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대기하던 제2 기병군단을 지휘하던 몽브헌Montbrun장군도 치명상을 입었고 프랑스군은 수 백 명의 귀중한 기병과 말을 잃었다. 드디어 프랑스와 연합군 기병이 움직일 차례가 되었다.
콜랭쿠르Caulaincourt가 제5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방벽 뒤로 돌아들었다가 역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고 기병대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으로 로흐주Lorge장군이 독일과 폴란드 중기병을 이끌고 방벽에 돌격해 들어갔다. 외젠의 보병이 때마침 경사면을 기어 올라 러시아 보병에게 뛰어들었다.
“오후에 외젠공의 병력이 우리 방벽에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다. 대포와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어서 마치 화산과도 같았다. 석양을 받은 칼, 총검과 헬멧이 반짝였는데 끔찍하면서도 황홀한 광경이었다.
우리 기병은 적 기병과 맞붙어서 사방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우리 방벽에 정면공격을 했고 결국 우리 포대는 침묵을 지켰다. 포대를 둘러싸고 양쪽이 백병전을 벌였다.“
몇 차례에 걸친 공방전 끝에 프랑스군이 대방벽을 차지했고 기병은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분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병의 추격을 받은 러시아군이 궤멸하면서 보로디노전투가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러시아군은 예상과 달리 허둥지둥 달아나지 않고 새로운 거점에서 맹렬한 저항을 하며 프랑스군의 추격을 막아냈다.
러시아군은 오히려 프랑스 기병을 궁지에 몰아 넣었고 바르클라이Barclay도 그 덕분에 포로신세를 모면할 수 있었다.
“장군의 말이 권총을 맞고 펄쩍 뛰어 올랐다. 프랑스 창기병이 장군을 추격해 창으로 찌르려는 순간에 주변에 있던 몇 명의 참모가 막아냈다. 때마침 이조움 경기병Izoum Hussar대가 도착했다.
이조움 경기병은 언덕 위에 올라 프랑스기병과 잠시 대치했다가 선봉대가 바로 돌격해 다른 부대가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어주었다. 맹렬한 돌격에 당황한 프랑스군은 서서히 물러났다. 적과 아군이 뒤엉켜 혼전이 벌어졌다. 기병 주변에는 아군 보병대가 급히 전열을 가다듬었는데 그 순간에 프랑스 기병여단 하나가 달려와 전열 중앙에 큰 구멍을 냈다. 적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 연합군의 작센장교도 대혼전의 기록을 남겼다.
“러시아군이 1,100보 거리에서 포도탄을 퍼부었다. 우리 포도 응사했고 포연 때문에 포의 섬광만 간신히 보였다. 마치 지옥문이 우리에게 잠시 열렸다가 닫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적의 포격이 멈췄다. 포연이 가시자 우리 기병이 방벽의 포대를 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에 우리도 러시아 용기병의 공격을 받고 개울 끝까지 몰렸다. 용기병이 사라지더니 엄청난 적 기병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포탄이 터지면서 흙먼지를 뒤집어 썼다. 최소한 25분 이상 그 자리를 지켰고 주변의 병사가 많이 줄어들었다. 병사들에게 아군이 올 때까지 조금만 버티자고 울부짖었다.“
“어느 틈엔가 들판이 프랑스 기병으로 가득 찼다. 제 자리를 지키면서 프랑스군이 적에게 돌격할 때에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도탄 파편이 기병의 흉갑과 헬멧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적 기병에게 달려가 밀어냈지만 적 보병은 다시 강력한 거점을 만들고 저항했다. 적을 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전투가 백병전으로 번져 피아를 구분하기도 힘든데다가 포연과 굉음으로 명령을 제대로 내리기도 힘들어서 이제 중대가 알아서 움직여야 했다. 프랑스군은 보병에 이어 기병과 포병 심지어 셋을 모두 투입해도 러시아군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여전히 제국근위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러시아 원정 당시, 나폴레옹은 이상하리만큼 답답한 판단을 했는데 독감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1,000보 이상을 물러섰다가 고르키Gorki 마을 부근에 새로운 방어선을 펼쳤다. 포병은 그 기세를 조금도 잃지 않고 포탄을 퍼부었고 간신히 대방벽의 잔해에 몸을 숨겼던 프랑스군은 이제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사병은 땅에 엎드려 포격을 피해도 좋지만 장교는 그대로 서 있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갑자기 그가 말을 멈췄는데 포탄에 머리가 날아갔다. 군복에 피와 뇌수가 묻었고 지워지지 않아서 원정내내 뭍힌 채로 다녔다.”
밤이 되자 탈진한 양쪽 모두 휴식을 취했다. 쿠투좁은 초반의 판세에 흥분한 나머지 성급한 승전보고를 차르에게 보냈지만 상세한 전황을 파악한 후에는 후퇴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집요한 저항에 크게 당황했고 나폴레옹은 보로디노전투를 두 거인의 전투라고 말했다.
무라가 “정말 힘든 전투였소. 이런 전투는 처음이오. 특히 포격말이오.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던지 거의 포도탄만 터지더군요”라고 말하자 네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적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사기도 크게 떨어졌을테니까 추격해서 확실한 승리를 거둬야 합니다”라고 응대했다.
“그렇지만 적은 여전히 전열을 유지하고 있소.” “그런 공격을 받고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쿠투좁은 부상병부터 소개하고 포병과 보급품을 움직였다. 나머지 병력은 그대로 밤을 지샜고 프랑스군도 시체와 신음하는 부상병 사이에서 끔찍한 밤을 보냈다.
하인리히 폰 브란트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물도 불도 없이 죽어가는 병사들 사이에서 밤을 보냈다. 죽은 적의 배낭에서 약간의 음식과 브랜디를 찾아냈다. 소총 개머리판과 부러진 나무조각으로 간신히 불을 붙여 말고기 요리를 했다. 수프를 끓이려고 물을 뜨러 갔었는데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흔들리는 화톳불 주변에 부상병이 모이더니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되었다. 그리고 불을 보고 기어오는 부상병이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팔 다리를 잃었는데도 마지막 힘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죽어갔는데 여전히 눈은 불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벽에 코사크 기병의 소규모 기습이 있었지만 전투는 완전히 끝났고 양쪽은 12시간의 격전이 가져온 피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43,000명이 사상과 실종된 것으로 보고되었다가 20,000명의 실종자와 부상병이 다시 합류했다.
쿠투좁은 단 하루 만에 전력의 33%를 잃었다. 23명의 장군이 죽거나 다쳤고 바그라티온은 7일 후에 부상악화로 죽었다. 1,300명 중 99명만 살아남은 연대도 있었다. 포로는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의 피해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약 40,000명을 잃고 49명의 장군이 사상당한 것으로 분석된다. 가장 앞에 투입되었던 연대는 대부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많은 장교를 잃었기 때문에 초급장교가 몇 계단 승진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없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겨울후퇴의 참상과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차라리 보로디노에서 눕겠다고 할 병사도 많았을 것이다.
부상병은 전사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보로디노 부근으로 옮겨진 부상병은 그대로 방치되어 죽어갔다.
“러시아군은 황급히 후퇴했는데도 전사자를 제대로 처리했다. 후퇴 길에 부상병이 죽어도 매장했다. 열등한 민족이라고 우습게봤었는데 전사자와 부상자 처리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우리는 부상병을 그대로 방치해 죽였고 진로에 방해되는 시체만 매장했다. 수많은 부상병이 땅 위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떠나는 우리를 보고 아무리 간청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살아남은 우리도 냉소적으로 변했다.“
나폴레옹은 전장을 정리하는 부대를 남겨두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했다. 14일,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의 돔지붕이 보이는 곳까지 진격했고 쿠투좁은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남동쪽으로 물러나서 후일을 기약했다.
일주일 만에 모스크바는 잿더미가 되었지만 여전히 차르는 항복하지 않았고 프랑스군은 폐허 속에서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총퇴각을 명령했고 한 달 전에 지나왔던 길로 되돌아가야했다. 겨울은 예년보다 빠르게 그리고 혹독하게 닥쳐왔다. 대육군은 그렇게 궤멸했다.
쿠투좁이 모스크바 부근의 집에서 모스크바 소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보로디노전투는 나폴레옹이 그렇게나 바라던 승리와 거리가 멀었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을 열었기 때문에 승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러시아는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보로디노의 피해를 곧바로 복구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계속 싸웠고 18개월 후에는 거꾸로 파리에 입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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