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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러시아 프리깃함, 스토로제보이의 반란

by uesgi2003 2013. 11. 1.


표트르대제에 대한 책을 정리하면서 러시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냉전시대의 교육때문에 러시아는 입에도 올릴 수 없는 금기단어였기에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괜한 편견이 꼼지락 거리기는 합니다만...


이번 이야기는 현대 러시아의 작은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영화 붉은 10월의 주제가 된 이야기입니다. 


러시아 프리깃함, 스토로제보이의 반란 


1975년 11월 8일 토요일 자정, 배 한 척의 엔진소음이 다우가바강의 정적을 깼다. BPK 스트로제보이Storozhevoy는 당시 소련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를 가로 지르는 해협을 출발했다. 크리바크Krivak급(사진참조) 대잠 프리깃함은 급선회를 한 후에 리가만을 향해 속도를 뇨높여 북으로 사라졌다. 


4시간 후,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크레믈린의 레오니드 브레즈넵Leonid Brezhnev의 침실을 급하게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비서는 안에서 대답이 없자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는 깊은 잠에 빠진 서기장을 깨웠다. 발트해 함대에서 들어온 위급한 전문이 아니었자면 공산당 서기장을 감히 깨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련 서기장이 바로 확인하고 결정해야 할 긴급한 일이 분명했다. 


짜증이 난 브레즈넵은 전문을 읽으며 당황했다. 반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발트해 함대의 모든 전함과 전투기에게 스토로제보이를 추격하라고 지시했다. "그 배를 폭격해서 침몰시키시오!" 그는 소리쳤다. 

2시간도 안되어서, Yak-28, Tu- 16, 경비함과 구축함이 미친듯이 수색에 나섰고 보는 즉시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마도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이야기일 것이다. 톰 클랜시의 1984년 베스트셀러 붉은 10월The Hunt for Red October 그리고 1990년 동명의 블록버스터 영화의 이야기와 거의 같기때문이다. 실제로 클랜시는 스토로제보이의 반란에서 소설 모티브를 따왔고 1982년 미해군 도서관에서 그레그 영 중위가 정리한 반란이야기를 참조했다. 

영화에서는 미 장교(알렉 볼드윈, 스코트 글렌, 제임스 얼 존스)가 소련 핵잠수함 함장(숀 코넬리)과 북대서양에서 스릴넘치는 술래잡기 게임을 벌인다. 우리는 소설과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정말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먼저 실제 반란은 잠수함이 아닌 일반 함선에서 벌어졌다. 그렇지만 10월호처럼, 스토로제보이는 매우 정교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이 함선의 임무는 냉전시기에 북대서양으로 항해해서 미잠수함을 침몰시키는 것이었다.

실제와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역의 동기였다. 클랜시의 소설에서는 마르코 라미우스 함장이 첨단 잠수함을 끌고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한다. 조자는 실제 반란을 주도했던 36살의 소련장교, 발레리 사블린Valery Sablin(사진참조)을 모델로 삼았지만 사블린은 망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더 야심차고 현실적인 목표를 노렸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레르부르크)로 가서 정박하고 소련정부를 전복시킬 생각이었다. 서방세계는 이전의 러시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망명할 것으로 예상했다. 

사블린은 달랐다. 왜 소련 해군장교가 이념문제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을까?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소련해군의 상태가 어땠을까? 클랜시의 소설에 나오는 정보장교가 실제로 존재했고 붉은제국의 몰락을 예상했을까?


발레리 사블린은 진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레닌혁명이 성공할 것으로 믿었던 마지막 세대였을 것이다. 사블린은 올바른 공산주의 지도자가 있다면 소련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허구보다 더 이상한 진실이 많다'는 말처럼 사블린은 정치장교였다. 공산당은 전함마다 정치장교를 배치해서 이념을 강화하고 서방으로의 망명을 막았다. 

그는 니키타 후루시쳅을 러시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려고 한 개혁자로 존경했다.

중앙당이 개혁시도를 포기하고 후루시쳅을 시대착오의 레오니드 브레즈넵으로 교체하면서 사블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충성심깊은 정치장교를 버리고 공산당을 전복시키기로 했다. 아내에게 "공상주의는 내부에서 개혁되어야 하오. 공산주의의 방어무기를 사용해서 말이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1975년 11월 8일, 리가항에 정박해 있던 사블린(당시 대위)는 행동에 옮겼다. 그는 함장 아나톨리 포툴니이를 감금하고 장교를 소집해서 소련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을 공개했다. 그들에게 앞에 놓인 체스말을 선택해서 지지나 반대의사를 표시해달라고 부탁했다. 흰색은 반란지지를, 검은색은 반대를 의미했다. 절반의 장교가 사블린과 동조했고 나머지는 감금되었다. 

그는 이제 사병의 동참을 설득했다. KGB 조사관이 나중에 준위 빅토르 보로다이에게 왜 동참했는 지를 묻자, 그는 "생애 처음으로 내게 진실을 알려준 사람이기 때문에"라며 다른 사병들을 대변했다. 다시 성공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 지를 묻자, 보오다이는 10% 정도로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조사관은 놀라서 왜 그런 위험을 무릅썼느냐고 다시 물었다. "10% 가능성도 가능성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사블린의 반란은 돌발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계획을 준비했고 함장보다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사병을 설득해왔다. 사블린은 그들의 애국심에 호소를 하고 정의를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노동자의 천국이 실제로는 경찰국가라는 점에 동의했다. 

볼세비키 혁명 58주년은 반란을 일으킬 좋은 시점이었다. 스토로제보이는 해군의 기념항해를 위해 리가에 정박할 예정이었다. 사블린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반란 중 하나를 시작했다. 


1905년 포템킨Potemikin 반란은 제정러시아 사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사블린은 작은 불씨 하나로 사회붕괴라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포템킨 전함은 흑해 함대에 배속되었고 선원은 조악한 식사를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소고기를 잘라 만든 스프를 거부했다. 전함의 장교들은 스프를 먹지 않으면 처형하겠다는 악수를 뒀다. 선원은 장교를 죽이거나 바다로 던졌다. 그들은 포템킨을 장악하고 여러 흑해 항구를 전전하면서 가는 곳마다 반란의 불길을 던졌다. 정부군은 결국 7,000명의 희생으로 반란을 진압해지만 니콜라스 2세 제정은 거의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사블린은 70년 후에 포템킨의 전설이 다시 재현되기를 바랬다. 


1925년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의 유명한 계단학살 장면입니다.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한, 오데사 계단의 학살장면은 실제로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많은 영화에서 이 장면을 재현했습니다. 


그의 계획은 이상, 꿈, 거짓말이 뒤섞여 있었다. 사블린은 먼저 선원에게 다른 부대가 반란에 합류할 예정이며 스토로제보이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그는 실제로 소련정권의 부패와 위선에 신물이 난 동료장교가 자신의 반란기치에 호응할 것으로 믿었다. 사블린은 리가를 자정에 떠나며 8시간 항해해서 11월 9일 아침에 레닌그라드 부근에 갈 생각이었다. 일단 혁명의 도시인 레닌그라드(해군성이 있는)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도착하면, 닻을 내리고 배의 무선교신을 통해 소련국민에게 정치방송을 해서 새 혁명을 일으키는 계획이었다. 


사블린은 소련정부에 제시할 요구목록을 정리해두었다. 여기에는 스토로제보이를 정부와 당기관에서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고, 국영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매일 밤 30분의 방송시간을 할애하고  함선이 소련 수로 어디에나 부표를 띄우고 정박할 수 있으며 선원의 육상휴가를 인정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블린은 브레즈네프와 당기관이 선원의 가족과 연인에게 어떤 박해도 가하지 않는 보장을 요구했다. 


그들이 요구를 수용하면, 레닌그라드 (특히 크론슈타트섬)의 해군수비대가 합류해서 해군성과 참모부 건물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로 1917년 당시에 크론슈타트 수비대가 레닌에게 큰 힘을 보태주었었다. 

사블린은 60년 후에, 비슷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러시아 해군의 반란역사를 돌이켜보면 완전히 엉뚱한 상상도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시작한 새 혁명의 불길은 모스크바로 이어지고 브레즈네프의 공산당정권은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1975년 11월 9일, 일요일 오전 6시, 브레즈네프의 명령을 받은 추격대가 사블린을 흑해에서 따라잡았다. 몇 차례의 공습은 엉뚱한 배를 오폭해서 다른 크리바크급의 프리킷함을 파손시키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진짜 목표물을 따라잡은 후에 엔진을 정지하고 정박하라고 요구했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로 가겠다며 추격대에게 합류하라고 권유했다. 


스웨덴 군정보장교는 고틀란드섬에서 괴상한 일을 겪었다. 사블린이 탐지를 피하기 위해 레이더를 껐기 때문에, 스웨덴의 레이더에는 깜박이는 점이 가득차더니 소련의 발트해 함정과 전폭기가 모두 스웨덴 레이더 기지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통역병사가 급하게 무전교신으로 어떤 함정을 추적 중이라는 정보를 받지 않았다면 스웨덴은 3차대전 준비에 돌입했을 수도 있었다. 

스웨덴 감청은 소련 전폭기 조종사들이 스토로제보이 폭격을 거부하는 교신을 들었다. 한 동안 사블린의 반란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국방장관은 해군 조종사를 믿을 수 없게 되자, 공군에게 지시해서 수호이 SU-24 전폭기로 반란함선의 항해를 멈추라고 명령했다. 수호이는 500파운드 폭탄을 선미에 명중시키고 기관포로 선체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소련 해병과 KGB 요원이 제자리에 선 스토로보제이에 올라 선원을 체포했다. 놀랍게도 희생자는 사블린이 총상을 입힌 포툴니이 함장 한 명 뿐이었다. 

사블린과 13명의 반란병은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비공개재판에서 조국을 배신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76년 8월 3일, 모스크바의 레포트토보 감옥의 지하실에서 처형이 집행되었는데 머리 바로 뒤를 쏘아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블린이 냉정시대 소련해군에서 첫 번째로 반란을 모의한 사람이 아니다. 1959년 니콜라이 아르타모놉 대위가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중 간첩이 되었다가 1975년에 오스트리아에서 KGB 요원에게 암살되었다. 1963년에는 북해 함대 교신병 블라디미르 가브릴롭이 반란을 모의했었고 1969년에는 발트해 함대의 장교 3명이 불온조직 모의로 체포되었다. 그 중에 한 명은 핵잠수함의 무기조작 장교였다. 1969년 발트해 핵잠수함에서 반란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고 실제로는 1972년 노르웨이 앞바다였다는 보고가 있다. 1970년대 초 순양함이 일본으로 가려다가 체포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소련은 필사적으로 반란 움직임을 막았다. 


사블린의 반란과 다른 항명사건은 기밀해제된 KGB 파일과 공개자료에서 확인되었지만 스웨덴 정보당국은 스토로제보이에 대한 어떤 자료도 공개하지 않았고 미 정보당국은 여전히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논평을 거부하고 있다. 그 배경이 어떻든, 당시 소련해군의 규육은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이 확실하다. 


전함 포템킨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영화에 큰 영향을 남긴 오데사 계단의 학살장면입니다. 90년 전 영화로 무성영화입니다. 

심지어 러시아에서도 한 때 금지되었었고 우리는 군부독재 시절에 말로만 들었던 장면입니다. 당시는 어떤 영화이던 적성국가 소련문화를 즐긴다는 것만으로도 처벌대상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