인데 원래 저런 흰색이 맞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바래고 곰팡이가 펴서 검은색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번에는 보호제를 덧칠해서 색이 변하지 않습니다.
앱을 미리 설치하면 이런 자세한 설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일본 중부여행을 가시는 분은 히메지 성 코스를 여유있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일본 전국시대 배경설명(2)-일본 전국시대 성(城) 한 방에 정리하기
현재 일본에는 12개의 천수각(텐슈)이 남아 있고 25개의 주요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에도 시절(1603-1867)에는 170개의 성이, 아즈치-모모야마 시절(1575-1600)에는 600개 이상의 성이, 그리고 전국시대(1467-1568)에는 3,000개 이상의 성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너무 적은 성만이 남아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일본의 유명한 천수각들. 클릭하면 커집니다.
지방의 다이묘들이 권력을 다투던 전국시대에 가장 많은 성이 건축되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2년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다이묘들만이 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칙령을 내린다. 히데요시의 국토측량에 따라 나뉘어진 204 구역의 다이묘 만이 성을 가질 수 있게 하면서 많은 성들이 허물어진다.
1614년과 1615년에 벌어진 오사카 동계와 하계 전투 후에, 전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으로 통일되는데, 이에야스는 지방 다이묘에게 한 개의 성만 남기고 모두 허물 것을 명령한다. 이 칙령에 따라 400개 정도의 성이 허물어지고 170개의 성만이 남아 250년의 세월을 지킨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에서 천황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또 한 번 성의 수난시대가 열린다. 사츠마와 조슈 지방의 무사들의 혁명을 시작으로 천황 중심의 중앙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에도는 도쿄라는 이름으로 수도가 되었으며, 다이묘의 영지는 47개 현으로 바뀌어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관장을 하게 된다.
1873년에 막부시대의 잔재로 여겨진 성을 다시 허물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 허무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17개의 큰 성만을 남기고 모두 허물어진다. 1640년 마에다 도시스네가 건축한 고마스 성은 기초 돌만 남기고 사라지며 요나고 성은 1874년 30엔에 팔려 땔감으로 사용된다. 와카마스 성은 1876년에 무너지고 우에다 성은 6엔에 공원으로 매각된다. 스야마, 도요하시, 돗토리, 도쿠시마, 다카마스, 소노베, 오수, 사에키, 사쿠라, 모리오카, 마에바시, 기시와다, 사기마, 가메야마, 후쿠오카, 후쿠에, 아코, 하기, 슴푸, 하마마스, 오카자키, 구마모토, 오다와라와 오사카 성도 허물어진다.
(오사카 성大坂城을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겉만 전국시대 성일뿐 그냥 공원에 가깝습니다. 성을 가보고 싶은 분에게는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성입니다. 성 안팎이 모두 콘크리트로 덮여있고 천수각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을 정도이니 알만하죠. 가끔 특별전시회가 열리는데 그 기간에만 관람을 추천합니다.
그나마 구마모토 성은 상당히 복원이 잘된 편입니다. 천수각에서 나와 한바퀴 도는 길도 산책로로 즐기기 좋습니다.)
대학살 명령에서 살아남은 가나자와 등의 성도 황실군의 막사로 사용되면서 술 취한 병사들의 실화나 무지로 많은 피해를 입는다. 마스에 성도 1875년 폐기처분을 받지만 지역유지가 180엔(당시 쌀 200가마?)에 사들여 보존되었으며 마스모토 성도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1877년에 사들였고 1913년에 수리된다.
이처럼 정치변화에 따른 인위적인 파괴말고도 화재 또는 지진과 같은 재해로 사라진 성도 많다. 에도 시절에는 일단 성이 피해를 입어도 수리하거나 복구하지 않았다. 니조 성의 5층짜리 천수각이 화재로 사라졌으며 후쿠이, 후나이, 구보타, 츠치우라, 마스마에가 화재로, 가케가와 성은 지진으로 무너졌다.
(니조 성二条城은 현재 도쿠가와 막부의 집무와 거처용 건물만 남아 있는 내정용 성입니다. 교토(도쿄가 아닌)를 가시는 분 중에 성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에게만 추천합니다. 다른 성과 달리 집무건물은 보존이 잘 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장식품 등 국보급 보물을 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기간 중 일본군이 성을 군사기지로 사용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나고야, 히로시마, 와카야마, 오카야마, 후쿠야마, 오가키, 기후와 같은 성의 천수각이 피해를 입었다.
대전이 끝나고 복구가 시작되면서 성의 역사와 문화적가치가 재조명되어, 오사카, 나고야, 와카야마, 히로시마, 구마모토, 오카야마, 오다와라, 후쿠야마 성이 콘크리트 복제물로 다시 건축된다. 역사적인 가치를 생각한다면 콘크리트 건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건축기간이 짧고 전통자재보다 훨씬 튼튼했기 때문에 콘크리트가 사용되었으며, 전통건축술과 자재에 대한 가치는 최근에야 인정을 받고 있다. 가나자와, 마스모토, 비츄-마스야마 성의 부속건물과 천수각이 전통방식으로 복원되었으며, 콘크리트 성조차 가지지 못한 지방정부는 기초와 잔재물을 찾아내 지역문화 축제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참고자료입니다.
우에스기 겐신 공의 유명한 가스가야마 성의 지방축제 홍보물. 당시에는 최고의 거성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몇 개의 기초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방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축제를 매년 열고 있습니다. 특히 작년에는 천지인이라는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을 다룬 드라마가 방영되어 인기가 더욱 대단했습니다.
일본 여행 다녀온 다음에 알아서 안사람 몰래 갔다 오려다가 눈물만 삼키고 말았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전국시대 이전과 초기의 성은 그림의 시키잔 성과 같이 산성이 보통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중반이 되면서 큰 세력을 이룬 다이묘들이 등장하고 군사력못지 않게 정치와 경제력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깊은 산속이 아닌 교통 요충지에 돌로 만든 성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다께다 신겐의 가신이었던 사나다 가문의 산성(나구루미)입니다. 요즘 사나다 마루 드라마에서 등장했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흙을 돋우고 목책을 세운 산성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습니다.
산성에서 평지의 성으로 바뀌면서 자연을 이용한 방어에서 설계를 통한 방어로 바뀌게 됩니다.
보통 농성을 하더라도 수비병이 어느 정도 될 경우에는 성벽 밖에 방어진지를 설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반격도 합니다만, 완전 농성모드로 들어갔을 때의 가장 큰 방어라인은 그림의 마쓰모또 성과 같이 물을 채운 해자입니다.
조총이라는 개인 화약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했던 일본은 주조와 화약제조기술이 뒤떨어져서 대포와 같은 대형화약무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사용해도 거치대도 없이 쏠 정도로 그 구경이 매우 작았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장군 휘하의 조선수군의 대포가 대활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후에 일본도 블랑기포와 같은 외국의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공성무기가 제대로 없던 전국시대에서는 해자가 가장 큰 방어선이었습니다.
해자가 깊고 넓은 성을 공격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서 해자를 메우고 다리를 놓아 공격하거나 수비병이 식량이나 물이 떨어져서 성문을 열 때까지 봉쇄하는 것입니다. 수비병이 충분한 총기와 화약을 보유하고 있다면 첫 번째 공격방법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겠죠. 해자를 넘어 성문에 진입하게 되면 사실 그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림은 마스모토의 천수각입니다. 복구된 성이라 해자에 바로 천수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투 목적의 성이 아니었거나 완전히 복구된 것이 아닐 겁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해자를 넘어 성벽 안에 진입하게 되면 그림과 같은 진로를 따라 적의 수뇌부가 있는 천수각까지 난입하게 됩니다.
농성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공격하는 측의 병력이 압도적이었다는 뜻이며, 해자를 넘어 주 성문을 돌파당했다는 것은 수비병 중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다는 뜻이 됩니다. 천수각까지 난입하는데 좁은 문과 미로를 통해 반격을 받더라도 하루를 넘기지 않고 함락됩니다.
그림은 히메지 성의 난입 경로입니다. 희메지 성은 전투용 성이 아니지만 규모가 큰 성이기 때문에 비교적 난입 경로가 길고 복잡합니다. 실제로 천천히 걸어보면 몇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일상이 전투인 전국시대의 전투용 성은 온갖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주요 부속건물을 장악하려면 이런 수비장소를 제압해야 합니다. 성벽 아래에 있는 적병들에게 뜨거운 물이나 돌을 떨어뜨리는 곳입니다. 평소에는 닌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잠겨있습니다.
성벽과 건물에도 총안이 뚫려있습니다.
건물 안에서는 자유롭게 사격할 수 있는 반면에 밖에서는 좁은 구멍을 정확하게 맞춰야 제압할 수 있습니다.
희메지 성을 방문하시면 자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로와 같은 난입 경로를 따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문들입니다.
성주가 다니지 않는 문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반면에 성주가 다니는 곳은 철 구조물을 붙여 방어도를 높였습니다.
이제 공성전의 몇 장면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설명했었죠? 농성에 들어가더라도 성에 틀어박혀 있으면 결국 말라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해자 밖에 목책과 임시 성벽을 만들어 놓고 반격도 가한다고요.
오사카 하계/동계 전투는 오사카라는 거대 성 안팎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오사카 시내 전체가 요새였고 외곽부터 서서히 밀어내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원래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음 먹고 지은 성으로 엄청난 인력과 예산이 들어갔기 때문에 해자와 성벽 크기가 일본 역대 최고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서 히데요시의 가신(미망인과 어린 아들을 받들고 이에야스에게 반대한)과 협상을 하는 동안, 인부를 동원해 해자를 메워버립니다. 그러고는 한 판 붙던지 하는 식의 행동을 보이죠. 그래서 지금의 해자는 재건축하면서 다시 만든 것입니다.
오사카 전투의 한 장면으로 당시의 그림입니다.
이에야스가 처음에는 외곽 성벽만 부수고 협상 끝내자고 했다가 해자까지 메워버리고서는 '앗! 그런 일이 있었다니.... 인부들이 실수한 모양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히데요시의 가신 중에는 책략가가 남아 있지 않았다는 소리도 됩니다.
이제 공성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후시미 성 전투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잠깐 나왔던 성입니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공격하는 이시다 미스나리의 서군은 엄청난 병력을 데리고 공격하지만 소수의 동군 수비병이 끝까지 저항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맙니다.
그럼 일본은 언제부터 공성전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했을까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철포가 아닌 대구경 대포는 오사카 공성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국상선에게서 대포와 화약을 사들인 기록이 나오는데,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오사카 성 정도의 규모는 몇 개월의 포격 정도는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됩니다. 이에야스가 노리고 쏜 포탄이 정확하게 날아들어가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 거주구역을 때렸고 시녀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기겁을 한 요도도노가 아들에게 달려가 화친을 요구했고 그만 어이없게도 그렇게 동계전투는 막을 내렸습니다.
1615년 6월 하계전투로 히데요시 가문을 멸문당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열리는데 1년 후에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이에야스의 대포사용은 신의 한수였습니다. 오사카 성에서 농성이 이어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대로 사망했다면 일본은 전국시대로 다시 빠져들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한일관계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분이 일본 전국시대에 관심이 있어서 성을 방문하고 싶다면 그래도 볼만한 뭔가가 있는 45개의 성입니다. 저는 구마모토 성, 히메지 성, 마스모토 성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성을 좋아한다면 국보급 자료가 있는 니조 성입니다.
45개 성에 남아 있는 건물을 표시한 표입니다.
건물이 제대로 남아있거나 복원된 성은 대개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성뿐만 아니라 산책을 하거나 일본 문화를 느끼기 좋은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는 전설로만 상상할 수 있는 초대형 성 두 곳이 있습니다. 먼저 완전히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즈치성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재력과 권력을 뽐내며 지었던 성으로 규모뿐만 아니라 화려한 금을 두르고 서구식 디자인을 적용한 것으로 전국의 다이묘를 압도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 사망 후에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기록과 전설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복원된 오사까 성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초거대 성을 만들었고 그림과 같이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산을 쪼개 엄청난 크기의 암석들을 운반하게 시킵니다.
복원과정에 몇 개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한 개의 크기가 높이 3m 넓이 6m가 훨씬 넘는 크기입니다. 다이묘들은 이런 엄청난 돌을 일년 내내 옮기느라 가산을 탕진해서 반란을 꿈도 못꿨다는 설이 있습니다. 전설이라고 한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금은 규모가 크게 줄었고 콘크리트 건축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란을 보시면 당시 공성전 모습을 실감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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