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를 하는 젊은 과학자들의 모임 덕분에 아주 약간 멀리 김포 중봉도서관에 가서 '과학으로 이긴 임진왜란'에 대해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도서관 측과 약간의 혼선이 있어서 중고등학생 수준에 맞춰 자료를 준비했는데... 막상 참석자 대부분이 초등학생과 학부모였습니다.
학부모는 그런대로 집중하셔서 나름 보람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강의 대상인 학생들은 부모님보다도 휴일 피로를 더 느끼면서 숙면을 취하더군요.
여러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수군이 왜 강했다고 알고 있나요? 아마도 대부분이 거북선을 먼저 떠올릴텐데, 그것은 잘못된 신화입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에 불과 3척만 사용된 기록이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에게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번 이야기는 미국남북전쟁은 잠시 접어두고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2부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명단은 서양인을 위한 자료로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리고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다음 에디터가 오류를 많이 일으켜서 크롬과 같은 다른 브라우저는 물론이고 IE에서 조차도 수정할 때마다 포맷이 바뀌는 오류가 발생합니다. 작은 그림은 클릭하면 약간 커집니다.
저작권때문에 도서의 자료를 인용하지 않았고 워낙 유명한 인물들이어서 위키 자료를 대부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예정
15. William the Conqueror
16. Saladin
17. Genghis Khan
18. Enrico Dandolo
19. Joan of Arc
20. Mehmed II
21. Franciso de Almeida
22. Hernán Cortés
23. Francisco Pizarro
24. Ivan IV
25. Yi Sun-sin
26. Tokugawa Ieyasu
27. Maurice of Nassau
28. 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Peter the Great
30. Robert Clive
31. George Washington
32. Benedict Arnold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8. 진시황 - 기원전 260~219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 명령을 내려서 수 양제와 함께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관료제도를 도입했으며 전국시대 국가들의 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기원전 230년부터 진시황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를 정복한 후에 228년에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225년에 위나라, 223년에 초나라, 222년에 연나라, 221년에 제나라를 합병해서 39세의 나이에 중국 황제에 올랐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죽었고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가 황제에 올랐고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족시켰다.
(우에스기 왈: 중국의 영웅 재조명을 통한 중화사상 부흥은 영화 '영웅'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영화에서 진시황의 원대한 야망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미화되는데, 영화 내용은 그렇지만 화려한 무술과 반전때문에 여러분에게 강추하는 영화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YSwZQOjDeXA&feature=related 유투브에 전편이 올라가 있기는 한데... 이런 영화는 굿 다운로드로 큰 화면에서 자막과 함께 볼 것을 권합니다.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황제에 오르면서 삼국지와 함께 반드시 읽어야 할 역사소설인 초한지가 시작됩니다.)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 기원전 100~44년
로마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반 대중의 편에 섰다. 기원전 60년대 말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소위 제1차 삼두 정치라는 초법적 정치 연대를 이루어 수년간 로마 정계를 장악하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9~55년)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기원전 55년에는 브리타니아(영국)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공훈 덕분에 카이사르는 강력한 세력가로 입지를 굳혀 폼페이우스를 위협하게 되었으며, 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의 두 정치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이렇듯 로마 정계가 재편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대치하게 되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대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결단을 내려 기원전 49년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일인 권력자로 등극했다.
정권을 장악한 뒤 그는 로마의 사회와 정치에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는 공화정의 귀족 정치를 고도로 중앙집권화하였으며,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했다. 기원전 44년 3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이끄는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살해했다. 그러나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양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완전한 전제(황제) 정치를 내세웠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기원전 42년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신으로 추앙했고 그의 사후 그의 공식명칭은 신격 카이사르가 되었다(Divus Caesar). 또한 그 이후부터 로마 황제가 죽었을 경우 후임자가 그를 신격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우에스기 왈: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이나 내전은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훌륭한 자료가 이미 있고, 앞으로도 소개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제 블로그에서는 일단 제쳐두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에 대한 영화로는 미국드라마 Rome을 추천합니다. 우리나라 시대극처럼 여성들의 치정문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나 당시 소품재현이 워낙 뛰어나서 제가 반복해서 보고 있는 최고의 시대극입니다.)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 405~453년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던 아틸라는 434년부터 죽을 때까지 8년 정도, 유럽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그의 제국은 중부 유럽부터 흑해와 발트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훈족의 그의 삼촌 루아가 죽자 그의 형 블레다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설과 블레다가 실질적인 왕이고 아틸라는 2인자에 머무르게되었다는 설이있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서로 사이가 좋은편은 아니였는데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블레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직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지않았는데 사냥 도중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과 아틸라가 죽였다는 설이 있다.
블레다가 죽은 뒤 아틸라는 훈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최대의 적이었으며, 발칸반도를 두 번 침공하고 두 번째 침공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에워쌌다. 현재의 프랑스 오를레앙까지 진격했지만 샬롱의 전투에서 뒤로 물러섰다. 아틸라는 452년에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를 수도 라벤나에서 몰아내기도 했다.
아틸라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으며, 의미 있는 유산도 남아있지 않다. 아틸라는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되어, 역사가들은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틸라는 세 편의 노르드 사가(sag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잔혹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서구인에게 아틸라는 공포의 대명사다. 무수한 이민족이 유럽을 침략했지만 아틸라가 이끌었던 훈족만한 공포를 선사했던것은 칭기즈칸의 몽골밖에 없었을 것이다. 야만족에 대한 서구의 온갖 편견과 날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지 몽매한 싸움꾼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신기술을 도입해서 전력을 보강하는 혁신가이기도 했다. 또 황금을 멀리할 정도로 강한 절제력이 있었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위대함은 유목부족에 지나지 않던 훈족을 거대한 국가(그림 참조)로 키워냈다는 점이다. 두려움과 황금으로 부하들을 통제한 점이나, 자신들의 전투스타일에 맞는 전쟁형태를 찾아낸 것 역시 그가 훈제국의 왕으로서 이룬 업적들이다. 자꾸만 뿔뿔이 흩어지려 하는 부족들을 엮어내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의 전쟁으로 역사에 남은 것 이것이 훈족 왕 아틸라의 진면목이다.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 로마 정부는 도망을 쳤지만 레오(Leo) 교황은 아틸라에게 맞섰고 교권이 정치를 앞서는 계기가 되었다. 아틸라의 시대와 함께 유럽의 중세시대가 시작된다.
11. 무함마드(Muhammad) - 570년~63년
이슬람교의 예언자로 마호메트, 모함메드(Mohammed, Muhammad, Mahomet)라는 영어식 발음으로도 불린다.
고아로 자란 무함마드는 뛰어난 상술로, 부자였던 하디자의 인정을 받았고 그녀와 결혼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여유를 가지게 된 무함마드는 금식하고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종교적 감수성은 유년시절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카바 신전의 관리인이었던 삼촌과 함께 살았고 카바 신전이 섬기는 검은 돌이 신인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무함마드는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던 중, "무함마드여, 그대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 하디자가 무함마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사촌이자 이비아니교 사제였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카 이븐 나우팔은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가브리엘(그림 참조)이었다며, 무함마드가 예언자라고 말했고 하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모두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 노예와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이 '알라의 사자'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전지 전능함,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잡신을 배격하고, 알라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설교해 부유한 상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신도들을 메디나로 피난시키고, 자기 혼자 메카에 남아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622년 메디나로 갔는데, 이것을 신도들은 '헤지라(성천)'라 하며 그 해를 이슬람교의 기원으로 정했다. 메디나 시대에 이슬람의 예언자이며, 정치적 지배자, 무장(武將)이기도 한 그는 계속 하늘의 계시를 전하는 한 편, 종교법, 사회와 경제관련 법규를 정하고, 624년 메디나를 공격해온 메카 군을 격파해 무슬림의 사기를 높였다.
630년, 메카에 입성해 카바 신전의 우상을 모두 파괴하면서, 그는 "진리는 왔고, 거짓은 멸망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이슬람 신앙을 포교하는 데는 나라의 힘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복 전쟁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했고 632년, 다. 이슬람교로써 아라비아 세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하던 중 병사하였다.
그의 사상은 <꾸란> 속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말한 알라의 계시를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6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에 의하여 터득하려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계율이 엄하고,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며, 종파의 확고한 구분은 있으나 교리의 올바른 본질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신앙이 인간의 생활을 규율에 맞게 지켜준다고 한다.
무함마드가 한 말 중에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 있다고 하나 이는 근거가 없는 말이다. 이는 이웃 종교인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이슬람교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슬람 교도들은 정복지의 기존 종교에 대해 너그러웠다. 이슬람 개종이 아니라 세금징수를 통한 생존을 위해 정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징수하는 세금도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보다 적어서 스스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이들이 많았다.
12. 샤를마뉴(Charlemagne) - 742년(또는 747년)~814년
샤를마뉴(영어로는 카롤루스) 대제는 서부, 중부 유럽 대부분을 통일하고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장했다. 재임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되었고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샤를마뉴 대제의 국내외적인 업적은 서유럽과 중세시대를 정의하는 데 기여했으며, 프랑스,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의 재임연표에서는 샤를 1세 또는 카를 1세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동생인 샤를로만과 함께 왕국을 통치했지만 사이가 벌어져 내전직전까지 갔다가 샤를로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비를 넘겼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던 사라센과 전쟁을 일으키던 중 무훈시 롤랑의 노래에서 언급되었던 론세스바예스 전투(779년)에서 끔찍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으나 교황의 보호자가 된다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 시행해 나아갔다. 또한 롬바르드 왕국, 사라센과의 장기전쟁을 끝낸 후 유럽 동쪽에 사는 민족 중 특히 작센족을 굴복시켜 가톨릭교로 개종시킨 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훗날 오토 왕조 출발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오늘날 샤를마뉴 대제는 프랑스, 독일 군주의 시초 인물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이후 최초로 대부분의 서유럽을 정복하여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 시켰으며 또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현재 유럽의 정체성에 발판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유럽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샤를마뉴 대제는 할아버지
샤를 마르텔의 뒤를 이어 ‘샤를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사실성 여부는 의심스러우나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기원을 샤를마뉴가 세운 왕국의 전통으로부터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샤를마뉴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해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덩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 912년~973년
오토 1세 또는 오토 대제는 하인리히 1세와 링엘하임의 마틸데의 아들로, 작센공작이자 독일과 이탈리아 왕이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로 인정받고 있다.
카롤링거 왕조 붕괴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으나 그의 영토는 독일,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 한정되었다.
그는 하인리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가 죽기 1개월 전인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하인리히 1세가 자기 수하의 공작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었던 반면 새 왕은 왕권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 때문에 바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불만을 품은 작센의 귀족들이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마르는 패배해 살해되었으며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왕에게 항복했고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는 직위에서 쫓겨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939년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을 받았다. 오토가 승리를 거뒀지만 941년에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고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947년에 바이에른 공작작위를 받았다.
제국 통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토는 왕국의 변경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동쪽에서는 슬라브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937년 마크데부르크에 장크트모리츠 수도원을 건립하고 948년에는 2곳의 주교관구를 세웠다. 북쪽에는 3곳에 주교관구를 세워 덴마크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오토의 제1차 보헤미아 원정은 실패했고 보헤미아 군주 볼레슬라프 1세는 950년이 되어서야 겨우 항복했다. 국경을 확장한 오토는 프랑스 내분의 중재자 역할까지 했고 이탈리아의 왕후 아델하이트가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에게 포로가 되어 그에게 지원을 요청해오자 오토는 951년 이탈리아로 진격해 롬바르디아 왕을 자칭한 후에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952년 베렝가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을 다스리는 그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오토는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중단해야 했다. 에디트에게서 난 아들 리우돌프가 몇몇 유력자들의 지원을 얻어 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형세가 불리해 작센으로 퇴각해야 했으나 954년 마자르족이 독일을 침공하면서 반군의 입장이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반군은 독일의 적들과 공모한다는 비난을 받기 쉬웠던 것이다. 장기간의 전투 끝에 955년 리우돌프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 덕분에 오토는 955년 8월 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에서 마자르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이후 오토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뒤 960년에 이르러 엘베 강 중류와 오데르 강 중류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슬라브족을 모두 복속시켰다. 968년에는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관구가 3곳의 주교관구와 더불어 창설되었다. 폴란드의 미에슈코까지 영향력을 넓힌 후에 오토는 이탈리아로 복귀해 베렝가리오 2세와 아달베르토를 격파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오토가 되돌아간 틈을 타 베렝가리오 부자는 다시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남 리우돌프가 죽자, 961년 오토는 아델하이트에게서 난 오토 2세를 독일왕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영지였던 작센공작에 빌룽 가문 출신 헤르만을 임명했다.
그 후 베렝가리오에게 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교황 요한 12세의 호소를 받아 2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다. 962년 2월 2일 로마에 당도한 오토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11일 후에 황제와 교황 간의 관계를 조성하기 위한 ' 오토의 특권'이라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교황청의 세속적인 권한을 확인하고 확대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교황선출을 인준할 수 있게 만든 단서조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963년 12월 오토가 요한 12세를 베렝가리오와 내통한 혐의로 폐위시키고 레오를 교황으로 앉혔을 때 추가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렝가리오는 생포되어 독일로 압송당했으며 964년에는 레오 8세에 반대하는 로마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황제 즉위 이후 샤를마뉴를 따라 학자들을 장려하고 학당을 설립하고 시인과 작가들을 지원하여 문예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를 오토왕가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965년 교황 레오 8세가 죽자 오토는 요한네스를 교황으로 선택했으나 로마인들이 쫓아냈고 오토는 3번째로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 966년~972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동로마제국은 샤를마뉴 때처럼 그를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그는 급기야 남이탈리아의 동로마제국 영토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비잔티움과의 오랜 협상 끝에 972년 오토 2세와 비잔티움 공주 테오파노가 결혼했다.
독일로 돌아온 황제는 973년 멤레벤에서 죽었고 첫 번째 부인 유디트의 무덤 옆에 묻혔다.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 990년~1063년
투으룰 벡으로도 불리는 그는 셀주크 제국의 첫 번째 칼리프였다. 토그릴은 유라시아 초원의 투르크 전사를 모아 부족 연맹을 만들었고 자신의 조상인 셀주크 이름을 붙였다. 페르시아를 정복해 셀주크 술탄국을 건설하고 1055년에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토그릴은 압바스 칼리프를 몰아내고 이슬람 세계를 연합한 후에 비잔티움 제국과 파티마 왕조에 대해 대립각을 세웠다.
1025년, 그는 형제 차으르와 함께 부하라의 카라한 왕조를 섬겼지만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에게 패배해 호라즘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셀주크 가문의 지도자 아르슬란 야브구는 후라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1028-9년에 그의 삼촌 (아르슬란 야브구) 이 마흐무드에 의해 후라산에서 쫓겨나자, 투으룰과 그의 형제는 후라산으로 진격해 마르브와 니샤푸르를 정복했다. 그들은 이후 부하라와 발흐를 약탈하고, 1037년에는 가즈니를 약탈했으며, 1038년에는 니샤푸르에서 술탄을 자칭했다.
1040년, 그들은 단다나칸에서 마흐무드의 아들 가즈니의 마수드 1세를 격파하고 (단다나칸 전투) 가즈나 제국의 서부를 정복했다. 마수드는 라호르 지역으로 도주했다. 토그릴은 차으르에게 후라산의 지배권을 줌으로서 가즈나 왕조의 역습을 대비한 뒤, 1040년부터 1044년까지 이란의 고원을 점령했다.
1054년 그의 군대는 비잔티움의 아나톨리아를 습격했고, 1055년에는 칼리프 알 카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파티마 왕조의 위협을 제거했다.
1058년, 그의 이부형제 이브라힘 이날이 반란을 일으키고 부와이 왕조와 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였다. 2년 후 토그릴은 반란을 진압하고 이브라힘을 처형한 뒤 바그다드에 재입성했다. 그는 압바스 칼리프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라이에서 죽었는데, 자식이 없었다. 차으르의 아들 슐레이만을 입양해 그를 후계자로 임명했으나, 슐레이만의 형제 알프 아르슬란과 투으룰의 사촌 쿠탈미쉬가 반발했다. 결국 알프 아르슬란이 슐레이만을 밀어내고 쿠탈미쉬를 죽여 계승 전쟁이 끝났다.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4월 27일에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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