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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왕당파와 의회파의 영국 내전 (1642~1643)

by uesgi2003 2013. 8. 25.


락의 전설로 꼽히는 그룹이 몇있는데 그 중에 King Crimson을 좋아합니다. 젊은 분들은 모르는... 마치 들국화의 1집 앨범이 수 십 년동안 한국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듯이, 그들이 1969년에 발표한 1집 In the court of crimson king은 락 역사상 명반에 꼽힙니다. 

지금도 Epitaph는 가사나 곡 모두 손꼽히는 명작인데, 안타깝게도 너무 실험적인 리더 로버트 프립이 그룹을 쥐고 흔들면서 락의 전설적인 멤버들이 얼마 못 버티고 나갔고 그룹은 극단적인 실험음악으로 치닫습니다. 


가끔씩 초보자들을 현혹시키는 아름다운 소곡을 발표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Prince Rupert Awakes(1970)라는 곡입니다. Lizard라는 앨범에 들어가 있고, 락의 전설(하도 전설이 많이 나와서 식상하겠지만 전설이 맞습니다)인 존 앤더슨(Yes의 보컬)이 합류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곱게 못가고 마지막은 불안한 연결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초보자는 절대로 전체 앨범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17세기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신대륙을 종횡무진했던 루퍼트 공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려다 보니 갑자기 킹 크림슨의 곡이 기억이 나더군요. 곡의 주인공이 루퍼트 공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가사가 아름다운 시였기 때문에 가사를 들여다 봐도 모르겠군요.

어쨌든 킹 크림슨이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루퍼트 공을 불렀다고 우기면서 유럽대륙의 격동기에 휩쓸리고 거친 풍랑을 일으켰던 라인의 루퍼트 공(Prince Rupert of the Rhine)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루퍼트 공의 해 

1642-43년 겨울은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영국 내전이 오래 가리라는 끔찍한 현실을 던져주었다. 1642년 10월 23일에 있었던 에지힐 전투에서 라인의 루퍼트 공(젊은 나이인데도 유럽에서는 알아주는 베테랑)은 영국 기병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전술을 재현하면서 의회파 기병을 전장에서 내쫓았다. 
그렇지만 원두당(Roundhead, 왕당파에 반대하며 머리를 짧게 깎아 생긴 이름으로 의회파) 보병은 긴 창을 땅에 꼽고 왕당파 보병을 저지하면서 참패를 피할 수 있었다. 
루퍼트는 11월 12일 브렌트포드에서 의회파를 턴햄 그린으로 쫓아냈고, 런던 시민군(London Trained Bands) 24,000명이 겨우 루퍼트의 수도 공격을 막아냈다. 

영국 중세 역사에 대해서는 설명이 많이 필요하니까 중간 중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1625년에 찰스 1세가 즉위하면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지만 찰스가 영국,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고 시도하면서 영국 의회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당시 영국 의회는 왕이 필요한 경우에 조언을 해주는 정도의 기관에 불과했고 찰스의 왕권신수설 그리고 카톨릭으로의 회귀 정책으로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게 됩니다. 

런던 시민군은 정규군이 없던 시절에 엘리자베스 1세가 시민병을 현대화하기 위해 만든 군대로 영국에서는 정규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방 시민군은 정규군이라고 하기에는 훈련이나 무장이 몹시 미흡했던 반면에 런던 시민군은 1572~1647년 기간 동안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습니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북, 남, 동, 서의 4개 연대로 20개 중대 6,000명이 있었고 왕과 의회가 대결을 한 1642년에는 부대기 색상에 따라 적, 청, 녹, 백, 황, 오렌지의 6개 연대(40개 중대)로 8,000명으로 늘었습니다. 왕당파(위에 나온)가 수도를 위협하자 3개 연대와 5개 보조군 연대가 징집되어서 20,000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시장의 지휘를 받는 런던 시민군은 1차 내전(1642~1646) 기간내내 런던의 의회파를 보호했고 의회의 야전군의 보병 여단 역할도 합니다. 
1645년에 있었던 신식군 창설에 따라 시민군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고 점차 사라지는데, 런던 시민군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퇴역군인의 예식 부대인 명예 포병중대가 남아 있습니다. 


루퍼트가 런던을 함락시켰다면 의회파는 항구, 이스트 안글리아와 북부만 장악하게 되었을텐데 찰스 1세는 루퍼트군에게 의회파를 공격하는 대신에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 기회를 놓쳤다. 그는 런던이 곧 영국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듬 해에 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하원의 절대적인 지도자 존 핌(John Pym)은 전쟁이 계속 될 것이며 런던 시민 중 1/3은 왕당파라는 문제에 직면하고는 찰스 왕과 협상을 했다. 왕의 전령이 런던에 1943년 1월에 도착했다. 의회파 대표들이 2월 4일에 옥스포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의회파 수비대가 마치 포로인 것처럼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루퍼트 공이 2일 전에 옥스포드를 점령했던 것이다. 

왕당파 사절은 런던에 있는 동안 베네치아 대사에게 요크셔에서 엑세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켄트에도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두 군대는 템즈강을 건너 런던을 포위해서 교역과 보급을 차단시키고 옥스포드에서 본대가 오면 수도를 함락시켜서 내전을 끝낼 계획이었다. 

이 원대한 계획은 루퍼트의 머리 속에서 나왔을 수도 있는데, 왕당파의 노쇠한 기병장군들의 반발을 샀다. 의회파에서도 올리버 크롬웰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루퍼트보다 20살이나 많았다.

기병장군인 루퍼트의 천재성은 연장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내전발발 당시에 23살이었고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 6, 70대 장군이 총지휘관이었다. 루퍼트는 70살의 패트릭 루트벤(Patrick Ruthven)의 지지를 받았어도 뛰어난 전략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찰스 왕도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던데다가 나라는 물론이고 군대에 대해서도 위임을 할 정도의 위인이 아니었다. 


북부의 뉴캐슬 후작인 윌리엄 캐번디스(William Cavendish)도 왕을 지지했다. 백색 군대를 모은 그는 유능했고 용감했지만 전장에서는 행동이 느렸다. 1643년, 그는 페르디난도와 그의 아들 토마스 페어팩스를 요크셔에서 몰아낸 다음에 요크를 점령했다. 그는 다시 남진해서 

링컨셔로 향했지만 크롬웰과 동부 카운티 연합의 기병대에 가로 막혔다. 그렇다고 해서 북부의 전투는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었으며 가장 중요한 1643년의 남부는 일승일패가 연이어졌다. 


1월의 눈이 녹자 왕과 의회파 대표는 옥스포드의 협상 테이블에서 격론을 벌였다. 루퍼트는 왕당파가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시렌세스터를 점령하고 전비로 한달에 4,000파운드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런던의 교역 그리고 해군의 지지에 기대고 있던 의회파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에 대해 대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퍼트의 행동은 왕당파의 노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존 핌은 의회파가 장악한 지역의 재화에 대해 구입세를 징수했다. 


왕당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면, 런던과 남동부의 부를 가지고 있는 의회파가 내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랄프 홉톤(Ralph Hopton) 경이 1642~43년 겨울에 콘월의 론세스톤에서 일련의 사건을 일으키면서 왕당파가 거의 승리할 뻔 했다. 


이번 이야기의 주무대가 되는 영국 남부지도입니다. 그 당시 지명과 차이가 있지만 이야기 흐름에 중요하기 때문에 큰 그림으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641년 12월 1일 당시, 의회파의 홉톤은 왕에게 의회의 탄원을 나열하면

서 의회의 동의없이는 대신을 임명할 수 없다는 대간주(Grand Remonstrance)를 제출했다. 찰스 왕은 3주 후에 탄원을 거부했다. 

그 후에 홉톤은 평화를 교란시킨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지만 헤트포드(Hertford) 후작이 서명한 위임장을 보여주며 판사에게 자신이 왕당파를 위해 자유를 수호하고 불법적인 과세와 징수를 막겠다는 발언을 했다. 그는 석방되었고 동원령을 발동시키며 수 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 

의회와 청교도 편을 들었던 콘월(Cornwall)도 왕당파로 입장을 바꾸었다. 홉톤의 뒤를 따라 베빌 그렌빌(Bevil Grenville) 경과 니콜라스 슬래닝(Nicolas Slanning) 경이 2,000명의 병력과 함께 합류했다. 1643년 1월 19일, 그들은 브래드독 다운의 의회파 군대를 진압하고 1,000자루의 머스킷총과 4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허트포드(Hertford) 후작은 브리스톨 해협을 건너 사우스 웨일스로 후퇴하면서 소머셋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 홉톤과 그렌빌이 브리스톨 해협 근처로 군대를 데리고 와서 브리스톨 근처에서 허트포드의 부대와 합류하고 다시 루퍼트의 기병과 합류한다면 서포크와 켄트까지 영국남부를 장악할 판이었다. 

그러나 홉톤, 그렌빌과 슬래닝은 플리마우스와 엑세터로 향했다. 그것도 너무 적은 병력을 데리고. 왕당파는 두 곳의 의회파 수비군이 콘월을 공격할까봐 두려워했다. 내전내내, 왕당파 영토 중심에 있던 두 곳의 의회파 수비군은 왕당파의 발목을 붙잡았다. 


1643년 4월 25일, 3,000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불어난 홉톤의 군대는 의회

파 조지 처들라이(George Chudleigh)경의 매복을 만났고 앞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폭풍 속에서 왕당파는 브래드독 다운에서 노획한 무기 모두를 잃었다. 

홉톤은 콘월로 돌아가 병력을 정비한 후에 데본셔로 진격하던 길에서 의회파의 새 지휘관 헨리 그레이를 붙잡았다. 5월 16일에 있었던 전투에서 왕당파의 맹렬한 돌격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포로가 된 처들라이는 왕당파의 권유를 받아 진영을 바꿨다. 홉톤은 6월 초에 차드까지 진격했다. 


왕당파 머스킷 소총병 훈련 모습입니다. 사격속도가 상당히 느렸고 정확도도 많이 떨어지는데다가 무연화약 이전의 시대라 일제사격 후에는 눈 앞이 안 보일 정도여서 창병과 같은 엄호병력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허트포드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옥스포드에서 과감하게 나와 차드에서 홉톤과 합류했다. 최소한 2,000명의 기병과 6,000명의 보병이 영국 남부의 의회파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 동안 루퍼트는 브링햄 북쪽의 리치필드를 강습해서 수류탄과 폭약을 이용해 점령했다. 북쪽과 통하는 길목을 열은 루퍼트는 리딩이 위험하다는 찰스 왕의 경고를 받고 옥스포드로 되돌아왔다. 루퍼트는 월링포드와 에빙톤의 요새를 시찰한 후에 의회파가 장악하고 있는 브리스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엑세스 공작이 리딩 함락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이스트 안글리아에서 크롬웰이 작은 승리를 거둔 동안, 의회파 장군 윌리엄 월러 경은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4월 13일에 루퍼트의 동생 모리스 공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지만 그는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히어포드에 입성했고 정찰별만으로 허트포드의 징집병을 궤멸시켰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의회파는 윌리엄을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윌리암 월러는 홉톤, 허트포드와 모리스 공이 차드에서 합류했고 자신의 등 뒤에서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월러는 베쓰 근처의 의회파 수비대와 함께 자리를 잡고 홉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전을 피했다. 홉톤은 하원때부터 오랜 친구사이였다. 홉톤은 만나자고 했지만 월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비극적이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명예롭게 그리고 사적인 원한없이 각자의 의무를 다하자"며 거절했다. 

월러는 살아 남아서 1660년의 

왕정복원(Restoration)을 볼 수 있었지만 홉톤은 1652년에 추방당해 죽게 된다. 


1643년 6월에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 홉톤은 허트포드와 그렌빌과 함께 전쟁회의를 열고 자신이 계속 지휘를 맡기로 했다. 7월 3일, 홉톤은 에이번강을 건너 작은 전초전을 벌인 후에 야영하기로 했다. 월러는 홉톤이 베쓰 북서쪽의 랜스다운 언덕으로 올 것을 예측하고 새벽이 오기 전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이 되어 홉톤은 월러는 언덕에서 몰아래녀고 했지만 월러는 언덕에 오르는 길에 머스킷 소총병을 배치시켰다. 


이제 왕당파는 랜스다운 언덕을 정면공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기병공격은 소총사격에 좌절되었고 거꾸로 월러 기병의 반격에 혼란에 빠졌다. 이 때에 콘월 출신 보병들이 창을 들고 마치 경계를 서는 것처럼 우뚝 섰고 월러는 언덕 위에서 대포로 이들을 공격했다. 대포 사격을 받은 콘월 보병부대는 밀집대형으로 언덕 위까지 용감하게 밀고 올라가서는 월러의 보병을 창으로 밀어냈다. 월러의 기병과 대포가 두 번이나 콘월 보병을 밀어냈지만 그 때마다 그들은 "대포를 차지하자"라며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올라갔고 세 번째 돌격에서는 그렌빌이 선두에 서고 양 옆에 머스킷 소총병이 따라붙었다. 

언덕에 올라간 콘월 보병은 사각대형으로 물러서지 않았고 왕당파 기병과 머스킷 소총병이 의회파 병력을 소탕했다. 그 날 밤 월러는 브리스톨로 후퇴했고 왕당파는 500자루의 머스킷 소총과 14통의 화약을 노획했다. 


왕당파의 승리는 비싼 대가를 치뤘다. 베빌 그렌빌이 마지막 돌격에서 전사했다. 기병대에서 루퍼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는 보병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용감한 돌격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은 왕당파는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던 반면에 의회파는 브리스톨에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7월 7일, 월러는 브리스톨을 빠져나와 홉톤과 다시 전투를 벌이려고 했지만 화약폭발로 부상을 당했던 홉톤은 디바이지스로 물러나서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7월 9일, 모리스 공이 월러의 기병과 일전을 치루는 동안 왕당파의 주력은 그대로 디바이지스에 머물렀다. 월러가 전력을 모으고 있는 동안 붕대를 두르고 있던 홉톤은 디바이지스를 절대로 내줄 수 없다며 모리스, 허트포드와 로버트 도머가 옥스포드로 가서 지원을 요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홉톤의 기병을 이끌고 마치 살리스베리로 후퇴하는 것처럼 우

회했다가 옥스포드로 달려갔다. 


왕당파의 기병 모습입니다. 유럽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7월 11일에 옥스포드에 도착했지만 루퍼트는 도시에 있지 않았다. 그는 군자금과 보급품을 가지고 온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를 위험한 미들랜드 너머로 배웅을 나가 있었다. 기적과 같이 옥스포드에서는 그 날 당장 1,800명의 병력이 마련되었고 모리스가 기병과 함께 출발했지만 노쇠한 허트포드는 옥스포드에 남았다. 


7월 13일 새벽 3시에 모리스가 근처까지 왔을 때에 월러는 디바이지스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던 중이었다. 홉톤은 오랜 친구에게 협상을 하자며 몇 시간을 벌었고 월러는 엑세스가 옥스포드에서 오는 왕당파 기병을 막아줄 것으로 확신하고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나타난 구원군에 놀라 디바이지스에는 약간의 병력만 남겨두고 급히 대열을 반전시켰다. 

옥스포드 구원군이 공격을 하자 디바이지스에서 분전하던 콘월 보병이 월러의 뒤를 협공했다. 의회파는 왕당파에 비해 숫자가 많았지만 결국 모든 대포와 1,400명의 포로를 넘겨주었다. 왕당파의 완벽한 승리였다. 


월러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엑세스 백작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비난했고 여왕을 안전하게 옥스포드까지 배웅한 루퍼트는 브리스톨로 향했다. 그곳에서 롭톤의 서부군을 흡수한 그는 북과 남쪽에서 동시에 브리스톨을 공략했다. 콘월 보병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에는 영국 제2의 도시를 함락시켰다. 

찰스 왕이 브리스톨로 입성했고 의회파의 몇 개 도시가 연달아 성문을 열었다. 브리스톨의 항구를 손에 넣은 왕당파는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의회파 대표단은 옥스포드에서 있었던 평화협상에서 왕이 조금만 양보한다면 의회파 지도자 핌을 탄핵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무산되었다


영국교회에서 주교가 그대로 있는 대신에 청교도를 인정하면 충분했다. 왕당파 중에서도 온건한 사람들은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설득했지만 왕은 거부했다. 네덜란드에 있던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는 남편에게 의회파 반역자들과 어떤 협상도 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찰스는 왕좌를 신성불가침으로 생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서약파(Protestant Covenanter, 그림 참조) 군대 그리고 아일랜드의 카톨릭 군대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반면에 하이드, 루시우스 케어리, 포크랜드와 같은 조언자들은 의회파와의 협상을 진심으로, 스코틀랜드 군대에 대해서는 마지 못해 지지했지만 아일랜드 군대에 대해서 알았다면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찰스 왕은 일관성없는 정책때문에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승리가 눈 앞이라고 확신한 나머지 전쟁을 계속 할 생각뿐이었다. 

런던의 핌은 전쟁내각을 구성했는데, 월러가 요구한 엑세스의 퇴진을 무마하려는 시도였다. 

크롬웰은 의회에게 7,000마리의 말을 모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와의 동맹협상도 추진되었다. 전쟁은 이제 영국 전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찰스는 아일랜

드 내전을 종식시켜서 영국으로 지원병을 보낼 수 있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동안 왕당파 지휘관들은 루퍼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론 끝에 글로스터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글로스터를 함락시킨다면 서쪽에 여전히 박혀있는 의회파 수비대의 기습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후가 자유로워진 콘월 보병이 마음놓고 런던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클로스터의 청교도 총독 에드워드 메시(Edward Massey) 대령은 루퍼트와 동년배였고 1640년 당시에는 왕의 군대에 있었다. 1642년, 그는 카톨릭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이 두려워서 의회파로 진영을 바꿨다. 8월 10일에 글로스터 앞에 도착한 찰스는 메시가 일종의 영웅으로 간주되어 의회파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엑세스는 그답지 않게 전력을 다해 시민군을 징집했고 15,000명을 데리고 글로스터로 향했다. 메시는 수비병을 모으고 여성은 왕당파 대포공격으로 인한 불을 끄게 했다. 나머지 시민에게는 흙벽을 쌓아 올리게 했다. 

도시를 강습하자는 루퍼트의 제안은 다시 무시되었고 갱도 공격을 하기로 했다.


8월 24일, 북쪽 언덕에서 횃불이 타오르며 의회파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신호가 메시에게 전달되었다. 같은 날 밤, 폭우가 쏟아지면서 루퍼트의 갱도 중 일부가 붕괴되었다. 


9월 5일, 엑세스는 글로스터 성당이 보이는 지점까지 접근했고 도시 안에서 화답하는 대포소

리를 듣고 안심했다. 다음 날 아침 이슬비를 맞으며 왕당파 참호를 당당하게 지나 글로스터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는 글로스터 구원으로 내전이 의회파로 기울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왕당파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왕당파가 엑세스보다 런던을 먼저 공격한다면 말이다. 

엑세스가 왕당파보다 먼저 런던에 들어온다면 의회는 최소한 1년 동안은 안전해지며 시간은 의회파의 편이었다. 


8월에 이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동맹사절단을 보내두었고 의회와 스코틀랜드는 서로를 지원하기로 동의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가 1640~42년에 했던 것처럼 카톨릭을 다시 강요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의회는 장로교를 허용할 것으로 믿었다. 의회는 영국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며 신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약속했다. 


9월 15일, 엑세스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시렌세스터의 왕당파 수비군을 공격한 후에 놀라운 속도로 브리스톨-런던 도로에 올라섰다. 

깜짝 놀란 루퍼트는 급히 찰스 왕을 찾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가롭게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왕에게 보병을 데리고 따라와 달라고 부탁하고 급히 기병만으로 엑세스를 뒤쫓았다. 

9월 18일 밤새 달린 루퍼트는 엑세스가 도착하기 2시간 전에 뉴베리에 들어섰고 찰스도 보병과 모리스의 기병을 데리고 도착했다. 루퍼트는 옥스포드에서 더 많은 화약과 탄약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이번에도 무시되었다. 


9월 20일 오전, 엑세스군의 존 햄프덴 연대가 뉴베리 남독의 빅스 고지를 점령했고 측면이 보강된 의회파는 병력을 전진시켰다. 실제 전투상황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1643년 당시 이 지역은 좁은 진흙 길, 두터운 잡목과 채소밭 투성이여서 3백 년 후에 노르망디 보카쥬 지역이 전차전에 적합하지 않듯이 기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루퍼트의 기병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의회파 보병을 돌파할 수 없었다. 포크랜드 경은 평소의 온건파 이미지를 씻기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웠는데 의회파 보병대열에 돌격해 들어갔다가 전사했다. 루퍼트가 경고했듯이 왕당파 포병의 화약은 바닥이 났고 기병이 지나갈 진격로를 열어주지 못했다. 왕당파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의회파도 뉴베리를 점령하기에는 전력이 모자라서 전투는 그대로 끝났다. 

21일 새벽에 엑세스는 대포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왕당파의 대포는 침묵을 지켰다. 


기적을 만난 엑세스는 보병을 뉴베리 남쪽 도로를 따라 정렬시키고 기병으로 엄호했다. 그리고는 병사들을 무사히 동쪽으로 후퇴시켰고 런던으로 가는 길에 리딩 수비대도 구해냈다. 의회는 글로스터를 구원하고 패전의 위기에서 구원하고 병사들까지 안전하게 후퇴시킨 엑세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의회파 내에서도 뉴베리 전투에서 흘린 피를 안타까워 하는 사람도 많았다. "모두가 영국인이었다. 서로를 죽이느라 용감히 싸우다니..." 


핌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내전에서 승리하고 싶었고 에딘버러의 스코틀랜드군과 동맹까지 맺었다. 의회파 내의 온건한 주장은 1643년에 중요 인물들이 죽으면서 사라져갔다. 핌의 오른팔이었던 존 햄프덴은 루퍼트의 기습을 받아 6월 18일에 치명상을 입었고 6일 후에 여인숙에서 죽었다. 존 핌 자신도 12월 8일에 암으로 죽으면서 초 강경파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급부상했다. 

마찬가지로 포크랜드가 전사하면서 왕당파 전쟁회의도 더욱 강경해졌다. 


1644년의 내전은 크롬웰과 스코틀랜드군이 등장하면서 급진전되었다. 성경을 읽는 신도의 군대로 알려지면서 왕당파에 속하지 않았던 북부와 동부의 청교도 마을에서는 지원병이 쏟아졌다. 

1643년 북부의 왕당파는 요크셔를 거의 함락시켰지만 많은 병력이 남부로 이동하면서 그 힘을 잃었다. 크롬웰과 동부 카운티 연합의 징병으로 헌팅돈과 캠브리지가 안전해졌고 런던도 더 이상 위협에 시달리지 않았다. 


1643년의 내전은 남부와 서부에서 일어 났었고 의회파는 간신히 패전을 모면했었다. 1644년 그들은 북부를 재점령하려고 했고 루퍼트는 뛰어난 기동전으로 마지막 기회를 되살렸다. 그는 요크 외곽에 도착해서는 의회파 포로에게 "크롬웰이 저기에 있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영국 내전은 1651년에 의회파가 승리하면서 끝나고 찰스 1세는 처형당합니다. 


영국 내전을 다뤘던 미니 시리즈 Devil's Whore에서 찰스 왕의 재판과 처형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