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랑전투 1814년 (1부)
3월 초 나폴레옹은 랑Laon에서 겝하르트 폰 블뤼허Gebhard von Blucher의 연합군에게 허를 찔려 수도 파리를 방어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참패를 당하고 몇 주 후인 1813년 11월 초, 그는 60,000명 정도의 병력을 프랑스로 데리고 돌아왔고 새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만신창이가 된 장군들은 프랑스의 라인Rhine 국경에서 조만간 닥쳐올 연합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2월 20일,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공 카를 필리프Karl Philipp가 이끄는 보헤미아Bohemia의 대군Grand Army이 바젤Basel을 통해 라인강 상류를 건넜다. 20일 이후에는 블뤼허의 슐레지엔Silesia군이 마인츠Mainz에서 강을 건넜다. 필리프와 블뤼허는 1월 15일까지 렁그흐Langres와 메츠Metz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저돌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던 블뤼허입니다. 나폴레옹과의 1:1 대결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나폴레옹을 퇴위시키는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참패 후에 6차 대프랑스동맹에 참전해서 프로이센과 러시아군 연합의 슐레지엔군을 이끌고 랑전투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연합군의 최종 목표는 당연히 파리였지만 공격목표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반 나폴레옹 연합은 프랑스를 침공할 것인지 나폴레옹을 축출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차이가 심했고 심지어 적대적으로 변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확장이 두려워 프랑스침공과 나폴레옹축출 모두에 반대하면서 외교 해결책을 모색했다. 러시아의 알렉사드르Alexander 1세는 나폴레옹을 반드시 제거하고 싶었다.
1814년 1~3월에 벌어진 6차 대프랑스동맹군의 프랑스 북동부 침공에서 양측은 쉴새없이 전투와 기동을 반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1월 29일, 프랑스 북동부의 브히안느Brienne에서 블뤼허의 군대를 배후에서 공격하려고 했다. 양측은 3,000명 정도의 피해를 입고 승리를 주장했다. 3일 후, 블뤼허는 필리프의 병력과 합류해 브히안느 남쪽 8km 정도 떨어진 라 티에르Battle of La Rothière에서 나폴레옹에게 참패를 안겼다.
나폴레옹은 45,000명 중에 겨우 6,000명만 잃었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려 후퇴했다. 연합군은 바로 추격해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지만 블뤼허는 예비병력이 부족했고 필리프의 후위부대는 너무 뒤처져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합군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한은 나폴레옹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놀랍게도 두 군대는 서로 갈라섰다. 라 티에르에서 승리를 거둔 연합군은 파리진격을 결정하고, 블뤼허는 마른Marne강을 따라, 필리프는 세느Seine강을 따라 진격했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속도가 느린 필리프군을 견제한 후에 블뤼허를 상대로 6일 작전Six Days’ Campaign으로 알려진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2월 9일, 나폴레옹은 4번의 전투에서 블뤼허의 프로이센군과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블뤼허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필리프군이 세느강을 건넜고 나폴레옹은 보헤미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블뤼허는 전열을 정비하고 증원을 받은 후에 단 2일 만에 필리프를 응원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기사회생한 블뤼허의 군대는 나폴레옹에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6일 작전 중 일부인 몽미하일Montmirail전투 상황입니다. 나폴레옹 인생의 최고전술로 슐레지엔군에게 결정적인 참패를 안겼습니다만... 본문의 설명과 같이 이어집니다.
2월 17일, 나폴레옹은 55,000명의 병력으로 파리에서 50km 떨어진 모흐멍Mormant에서 필리프의 120,000명에 맞섰다. 블뤼허의 패배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남동쪽의 트루아Troyes까지 100km를 후퇴했다.
이후 며칠동안 나폴레옹은 노정-슈흐-센느Nogent-sur-seine에 병력을 모았고 필리프는 트루아에 병력을 집결했고 블뤼허는 메히-슈흐-센느Mery-sur-seine에서 나폴레옹의 측면을 위협했다. 필리프는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120km를 후퇴해 렁그흐에 들어갔고 블뤼허는 200km 떨어진 낭시Nancy로 후퇴했다.
블뤼허는 다시 라인강을 건너 돌아갈까 봐 염려했다. 그는 슐레지아군을 마른강 건너로 보내 독일 북부군대의 2개 군단과 합쳐 파리로 진격시키자고 제안했다. 필리프는 이 계획에 동의하고 보헤미아군은 50km 정도만 더 후퇴하기로 했다.
2월 23일, 필리프는 후퇴를 시작했고 이튿날에는 블뤼허가 진격에 나섰다. 2월 25일, 나폴레옹은 미끼를 물고 블뤼허의 뒤를 맹추격했다. 3월 1일, 나폴레옹은 마른강에서 갈림길에 들어섰다. 블뤼허를 계속 추격할 것인가 아니면 필리프를 상대할 것인가?
나폴레옹의 계획은 필리프가 가장 두려워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는 동생 조세프Joseph에게 뫼즈Meuse와 라인강의 요새에 병력을 집결시킬 것이라고 말한 후에 필리프의 우측으로 도는 배후기동Manoeuvre sur les derrières을 결정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바로 이 전술을 실행에 옮겼다면 필리프는 바로 라인강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블뤼허가 마른강 북쪽에 가 있었기 때문에 우익이 포위되는 동시에 라인강에 나폴레옹이 나타나면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블뤼허도 다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결정을 바꾸는 실수를 저질렀다. 필리프의 보헤미안군을 상대하지 않고 대신에 블뤼허를 추격하기로 했다. 블뤼허가 의도한대로 파리가 우선이었다.
나폴레옹은 북쪽 멀리 엔Aisne강으로 후퇴한 블뤼허를 추격했다. 독일북부 2개군단은 계획대로 수아송Soissons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블뤼허 군대와 합류했다. 슐레지아군은 엔강다리와 부교를 통해 나폴레옹의 추격을 뿌리치고 엔강 너머로 달아났다.
나폴레옹이 3월 7일에 크하온느Craonne에서 블뤼허의 러시아군을 격파하자 블뤼허는 고지대에 있는 랑Laon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랑을 점령해 공격적인 블뤼허를 몰아내고 파리를 방어하는 동시에 연합군의 양동작전을 차단시키려고 했다. 나폴레옹은 북동부 요새 수비대까지 모아 다시 후퇴하고 있는 필리프를 공격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3월 8일, 랑에 후위군만 있다고 확신한 나폴레옹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방향에서 랑을 공격했다. 거리가 너무 멀고 중간은 지형이 험해서 서로 협력할 수 없는 무척 위험한 공격이었다. 나폴레옹은 수아송에서 37,000명을 직접 이끌고, 오귀스트 드 마르몽Auguste frederic de marmont 원수는 랭스Reims 도로로 9,500명을 데리고 공격했다. 블뤼허는 약 100,000명과 600문의 대포가 있었다.
블뤼허의 우익인 러시아군단 25,200명은 티에레Thierret에, 중앙인 프로이센 3군단 16,900명은 랑에, 좌익인 프로이센 1군단(13,500명)과 2군단(10,600명)은 북동쪽으로 랭스방면 도로를 지키고 있었다. 러시아 2개군단 38,000명은 랑고지 북쪽에 예비병력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안질환과 고열로 고생하던 블뤼허는 나폴레옹이 병력을 전개하기 전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나폴레옹의 공격방향이 결정되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3월 8일 저녁, 나폴레옹은 미셸 네Michel Ney원수의 근위대군단을 동원해 에투벨레Etouvelle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새벽 2시, 네는 계속 공격을 감행해 쉬비Chivy를 탈환했고 동이 틀 무렵에는 러시아군을 세미이Semilly까지 밀어냈다.
밤새 폭설이 내렸고 이른 아침이 되자 모든 지역이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오전 7시, 네는 피에르 보이어Pierre Boyer여단을 시켜 세미이를 공격하게 하고 모방Morvan사단은 아흐동Ardon의 블뤼허 중앙으로 진격시켰다.
보이어여단은 집중포화를 맞아가며 오전 9시에 공격을 시작했지만 프로이센군을 뚫지 못했다. 모방사단은 안개덕분에 아흐동을 기습해 프로이센군을 랑고지 초입까지 1km 정도를 밀어냈다. 반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아흐동까지 다시 밀려났지만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오전 11시, 겨울태양이 안개를 걷어냈다. 블뤼허는 마당 이브Madame Eve라고 부르는 성채 아래에서 프랑스군 대대의 얇은 대열을 지켜보면서 나폴레옹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공격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오가 되자 크하온느 북쪽 12km 지점, 이틀 전에 교전했던 마을에서 프랑스군이 접근해왔다. 그는 이 병력이 주공이라고 생각했다. 아흐동이 프랑스군의 연결점으로 보였다. 프랑스군 주력이 좌익을 공격할 것으로 보고 아흐동을 공격해 우익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군의 대응을 알아보기로 했다.
3월 9일 오전, 12보병사단이 클라시Clacy와 세미이 사이에 있는 프랑스군을 공격했다. 동시에 후사르 4개연대, 코사크 기병대와 경포병이 우익으로 돌아 네의 가장 왼쪽과 후미를 위협했다. 12보병사단이 프랑스군을 클라시에서 몰아냈고 러시아군이 서쪽으로 공격을 펼쳤지만 네가 바로 반격해 러시아군을 다시 클라시로 돌려 보냈다.
모방이 중상을 입자 아흐동을 지키던 근위대대 2개가 물러났다. 바로 이 순간에 나폴레옹이 랑에서 남서쪽으로 14km 떨어진 샤비농Chavignon에 도착했다.
블뤼허는 6여단이 아흐동을 점령하자 기병예비대를 아흐동으로 보내 네의 우익을 포위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폴레옹과 같은 천재가 양쪽 병력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벌려 놓았을 리가 없었다. 세번째 병력이 랑의 남동쪽 6km 지점에 조만간 나타날 것만 같았다.
결국 나폴레옹의 세번째 공격로를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총공격을 중단하기로 하고 제6여단과 기병예비대를 불러 들였다. 다시 아흐동은 프랑스군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오후 3시 정도에 페스티에Festieux 공격로가 주공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블뤼허는 프로이센 2개 군단에게 바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개활지에 기병을 최대한 투입하기 위해 이미 네의 배후로 돌아간 기병대를 불러들였다. 하루 종일, 마르몽에게 행군속도를 높이라는 전령이 계속 달려갔지만 코사크에게 모두 잡히거나 쫓겨났다.
나폴레옹은 마르몽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하고 블뤼허의 우익을 공격해서 좌익의 병력을 우익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마르몽이 도착하면 블뤼허가 대책없이 당할 것으로 기대했다.
프로이센 경기병Hussar입니다.
오후 4시, 전투는 격전으로 치달았다. 앙리 프랑소아 샤르팡티에Henry Francois Charpentier군단의 선두사단이 네의 사단지원을 받아 러시아군을 클라시에서 몰아낸 반면에 아흐동을 뷜로우Bulow의 6여단에게 다시 빼앗겼다.
마르몽의 선봉대가 오전 10시를 넘어서 페스티에를 점령했지만 나폴레옹의 바람대로 행군에 나서지 않고 2시간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오후 4시에야 아티스Athies에서 프로이센 2개 대대를 몰아냈다.
마르몽은 연합군의 좌측을 향해 기병대를 전개하자 연합군도 마르몽의 우측으로 기병대를 보냈다. 정면에 연합군 4개 군단이, 우측에 대규모 기병대가 집결하자, 마몽은 현명하게 교전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더구나 그의 병력은 신병이거나 선원으로 지상전투 경험이 없었다. 마몽원수는 아티스 남동쪽 6km 떨어진 지점에서 밤을 보냈다.
블뤼허는 랑에서 아티스전투를 지켜볼 수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강한 서풍 때문에 전장의 소음을 듣거나 마르몽의 공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마르몽의 움직임을 전혀 몰랐고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후 5시 정도에 전투중단을 명령했다.
밤이 되자, 불뤼허는 곳곳에서 달려온 보고를 받았고 브유이예흐Bruyeres방면에서 세번째 공격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르몽의 병력이 겨우 10,000명이라는 보고도 받았다. 프랑스군 포로는 나폴레옹이 네와 함께 있다고 털어 놓았다.
블뤼허는 마르몽을 기습해 궤멸시키기로 했다.
'근대 > 나폴레옹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옹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워털루전투 (1부) (0) | 2018.04.29 |
---|---|
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 랑전투 (2부) (0) | 2017.07.25 |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실패가 겨울때문? (0) | 2016.02.03 |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3부) (0) | 2015.05.01 |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2부) (0) | 201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