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경험과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하기 마련이고 그 위에 굳혀진 고정관념 역시 부실해질 수 밖에 없죠.
보통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능동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경우,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찾아나서 고정관념을 스스로 깨트리거나 계속 보완을 합니다.
또는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재가공해서 새로운 고정관념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죠.
반면에 고정관념을 맹신하며 그렇게 시들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사에서도 마치 진리처럼 잘못 알려진 고정관념이 있죠. 상황변화에 따라 재해석된 경우도 있지만 원래 편협되거나 왜곡된 지식이 퍼진 경우도 많죠.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한의 추위가 밀어닥쳐서 나폴레옹의 원정이 실패했다고 맹신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전사자료를 접하지 못한데다가 이런 그림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겠죠.
실제로는 혹한의 추위가 닥치기 훨씬 전인 모스크바 입성 당시에 이미 원정에 실패했고 대육군의 피해는 거의 대부분이 질병, 아사, 탈영과 전사라고 구체적인 자료를 인용해서 설명해도 눈과 귀를 열지 않죠.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그러는데 네가 뭐기에”라며 오히려 가르치려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인용하겠습니다. 전문가의 자료말입니다.
먼저 전사가 아닌 일반 러시아역사 번역서입니다.
그래서 프랑스군뿐만 아니라 동맹군의 탈영이 초반부터 이어졌습니다. 러시아는 종전 후에 이들을 모아 따로 부대를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프랑스군 포로만 해도 10~18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탈영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북부 발트해와 남부 오스만투르크 접경의 병력을 대거 소환해서 남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대병력을 이끌고 오면서 초토화시킨 황무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 역사서에서도 추위보다 기아와 전염병때문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그럼 다른 자료도 인용해볼까요?
The invasion of Russia clearly and dramatically demonstrates the importance of logistics in military planning.
러시아침공은 군사작전에서 병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Napoleon and the Grande Armée had developed a proclivity for living off the land that had served it well in the densely populated and agriculturally rich central Europe with its dense network of roads.
나폴레옹과 대육군은 많은 인구, 풍부한 농업, 잘 발달된 도로망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Rapid forced marches had dazed and confused old order Austrian and Prussian armies and much had been made of the use of foraging.
강행군은 노쇠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군을 힘들게 했고 현지징발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In Russia many of the Grande Armée's methods of operation worked against it and they were additionally seriously handicapped by the lack of winter horse shoes which made it impossible for the horses to obtain traction on snow and ice.
대육군은 러시아에서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작전을 벌였고 겨울용 말발굽을 준비하지 않아서 눈과 얼음에서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Forced marches often made troops do without supplies as the supply wagons struggled to keep up. Lack of food and water in thinly populated, much less agriculturally dense regions led to the death of troops and their mounts by exposing them to waterborne diseases from drinking from mud puddles and eating rotten food and forage. The front of the army received whatever could be provided while the formations behind starved.
보급없는 강행군이 이어졌고 보급마차는 뒤처졌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비농업 지대에서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썩은 음식과 사료를 먹고 진흙탕 물을 먹다 보니 수인성 전염병으로 병사와 말이 죽어갔다.
Napoleon had in fact made extensive preparations providing for the provisioning of his army. Seventeen train battalions, comprising 6000 vehicles, were to provide a 40-day supply for theGrande Armée and its operations, and a large system of magazines was established in towns and cities in Poland and East Prussia.
나폴레옹은 실제로 군대보급을 위해 상당한 준비를 했었다. 마차 6,000대의 17개 보급대대가 대육군의 40일치 보급을 책임지기로 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에 상당한 보급창고를 준비했었다.
At the start of the campaign, no march on Moscow was envisaged and so the preparations would have sufficed. However, the Russian armies could not stand singularly against the main battle group of 285,000 men and continued to retreat and attempt to join one another.
원정초기만 해도 모스크바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 준비로 충분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러시아군은 28만 5천명의 주력을 막아내지 못했고 계속 후퇴했다.
The main body of Napoleon's Grande Armée diminished by a third during the first eight weeks of his invasion before the major battle of the campaign. This decrease was partly due to garrisoning supply centers, desertions, disease, and casualties sustained in minor actions.
대육군의 주력은 침공 8주 만에 보급창고 수비, 탈영, 질병, 전투손실 때문에 1/3으로 줄어들었다.
This demanded an advance by the Grande Armée over a network of dirt roads that dissolved into deep mires, where ruts in the mud froze solid, killing already exhausted horses and breaking wagons.
대육군은 진흙수렁으로 변해버린 열악한 도로를 따라 진격했고 이미 지쳐버린 말이 쓰러지고 마차는 부숴졌다.
As the graph of Charles Joseph Minard, given below, shows, the Grande Armée incurred the majority of its losses during the march to Moscow during the summer and autumn. Starvation, desertion, typhus and suicide would cost the French Army more men than all the battles of the Russian invasion combined.
아래의 샤를 조셉 미나르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대육군은 여름과 가을에 모스크바로 강행군하면서 대부분의 피해를 입었다. 아사, 탈영, 티푸스, 자살로 입은 피해가 러시아와의 전투손실보다 훨씬 더 컸다.
선의 굵기는 대육군의 병력규모를 의미합니다. 모스크바에 들어간 대육군은 겨우 1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혹한의 추위가 찾아오기 전에 이미 6~7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Sitting in the ashes of a ruined city with no foreseeable prospect of Russian capitulation, idle troops and supplies diminished by use and Russian operations of attrition, Napoleon had little choice but to withdraw his army from Moscow.
잿더미로 변한 도시잔해 속에서 기약 없는 러시아의 항복을 기다리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소모전으로 보급이 바닥나자 모스크바를 버리고 철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려, 로히스통장군에게 러시아와의 협상을 받아내라고 재촉하는 나폴레옹입니다.
He began the long retreat by the middle of October 1812. At the Battle of Maloyaroslavets, Kutuzov was able to force the French army into using the same Smolensk road on which they had earlier moved east, the corridor of which had been stripped of food by both armies.
그는 1812년 10월 중순에 먼 귀국여정에 올랐다. 러시아 쿠투좁은 말로야로슬라베츠전투로 프랑스군이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돌아가게 몰아넣었다.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길은 이미 양쪽 군대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말로야로슬라베츠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신승을 거뒀지만 쿠투좁은 프랑스군의 남진을 성공적으로 봉쇄했습니다.
이미 곳곳에서 프랑스군이 패배를 하고 있었고 쿠투좁은 프랑스군과 대회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칼루가 방면(지도 표시)을 포기하고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스몰렌스크로 방향을 잡게 됩니다.
This is often presented as an example of scorched earth tactics. Continuing to block the southern flank to prevent the French from returning by a different route, Kutuzov employed partisan tactics to repeatedly strike at the French train where it was weakest. As the retreating French train broke up and became separated, Cossack bands and light Russian cavalry assaulted isolated French units.
초토화전술의 좋은 예였다. 쿠투좁은 프랑스군이 다른 경로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남쪽 측면을 틀어막고는 게릴라전술로 본대 중 가장 약한 행렬을 계속 공격했다.
코사크와 러시아 경기병이 고립된 프랑스부대를 처리했다.
Supplying the army became an impossibility. The lack of grass and feed weakened the remaining horses, almost all of which died or were killed for food by starving soldiers. Without horses, the French cavalry ceased to exist; cavalrymen had to march on foot. Lack of horses meant many cannons and wagons had to be abandoned.
보급은 불가능했다. 마초부족으로 남은 말이 죽어갔고 굶주린 병사의 식량이 되었다. 말이 사라지자 프랑스기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기병도 걸어야 했고 많은 대포와 마차를 두고 떠나야했다.
Much of the artillery lost was replaced in 1813, but the loss of thousands of wagons and trained horses weakened Napoleon's armies for the remainder of his wars. Starvation and disease took their toll, and desertion soared. Many of the deserters were taken prisoner or killed by Russian peasants. Badly weakened by these circumstances, the French military position collapsed.
상실한 대포는 1813년에 상당부분 보완했지만 수천 개의 마차와 군마는 복구할 수 없었고 이후에 나폴레옹군의 약점이 되었다.
병사는 질병과 기아로 쓰러졌고 탈영이 걷잡을 수 없게 번졌다. 많은 탈영병이 포로로 잡히거나 러시아 농부에게 피살되었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자 프랑스군은 군대라고 할 수 없었다.
Further defeats were inflicted on elements of the Grande Armée at Vyazma, Krasnoi and Polotsk. The crossing of the river Berezina was a final French calamity; two Russian armies inflicted horrendous casualties on the remnants of the Grande Armée as it struggled to escape across pontoon bridges.
뱌즈마, 크라스노이와 폴로츠크에서 있던 대육군 부대가 패전을 거듭했다. 베레지나강에서 마지막 참상이 벌어졌다. 부교를 건너려던 대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베레지강의 참상입니다.
그럼 좀 더 보기 쉬운 그래프로 바꿔 볼까요? 혹한이 시작된 11월 9일 이전에 이미 대육군은 그 존재자체가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더 알기 쉬운 지도를 제가 편집해보았습니다.
대육군은 모스크바를 떠난 직후에 벌어진 말로야로슬라베츠전투에서 남하봉쇄를 뚫지 못할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근대 > 나폴레옹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 랑전투 (2부) (0) | 2017.07.25 |
---|---|
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 랑전투 (1부) (0) | 2017.07.24 |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3부) (0) | 2015.05.01 |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2부) (0) | 2015.04.30 |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1부) (0) | 201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