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미드 바이킹스Vikings의 배경인 영국 앵글로 색슨 7왕국 그리고 바이킹의 침공 이야기입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드라마로는 재미까지 갖춘 바이킹스가 시즌 2를 끝내고 내년을 기다리게 만들었죠.
한 줌 밖에 안되는 바이킹의 약탈에도 속수무책인 영국왕조 그리고 군사력이 좀 이상할텐데 당시 영국의 상황이 실제로 그랬습니다. 워낙 바이킹의 기동력이나 전술이 뛰어나기도 했고요.
제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여러 번 당부하지만, 역사는 발전하는 학문입니다. 새로운 증거와 해석이 나올 때마다 크게 수정되는 학문이죠. 확증이 나올 때까지는 당연히 온갖 오류와 억측이 난무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영화와 소설로 알고 있는 역사는 거의 모두 조작이고, 그나마 정통 역사서적(제 이야기를 포함해서)조차도 신빙성이 의심되는 몇 줄의 기록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좋은 예로 한니발이 과연 알프스 산맥을 넘었는 지에 대해서도 확증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기록이 함께 있었던 측근도 아니고 1~200년 후의 기록을 구전 등으로 옮기면서 각색되었기 때문에 학자의 시각에 따라 편차가 굉장히 심합니다.
이번 이야기도 정사로 볼 수 없는 음유시인의 노래를 근거로 사실로 추정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른 확증이 나올 때까지는 일단 실제있었던 이야기로 간주해야겠죠?
바이킹에 맞선 색슨 지방장관 버트노트Byrhtnoth의 죽음
1,000년 전, 영국은 바이킹 침략자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사 역사학자가 기록한 앵글로-색슨Anglo-Saxson 연대기를 보면 그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데, 먼저 789년의 스칸다나비아Norse인 침공과 793년의 충격적인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 약탈(지도의 붉은 원. 현재는 홀리 섬이라고 부르며 당시에는 켈트족의 기독교 성지였음)이 기록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는 800년대 후반에 수도사가 기록한 연대기를 전국의 수도원으로 보내 개별 역사를 기록하게 했고 9개의 수기가 남아 있습니다. 오류도 많고 서로 상충되는 기록도 있지만 고대 영국역사의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침공과 점령이 빈번하게 일어나더니 865년에는 무골왕 이바르Ivar the Boneless(광전사라는 별칭을 가진 바이킹 지도자. 미드 바이킹스의 라그나르 로드부로크Ragnar Lodbrok의 아들. 덴마크와 스웨덴을 통치)가 아예 대이교군Great Heathen Army를 이끌고 영국을 점령하려고 했다.
미드 바이킹스의 주인공이 바로 신화속 인물 라그나르 로드부로크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이제 출산한 아이가 이바르인가요? 주인공만 집중하다 보니 기억이 가물 가물합니다.
무골왕 이바르의 침공로입니다.
노텀브리아Northumbria와 메르시아Mercia는 속절없이 점령당했지만 웨섹스Wessex는 알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의 지휘 하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침공을 막아냈다. 알프레드(실질적인 영국통일)와 후계자는 10세기 중반까지 국토탈환에 성공하면서 앵글로색슨 왕조를 탄생시켰다.
요즘 엣지 오브 투마로우의 영향으로 왔다리 갔다리 상황이 유행이니까 저도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앵글로 색슨 왕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기원후 43년에 로마가 켈트족을 밀어내고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합병했습니다.
로마가 힘을 잃고 켈트족이 국토회복을 하던 4세기부터 유럽대륙의 앵글, 색슨과 유트족의 침공과 이동이 시작됩니다.
앵글로 색슨은 게르만 혈통으로 켈트족에게 빼앗은 땅을 이번에 바이킹에게 빼앗기는 것이니 그리 억울할 것은 없죠. 그들도 바이킹(정확한 명칭은 노르드인)처럼 배를 타고 켈트와 로마의 해안지역부터 점령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예 눌러 앉고 왕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세기가 시작되면서 앵글로 색슨의 7왕조가 영국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지만 980년에 새로운 침공이 시작되었다. 에설레드Etherlred 2세(일명 섣부른왕 the Unready)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는 바이킹이 새로운 전략을 사용했다. 초기 바이킹은 새로운 땅을 찾아 모험을 떠났지만 에설레드 당시의 바이킹은 말, 은과 노예를 얻으면 바로 사라지는 해적이었다. 영국의 대처는 미온적이었다.
섣부른왕 에설레드는 덴마크인에게 연공을 지불하고 평화를 얻으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어설프게 덴마크 정착민을 학살했다가 대대적인 보복을 자초한 후에 노르망디로 달아났습니다. 덴마크의 스벤왕이 영국왕으로 추대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야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림의 큰 검과 대조적으로 그의 모습은 소심해보입니다. 에셀레드의 시대가 만화 빈란드사가의 배경으로 알고 있습니다.
1010년,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저자는 에셀레드의 절망적인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군대가 서쪽에 주둔하고 있으면 바이킹은 동쪽에 있었다. 그들이 남쪽으로 오면 우리군은 북쪽에 있었다. 모든 궁전신하를 불러들여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 쯤이면 한 달도 안되어서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 결국 군대를 모을 지휘관이 없다. 모두가 달아나기 바쁘다."
색슨 지도력도 문제였지만 바이킹은 속수무책일 정도로 교활한 적이었다. 그들은 긴 배를 타고 해안이든 강이든 마음대로 휘젖고 다닐 수 있었다. 그들의 침공소식은 상당히 빨리 퍼지지만 병사를 모으고 무장을 시킨 후에 그 지점으로 출발하기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한 며칠은 걸렸다. 바이킹은 교외를 약탈하고 노획물과 노예를 싣고 다시 바다로 나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991년에 색슨과 바이킹 사이에 몰던Maldon 전투가 벌어졌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서는 991년 전투에 대해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
"올라프Olaf가 93척을 이끌고 포크스톤Folkestone으로 와서 주변을 약탈하고 다니다가 샌드위치Sandwich로 이동했다가 다시 입스위치Ipswich로 가서 약탈하고 다시 몰던으로 갔다. 그리고 지방장관 버트노트가 군대를 이글고 그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지방장관을 죽이고 그 지역을 차지했다."
올라프는 올라프 트리그바손Olaf Tryggvason으로 나중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버트노프는 동부 영국 엑세스의 높은 귀족이었고 치안과 행정을 책임지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를 이끄는 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몰던 전투에 대한 기록은 서사시로도 남겨져있는데 그 전투를 실제로 목격한 사람의 기록으로 추측된다. 서사시에서 몰던 전투 부분은 버트노트가 군대를 정비한 후에 적을 향해 진군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올라프와 바이킹은 블랙워터 하구의 노데이Nothey 섬에 전열을 차렸고 엑세스군은 반대편 강변에 정렬했다. 양 진영 사이에는 수심이 낮아지면 건널 수 있는 둑길이 있었다.
몰던 지역은 런던 북동부에 있는, 지도의 붉은 원 부분입니다. 위 아래 지도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시에서는 바이킹이 버트노프에게 공물을 충분히 내놓으면 살려주겠다며 약을 올렸다. 버트노트는 정중하게 거절하며 색슨 검맛을 보여주겠다고 대답했다. 올라프는 버트노트에게 싸우려면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교활한 제안을 했다. 버트노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바이킹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둑길을 건너왔다.
전투가 벌어졌고 버트노트와 엑세스군은 학살당했다.
나름 그럴듯한 이야기이지만 버트노트가 오만한 바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트로이 공성전의 근거로 호머의 일리아드Iliad를 인용하지 않으며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 대해 세익스피어의 헨리 5세를 인용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1,000년 동안 무명씨가 지은 10세기 음유시를 보고 왕국을 위험에 빠트렸다고 버트노트를 비난하고 있다.
물론 시가 완전한 공상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강 하구, 섬과 둑길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고 전투도 시의 묘사대로 본토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버트노트가 왜 바이킹의 도강을 허용했는 지를 알아내려면 시에서 묘사한 자만심과 어리석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를 보면 980~991년의 기간은 많은 침공이 있었고 단 한 번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버트노트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바이킹에 맞서서 전투를 벌인 색슨 지도자였고 바이킹이 전투를 벌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만으로도 그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올라프가 주변지역을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다음 목표는 엑세스라고 판단하고 병사를 모았다. 아마도 봉화불 신호와 같은 정보망에 따라 바이킹이 있는 정확한 위치로 향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지역을 잘 아는 버트노트의 추측이었을 수도 있다.
바이킹은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는 강하구를 숙영지로 선택했고 엑세스에는 바이킹이 선택할 하구가 4곳 밖에 없었다. 어쨌든 버트노트는 늦지 않게 노데이 섬에 있는 바이킹을 가로 막았다.
9~10세기 영국 아일랜드와 앵글로 지역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전사가는 버트노트가 반대편 강변을 지키면서 도강하는 바이킹을 공격해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바이킹의 배가 없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버트노트가 둑길을 봉쇄하고 있으면 바이킹은 배를 타고 이동했을 것이고 그것을 막으려고 섬으로 건너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버트노트는 어떻게든 바이킹을 전투에 끌여들여야 했다.
도망치는 적을 상대할 때마다 겪는 전형적인 문제였다. 그로서는 전투를 벌이겠다며 건너가게 해달라는 바이킹을 마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양쪽이 전투를 피하지 않은 것을 보면 병력이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올라프의 함대가 93척이 맞다면 3,000명은 태우고 왔을테지만 이미 약탈물과 노예를 수송선에 태워 고향으로 보냈을테고 1,500명 정도가 합리적인 추측이다. 양쪽에서 1,000~1,500명의 군대가 있었고 병사들의 무장도 대부분 도끼나 창이었을 것이다. 당시 휘두르는 검은 상당히 비싼 무기였기 때문에 버트노트와 같은 부자만이 소지할 수 있었다.
당시 앵글로 색슨 왕국은 상비군이 없었고 사진과 같이 퍼드Fyrd 라는 부족단위의 민병대가 있었습니다. 버트노트와 같은 지방장관이 자유민 남성 중에서 퍼드를 소집하고 지휘했는데 퍼드 소집에 불응하면 벌금이나 처벌을 받았습니다.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인데 민병대인 퍼드가 갑옷, 방패와 무기를 스스로 조달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중무장했을 리가 없죠. 그들이 들고 있는 칼은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찌르는 칼입니다. 휘두르는 칼은 본문에서도 설명했듯이 부자만 소지할 수 있었습니다.
양쪽 모두 보병이 중심인 것은 확실했다. 바이킹은 배에 말을 실을 수 없어서 기병이 거의 없었고 색슨군도 기병은 정찰 정도로만 사용하고 모두 보병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인 전술이 방패를 이용한 근접전이었기 때문에 전투는 치열했고 금방 끝났다. 색슨군은 대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났고 버트노트와 직솔병사만이 자리를 지키다가 모두 죽었다.
몰던 패전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었고 특히 색슨 왕국은 치명상을 입었다.
에설레드 왕은 바이킹에게 공물을 주기로 결정했다. 알프레드 대왕도 바이킹에게 공물을 주기는 했어도 적절한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이지 에설레드처럼 엄청난 공물을 주지는 않았다. 991년에 지금된 은만 해도 4.5톤이 넘었다. 이 정도 공물이면 평화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액수는 더욱 높아졌고 영국은 군대를 모으고 무장시킬 재원이 바닥났다. 1012년에는 무려 22톤의 은을 바쳐야했다.
11세기 당시의 영국은 이런 부채를 감당할 수 없었고 1016년에 덴마크 왕 카누트Canute가 영국왕위에 추대된 것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1042년에 색슨왕조가 복구되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1066년에는 역사상 마지막으로 두 번의 침공을 겪었다. 한 해에 두 번이나 말이다. 먼저 노르웨이의 하랄드 2세Harald Hardraade가 침공했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에 있던 노르망디 공인 서자왕 윌리암William the Bastard가 침공했다.
몰던 전투로 색슨왕조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색슨왕조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버트노트를 기사도에 물든 바보라고 단정지어서도 안된다. 그는 위험을 미리 계산했고 그 판단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만약 그의 도박이 맞아 떨어졌다면 음유시인들은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노래했을테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미드 바이킹스에서 영국에 상륙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앵글로 색슨군과 일전을 벌이는 모습입니다. 방패벽 전술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그냥 인상적인 바이킹 또는 색슨 전사의 그림입니다. 나중에 헤이스팅스 전투 등에서 사용하려고 했다가 그냥 올립니다. 설명은 따로 없으니까 감상만 하시면 됩니다. 클릭하면 커지는 그림도 있습니다.
바이킹 교역로라고 되어 있는데 교역과 약탈이 병행되었겠죠. 아래 그림은 북미에 상륙한 바이킹이 원주민을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재미있게도 그 아래에는 거꾸로 공격당하는 모습입니다.
아! 잘못 넣은 것이 아닙니다. 미식축구 바이킹 팀의 치어리더입니다. 유머로 한 컷 넣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한 장면입니다. 상대하기 난감한 민족이 프랑크와 바이킹입니다. 공성전에서 커다란 방패를 앞세워 길목을 막고 있으면 피해가 엄청나서 공성전은 피하고 싶더군요.
그리고 앵글로 색슨 전사들 모습입니다. 미드 바이킹스에서 워낙 쉽게 무너져서 우습게 보이지만 게르만족 출신들입니다. 클릭하면 커지는 그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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