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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스페인 원정 영국군과 가족 이야기 (2부)

by uesgi2003 2014. 7. 8.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 하죠. 노년층은 자식과 단절되고, 중장년층은 정리해고와 자영업 위기에 몰리고, 청년층은 일자리 찾기에 매일이 전투이기 때문에 인문학을 통한 정신수양은 사치일 겁니다. 정부가 국민이 사치를 누릴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어야 하는데, 발등의 불끄기에 급급한 상태입니다. 물론 자신이 지른 불이니... 답답하죠.


 

저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짧은 이야기가 아니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역사서적을 번역해서 추천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다들 한숨 돌아볼 여유가 생겨서 벗고 죽이는 감각적인 미드보다는 성격이 충돌하는 정통 역사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페인 원정 영국군과 가족 이야기 (2부)

 

무거운 군장을 메고 긴 행군에 나서더라도 원정지의 삶이 본국에 머무르는 것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 한 에딘버러 여성은 부대가 먹는 음식에 경악을 하고는 병사들에게 독을 먹인다고 말할 정도였다. 본국에서는 급여체불과 조악한 음식이 보통이었다. 병사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일도 있었는데, 옥스포드셔 민병대는 시포드의 밀과 밀가루를 훔쳐서 마차에 싣고는 다른 곳에 팔아버렸다. 

최소한 원정지의 부대는 납득할만한 배급을 받았는데 웰링턴의 군체계가 그 당시로는 상당히 효율적으로 가동한 덕분이었다. 배급을 받고 현지에서 얻거나 훔쳐서 본국에 있을 때보다 조금은 나은 수준의 하루를 보냈다. 

 

술도 위안을 주었다. 많은 여성이 남편만큼이나 술을 마셨다. 그렇지만 원정지에서는 기상해서 군장을 챙겨 행군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원정 중에는 어쩔 수 없이 현지 여성이 합류했고 숫자는 갈수록 늘었다. 일부는 쾌락을 찾아서, 일부는 영국군이 가진 보급품때문에 부대를 따라 다녔다. 물론 부대가 길에 나서면 미련없이 등을 돌리는 여성도 많았다. 

 

원정지에서는 동료애가 형성되었다. 장교와 사관은 부대의 여성과 아이에게 주의를 기울였고 가족은 서로를 돌봤다. 길을 잃은 가족은 다른 부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 웰링턴 군대의 행군은 1808년 12월의 추운 겨울에도 36시간 동안 80km를 행군했을 정도로 가혹했기 때문에 이산가족을 돌보는 전통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장교부인도 대부분 사병부인과 비슷한 고생을 했지만 커리부인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짚모자와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고 무릎에는 작은 애완견을 올려두고 노새를 타고 행군대열과 함께 했다. 뒤에는 커리부인의 아기를 안은 유모와 시종이 있었다. 다른 하인은 일용품을 실은 노새를 끌었는데 카나리아 새장까지 있었다. 그리고 절정은 염소였다. 아기에게 염소우유를 먹였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영국여성만 따라다닌 것이 아니다. 스페인 독립전쟁에서는 한 사랑이야기가 유명했는데, 95보병연대의 해리 스미스 대위는 후아나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스미스는 1814 4 7, 바다호스에서 겨우 14살이던 그녀를 만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겨우 이틀 만에 결혼했고 후아나는 나머지 원정기간 내내 남편을 따라다녔다.

후아나는 어리고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강인했고 매우 긍정적이었다. 귀한 가문출신이었는데도 불을 피워 요리를 했고 병사와 함께 강을 건넜고 남편, 13마리의 그레이하운드, 자신의 퍼그() 그리고 비를 피하려는 병사와 헛간이나 텐트를 함께 사용했다.

 

그녀는 병마도 이겨냈고 프랑스군의 추격도 벗어났고 낙마사고도 버텨냈다. 나중에 후아나는 남편을 따라 영국을 거쳐 벨기에까지 갔고 그곳에서 홀로 남아 워털루 전쟁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전세계 패권을 차지한 영국은 장교를 현지에 임관시켰고, 스미스는 케이프 콜로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후아나는 남아프리카에 가서야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봄이나 여름행군은 겨울에 비하면 소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패전으로 후퇴하는 길은 지옥길과 같았다. 신발은 낡아 헤졌고 이베리아 도로의 진흙으로 하반신이 모두 젖었다.

1808~1809년 끔찍했던 코룬나Corunna 후퇴에서는 병사와 여성 가릴 것 없이 포도주를 훔쳤고 눈 덮인 거리는 혼수상태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쓰러진 누더기 차림의 사람들은 얼어 죽거나 추격해온 프랑스 기병(그림은 프랑스 용기병)에게 학살당했다.

 

 

포르투갈로 향하는 빙판길가에는 남녀가 눈을 맞으며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울고 있는 아기가 있었는데 운이 좋으면 다른 병사가 데리고 갔고 운이 나쁘면 그대로 얼어 죽었다. 얼마를 더 달아나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기는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행군에 나설 때면 일어나지 않는 병사들이 늘어갔다. 밤새 얼어 죽은 사람 중에는 부부도 있었지만, 죽은 남편 곁에서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부인도 많았다.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잔인했다.

한 병사는 지쳐 쓰러진 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 전날에도 다른 병사가 일으켜 세웠던 모자였다. 이번에는 도우려는 병사가 없었고 길가에서 누더기를 쓰고 앉아있는 두 사람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임산부도 원정지에 따라 나섰고 원정지에서 임신을 했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출산시기를 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맥과이어 부인은 빙판 위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출산했고 부부는 서둘러 본대를 뒤쫓아가야 했다.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신생아는 코룬나 후퇴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임산부는 포르투칼의 황야에서 버림을 받았다. 한 영국군 장교가 그녀를 보고 포르투갈 여성을 고용해서 출산을 돕게 했고 그 임산부는 이튿날 팔에 신생아를 안고 12km 이상을 걸어 가까운 마을로 갔다. 


 

격전이 벌어질 경우의 희생자는 50%를 넘어서기도 했기 때문에 결전의 날 아침은 비장했다. 1815년 6월 16일, 워털루로 출발하는 연대에 대한 기록을 보자.

"많은 병사가 아내와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될 수도 있었고, 역전의 용사의 거친 뺨에도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창문 밑에 있던 한 가엾은 친구는 계속 아내를 돌아보고 아기를 한 번 더 팔에 안았다. 코트 소매로 눈믈을 닦고는 아기를 돌려주고 왕궁 반대편에 도열해 있던 중대로 뛰어갔다."


 

전투가 끝나면 포연이 가시기도 전에 전장에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눈에 먼저 띄지 않은 부상병은 당시의 원시적인 응급처치조차도 못받고 죽어갔다. 그래서 부인들은 피투성이의 전장에 달려가 랜턴불빛 아래에서 남편을 찾고 불러댔다. 만약 남편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야전병원 수술대에 먼저 올릴 수 있었다. 

남편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총탄이나 포탄에는 눈이 없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워털루 근처의 한 마을에서는 프랑스군 총탄에 죽은 어머니 품에 매달려 있는 아이가 발견되었고 한 병사가 데려가서 다른 연대에 복무 중인 아버지를 찾아주었다. 


 

웰링턴군은 거듭해서 프랑스군을 이겼지만 전사자 명단은 계속 늘어갔다. 미망인이 된 부인은 남편의 동료가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가끔은 연대에서 모은 돈으로 귀국행 배를 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재혼을 했는데 일주일도 안되어서 다시 미망인이 되기도 했다. 

한 여성은 5개월 만에 3명의 남편을 잃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돌아와 분쟁이 일어났다. 전남편과 현남편은 동전을 던져 이긴 사람이 남편이 되기로 했고 여성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결정이 내려졌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고 대부분의 연대, 그리고 가족이 본국으로 돌아왔다. 잠시동안이지만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왕실 하이랜드 연대는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긴 여정동안 교회 종소리, 담배, 차와 설탕 같은 기호품 선물도 받았다. 캠브리지에서는 대단한 연회가 벌어졌고 연대의 부인들에게 큰 돈인 2파운드를 지급했다. 

승전의 기쁨과 흥분이 사라지면, 상황은 이전으로 되돌아갔고 연대의 가족은 다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850년대의 크림전쟁까지 가족은 유럽대륙을 돌아다니며 부대를 따라다녔고 그 이후에는 공식적인 가족동반이 사라졌다.

 

크림전쟁 후의 개선덕분에 병사와 가족의 삶은 많이 나아졌다. 점차 기혼병사의 숙소가 늘어났고 가족수당과 의료서비스도 좋아졌다. 여성이 음식과 바느질말고도 병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는 교훈을 정부가 깨닫고 실천하는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최소한 가족과 함께 한 부대는 야만인 집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