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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1부)

by uesgi2003 2015. 4. 29.


후안무치가 우리나라의 최근 유행인 모양입니다. 뇌물을 받아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감히 흙탕물 씌우기에 나섰습니다. 국민 중 최소한 40%가 그런 흙탕물 놀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으니 대유행이 되었죠.

 

저는 이제 저물어가는 세대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만, 이제 사회에 나서는 세대가 불쌍합니다. 무기력하게 희망이 있기만을 바랍니다.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

 

1812623일 저녁 11, 프랑스군의 선봉대가 네만Nieman강 위의 부교를 건너 러시아에 들어섰다. 전설적인 러시아원정의 시작이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에서 대군을 긁어 모았고 45만 명이라는 엄청난 병력이 러시아로 밀려들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선호하던 대회전으로 속전속결을 원했고 3주의 보급품만 배급했다. 러시아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기세등등한 적에게 맞서지 않고 영토 깊숙이 끌어들이며 작전상 후퇴를 계속했다. 러시아 지휘관 바클리아Baclay와 바그라티온Bagration은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계속 후퇴하며 나폴레옹의 속을 태웠다.

 

그 뒤를 급하게 추격하는 프랑스 대육군Grande Armee(그림 참조)은 그만큼 고통에 시달렸다. 러시아 여름의 더위는 살인적이었고 보급품도 바닥을 드러냈다. 국경을 넘은지 7주 만에 스몰렌스크Smolensk 부근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군은 6,00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대도시를 버리기로 하고 다시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지휘관 중 일부는 스몰렌스크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겨울 숙영지를 준비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폴레옹은 여전히 속전속결을 원했고 모스크바까지 적을 추격하라고 압박했다. 러시아군도 모스크바를 방어할 수 밖에 없고 만약 모스크바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평화협상에 제 발로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1812625일 당시의 대육군 구성, 554,400:

300,000 프랑스, 라인랜드 독일, 네덜란드인

95,000 폴란드인

35,000 오스트리아인

30,000 이탈리아인

24,000 바바리아 독일인

20,000 작센 독일인

20,000 프로이센 독일인

17,000 베스트팔렌 독일인

15,000 스위스인

9,800 덴마크, 노르웨이인

4,000 포르투칼인

3,500 크로아티아인


이쯤 되자 러시아군도 고민에 시달렸다. 모스크바를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프랑스군에 맞설 수도 없었다. 지휘관을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이 급등했고 차르는 쿠투좁Kutuzov을 새로 임명했다. 그는 투르크를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리며 반전을 이끌어낼 인물로 꼽혔었다.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쳅 쿠투촙은 러시아-투르크 전쟁(1787~1792)에서 오차콥(그림 참조), 오데사, 벤데르와 이스마일을 점령하며 명성을 높였습니다. 파벨Paul 1세의 큰 신임을 얻었다가 후계자 알렉산드르 1세에게서는 눈 밖에 밀려났습니다.

보로디노와 말로야로슬라베츠Maloyaroslavets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대대적인 반격으로 프랑스군을 궤멸시켜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827, 쿠투좁은 군대에 합류해 그자츠크Gjatsk로 후퇴하는 병력을 검열했다. 나폴레옹은 29일에 지휘관교체 정보를 듣고는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대회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병력을 나누고 모으면서 장기인 기병을 보내 러시아군 후위를 바짝 추격했다.

다부Davout와 무라Murat가 러시아 후위를 따라 붙으면서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105, 무라의 기병이 보로디노Bododino(지도 참조)라는 작은 마을 부근에 늘어선 보병을 공격했다.

쿠투좁은 원래 그자츠크를 전장으로 결정했었지만 보로디노가 방어전에 더 좋다고 판단했고 방어시설을 급히 구축했다.


 

양쪽 병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러시아군은 약 120,000명 이상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그 중 19,000명은 코사크와 민병이었고 민병은 각 연대에 배속해서 병력을 늘렸다. 쿠투좁은 특히 포병전력에 공을 들여 640문의 야포를 동원했다. 바르클라이가 러이사군 우익과 중앙을, 프랑스군에게 많이 노출된 좌익은 바그라티온이 맡았다.

 

러시아군이 자리를 잡자, 다부의 병력이 바로 네베롭스키Neverovskii가 맡은 스체바르디노Schevardino 방벽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초반에 일제사격으로 버텼다가 프랑스군이 급히 배치한 포격을 맞고 대열을 무너트렸다.

프랑스군이 방벽에 뛰어들었고 러시아군도 병력을 더 투입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폴란드군이 다부를 지원하자 러시아군은 어둠을 틈타 주방어선 뒤로 물러났다.

 

날이 밝자, 드디어 기다리던 대회전을 맞이한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배치를 살펴보았다. 병사들도 끔찍했던 행군과 추격전을 이제야 끝낼 수 있다며 오히려 전투를 반기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132,000명의 병력과 587문의 포를 동원했다. 보병은 전투를 겪으면서 정예로 거듭났지만 기병전력은 심각한 상태여서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외로 6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다부는 적의 좌익을 우회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지독한 감기에 고생하던 나폴레옹은 스체바르디노 방벽으로 사령부를 옮기고 정면공격을 준비했다.

 

원래 전투 전날식사를 가장 잘 먹여야했지만 프랑스군은 보급상황이 심각했고 겨우 동물지방으로 만든 초를 녹인 빵 스프 정도만 간신히 먹었다. 러시아군도 프랑스군 만큼이나 사기가 높았고 보급상태는 훨씬 좋았다.

6, 일부 전선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 가깝게 접근했는데도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러시아 11시단 포병은 전진배치하던 중에 프랑스 용기병Dragoon과 마주쳤다가 바로 물러났다.

 

저녁이 되자 250,000명은 잠자리에 들었다. 나폴레옹은 목이 쉴 정도로 감기에 시달렸는데도 새벽 3시에 말을 타고 나가 러시아군이 달아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참모에게 명령을 내렸다.

외젠이 다부의 2개 사단지원을 받아 보로디노 부근의 러시아군과 대방벽Great Redoubt를 공격하고 네Ney와 주노Junot는 세멘놉스카야Semenovskaja 마을을 공격하고 다부는 플레쉐Fleches(화살표형 방어시설), 폴란드군의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는 우티차Utitza와 우익 끝의 언덕을 공격하기로 했다.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Józef Antoni Poniatowski는 폴란드 왕족으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하다가 폴란드군을 이끌었습니다. 러시아의 공격과 나약한 폴란드왕정에 맞서다가 추방당해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과 폴란드를 떠돌다가 다시 폴란드군을 합류합니다.

1806, 프랑스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프랑스군에 합류했고 많은 활약으로 26명의 원수 중 한 명으로, 그리고 가장 용맹스러운 원수로 자리잡습니다. 보로디노전투에서도 결정적인 활약을 했으며 그의 부대는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에 대해 충성했고 나폴레옹도 그를 왕족대우를 해주었습니다. 1813, 라이프치히전투에서 후퇴하다가 아군의 황당한 실수로 익사했고 국민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기병은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고 제국근위대는 예비군으로 남겨두었다.

 

7일 새벽이 밝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외젠의 보병이 가장 먼저 전진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 근위엽병Guard Jagers연대가 있는 보로디노로 쏟아져 들어갔다. 곧바로 엽병연대는 콜로츠챠Kolotscha로 물러났다


영화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신일 겁니다. 1967년작 러시아판 전쟁과 평화 중 보로디노 전투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