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울려퍼진 사자의 마지막 울음소리
3차 십자군 원정과 오스트리아 억류에서 돌아온 리차드는 나머지 여생을 숙적 필립 2세 아우구스투스와 싸우며 보낸다.
“저희의 적이며 전하의 왕국을 교란시킨 영국왕 리차드의 신상에 대해 전하에게 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가 그를 잡아두고 있습니다. 전하에게 매우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소식으로 시작되는 편지가 프랑스왕 필립에게 전달되면서 리차드의 실종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리차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헨리 6세의 손안에 있고 1193년 캠페인 시기도 다가오기 때문에, 필립은 다시 없을 이번 기회에 명예를 되찾고 오랜 숙적인 양주(Angevin, 프랑스 영토 내의 영국령 영지) 제국을 확실하게 제거할 생각이었다.
약 1년 전인 12월 27일,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필립 아우구스투스가 비참한 심정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건강도 나빠졌을 뿐만 아니라 시실리에서 떠날 때부터 아크레(Acre)를 탈환했을 때까지 항상 리차드에게 뒤져 자존심도 매우 상한 상태였다. 리차드와 이런 저런 일로 사이가 악화되었었지만 시실리에서 당한 모욕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1191년 3월 말에, 리차드는 필립의 여동생 앨리스(Alice)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나바라의 베렝가리아(Berengaria of Navarre)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것도 모자라 앨리스가 선왕 헨리의 정부였고 사생아까지 낳았다고 주장해서 필립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필립은 십자군 원정을 망쳤다는 원망이 두려워 상처입은 자존심을 굽히고 1만 마르크의 보상금을 받아들였다. 앨리스의 지참금에 포함되었던 벡상(Vexin)의 노르만 경계지역과 지조르(Gisors) 요새는 돌려받지 않았고, 향후에는 리차드의 왕자에게 상속된다는 것에 동의했다. 만약 리차드에게 물려줄 왕자가 없는 경우에는 이 전략요충지는 필립에게 다시 되돌아간다. 필립도 후계자가 없다면 노르망디에 합병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필립이 기분좋게 동의했을리가 없으며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영국 왕은 그 동안 프랑스 내의 영지에 대해 프랑스 왕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리차드는 필립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땅까지도 욕심을 부려 필립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렸다. 누가 봐도 프랑스 왕이 영국 왕에 비해 열세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필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지역을 찾아야만 했다.
(우에스기 왈: 리차드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젊었을 때에 프랑스에 있으면서 필립과 동성애 연인관계였고, 죽을 때까지 후계자가 없었다는 것을 증거로 들고 있다. 리차드의 후계자가 없을 경우, 벡상과 지조르를 필립에게 반환한다는 조건도 당연히 후계자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프랑스 왕이 동의하지 않았을까?
리차드가 독일에 포로로 잡힌 일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기사의 아르수프 전투를 참조하도록 하자. 퍼즐 조각처럼 단편 단편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좀 불편한 점이 많을텐데 내용이 가능한 한 겹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저도 이해해주시길.)
필립과 리차드의 극심한 반목
리차드는 십자군 원정 중이었는데, 원정 중인 십자군의 모든 재산은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영주가 부재 중일 때에는 어느 누구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교회의 보이지 않는 법이 존재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필립이 아니었고, 이왕 하는 김에 더 많은 목표를 노리기로 하고, 교활한 계책을 써서 리차드의 아픈 곳을 건드리기로 한다.
1192년 1월 20일, 필립은 리차드의 노르망디 귀족인 윌리엄을 찾아가 1년 전에 리차드가 메시나에서 노르망 벡상 지역을 필립에게 양도한다고 서명한 위조문서를 내밀었다. 필립의 의도를 의심한 윌리암과 다른 영주들은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다. 그 당시 비옥한 아르투와(Artois) 지역을 남긴 플랑드르(Flanders)의 필립백작과 같이, 십자군 원정에서 죽은 프랑스 귀족들의 재산이 왕에게 귀속되기 시작했고, 양주제국을 침공하려면 이런 지역의 통치부터 확실하게 장악해야 했기 때문에 바로 당장 뭘 얻어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위조문서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쌓았던 것이었다.
그림 설명: 필립의 국토회복 전쟁이전의 프랑스 내 영지 배치도. 현재의 프랑스와 달리 프랑스 왕권이 매우 약했음을 알 수 있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영국 또는 봉신들의 영지였다.
1192년 내내, 필립은 리차드 진영에 대항할 사람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리차드의 동생인 존 백작, 플랑드르의 볼드윈8세 백작, 툴루즈(Touluse)의 레몽 백작, 앙굴렘(Angouleme)의 아데마르(Ademar)이 넘어왔다. 양쪽 왕의 영토 중간에 있던 벡상의 지역토후에게도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중립적이었던 이들도 결국에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사가 존 질링햄(John Gillingham)이 말했듯이 “중립적이던 토후들도 어느 마차던 뛰어 올라타지 않으면 깔려 죽을” 판국이었다.
대격돌의 시작
1193년의 첫 번째 사건은 리차드의 동생 존 백작이 파리에 와서 프랑스내의 영국 영지에 대한 조공을 바치면서 시작된다. 영국에 돌아온 존은 리차드가 이미 죽었으며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어머니 엘레노어(Eleanor)는 리차드가 독일에서 헨리 6세의 포로가 되었을 뿐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에서의 계책이 실패한 필립은 벡상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전투는 상당히 위험한 모험으로 용병부대와 혼성부대가 요새를 포위하고 가끔씩 교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요새 외곽의 민간인 지역을 약탈하고 파괴한 후에 재빨리 이동해서 적을 최대한 교란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또 다시 역사가의 말을 빌리면 “최전위에 있던 정찰대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부대가 약탈을 했다. 습격당한 주민들은 타죽거나 손이 묶여 끌려갔다.”
그림 설명: 프랑스와 양주제국의 노르망디 사이에 있는 전략요충지 벡상은 자연스럽게 리차드와 필립의 목표물이 된다. 이 당시 프랑스의 신세도 좀 한심했는데, 민족과 국가의 개념이 전혀 없던 봉건시대에서 왕권을 찾아가던 시기이니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프랑스의 영광이 실현됩니다. 그림을 클릭하면 조금 더 커집니다.
필립의 첫 번째 목표는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지조르요새였다. 지조르의 성주는 양쪽 왕 모두에게 조공을 바치던 지베르니 드 바스꿰이(Gilbert de Vascoeuil)였는데 예상과 달리 순순히 성문을 열고 투항하고 만다. 전략적 가치나 요새의 방어를 생각한다면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조르를 손에 넣은 필립은 노르망디로 쳐들어가 디에프(Dieppe)에 다다른다. 존 백작은 배반의 대가로 에브휴(Evreux)를 받았고, 볼드윈 백작까지 합세해서 세력이 더욱 커진 필립의 대군은 노르망디의 쌍둥이 수도인 루앙(Rouen)을 포위한다. 필립의 기대와 달리 로버트 공작 (Leicester)이 워낙 도시 방어선을 공들여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다. 필립이 수비병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수비병들은 프랑스 왕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혼자서 놀러 올 수 있다는 답변을 들려준다. 노르망디의 마지막 최종 목표를 손에 넣지 못해 분노한 필립은 보다 손쉬운 목표를 찾아 이동한다.
7월 9일, 멍뜨(Mantes)에서 리차드의 봉신들을 만난 필립은 영국령에 대한 공격을 중단한다면 지금까지 얻은 영토를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추가로 다른 영토도 넘겨줄 수 있다는 협상을 끌어낸다. 또한 리차드가 이 지역을 되찾으려면 2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조공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덧붙였다. 리차드의 성격으로 볼 때 이런 협상을 제안했을 리 없지만 필립과 존의 방해로 독일에 계속 포로로 잡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립과 존은 리차드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막대한 돈을 지불하겠다고 헨리5세에게 제안을 했지만, 헨리는 이미 리차드의 명성과 당당한 태도에 감명을 받은 상태였고, 리차드도 억류된 기간 동안 신세만 한탄하지 않고 많은 영주, 왕자, 성직자들과 친분을 쌓아두었기 때문에 헨리는 두 사람의 제안을 거부한다.
우리에서 풀려난 사자
1194년 2월 4일, 양주제국이 10만 마르크라는 천문학적 몸값을 치르면서 리차드가 드디어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헨리는 양주제국이 영국에 바치던 조공도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차드는 예상과 달리 바로 귀국하지 않고 콜롱(Cologne)에 들러 독일과의 정치적 연대를 강화시켜 필립의 등뒤를 위협한다. 3월 13일 리차드는 영국에 도착해서 자신의 왕위를 되찾는다.
리차드는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기 전에 처분하려고 내놓았던 영국내 영토, 작위와 권리를 다시 매각하기 시작한다. 필립과의 대결에 많은 돈이, 그것도 하루빨리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많은 역사가들이 주장한 것과 달리, 가장 높은 금액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매각하는 대신에 더 낮은 가격이라도 믿을 수 있고 유능한 사람에게 매각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프랑스 원정에서 성공하려면 재정과 물자공급이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 설명: 막대한 몸값을 치르고 독일에서 풀려난 리차드가 1194년 3월 14일 샌드위치(Sandwich)에 내리고 있다. 영화 로빈훗에서는 리차드가 십자군 원정 후에 귀국하지 못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4월 4일, 리차드는 스코틀랜드의 윌리암 왕을 만나 2주간 친목을 다진 다음, 4월 17일 윈체스터(Winchester)에서 다시 왕위계승식을 거행해 자신이 유일한 왕임을 못박는다. 5월 12일, 리차드는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드디어 노르망디에 상륙한다. 단 몇 개월 만에, 리차드는 혼란스러운 영국 내정을 정리하고 군대를 소집해 필립을 향한 원정을 한 것이다. 이것으로 판단해보면, 당시 영국은 일부 역사사가 주장한 것과 달리, 피폐하거나 왕권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누이(Verneuil)
필립도 리차드가 전쟁터에 돌아올 때까지 놀고만 있지 않았다. 정복한 영토를 잘 통합해서 세느 강의 동쪽 노르망디 지역 상당부분이 필립의 세력이 되었다. 그는 이제 루앙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뚜렌느(Touraine)와 베리(Berry)에서는 동맹군이 매우 우세한 입장이었고, 아키텐(Aquitaine)에서는 지오프리(Geoffrey) 등의 귀족들이 공공연하게 리차드에 대해 반역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돌아온 형 때문에 필사적인 존 백작도 필립의 어떤 요구던 들어줄 태도였다.
그림 설명: 상 드니스 수도원의 스테인 글라스에 그려진 필립2세.
필립은 베르누이 요새를 포위하면서 1194년 군사작전을 시작한다. 이 요새는 1193년에도 공격을 버텨냈었기 때문에 필립을 비꼬는 캐리커처를 성문에 그려 두 번째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필립은 리차드의 프랑스 진군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함락시켜야만 했다.
프랑스에 상륙한 리차드는 바로 베르누이로 진군한다. 진군도중 자신의 반역행위에 대해 용서를 비는 존에게 “괜찮아, 너는 아직 애니까”라고 무시한다. 당시 28세였던 존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에브휴로 쳐들어가 자신을 환영하는 프랑스 수비대를 모두 학살한다.
리차드가 다가오는 것을 안 필립은 막사를 걷어 에브휴를 탈환하고 베르누이 공격을 위해 많은 병사들을 남겨두지만, 왕이 떠난 것을 안 프랑스 군은 바로 다음 날 철수를 한다. 5월 30일, 리차드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여기에 입성한다. 너무나도 손쉬운 성공에 기쁜 나머지 항복한 수비병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한 명씩 키스를 했다고 알려진다.
필립이 북부지역 공략에 엄청난 정력을 쏟아붓고도 별 소득이 없었던 반면에, 리차드는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한 후에 아키텐의 반역자들에게로 군대를 돌린다. 상황이 급하게 변한 필립은 북부공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재정비해서 빼앗긴 요새 공격과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한다. 필립의 군대가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차드는 필립이 통과할 방돔(Vendome)에서 일전을 치를 상세한 작전을 수립한다.
필립은 리차드에게 한 번 붙어보자고 응답을 했지만, 실제로는 황당하게 막사를 다시 걷어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맹렬히 추격한 리차드는 7월 4일 프레트발(Freteval) 근처에서 프랑스 후위를 붙잡는다. 결국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 군이 다시 한 번 후퇴하는데 성공했지만 양주제국의 배반자 명단이 적힌 중요한 문서가 리차드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 리차드에게 남쪽 지방에서의 모든 계책이 탄로났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호각지세
필립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노르망디로 급하게 진격해 존 백작과 윌리암 공작의 군대에게 공격을 퍼붓는다. 결국 이전의 패배를 설욕했지만 리차드의 신속한 대처때문에 필립의 재정은 파탄날 지경이 된다. (영국에서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고 온) 리차드도 재정상태가 너무 안좋았기에 두 사람은 틸리에레스(Tillieres) 휴전에 합의한다. 그리고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리차드의 조카딸이 필립의 아들 루이스와 결혼하고 지참금으로 벡상, 버논(Vernon) 등의 지역과 2만 마르크를 지불한다는 말이 오갔지만 최종 합의는 연기된다.
1195년 필립이 다시 보드뢰이유(Vaudreuil)를 포위하면서 전쟁이 벌어지고 리차드가 협상을 위해 필립을 방문한다. 적이라도 예방했을 때에는 전투를 멈추는 것이 당시의 예절이었지만, 필립은 보다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해 요새를 함락시켜야만 했고 인부들에게 요새 벽 밑에 굴을 파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리차드와 대면하는 자리에서 요새의 큰 벽이 무너져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어떤 상황인지를 눈치챈 리차드는 복수를 맹세하며 황급히 자리를 뜬다.
필립은 노르망디 북동부 공략에 주력하고, 그리스의 불과 같은 물질로 항구에 정박한 영국 함대를 불태워 침몰시킨 디에페(Dieppe) 전투로 절정에 달한다. 리차드는 급히 프랑스군의 후위를 위협했지만 이번에는 실패하고 만다. 노르망디 공략에 기세가 오른 필립은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리차드의 용병 지휘관 메르카디어(Mercadier)가 점령한 이슈댕(Issoudun)을 노린다. 프랑스군이 마을에 진지를 펴고 성을 포위하는 순간, 리차드와 선봉부대가 갑작스레 나타나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들어가 수비대와 합류한다. 필립은 리차드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리차드는 이미 본대에게 필립의 배후를 압박하는 동시에 보급로를 끊을 것을 지시해둔 상태였다. 자신이 오히려 위기에 빠진 것을 알게 된 필립은 1196년에 다시 한 번 휴전에 서명한다.
후반전
1196년과 97년의 전쟁은 단기전이면서도 치열했지만 여전히 밀고 당기는 상태가 이어진다. 일단 시작은 리차드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갔다. 영국의 정치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판에 조카와 후계자 아더가 필립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리차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한다면, 양주제국은 존의 차지가 된다. 필립이 오말(Aumale)을 공격했는데, 요새를 구원해주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갈리옹(Gallion) 포위전에서 리차드는 석궁에 맞아 한 달이 넘게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군사적 실패는 연이어졌지만 그래도 정치적으로는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196년 10월 여동생 조안(Joan)을 뚤루즈의 레몽 백작과 결혼시켜 40년간 이어진 지역분쟁을 끝낸다.
리차드는 세느 남쪽에 웅장한 성을 완성한다. 샤또 가야르드(Chateau Gaillard)라고 불린 이 성은 2년의 긴 시간과 11,500파운드라는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기에 “성벽이 버터로 변한다고 해도 지킬 자신이 있는”성이라고 공언할만큼 완벽한 성이었다. 그렇다고 수비를 위한 성은 아니며 앞으로의 노르망디 탈환작전의 거점으로 활용할 공격용 성이었다.
리차드는 필립의 중요한 동맹군인 플랑드르의 볼드윈9세 백작을 교역봉쇄 전략으로 무너뜨린다. 유럽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플랑드르는 도시의 크기에 비해 너무 많은 시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뿐만 아니라 당시의 주수입원인 직물의 원료 역시 영국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의 수출을 금지시키는 채찍과 함께 볼드윈이 영국에 가진 영토를 시가대로 매입하고 거기에 5,000 마르크까지 얹어준다는 당근도 제시받은 볼드윈은 1197년에 결국 리차드에게 투항한다.
궁지에 몰린 필립
1198년 신성로마황제 헨리6세가 죽고 3살짜리 후계자로는 왕위를 잇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자 리차드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온다. 독일귀족들은 너무 어린 후계자대신에 리차드의 조카 브룬스뷕(Brunswick)의 오토(Otto)를 왕으로 지명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등에 얻은 리차드는 필립에게 공세를 펼칠 군자금을 얻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교황의 호의도 이끌어낸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불로뉴(Boulogne) 백작과 노르망디의 많은 귀족들이 다시 한 번 필립을 버리고 리차드 쪽으로 돌아선다.
필립은 벡상 주변의 18개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며 1198년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벡상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리차드 편이 된 볼드윈이 아르투아(Artois)를 공격했기 때문에 리차드보다 발등의 불이 더 급해졌다.
9월 27일, 리차드가 벡상으로 진군해 꾸셀르 쇼씨(Courcelles-Chaussy)와 부리(Boury)를 점령한 후에 댕구(Dangu)로 되돌아간다. 필립은 이 지역이 아직도 점령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300명의 기사와 시종만 데리고 이 지역으로 되돌아오는 실수를 범한다. 필립이 급하게 전장터를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리차드는 중간에서 기습을 가해 프랑스군이 지조르(Gisors)로 퇴각하게 만든다. 무거운 갑옷의 기사와 말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다리가 무너졌고 필립은 거의 익사직전에 구출된다. 18명의 기사가 익사했지만 나머지 병력은 지조르로 무사히 입성하고 약간의 기습병력만 가진 리차드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필립은 곧 군대를 정비해서 에브휴를 향해 다시 진군한다. 리차드는 필립의 공격에 벡상 공격으로 맞대응하고 용병지휘관 메르카디어는 애버빌(Abbeville)을 기습한다.
1198년 가을이 되자, 리차드는 1193년에 잃었던 지역을 거의 모두 수복했고 그의 영향력과 동맹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해졌다. 궁지에 몰린 필립은 리차드에게 지조르를 제외한 자신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영구적인 휴전을 제안한다. 리차드는 볼드윈 백작도 포함된 평화협정을 원했기 때문에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합의한다.
대결의 끝
1199년 1월 중순 한 척의 배가 세느 강변에 다가왔다. 배 위에 늠름하게 서 있는 사람은 사자왕 리차드였고 강변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필립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두 왕이 서로에게 소리 높여 조건을 제시했지만 영구적인 휴전합의는 실패했고 결국 5년간의 휴전에만 합의한다.
리차드는 휴전기간 동안 양주제국의 남부지역 안정에 힘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앙굴렘(Angouleme)과 리모주(Limoges)의 백작들이 가장 골치덩어리들이었다.
1199년 3월 리모주의 귀족 아샤르(Achard)를 공격하는데, 숨겨진 보물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로마 때부터 내려온 보물을 아샤르의 부하들이 발견해서 손에 넣었고 이 중 일부를 리모주 백작과 리차드에게 헌납했다고 한다. 왕에게 모두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리차드는 아샤르를 공격한다. 겨우 수비병이 40명 밖에 안되는 찰루스(Chalus)에서 리차드가 죽은 것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신이 리차드의 탐욕을 벌한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림 설명: 음식나르던 중에 석궁도 쏘는 투잡뛰는 요리사. 영화 로빈훗의 한 장면.
앵글로-노르만 역사가들도 리차드의 탐욕을 비난했다. 보물을 노려 전쟁을 벌이다 죽은 것을 신이 내린 심판이라
고 설명했다. 도덕적으로는 그런 비난을 받을만했지만 리차드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람을 용서했고 신에게도 자신의 죄를 빌었다. 죽음을 앞둔 사자왕은 그리스도교인으로서도, 전설적인 십자군왕으로서도 모범적인 행동을 보였다. 충성스러운 메르카디어는 그런 기사도가 없는 사람이었다. 리차드가 죽자, 그는 석궁을 쏜 요리사를 불에 태워 죽이고 나머지 수비병도 모두 목매달았다.
그림 설명: 석궁을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리차드. 리차드는 항상 병사들 앞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부상을 많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죽음의 부상이었다. 역시 영화 로빈훗의 한 장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전설인지 알 방법은 없다. 리모주의 베네딕트 수도사인 버나드(Bernard)는 리차드가 리모주 백작의 성과 마을을 노렸을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월 26일, 리차드는 평상복차림으로 공격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보러 나갔다가 화살을 맞았는데. 왕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람으로 여러 명이 거론되었지만, 버나드는 피에르 바질레(Pierre Basile)가 큰 프라이팬으로 화살들을 막아내면서 리차드에게 석궁을 쐈다고 말한다. 리차드는 피하지도 않고 자신을 노리는 용기에 박수를 보냈지만 화살은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꽂혔다.
그림 설명: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은 리차드가 죽기 직전 자신을 쏜 석궁병을 용서한다. 그렇지만 용병대장은 그를 죽을 때까지 불로 고문을 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채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리차드는 의사를 불러 수술을 하게 했으나 화살이 너무 깊게 박혀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죽는 것을 경험한 리차드는 자신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를 불렀다. 1199년 4월 6일, 리차드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어머니 엘레노어는 “삶의 모든 것을 잃었다”면서 슬피 운다.
만약 리차드가 살아있었다면 휴전을 중단하고 필립과의 전쟁은 계속했을 것이다. 사자왕은 그 이름에 어울리게 필립의 영토로 밀고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협상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결국 1198년까지 리차드를 끊임없이 괴롭힌 필립이 승자가 되었다.
그림 설명: 1199년 4월 6일 어머니 품에서 죽은 리차드는 아버지 헨리 2세가 묻혀있는 퐁테브로(fontevraud) 수도원에 함께 묻힌다. 그의 내장은 찰루스에, 심장은 루앙에
따로 묻힌다.
리차드의 후계자인 존은 교활하고 경험많은 필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존은 필립이 죽는 1223년까지 프랑스의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리차드가 그렇게 고생해서 지켜낸 양주제국도 완전히 와해된다. 리차드왕보다 오래 산 필립2세는 필립 아우구스투스(Philip Augustus)로 기록되었고, 무능한 존왕은 땅을 잃은 존(John Lackland)라는 별명을 얻는다.
Military History Simon Rees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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