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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선, 튀니지전투 (2부) - 롬멜의 선공

by uesgi2003 2015. 2. 18.


타이거/판터와 셔먼의 전차전에 대해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튀지니 전투에서는 미시적인 전투장면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판터와 셔먼의 상세베르 전차전(http://blog.daum.net/uesgi2003/675)에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해두었습니다


튀니지 경주에서 연합군이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자 프랑스군은 다시 분열되었다. 12 24, 프랑소아 달랑Francois Darlan이 암살당하고 앙리 지로Henry Giraud(사진 참조)가 최고사령관에 올랐다. 미국은 놀랍게도 달랑의 비시정부와의 협상에 적극적이어서 자유 프랑스정부를 실망시켰다

달랑의 죽음으로 북아프리카의 비시 프랑스와 샤를 드골Charles de Graulle의 자유 프랑스는 통합의 여지가 생겼다. 드골과 지로는 1월에 만났지만 1943 6월이 되어서야 민족해방프랑스위원회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가 결성되었고 두 사람이 공동의장을 맡았다. 지로는 드골을 혐오했고 북아프리카 프랑스의 단결은 좀 더 기다려야했다.



1/2차대전에서 모두 포로신세가 되었던 지로입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탈출한 그를 독일에 넘기지 않았고 그는 북아프리카로탈출해 프랑스군을 지휘했습니다. 

 

추축군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유능한 지휘관이었던 네링은 직설적인 태도로 상관을 자극했다. 독일 사령부는 군단을 군으로 승격시킨 후에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Hans Jurgen von Arnim 상급대장을 갑작스레 튀니지로 보내 12 8일부터 제5 기갑군 지휘를 맡게 했다. 5기갑군은 비제르테Bizerte 지역의 혼성 보병사단, 튀니스 부근의 제10 기갑사단, 남쪽의 이탈리아 수페르가Superga 사단으로 편성되었는데, 히틀러는 아르님이 베를린을 떠나기 전에 3개 기계화 사단과 3개 자동화 사단 증편을 약속했다.

연합군은 공군과 해군을 동원해 추축군의 증강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튀니스와 비제르타는 시실리 항구와 비행장에서 겨우 200km 거리였기 때문에 항공엄호를 받는 추축군 수송선을 요격하기 힘들었다. 11월 중순부터 1월까지, 튀니지에는 243,000명과 856,000톤의 군수품이 모였다.

 

아이젠하워Eisenhower는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튀니지 방향으로 병력을 대거 이동시켰다. 북부에 있던 케네스 앤더슨의 영국 제1 군은 3개월 동안 1, 4 46사단을 증원받았다. 3월 말에는 영국 9군단이 도착했고 우익에는 프랑스 19군단 (2개 사단), 남쪽에서는 미 2군단 (1, 3, 9, 34 보병사단과 1, 2 기갑사단)이 보강되었다.

아이젠하워는 프랑스 군단을 제 1군 휘하에 두려고 했지만 지로가 반대해서 당분간 아프리카 사령부의 지휘를 받기로 했다. 항공지원을 위한 비행장도 대거 건설되었다.



비행장 건설이라고 해도 대단한 작업은 아니고, 활주로 다지고 도로 연결하고 보급품 모아두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1월 초부터 앤더슨은 제한공격과 무력정찰로 추축군 전방에 압박을 가했고 폰 아르님도 같은 전술로 대응했다. 1 18, 그는 10기갑사단과 334보병사단의 일부를 투입해서 이탈리아 수페르가 사단의 전방에 공간을 마련했고 연합군의 동쪽 진출을 사전에 차단했다. 영국 5군단의 우익에 대해 시도한 이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남쪽 아래의 프랑스군은 전체적으로 30~50km 뒤로 밀려났다. 중화기가 부족한 프랑스군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7개 보병대대가 산맥에 고립되었다. 앤더슨은 36여단을 보냈고 미군에게는 제1 기갑사단의 전투단 B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했다. 1 23일까지 격전이 벌어졌고 전선은 다시 고착되었다


1월 초부터 앤더슨은 제한공격과 무력정찰로 추축군 전방에 압박을 가했고 폰 아르님도 같은 전술로 대응했다. 1 18, 그는 10기갑사단과 334보병사단의 일부를 투입해서 이탈리아 수페르가 사단의 전방에 공간을 마련했고 연합군의 동쪽 진출을 사전에 차단했다. 영국 5군단의 우익에 대해 시도한 이 공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남쪽 아래의 프랑스군은 전체적으로 30~50km 뒤로 밀려났다. 중화기가 부족한 프랑스군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7개 보병대대가 산맥에 고립되었다. 앤더슨은 36여단을 보냈고 미군에게는 제1 기갑사단의 전투단 B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했다. 1 23일까지 격전이 벌어졌고 전선은 다시 고착되었다.

 

연합군의 협조문제가 대두되어 1 21, 앤더슨이 전선전체의 협력을 맡으면서 미군병력 전개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지로도 프랑스군에 대한 앤더슨의 지휘를 수용했다. 그렇지만 320km 전선에 분산된 병력을, 그것도 열악한 통신체계로 지휘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였다. 앤더스는 군단 지휘관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4일 동안 1,600km를 달렸을 정도였다. 아이젠하워는 항공지원을 로렌드 쿠터Laurence Kuter에게 일임했다.

 

그동안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은 프랑스가 버린 마레트 라인의 요새 앞에 병력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하면 튀니지로 들어오는 남과 북의 협곡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롬멜은 1월에 병력을 재편성했다. 마레트 방어선의 독일-이탈리아 기갑군을 제1 이탈리아군으로 바꾸고 지오반니 메세Giovanni Messe에게 지휘를 맡겼다.

2군단의 일부는 아틀라스 산맥의 협곡을 통해 튀니지아로 들어가 산맥에 둘러 쌓인 삼각지를 장악했다. 이대로 해안의 스팍스Sfax로 진격하면 마레트의 1이탈리아군과 튀니스 부근의 폰 아르님군은 서로 단절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롬멜이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시디 부지드Sidi Bou Zid 전투

1943 1 30, 폰 아르님의 독일 21기갑사단과 3개 이탈리아사단이 파이드Faid 부근의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다. 파이드는 산맥의 동쪽에서 해안평원으로 이어지는 주 통로였다. 미군은 1기간사단의 전차를 증원시켜달라는 프랑스군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고 무장이 열악한 프랑스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뒤늦게 1사단의 전투단 B를 포함해 여러 번 반격했지만 이미 강력한 수비망을 펼친 추축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연합군은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고 작은 마을 스베이틀라Sbeitla에 새 전선을 만들었다.


 

봄바람Fruhlingwind 작전에서 아르님은 미군 1기갑사단의 전투단 A(CCA) 34보병사단의 168연대 전투대가 지키던 시디 부지드 지역을 4개 기갑부대로 공격했다. 미군의 배치와 방어는 허술해서 서로를 지원할 수 없었다.

2 15, CCA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고지에 보병을 남겨둔 채로 후퇴했다. CCC가 급히 시디 부지드 구원에 나섰지만 마찬가지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2 15일 저녁이 되자 독일 3개 기갑부대가 CCA CCC를 완전히 밀어내고 스베이틸라로 향했고 CCB와 전투를 벌였다. 항공지원을 받은 CCB는 하루를 버텼지만 항공지원이 끊어지자 2 17일에 스베이틸라를 버리고 후퇴했다.



북아프리카와 같이 지평선 끝까지 노출된 지역에서 그 위력이 절정에 달했던 88mm 대전차포입니다. 

 

남쪽에서는 아프리카 군단의 나머지 병력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1군이 2 15일에 가스파를 향해 진격했는데 이미 도시는 텅 빈 상태였다. 연합군은 프랑스 19군단의 재무장을 위해 불러들였고 미 2군단도 데르나이아-카세린-가프-스비바 방어선으로 후퇴한 상태였다.

2 17일 오후, 롬멜의 부대가 카세린Kasserine 남서쪽 23km 지점의 페리아나Feriana와 텔레프테Thelepte를 점령했고 영국군은 남부지역의 공군기지였던 텔레프테 비행장을 급히 소개했다.

 

카세린 협곡전투

2 19, 롬멜은 카세린과 스비바를 통해 진격해서 영국 1군의 측면을 위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롬멜은 카세린으로만 공격을 집중해서 2군단을 밀어낸 후에 테베사Tebessa의 미군 군수품을 노획하자고 제안했었다. 롬멜은 새로 받은 제10 21전차사단이 있었지만 스비바까지 공격을 넓히면 강도가 약해질 뿐만 아니라 측면이 노출되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2 19,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과 마레트 방어선의 이탈리아 1군까지 동원해 카세린 협곡전투를 시작했다. 경험이 부족한 연합군을 기습할 생각으로 제3 정찰대대의 경장갑차를 협곡으로 급히 보냈다.

알렉산더 스타크Alexander Stark 대령의 부대가 협곡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아직 미군과 프랑스 부대를 제대로 배치하지 못했지만 주변 고지대에 배치한 중화기로 정찰대대에게 직격탄을 날려 막아냈다. 추축군은 보병을 투입해 고지대의 중화기를 찾아 다녔다.

21기갑사단의 전차를 동원한 스비바 방면 공격도 제1 근위여단과 18 연대전투대의 대전차포 반격을 받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다가 제34 보병사단의 2개 연대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2 20, 카세린 협곡 주변의 고지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아프리카 군단은 131사단과 10기갑사단의 증원을 받아 협곡으로 다시 한 번 공격하기로 했다. 아침공격은 지지부진했지만 오후에 다시 한 번 맹공격을 퍼부었고 연합군의 방어선은 무너졌다




이탈리아군의 주력전차 카로 아르마토Carro Armato M14/41 모습입니다동맹국 일본과 함께 경전차로 전쟁을 치를 밖에 없었는데 움직이는 관이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전면장갑이 30mm 불과했고 4.7cm 포를 장착했습니다. 900m 거리에서 29mm 장갑을 뚫을 있기 때문에 연합군의 M3 Lee 전차를 격파하려면 100m 이내로 접근해야 했고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한 M4 셔먼(76mm) 격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2 20일 오후, 카세린 협곡을 통과한 켄타우로Centauro 사단은 테베사Tebassa 방향으로 서진했고 연합군의 반격은 없었다. 그 뒤를 따라 10기갑사단의 폰 브로이쉬von Broich 전투대가 탈라Thala 방향으로 우회전했다가 26기간여단의 고어 군Gore Force와 전투를 벌였다. 전차가 부족했던 고어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른 부대가 후방에 방어선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동안 미 1기갑사단의 CCB도 테베사를 방어하기 위해 달려갔다.


 

21일 오후 1, 폰 브로이쉬 부대는 탈라 도로에서 26기갑여단의 방어선에 막혔다. 롬멜이 공격을 직접 지휘하며 연합군을 몰아붙였고 26기갑여단은 탈라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조금씩 물러났다. 마지막 방어선을 두고 저녁 7시부터 3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쪽 모두 승기를 잡지 못했다.

모로코에서 1,300km를 달려온 미 9보병사단의 야포 48문이 도착했고 이를 알지 못했던 브로이쉬는 22일 아침에 공격을 재개했다가 맹렬한 포탄세례를 받았다. 크게 놀란 롬멜은 병력을 집결시키고 수비태세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더 이상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스비바의 21기갑사단도 큰 진전이 없었다 베르살리에리Bersalieri 2개 대대(사진참조)의 공격이 무산되었고 더 남쪽의 테베사 도로의 공격도 잘 틀어박힌 CCB의 전차와 야포에 가로막혔다. 21일 밤에 우회돌파하려던 시도가 무산되었고 22일에는 큰 사상자를 냈다. 23일 오전의 공격도 다시 한 번 가로막혔다.


 

22일 침울한 상태에서 케세링Kesselring을 만난 롬멜은 연합군의 저항이 너무 거세며 8군의 선봉이 마레트 방어선에서 몇 km 밖에 안 떨어진 메드닌Medenine까지 진출했다며 작전을 취소하고 마레트 방어선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세린 공격에서 입은 피해가 워낙 커서 가까운 미래에 있을 연합군의 공세를 막을 전력이 없다고 말했다. 케세링은 공세를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결국 작전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추축군은 25일 카세린에서 철수해 마레트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양쪽 모두 전투를 잠시 중단하고 전황을 분석했다. 롬멜은 여전히 미군을 무시하고 영연방군을 상대로 여겼다. 그는 이런 편견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았는데 나중에 큰 대가를 치렀다. 미군도 전황을 분석하고 고위 지휘관을 경질하며 귀한 교훈을 자료로 편찬해냈다.

1943 3 6, 2군단 사령관을 프레덴달Fredendall에서 조지 패튼George Patton으로 바꿨고 군단부사령관에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를 임명했다. 그리고 일선 지휘관에게는 프레덴달이 했던 것처럼 병력을 넓게 분산시키지 말고 전장에 밀집해서 배치시켜야 한다는 교훈을 전달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미군의 화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근접항공지원은 악천후 때문에 어쩔 방법이 없었다. 항공지원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 해결되었다.

 

카사블랑카Casablanca 회담에서는 해롤드 알렉산더Harold Alexander를 북아프리카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앤더스를 비난하며 튀니지의 적을 모두 소탕하겠다고 장담했다. 8군을 가베스Gabes 북쪽으로 전진시키고 1군은 추국군의 예비병력이 8군에게 향하지 못하도록 압박한 후에 8군과 1군 모두 비행장 확보에 주력해서 압도적인 항공전력을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이렇게 육해공 3박자가 완성되면 튀니지의 추축군을 4 30일까지 섬멸한 후에 8월의 온화한 날씨를 이용해 시실리에 상륙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카사블랑카 회담에서는 지중해 공군의 재조직에도 합의했다. 공군사령관 아더 테더Arthur Tedder가 지중해 공군사령관으로 지중해의 모든 공군작전을 책임지게 되었고 칼 스파츠Carl Spaatz는 북서아프리카공군 사령관으로 튀니지 공군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추축군도 2개 군의 통합사령관직을 만들기로 하고 히틀러는 아르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했지만 케세링은 롬멜을 강력하게 추천해서 롬멜이 23일 새로 편성된 아프리카 군집단Army Group Africa의 사령관을 맡았다.


알제리인이 자유 프랑스군에 편입되어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 'Days of Glory'입니다. 유투브에서 영화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