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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 랑전투 (2부)

by uesgi2003 2017. 7. 25.


파리를 잃은 나폴레옹 - 랑전투 (2부)



1부에서 소개하지 못했던 미셀 네원수의 러시아원정 장면입니다. 용맹하기로는 나폴레옹 원수 중 최고였지만 전략전술은 문제가 많았다는 평가입니다.

마르몽의 배반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해서 나폴레옹의 등뒤에 칼을 꽂았다가 엘바섬 탈출 후에 다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워털루패전 후 1815년에 부르옹왕가가 네를 처형했습니다. 




아티스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오후 6 30, 프로이센대대 6개가 앞서고 요크Yorck 1군단이 뒤를 이어 마르몽의 중앙으로 향했다. 프로이센군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아티스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요크 오른쪽의 클라이스트Kleist 2군단이 들판을 가로질러 마르몽의 좌익으로 다가갔다. 치에텐Zieten의 경기병 7,000명이 마르몽의 우익을 덮쳤을 때에는 프랑스기병 2,000명은 안장에 올라 타지도 못한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물러서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마르몽의 6군단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마르몽은 배반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지만 나폴레옹 원수 중에 학식이 가장 뛰어나고 지휘능력도 출중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에서 벨기에로, 7월 혁명에서 다시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천수를 누렸습니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기병의 추격을 받고 계속 밀려났다. 프로이센 보병은 추격을 포기하고 거의 모두 아티스로 돌아왔다. 오전 2, 기습공격 몇 시간 후, 마르몽은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여전히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대가 서로 뒤섞여서 바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떤 명령도 당장은 불가능합니다. 베히 오 박Berry-Au-Bac까지 후퇴해서 정비해야 합니다.”

마르몽은 3,500명 이상(포로 2,000명 포함), 야포 45문과 탄약상자 131개를 잃었고 프로이센군은 겨우 850명만 잃었다.

 

3 9, 거친 바람이 불어서 나폴레옹은 아티스전투를 전혀 알지 못했다. 황제는 이튿날 블뤼허를 협공한다는 계획을 취소하지 않았다. 마르몽의 참패가 알려진 오전 1시에는 이미 각 부대에 작전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전 2 30분에 6군단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보고가 다시 들어왔다. 블뤼허가 마르몽을 추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블뤼허의 대열 뒤를 노리기로 했다. 평원에서는 자신의 용병술로 우세한 적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3 10, 블뤼허는 승리를 만끽하며 전군에 추격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날이 새자 나폴레옹이 이전 위치를 고수하지 않고 오히려 공세로 나온 것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블뤼허는 모든 군단에게 이전 위치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군만 공격에 나섰다.

오전 9, , 샤르펭티에Charpentier와 모르티에Mortier군단이 클라시 방어를 맡았다. 러시아군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블뤼허는 중앙의 뷜로우Bulow 대대 몇 개를 빼내 러시아군을 응원했다.

나폴레옹은 뷜로우의 이동을 보고 블뤼허가 결전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클라시를 방어하는 병력에게 러시아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네는 2개 사단으로 아흐동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블뤼허가 결전에 응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오후 6시에 수아송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그림 참조). 클라시에 있던 2개 대대, 기병 300명과 야포 2문도 날이 새자 후퇴했다. 블뤼허는 몸이 아팠기 때문에 나폴레옹과 24,000명의 후퇴를 그대로 지켜보았다.

연합군은 4,000명을 잃은 반면에 나폴레옹은 본대 6,000명과 마르몽의 병력 3,500명을 잃었다. 더 이상 병력, 물자와 사기가 견뎌낼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신근위대가 눈처럼 녹아 내렸다. 구근위대는 전력을 유지했지만 근위기병의 전력손실이 너무 심각하다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랑에서 블뤼허를 격파해 흐름을 바꿀 유일한 기회를 놓쳤다. 블뤼허가 패했다면 필리프는 반드시 국경을 다시 넘어갔을 것이다. 파리의 분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나폴레옹은 필리프보다는 블뤼허군이 더 위험하다. 무조건 수아송으로 가서 파리에 가깝게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병력을 돌리기가 너무 어렵다고 기록했다.

3 11, 나폴레옹은 동생에게 파리를 내려다 보는 고지, 특히 몽마르트Montmartre에 방벽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파리 피난민과 실직자를 징병해서 30,000명의 국가근위대를 편성하라는 지시도 했다.

 

그렇지만 파리는 대혼란에 빠졌고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그는 3 13일 랭스와 3 26일 생디지에St. Dizier에서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블뤼허를 상대하는 동안 팔리프는 전열을 완전히 정비했다. 그렇다고 블뤼허에게 치명타를 날리지도 못했다.

나폴레옹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연합국은 정치적 해결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폴레옹이 블뤼허와 있는 동안, 필리프가 공세에 나섰다. 보헤미아군이 파리에 접근하자, 나폴레옹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동쪽으로 급히 이동해서 보헤미아군의 우측으로 돌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 이전에 적이 먼저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공 카를 필리프입니다. 러시아를 견제하고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도 했지만 6차동맹에서 프랑스 침공의 선봉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3 20~21일에 필리프의 후위를 격파하지 못했고 오히려 필리프와 블뤼허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최후의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3 31, 마르몽이 파리를 넘겨주었고 나폴레옹은 6일 후에 무조건 폐위조건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나폴레옹 최고의 순간이겠죠. 황제제위에 있는 나폴레옹입니다. 



폐위 후에 엘바섬으로 추방되는 나폴레옹입니다. 영국의 삽화입니다. 아래는 떠나는 나폴레옹과 배웅하는 황실근위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