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땅콩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귀족태생의 마카다미야가
일은 다 저질렀는데 서민태생의 땅콩이 회자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외국출장은 자주 다녔기 때문에 초대회사와 항공사의 배려(좌석승급), 마일리지 소진으로 퍼스트 클래스는 3번을 타봤습니다. 출국편은 일찍 나가서 비상구 근처를 확보하기 때문에 이코노미 좌석을 이용하지만 귀국편에는 체력이 바닥났고 비상구 좌석확보가 어려워서 승급을 하는데 운이 좋으면 항공사가 배려를 해주는 승급행운을 얻거나 아니면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확보도 어려워서 마일리지 모두 사용해서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했습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따로 마련된 항공사 라운지에서 대기하다가 가장 먼저 탑승하게 됩니다. 비행기에 오르면 기장이 승객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나누며 짧은 대화를 하죠. 제가 한국인인 것을 안 기장이 월드컵에서 극적인 무승부를 했을 때에 밖으로 나와서 귓속말로 “선생님 한 골 넣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주더군요. 나중에 무승부가 된 후에 기내방송으로 무승부를 알렸고 갑자기 터진 환호성에 외국승객들은 승무원을 불러대며 이유를 묻는 해프닝이 있었죠.
비즈니스 클래스만 해도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영광(?)이 있으니 퍼스트 클래스는 식사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빵종류도 다양하게 선택하고 심지어 쉐프가 타서 잘라주는 회를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했듯이 귀국편은 체력이 방전되어서 잠만 자게 되는데 침대처럼 뒤집어지는 좌석이어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라고 해도 집침대로 향하는 교통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니 식사도 거르고 계속 잠을 청하게 됩니다.
퍼스트 클래스를 담당한 나이 지긋한 승무원은 아무 것도 안 먹고 자는 놈이 많이 불편하죠. 직업정신이 투철하니 제가 몸을 뒤척이기만 해도 식사를 할 것인지 묻기 위해 제 바로 앞에 무릎을 굽히고 보고 있습니다. 참 미안하더군요. 승무원 괴롭히기 싫어서 결국 일어나서 식사를 먹기도 했습니다.
요즘 승무원들이 더 힘들겁니다. 라면 못 끓였다고 신문으로 맞고 알아서 못 모신다고 매뉴얼로맞고 성추행당하고… 겉으로는 깔끔하고 도도해보이지만 육체노동자인 동시에 감정노동자의 복잡한 직업이죠. 자신의 역할을 당연히 하는 것이지만 고생한 승무원들에게 “덕분에 편하게 여행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 무척 좋아합니다. 그리고 인상에 남은 승무원이 있다면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항공사는 미워도 홈페이지에 칭찬의 글을 남겨두면 큰 격려가 될 겁니다.
물론 이런 칭찬은 승무원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가족부터 멀게는 사냥개/진돗개와 청와대 모 여사... 이건 아니군요. 멀게는 택배와 패스트풋 종업원까지 “수고했습니다”라는 말을 전해주면 좋겠죠.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말이죠.
퍼온 사진입니다. 겨울에는 특히 이런 배려가 필요하죠. 저도 집에 있을 때에는 택배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가 받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1945년 프라하 봉기 2부
1944년 중반부터 소련의 동부전선 돌파에 기대를 걸던 체코 저항세력은
망명정부의 지원을 받아도 독일군의 존재가 부담이 되었다. 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던 저항은 9월에 철저하게 진압되었고 보복당했다. 1945년 봄만 해도, 아직 슬로바키아에서의 봉기실패의 후유증이 심각해서 또 다른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기 난감한 상태였다.
1945년 4월, 쇠르너원수의 중앙집단군은 슬로바키아에서 모라비아로 밀려난 상태였고 저항세력의 히트앤드런 공격이 매일같이 일어났다. 독일보급선과 저장고를 공격해 후방을 교란시켰고 전방의 병력을 뒤로 돌리게 만들었다.
프라하 저항군은 수비대를 공격하고 있었지만 독일정규군을 상대로 본격적인 전투는 불가능했다. 프라하를 책임진 루돌프 투상Rudolf Toussaint에게는 혼성군, 보안군, 무장친위대, 수비군 부대가 꽤 많이 있어서 어떤 저항도 맞설 수 있었다.
1891년에 태어난 투상은 1944년 7월부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전권특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체코유대인과 집시를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체코 저항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무장친위대 작전에 적극 동참했다. 투상은 절대로 프라하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투상과 쇠르너는 적군과 레지스탕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호령 서부국경에 배치된 한스 폰 옵스트펠데르Hans von Obstfelder의 7군이 조지 패튼의 강력한 3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3군은 7군의 약한 방어선을 쉽게 뚫고 보호령에 들어올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은 급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소련이 동과 중유럽의 상당부분을 점령하는 분할에 합의했다. 연합군은 소련에게 동유럽 해방의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명예욕이 강했던 패튼은 오마르 브래들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서부를 점령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직속상관 브래들리와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군사와 정치적인 면 모두에서 불필요한 부담이라며 거절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반대로 적군에게 가능한 한 적은 영토를 내주고 싶었다. 그는 프라하를 연합군이 점령하자고 주장했지만 힘을 얻지 못했다.
4월 21일, 소련군의 첫 번째 포탄이 베를린에 떨어졌다. 동부전선의 마지막 순간이 눈 앞에 다가왔는데도 히틀러는 최후를 준비하지 않았다.
베를린이 함락되면 독일군의 수중에는 프라하만 남게 되었다. 독일군은 여전히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은 서부전선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내키지 않아도 종전 후의 삶을 위해 항복을 선택했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함락되자 더 이상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을 상대하는 독일군은 승패는 상관없이 생존이 목표였다. 항복은 죽음 직전에나 선택할 대안이었다. 포로가 되면 두들겨 맞거나 사살당하기 쉬웠고 극동이나 우랄 수용소로 끌려가 중노동을 하는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나 다를 바가 없는 선택인 셈이었다.
중앙집단군의 마지막 희망은 적군의 추격을 뚫고 서부로 탈출해서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중앙집단군의 모든 병사가 최후의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버티는 이유였다.
반면에 체코의 다양한 저항세력은 종전 후의 입지를 노리고 각자 봉기를 준비했다. 이들이 무장봉기 계획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을 때, 중앙집단군은 프라하의 동부 작은 지역에 갇히고 있었다. 베를린 공세를 끝낸 적군은 이반 코넵Ivan Konev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남쪽으로 급파해서 중앙집단군을 전멸시키려고 했다. 코넵의 병력은 슐레지아Silesia를 빠르게 통과한 후에 5월 4일에는 체코 북부국경을 넘기 직전이었다.
투상은 프라하 거리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대해 보고를 계속 받고 있었다. 수비대만으로도 저항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만약 본격적인 무장봉기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면 도시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외곽의 쇠르너 중앙집단군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고 있었기에 상투의 수비대를 도와줄 형편이 안되었다.
프라하 서쪽 65km 지점의 사령부에 세르게이 부냐첸코Sergei Bunyachenko가 있었다. 나중에 프라하 해방의 주역이 되는 그는 1902년 생으로 제26 보병사단의 참모장을 지낸 후에 1942년에 제59 보병여단을 지휘하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지금은 KONR(ROA에서 개명) 제1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소련 대항군의 주축은 안드레이 안드레비치 블라솝Vlasov(아래 사진참조)으로 1942년에 레닌그라드를 지원하다가 포로가 된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는 포위당한 자신을 구하지 않은 스탈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를 설득해 반 공산주의군을 결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동부전선에 백만 명 이상의 러시아 자원병을 투입했는데 독일 지휘관은 갈수록 늘어가는 소련 파르티잔의 공세에 대해 러시아 자원병에 의존하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동부전선이 악화되자 블라솝은 더욱 큰 목소리를 냈다. SS와 국방군 고위장교가 흐라드차니 스페인 홀에 모였고 블라솝은 자신의 반 소련군으로 러시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라솝은 병력을 모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이렇게 KONR의 일부가 만들어졌다. 포로 수용소에 이런 소식이 퍼졌고 러시아 포로가 수천 명씩 줄을 섰다. 블라솝은 결국 자신의 희망대로 병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데다가 그 숫자도 너무 적었다.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의 군수공장은 한계에 이르렀고 5만 명 정도로 2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2개 사단이 KONR군의 중추가 될 예정이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블라솝은 오데르Oder강을 건너려는 소련군을 막지 못하자 사단을 보헤미아로 이동시켰다. 그는 패전을 인정하고 미군에게 항복해서 병사의 목숨을 건지려고 했다. 이제는 서부 연합군이 KONR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반면에 체코의 다양한 저항세력은 종전 후의 입지를 노리고 각자 봉기를 준비했다. 이들이 무장봉기 계획에 대해 의견이 갈리고 있을 때, 중앙집단군은 프라하의 동부 작은 지역에 갇히고 있었다. 베를린 공세를 끝낸 적군은 이반 코네프Ivan Konev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남쪽으로 급파해서 중앙집단군을 전멸시키려고 했다. 코네프의 병력은 슐레지아Silesia를 빠르게 통과한 후에 5월 4일에는 체코 북부국경을 넘기 직전이었다.
투상은 프라하 거리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대해 보고를 계속 받고 있었다. 수비대만으로도 저항움직임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만약 본격적인 무장봉기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면 도시를 더 이상 지킬 수 없었다. 외곽의 쇠르너 중앙집단군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고 있었기에 상투의 수비대를 도와줄 형편이 안되었다.
5월 4일, 코네프는 중앙집단군의 북쪽 측면을 뚫을 준비를 마쳤다. 독일 제11 전차사단 전체가 미군에게 항복하면서 7군의 방어선에는 거대한 틈이 생겼다. 프라하로 향하는 길이 열렸고 패튼은 다시 한 번 브래들리에게 보헤미아 진격을 요청했다.
4일 7시 30분에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고 3군은 국경을 넘었다. 패튼 병력은 넓은 전선을 펼치며 진격했고 사소한 저항은 순식간에 진압했다. 패튼의 진격로에 놓인 도시에서는 이 소식이 퍼지면서 대대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프라하의 저항세력도 이 소식을 들었고 즉시 모든 지도자에게 긴급회의참석을 요청했다. 그들은 무장봉기 시기와 방법에 대해 늦은 밤까지 격론을 벌였다. CNC(Czech National Council)은 아직 시기상조라며 반대했지만 나머지 세력은 이미 수비군과 교전 중이라며 봉기를 지지했다. 그리고 시민도 더 이상 참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CNC도 결국 물러서면서 무장봉기가 결정되었다.
5월 5일, CNC 대표가 부냐첸코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대표는 그에게 그날 오후에 대대적인 무장봉기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에 같은 슬라브민족의 적인 독일 수비대를 상대로 함께 싸워 프라하를 해방시키자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부냐첸코의 마음은 움직였지만 아직 블라솝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그 자리를 지키다가 미군에게 항복하고 싶었다. 그는 블라솝에게 전화를 걸어 격론을 벌였다. 블라솝이 양해를 했는지 아니면 부냐첸코가 결단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KONR 제1 사단이 프라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라하 봉기 65주년 기념 재현장면입니다.
5월 5일 아침, 저항세력은 무기를 들고 미리 예정된 위치로 숨어들어갔다. 무장봉기가 성공하려면 일반시민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받아야 했고 프라하 라디오 송신소를 가장 먼저 장악해야 했다.
투상은 전날에 있었던 시가전에 대해 심상치 않게 생각했고 수비대의 경계를 명령했다. 사령부와 주요 거점의 통신선은 이미 단절되어 있었지만 일부 부대는 명령을 받고 저항세력의 공격에 대비했다.
저항군은 프라하 라디오로 향했다. 그룹 알렉스Alex가 선봉에 서서 독일군을 밀어내는 역할을 맡았다. 오후 12시 30분, 프라하 라디오는 처음으로 시민에게 점령군을 몰아내자는 방송을 송출했다. 라디오 방송이 나가는 동안에도 저항군과 체코경찰은 송신소를 지키는 SS와 전투를 벌였다.
아나운서는 창 밖의 격렬한 총격음을 들으면서 “모든 체코인에게 알립니다. 당장 우리를 도와주세요. 체코 라디오를 함께 지킵시다. SS가 국민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아직 라디오로 오는 길이 열려있습니다…”라며 무장봉기를 알렸다.
그룹 알렉스의 카렐 쿠틀바르Karel Kutlvar가 프라항 사령관을 맡았다. 라디오 송신소 외에도 다른 공공건물을 초반에 장악했고 거리에서는 저항군과 독일군이 뒤섞여 혼전을 벌였다.
5일 오후, CNC가 저항세력의 주도권을 잡았고 그 날 새로 임명된 프라하 시장도 CNC를 지지해 시정부 저항에 동참했다. 저항군의 초반기세는 예사롭지 않았지만 프라하 해방의 열쇠는 외곽의 연합군이 가지고 있었다.
프라하 라디오는 시민에게 계속 호소했다. 5월 6일 오전 1시, 시민에게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해서 독일군을 막아달라는 방송이 나갔다.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서 마치 19세기 시민혁명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건물에서 벽돌을 떼어내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수레, 자동차, 전차를 뒤집어 주요지점을 막았고 건물옥상에는 저격병이 배치되었다.
날이 밝기까지 1,600개의 바리케이드가 프라하 시내를 막고 있었다.
라디오 방송은 이제 시민이 아니라 외곽의 연합군으로 향했다. “여기는 프라하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총이 필요합니다. 독일군이 너무 많습니다!”
미군은 방송을 접수했고 영국군과 러시아군도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플젠Plzen에 들어온 패튼은 프라하까지 겨우 80km 남겨두었다. 아이젠하워가 허락한 마지막 지점이었다. 나머지 지역은 소련에게 넘겨주기로 했기 때문에 방송을 듣고도 움직일 수 없었다.
중앙집단군을 상대하던 적군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체코 저항군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나중에 공산정권을 세우기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프라하는 5월 6일에 위기를 맞았다. 기습을 받은 투상은 이제 수비대를 동원해 저항군을 진압하려고 했다. 도시 절반을 저항군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병력을 한 곳에 집결시켜야 했다. 곳곳에 흩어진 수비대가 바리케이드와 저격수를 뚫고 집결지까지 모이는 일은 매우 위험했는데도 독일군은 장애물을 돌파하고 라디오 송신소로 향했다.
투상은 쇠르너에게 지원요청을 했다. 중앙집단군은 소련군만으로도 중과부적이었는데도 쇠르너는 SS 부대를 도시로 들여보냈다. 그 중 하나가 발러슈타인Wallerstein 전투단으로 병력이 크게 줄어든 보병 2개 연대, 돌격포 1개 대대와 다른 부속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SS 부대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라디오 송신소를 공격했고 위기에 몰린 저항군은 다시 한 번 연합군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프라하가 위험합니다! 독일군이 전차와 비행기로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연합군이 당장 도와주셔야 합니다. 전차와 비행기를 보내주십시오. 우리가 프라하를 지켜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지금 방송이 나가는 동안에도 밖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독일군에게서 탈출한 스코틀랜드 포로 윌리암 그리그의 목소리였다. 그리그는 무장봉기 속에 휘말려들었고 저항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연합군에게 위기상황을 알렸다. 밖에는 쉴새 없이 포탄이 터지는데도 그는 침착하게 마이크를 잡고 연합군에게 호소했다.
저항군이 아무리 용감해도 독일 정규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독일군에게 밀려난 저항군은 급히 송출장비를 빼내 안전한 곳에서 계속 방송을 했다. 그리그는 도시로 접근 중인 독일 전차부대를 폭격해달라고 연합군에게 요청했다. 다행히 이 요청은 받아들여져 독일군의 전차행렬은 전멸했다.
패튼은 다시 한 번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에게 전화해서 프라하로 진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내일이면 프라하에서 전화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떤 경우라도 더 이상 나아가지 말라며 거절했다.
그렇지만 패튼은 3명을 프라하로 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짚을 타고 곤경에 몰린 저항군을 직접 확인한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패튼은 브래들리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다. 브래들리는 아이젠하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동안, 부냐첸코는 프라하 안으로 들어왔다. 5일에 선봉대가 들어왔고 대부분의 병력은 6일에 들어왔다. 그는 즉시 병력을 전투에 투입했다.
KONR군이 저항군에게 합류하면서 독일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양쪽에서 전투를 벌이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아래 사진참조). 밤이 되면서 KONR군이 수비대와 SS부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투상은 이 상황을 쇠르너에게 보고했고 KONR의 배반에 화가 난 쇠르너는 더 많은 SS 병력을 약속했지만, 투상은 이미 휴전이나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항군을 진압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적군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나머지 병력이라도 살릴 생각이었다.
부냐첸코는 더 많은 독일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예비연대에게 15km 떨어진 고지에 저항선을 만들게 했다. SS부대는 얼마 안되는 예비연대의 저항선을 뚫지 못했다.
지원군이 막히고 KONR과 저항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투상은 공식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두 눈을 가린 채로 CNC 사령부로 끌려간 그는 4시간이 넘게 지도자와 논쟁을 벌였다. 그는 도시를 그대로 내줄 테니 수비대가 서부로 탈출해서 미군에게 항복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미 유럽전역에서 독일군이 항복했기 때문에 CNC도 전투를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투상의 휴전요청이 받아들여졌고 도시전체에 해방소식이 퍼졌다. 투상은 “이제 군대 없는 장군이 되었군”이라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독일군은 급히 집결해서 서부로 탈출하기 시작했고 도시는 해방을 만끽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독일군과 독일계 시민을 공격하는 보복도 있었다. 5월 8일이 해방일이 되었지만 6년간 독일의 지배를 받은 것에 대한 보복일이기도 했다.
부냐첸코 병력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코네프의 병력이 외곽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KONR의 모든 병사는 적군에게 넘어가면 어떤 운명인 지를 잘 알고 있었다. KONR 제2 사단까지 합쳐 5만 명의 병력이 남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절반 정도의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미군에게 갈 수 있었는데 일부는 다시 소련에게 넘겨지기도 했다.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한 나머지 절반은 굴라크Gulag(러시아의 노동수용소 기관)에서 천천히 죽어갔다.
블라솝, 부냐첸코와 20명의 다른 KONR 지휘관은 모스크바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은 후에 처형당했다.
투상은 체코정부로 인도되어 재판을 받았고, 유대인과 집시 송출과 체코국민에 대한 범죄행위에 대해 종신형 처분을 받았지만 1961년에 풀려났다. 그가 수감 중에 소련정보기관에 협조해서 풀려났다는 주장이 있는데 7년 후에 죽었다.
패튼의 병력은 프라하에 들어가지 못했다. 5월 9일, 코네프의 병력이 대단한 기세를 올리며 입성했고 그 날이 공식 해방일이 되었다. 무장봉기에서 1,700~2,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5월 10일, 망명정부가 프라하로 돌아와 CNC를 해체했다. 저항 지도자는 명예만 인정받았을 뿐, 새정부에서 아무런 역할을 맡지 못했다. 소련군이 전국을 통제했고 포츠담 회담결과에 따라 체코에서 수십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추방되었다.
민주정부는 소련의 영향에 따라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같은 길을 걸었다. 1947년, 슬로바크 민주당은 유명무실해졌고 1949년 2월, 체코의 모든 민주주의 노선의 당이 해체되었다. 한 달 후에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1968년 봄에 체코에서는 개혁성향의 정부가 집권하면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열렸지만 가만히 두고 볼 소련이 아니었습니다. 무력침공해서 많은 시민을 죽이고 1989년까지 점령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기록되어서 프라하 무장봉기는 폄하되고 부냐첸코와 KONR의 역할은 삭제되었다.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에야 진실이 다시 밝혀졌다.
프라하는 적군이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방영웅은 체코 저항군과 국민이며 마지막 전투에서 자유를 지지한 러시아 병사들이었다.
프라하 봉기 당시에 독일군의 헤처전차에서 포신을 떼어내고 저항군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 설명했듯이 독일은 체코를 합병하면서 38t라는 걸작전차를 손에 넣었고 종전까지 헤처 등의 다양한 파생전차를 만들었습니다. 무장봉기에 투입된 헤처전차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동영상에서는 4호전차 굴러가는 것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1975년 영화라 아직 소련의 영향력이 절대적입니다. 그냥 분위기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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