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다음 2014 우수블로그에 선정되고, (그것보다는) 매일경제와 네이버 뉴스에 제 이야기가 전재되면서 많은 분들이 제 서재(블로그)를 놀러 오십니다.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제 이야기의 목적과 기대가 맞지 않아 들리는 불협화음도 염려됩니다.
그래도 멀리서 제 서재를 방문해주신 분들을 위해 이야기를 빨리 정리해야겠죠?
새로 오신 분들은 꼭 http://blog.daum.net/uesgi2003/2 제 변명부터 읽고 다른 이야기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이탈리아 해군이 멈춘 날, 마타판 곶 전투(1941)
1940년 6월,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난감한 처지였다. 독일 수상 아돌프 히틀러는 승리가도를 달리는 전쟁군주의 모습 자체였고 나치군은 프랑스 북부,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휩쓸고 있었다. 이미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합병한 독일제국은 유럽최강국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탐욕스러운 히틀러와 동맹이 되어 유럽의 나머지 부분을 노릴 것인지 아니면 친독일 진영의 뒤에 남아 독일의 정복행진에 박수만 보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무솔리니는 왕과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에 병력을 보내 히틀러에게 모든 운을 걸었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국경분쟁지역만 넘겨주었다. 총통은 프랑스 비시Vichy 꼭두각시 정부와 동맹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느닷없이 뛰어든 이탈리아는 불청객에 불과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 더 나아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불편한 갑을관계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전체주의)당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카이사르가 우리바다Mare Nostrum이라고 불렀던 지중해를 장악하기로 했다.
1918년 초, 무솔리니는 지중해 해군재건을 시작했고 알렉산드리아, 지브랄타와 말타 등의 전략요충지를 가진 대영제국해군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프랑스도 강력한 함대와 지중해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는 선박건조에 박차를 가해 노후된 영국 함대보다 더 강력하고 빠른 전함, 순양함, 구축함과 어뢰정을 만들어냈다.
지난 4백 년 동안 바다를 지배한 영국해군은 대서양에서 독일 해군의 유보트에 심한 압박을 받았다. 북대서양 상선호위와 본토 경계에 대부분의 전력을 투입했고,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로 가는 해로방어는 2진급 전력의 몫이었다.
강력한 프랑스해군이 연합군 전력에서 이탈하자 영국은 알제리 오랑Oran을 공격해 비시정부의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메르스엘케비르Mers-el-Kebir라고 부르는 전투인데, 영국은 프랑스가 함대를 독일에게 절대로 넘겨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일방적으로 알제리 일대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해, 메르스엘케비르에 정박한 10척 중 7척이 침몰하거나 큰 손상을 입었고 1,600명의 해군이 사상당한 반면에 영국은 겨우 2명의 사망자만 발생했습니다.
프랑스해군은 독일이 툴롱에 있는 전함을 몰수하려고 하자 자침시켜 자신의 약속을 지켰고 영국은 메르스엘케비르 공격이 성급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무솔리니가 참전하자 생각지도 못한 변수들이 터져 나왔다. 해군과 조금만 협의했어도 함대를 운용할 기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영국이 지중해 양끝을 차단하고 있었고 지금은 대단한 산유국인 리비아가 그 당시에는 한 방울의 기름도 생산하지 못했다.
일 두체(무솔리니의 직함)는 뒤늦게 그런 상황을 알았지만 지중해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에 지나친 욕심을 냈다. 리비아 주군 이탈리아군은 이집트로 쳐들어가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군을 밀어내려고 했다. 동아프리카에서는 본국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소말리랜드(소말리아 북부)를 공격해 영국함대의 홍해접근을 차단하려고 했다.
또 다른 병력은 동시에 알바니아를 점령한 후에 그리스를 서둘러 공격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는 이탈리아군의 침공을 막아내고 오히려 알바니아까지 추격해 들어갔다.
영국은 이집트 전역의 병력을 모아 반격했고 이탈리아군은 출발지인 리비아로 쫓겨 들어갔다. 다급해진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아프리카 군단의 전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독일공군도 시실리와 북아프리카에 기지를 만들었다. 무솔리니는 그리스의 한심스러운 상황 때문에 다시 한 번 히틀러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마치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해서 형에게 굽실거리는 못난 동생 꼴이 되었다.
이탈리아해군은 최소한 지중해에서만큼은 독일해군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제독은 독일과의 불편한 관계가 못마땅했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를 구원한 독일은 이탈리아함대에게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이탈리아해군은 독일에게 기름보급을 요구했지만 독일도 기름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이탈리아해군에게 지중해를 내줄 생각이 없었고 부족한 전력을 가지고도 강력한 선제타를 날렸다. 이탈리아함대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부츠 뒷굽의 타란토Tarato에 정박해 있었는데 안전하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1940년 11월 11일 밤, HMS 일러스트리어스Illustrious에서 출격한 페어리 소드피시Fairey Swordfish 뇌격기가 이탈리아의 핵심전력에 큰 피해를 입혔다. 타란토 공습은 일본이 자신감을 얻고 13개월 후에 진주만을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급격하게 진화한 후배 뇌격기와 비교하면 의아할 정도의 소드피시 모습입니다. 개전초기 영국해군의 주력 함상공격기였고 실제로도 지중해 해전뿐 아니라 독일해군의 자랑인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키는 전설을 만들었습니다.
독일의 전설적인 급강하폭격기 슈투카에 대해 폄하하는 분이 많은데, 소드피시와 비교하면 슈투카가 얼마나 대단한 명작인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시 타란토 항구 모습입니다. 이런데도 겨우 전함 3척의 전과? 하는 분이 있을텐데, 타란토 공습에 투입된 뇌격기가 겨우 21대였고 공격기나 어뢰의 성능이 크게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항공모함 1척, 중경순양함 4척, 구축함 5척만 이끌고 이탈리아해군의 심장을 노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작전이었고 주력전함
3척에 큰 손상을 입히는 것은 전설적인 전과입니다.
(타란토 공습으로 이탈리아는 6척의
전함 중 3척을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리토리오Littorio는 5개월,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는 6개월간 수리를 해야 했고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i Cavour는 이탈리아가 연합군진영으로 이탈할 때까지도 수리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해군은 영국의 추가공습을 피해 함대 대부분을 타란토에서 나폴리로 옮겼습니다. 타란토 공습은 이탈리아해군 전력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 이탈리아-리비아 수송로를 차단하려던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리토리오급 전함의 15인치 주포의 위용입니다.
큰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함대는 아드리아해 나폴리항으로 도피했고 전함은 4개월 동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육지에 이어 바다에서도 몰리자 이탈리아는 다급한 상태였고 승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탈리아해군은 전장과 시기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지만 베를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연합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테네로 마음대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면서 그리스의 전쟁을 지원했고 독일은 보급로를 반드시 끊어야했다.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해군이 유일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귀중한 기름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작전을 강요했다.
이탈리아는 마지못해 요청을 받아들이며 독일의 항공지원을 요청했고 독일은 항공지원을 약속했다. 1941년 2월, 두 나라의 고위인사가 만나 3일 동안 연합작전에 대해 협의했다.
이탈리아의 적은 내부에 있었다. 이탈리아공군은 해군과 경쟁관계였으며 해군이 지원을 요청해도 반드시 해군사령부의 공식요청을 거쳐 무솔리니의 승낙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얽혀있는 판에 독일공군까지 끼어들면서 공군과 해군의 협조는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반대로 영국은 일선 사령관이 모든 전술결정을 내리고 런던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서로를 지원했다.
이런 무능력과 관료주의 틈에서 그리스 주변의 해역을 장악하는 가우도Gaudo 작전이 마련되었다. 어딘가에 있을 연합군 수송단을 기습해 잡겠다며 이탈리아 함대는 3월 26일에 닻을 올렸다. 무전교신도 중단하고, 타란토 패전을 복수하고 지중해를 탈환하겠다는 의지는 대단했다.
안젤로 라치노Angelo Lachino 제독은 무엇보다 하늘에 독일과 이탈리아 항공기가 단 한대도 없는 것이 불안했다. 45,000톤급 신형전함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를 기함으로 8척의 순양함과 13척의 구축함이 합류했다.
불과 1년 전에 취임한 최신형 전함 비토리오 베네토입니다. 영국의 주력이 대서양에 있었기 때문에 운좋게 종전 후까지 살아남아서 폐기처분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함 중에 가장 큰 활약을 했으며 11번의 공격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독특하게 부포가 1차대전 전함과 같이 선측에 있습니다.
26일, 이탈리아 정찰기가 알렉산드리아에 얌전히 있는 영국전함 워스파이트Warspite, 바햄Barham, 베일리언트Vailiant, 항모 HMS 포미더블Formidable을 발견했다. 라치노가 노리던 전과가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과를 남긴 워스파이트입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자랑) 아카데미 제품을 외국인이 만든 것입니다. 워스파이트 온라인으로 40,000원 밖에 안합니다. 심지어 금속제 포신도 주는군요.
영국 정찰기도 이탈리아 순양함을 발견했고 영국해군에게 알렸다. 영국 암호해독팀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많은 암호통신문을 해독했기 때문에 이탈리아해군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집트에 있던 앤드류 커닝햄Andrew Cunningham 제독은 4척의 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7 순양함대에게 경보를 발령하면서 크레테Crete섬 남부로 내려가 순양함대로 보이는 적을 요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스에 있던 30대의 브리스톨 블렌하임Bristol Blenheim 경폭격기도 출격준비를 시켰다.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주요 폭격기들입니다. 오른쪽 아래에서 두번째가 브리스톨 블렌하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마타판 곶 전투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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