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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1945년 프라하 봉기 1부

by uesgi2003 2014. 12. 7.


십상시가 우리 생활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4대천왕과 십상시라... 박씨 정부가 단 2년 만에 유신을 제치고 무려 1,9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기원을 이룩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안에 전세계로 소식이 퍼지는 요즘을, 중국 한나라 구중궁궐로 착각하면 곤란할텐데도 눈가리고 아웅거리고 있더군요. 내년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스캔들이 터져나올 지... 벌써부터 한숨만 나옵니다. 


이명박이라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박근혜는 다를 줄 알았다고 했죠. 다시 아니어서 김무성은 다를거랍니다. 이제는 욕하기도 지쳤습니다. 



프라하 봉기

 

1945 5 1, 독일의 전쟁체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베를린은 함락되었고 항복하는 독일군의 행렬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연합군이 유럽 대부분을 장악했고 해방된 주요 수도의 시민은 종전축하로 들썩였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의 공기는 완전히 달랐다. 독일군이 거리를 돌아다녔고 게슈타포Gestapo의 발자국 소리에 시민은 집안으로 몸을 숨겼다. 히틀러의 자살과 천년제국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여전히 활보했고 프라하Prague는 전쟁의 일상을 계속 이어갔다.

 

5월 초순,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고 해방군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패튼의 미군은 서부지역에 진입해서 독일군의 사소한 저항을 진압했고 동쪽에서는 적군(소련)이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적군의 동계와 춘계 대공세로 전멸직전에 몰린 독일군은 미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서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면서 체코 공산주의와 체코 망명정부 양쪽의 파르티잔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세력인 러시아 인민해방군Committee for the Liberation of the Peoples of Russia(KORN)이 프라하 서쪽지역에 모여들고 있었다.

(KORN은 소련에게 아직 점령되지 않은 슬라브 지역을 중심으로 적군이 진주하기 전에 독일과 평화협상을 하고 종전하자는, 친독일세력으로 1944 11월에 독일의 후원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2차대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독일에게 항복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합병한 후에 독일인이 많이 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부지역, 주데텐란트Sudetenland로 눈을 돌렸다. 주데텐란트는 서유럽의 침공로를 막는 방어진지가 잘 마련된 산악지역이었다. 그리고 체코의 철광석 산지인 동시에 주요 군수공장이 있는 곳이었다.

독일의 후원을 받은 독일혈통은 1938년에 제국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체코인과 무력충돌을 벌여 양쪽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베를린은 동족을 공격하는 체코인의 만행을 보도하며 독일국민을 일부러 자극시켰다.

 

체코정부는 서유럽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938년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뮌헨에서 회동을 가졌지만 체코대표는 참석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더 이상 체코의 분쟁을 확대하지 않고 체코의 정체성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주데텐란트를 1939 1월에 합병했다.

히틀러는 2개월 만에 약속을 어겼고 3 14, 독일군이 프라하에 진주했지만 서유럽은 항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체코는 서부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과 동부의 슬로바키아와 나뉘어졌다. 폴란드와 헝가리도 약간의 영토를 합병했다.

 

슬로바키아는 로마카톨릭 신부 요세프 티소Josef Tiso 정부가 관장했는데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했다. 자연스럽게 독일과 조약을 맺은 후에 제3제국의 보호령으로 들어왔다. 이미 많은 슬로바키아인이 친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기동사단, 보안사단, 전투항공대 2, 정찰항공대를 편성해 독일의 러시아침공을 지원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은 체코 대통령 에밀 하하Emil Hacha 박사 정부가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독일 나치당의 위성정부에 불과했고 나치정부가 체코 공장과 광산부터 일상경제까지 모두 결정했다.



독일이 체코군수공장에서 발견한 보물덩이 38t 전차입니다. 개전초기 장갑차 수준의 1/2호 전차가 거의 대부분이었던 독일군에게 강력한 37mm 포를 무장한 전차는 귀중한 전력이었고 더구나 기계의 신뢰성이 워낙 대단해서 종전때까지 온갖 파생전차를 만들어냈습니다. 

개전초기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차였고 종전 베를린 시가전에도 가장 아래사진의 헤처Hetzer 전차로 활약을 했습니다. 


 

독일은 체코경제에 큰 관심을 쏟았는데, 체코의 광산, 유명한 스코다Skoda공장과 탄약공장은 전쟁에 대단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배급을 줄였는데도 공장노동자는 여전히 급여를 받고 1939 9월에 독일에 함락된 폴란드 국민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영국에 체코망명정부가 구성되었지만 너무 멀리 있었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도 저항운동은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1941 6,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그 때까지 독일에 반대하지 않았던 체코 공산당은 저항군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다른 저항조직보다 훨씬 강력한 활동을 펼쳤다.

독일과 체코의 관계는 1941 9월에 전환점을 맞이했다. 27,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사진 오른쪽)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 그는 해군을 거쳐 막 시작된 무장친위대에 합류했고 하인리히 히믈러Himmler(사진 왼쪽)의 눈에 들었다. 뛰어난 조직장악능력을 가진 그는 무장친위대 핵심에 진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에 이미 나치보안경찰SS Sicherheitsdienst(SD)를 조직한 후에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나치당이 집권한 1933년 이후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로 자리잡았다.

SD는 당과 국가의 두뇌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 하이드리히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유대인 문제에도 간여하게 되었다. 1942 1 10일에 있었던 반제회의Wannsee Conference를 주관했는데, 이 회의에서 1 1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유대인 대량학살을 결정했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에 취임하자 마자 권력을 보강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무능력한 선임자를 영구적인 병가처분하고는 다른 누구와도 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 흐라드차니Hradcany 성에 자리잡은 그는 체코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고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다.

하이드리히는 독일제국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을 무자비하게 처형해서 유럽의 사형집행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향력이 있는 지식인, 저자, 신부 등을 모두 체포한 후에 사전조치 대상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처형부대가 흐라드차니 성의 정원에서 매일 사형을 집행했고 하이드리히는 사무실 창문을 통해 지켜보는 일이 많았다.

 

저항운동은 잔인하게 진압했던 반면에 체코 노동자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사용했다. 할당량을 맞춘 탄약공장 근로자는 추가 배급을 받았고 더 많은 생산량에는 그에 맞는 특권을 부여했다. 이런 조치덕분에 체코 공장은 양질의 고급무기를 계속 생산해냈고 독일의 동부전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42년 봄, 체코망명정부는 저항운동에 힘을 불어 넣고 근로자와 독일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해 하이드리히를 제거하기로 했다.

암살팀이 보호령에 침입했고 1942 5 27일에 프라하 시내를 통과하던 하이드리히를 습격했다. 그는 일주일을 고통스럽게 보내다가 죽었다.



하이드리히 암살은 원하던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당근은 사라졌고 후임 칼 헤르만 프랑크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하이드리히의 빈자리를 종전까지 맡았다.

 

암살사건이 벌어진 지 몇 시간 만에, 프랑크는 SS와 보안경찰을 전국에 풀었고 암살팀은 프라하 교회 지하에서 저항하다 죽었다. 수 백 명이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았고 처형되었다.

독일은 아예 리디체(암살팀이 숨었던) 마을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모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은 집단수용소로 보냈고 아이들은 집단수용소나 독일 SS 가정에 입양시켰다



연합국은 하이드리히 암살과 독일의 대응을 보고 보호령의 저항운동을 통해 전쟁물자 생산을 방해하고 전방의 귀중한 전력을 후방으로 돌리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향후 3년 동안, 체코국민은 프랑크와 나치정부의 철권통치에 고통을 받게 되었다. 1945년 초가 되자, 체코국민은 점령군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히틀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베를린 공세를 위해 150만 명의 병력을 모이고 있었는데, 동부전선의 모든 지휘관은 예비병력없이 사투를 벌이거나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베를린 방어전을 책임진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는 동프로이센에서 빼낸 병력을 증원군으로 받게 된다고 들었다. 그는 그런 조치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름만 남은 몇 개의 기갑사단을 모아 동부의 시민이 서쪽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소련군의 돌파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히틀러는 수도를 노리는 소련의 공격보다는 프라하에 더 큰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슬로바키아를 관통하는 적군의 진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페르디난트 쇠르너Ferdinand Schorner의 중앙집단군이 상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총애하는 쇠르너 원수는 지휘관으로는 무능했지만 종전까지 총통에 대한 충성심을 놓지 않았다. 중앙집단군은 1월부터 이반 페트롭Ivan Petrov의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로디온 만닐롭스키Rodion Malinovsky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에게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는데, 체코, 루마니아, 폴란드 병력이 적군에 속속 가담하고 있었다.


 

(쇠르너 원수는 전선을 이탈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다가 체포되어 종전 후까지 가장 오래 살아남은 원수입니다. 앞의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히틀러에게는 최고의 장기 말이었지만 독일군과 국민에게는 최악의 지휘관이었습니다.

탈출수송편이 지연된 이유도 있었지만 크림반도 후퇴도 히틀러와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체포될 당시에도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방에 있는 병사, 특히 군복을 입지 않은 병사는 탈영병으로 처벌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은 달아나서 군복을 벗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히틀러와 쇠르너는 베를린 공격이 기만작전이라고 확신했다. 쇠르너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말했다. “총통각하, 비스마르크는 프라하는 곧 유럽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비스마르크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현신이라고 착각하던 히틀러는 그의 말에 동의했고 어떤 수단을 쓰던 프라하를 사수할 생각이었다.

4 5, 하인리치의 귀중한 기갑전력이 비스와Vistula집단군에서 중앙집단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인리치에게 약속했던 동프로이센의 병력도 대부분 쇠르너에게 보강되었다.

 

하인리치는 즉시 히틀러에게 달려가 보좌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즉시 병력을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히틀러는 미안하군요.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소. 전차는 남부동맹에게 더 급합니다. 소련군의 주공격로는 베를린이 분명히 아니오. 남부에 더 강력한 병력이 집결하고 있단 말이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슬로바키아를 관통하는 적군을 저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베를린 공격은 프라하 침공을 숨기기 위한 기만작전이라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프라하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적은 베를린이 아니라 프라하를 공격할 것이오. 그러니 비스와집단군은 적의 기만공격만 막아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베를린 시민의 운명도 외면했다.

 

히틀러가 지도 위에서 병력을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프라하 봉기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모이게 되었다. 적군은 동부전선에서 중앙집단군을 두들기는 동시에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망명정부대표를 모아 애국전선National Front’를 구성했다. 당연히 공산주의자가 주축이 되었다


영화 새벽의 7인에서 하이드리히를 처단하는 암살팀입니다. 마지막 교회장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