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판터와 셔먼의 상세베르 전차전

by uesgi2003 2015. 1. 17.


모든 전쟁영화가 그렇듯이, 퓨리가 안겨준 재미있는(?) 오해를 설명할 겸 모처럼 2차대전 전차전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저도 좋아하는 주제라 하루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데, 느닷없이 터진 전세집 구하기 3만리 여행 중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2차대전 서부전선은 노르망디 상륙, 상뢰St Lo와 캉Caen, 굿우드GoodWood와 코브라Cobra 작전, 팔레스Falaise 포켓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연합군과 추축군이 프랑스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고 그만큼 중요한 전투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굵직한 전투 중간 또는 도중에도 소규모 전투는 쉴새 없이 벌어졌고 양쪽 모두에게 많은 피를 요구했는데도 이제는 거의 잊혀졌고 언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상세베칼바도스St Sever-Calvados 남동외곽에서는 1944 8 4일에 그런 전투가 벌어졌다.

 

1944 7월 말, 코브라 작전이 막바지에 다다랐고 미 제1군 기갑부대가 코탕탱Contentin반도(지도의 뾰족한 반도부분)를 완전히 장악했다. 8 3, 2 기갑사단의 B전투단Combat Command은 둘로 나뉘어 세트-프헤헤Sept-Freres 근교와 쿠흐송Courson 마을(지도의 표시부근)까지 접근했다. B전투단은 통제하기 쉽다는 이유로 원래부터 둘로 나뉘어 작전을 펼쳤다.

A. 디즈니대령과 이삭 D.  와이트준장이 양쪽을 지휘하고 있었다. 작전초기에는 디즈니 부대가 왼쪽을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전투를 벌이다 보니 와이트 부대의 오른쪽에 있게 되었다.


디즈니와 와이트는 모두 경험이 풍부했다. 와이트는 1930년대 초반부터 기계화부대에 있었고 1942 6, 67 기갑연대장을 맡은 후에 1943 4 5, CCB 단장이 된 후에 디즈니가 연대장이 될 예정이었다.

폴 디즈니는 상이훈장Purple Heart를 포함해 많은 훈장을 받은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제2 기갑사단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직후에 대령으로 진급했고 이제 부대를 이끌고 쿠흐송을 향하게 되었다.

 

폴 디즈니 부대는 제2 대대와 제3 대대가 주축이었고 포병과 공병, 702 전차구축 대대의 1개 소대와 의무파견대의 지원을 받았다.

8 4일 금요일, 디즈니는 쿠흐송을 거쳐 상세베칼바도스 도로를 따라 샹두볼Champ-du-bolt까지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5시에 출발한 디즈니 부대는 오른쪽에서 접근하던 제28 보병사단의 제110 보병연대의 근접지원을 받았다


쿠흐송을 통과한 부대는 오전 9:30분에 상세베르칼바도스에 도착했다.  이미 마을은 독일군의 포화로 폐허가 되어 있었고 부대는 서둘러 상세베르 숲의 외곽까지 전진했다.

마을 남동쪽 1.5km 지점, 그러니까 미군의 전진로 바로 앞의 과수원(도로 좌측) 판터Panther 전차 2대가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면시야가 300m 거리까지 탁 트였기 때문에 판터에게는 더 없이 좋은 매복지였다. 판터는 44톤의 무게에 80mm의 두터운 경사장갑을 둘렀고 7.5cm 장포신을 무장해 공격, 방어, 운용 모든 면에서 독일군뿐만 아니라 2차대전 최고의 걸작전차 중 하나였다.

 

한 대는 도로 바로 옆의 농장건물을 엄폐물삼았고 다른 한대는 왼쪽 50m 지점에 떨어져 전면시야가 미치는 모든 곳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차 앞 160m 지점에는 만신창이가 된 빈 보병대대가 참호를 파고 미군의 접근을 막았다.

판터 전차의 무장친위대 장교후보생SS Oberjunker 프리츠 랑앙케Fritz Langanke가 해치를 열고 안개 덮인 도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미군의 접근을 막으라는 제2 SS 기갑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8 4일 오전 일찍 교차로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도로 우측의 나무 그늘에 자리잡았지만 중대장 요하힘 중위Obersturmfuhrer의 전차가 도착하면서 도로를 건너 과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프리츠 랑앙케는 다스 라이히Das Reich 무장친위대사단 소속으로 팔레스 포켓에서의 활약으로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2012년 최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막 25세를 넘긴 프리츠 랑앙케는 폴란드, 프랑스, 발칸반도와 러시아 전투를 겪은 베테랑이었다. 그는 다스 라이히 사단 제2 SS 기갑연대, 2 중대 소대장으로 벌써 연합군 전차를 10대나 격파했다. 판단력도 빨라 독일군 총퇴각에서 병사들을 무사히 데리고 나와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랑앙케의 결단력, 판단력과 운 덕분에 소대원은 말할 것도 없고 600명의 보병이 미군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랑앙케의 판터 211호에는 포수 마인들Meindl, 장전수 슈투르만Sturmann, 통신병겸 기관총수 플룸Pulm이 함께 타고 있었다. 슈트르만 하일Heil은 부상당한 조종수를 대신해 최근에 전출왔다.

 

과수원 왼쪽 구석에는 요하임의 판터 201호가 서 있었다. 5번이나 부상을 입은 요하임도 나중에 금십자훈장Cross in Gold을 받게 된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베흐시Percy에서 격전을 벌이며 좀처럼 물러나지 않아서 미군의 진격을 24시간이나 막아내는 공을 세웠다. 요하임의 격렬한 저항에 막힌 셔먼전차부대는 독일군이 밤에 물러난 후에야 베흐시를 탈환했다.

그렇다고 요하임은 무자비한 무장친위대 장교가 아니었다. 그는 주저앉은 전차에서 전차병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고 그들이 민가에 숨어 있을 때에도 공격하지 않았다. 심지어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까지 했다.

 

아침이 밝았는데도 도로는 아직 안개에 덮여있었다. 디즈니 부대는 안개 낀 도로를 그대로 전진했고, 랑앙케의 시야에 미군전차가 들어왔다. 랑앙케의 전차는 시동을 끈 상태였기 때문에 수동으로 포탑을 돌려야 했다. 첫 탄은 빗나갔고 셔먼은 농가 건물에 가려졌다.

 

요하임은 요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211호는 시동을 걸어 도로로 올라가 계속 다가오는 셔먼을 노렸다. 50m 거리 밖의 셔먼은 포탄을 맞고 주저 앉았고 차체 밖으로 상체를 내놓고 있었던 전차장은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려왔다.

랑앙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고 좌회전했고 예상대로 150m 거리에 2대의 셔먼이 더 있었다. 랑앙케의 지시에 따라 포수는 정확하게 한 발에 한 대씩 격파했다.

 

전방을 살피던 랑앙케는 두 손을 들고 뛰어가는 보병을 보았다. 처음에는 미군이 항복해 오는 것으로 착각했는데 전방에 있던 아군이었다. 이제 2대의 판터는 보병지원이 없는 매우 위험한 입장이 되었다.

랑앙케가 다시 과수원으로 돌아간 정오에 연대장이 상황을 점검하러 방문했고 판터의 전과에 크게 만족하며 돌아갔다. 랑앙케와 요하임은 원래 위치에서 조용히 미군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두 전차 앞에는 나무와 덤불이 많아서 보병의 접근을 알아채기 힘들었는데 특히 201호 전방에는 언덕이 있어서 전방시야가 아주 좁았다

전방 1km 정도에 있는 언덕은 도로보다 높아서 미군 관측병이 올라 포격을 정확하게 유도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실제로 요하임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랑앙케는 지난 2주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미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자신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큰 피해를 입으며 총퇴각했고 무장친위대라면 자연스럽게 배수진의 각오로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희망이 없었다. 어차피 살아남기 힘들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아보려고만 했다적을 막아 세우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라고 회상했다.

도로에 발이 묶인 미군은 현재 위치를 고수한 채로 제41 기갑보병연대와 함께 측면으로 돌기로 했다. 그 이전에 포격으로 독일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위치를 융단포격하기로 하고 요하임이 걱정하던 언덕에 올라 정확한 위치를 관측하기로 헸다.

 

E 중대장 제임스 맥카트니McCartney 대위가 언덕에 올랐다. 자신의 셔먼은 도로에 세워두고 전방상황이 어떤 지를 보고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언덕에 오르자 사단의 로버츠 대령이 먼저 올라와 있었고 그는 도로를 돌파해야 하네라고 말했다. 그는 충동적인 인물로 전방을 쌍안경으로 제대로 관측도 하지 않고 언덕을 떠났다.

 

이들보다 먼저 언덕에 올랐던 루이스 탠킨Louise Tankin 의무대위는 부상당한 독일군 3명을 구조해달라는 무선교신을 들었다. 그는 짚을 타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3명의 독일군을 싣고 후방으로 옮긴 그는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주저앉은 셔먼 안에 부상병이 있는 지를 살피겠다며 다시 짚 2대를 끌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요하임은 랑앙케와 함께 적십자기를 단 짚 2대가 셔먼을 살펴본 후에도 계속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황당해했다. 탠킨은 혹시라도 아군이나 독일군 부상병이 남겨져 있다면 포격에 목숨을 잃을까 봐 위험을 무릅쓰고 너무 나간 것이었고 요하임은 미군이 그대로 돌아가게 놔두면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탠킨의 짚을 붙잡았다.

 

바로 이 순간에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요하임은 미군을 그대로 도로에 둘 수도 없어서 부근의 보병에게 후방으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무선교신은 막는 대신에 부상병이 있으면 후방으로 함께 실어갈 수 있게 했다.

맹렬한 포격이 점차 과수원으로 다가왔고 파편이 차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도로보다는 안전하다고 해도 판터의 상부 장갑은 얇기 때문에 직격탄을 맞으면 위험했고 전차병에게는 차라리 전차전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주 동안 잠도 거의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전차병 중 몇 명은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차체에 머리를 대고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랑앙케는 마인들과 자리를 바꿔 그가 머리를 대고 더 편하게 잘 수 있게 배려했다.

 

지옥 속의 휴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랑앙케가 전차장 자리에 올라 전방을 다시 주시했다. “셔먼이 도로에 올라와 전속력으로 우리에게 달려왔다. 전차포는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보통은 포격 후에 공군을 불러 다시 한 번 더 공격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셔먼의 과감한 행동에 크게 놀랐다.

셔먼을 본 요하임은 잠에 빠진 포수를 발로 차서 깨웠다. 포수는 철갑탄으로 맞춰놓았다고 착각하고 발사했지만 포탄은 셔먼을 넘어갔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포탄도 다시 넘어갔다. 나중에야 고폭탄용으로 설정해놓은 것을 알았다.

 

랑앙케는 포탄이 계속 빗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제 판터와 셔먼 중 누가 먼저 맞추느냐의 러시안 룰렛을 직감했다. 셔먼의 포는 정확하게 판터를 노리고 있었지만 높낮이를 조정해야 했다. 랑앙케가 해치를 열고 상체를 내밀자 셔먼의 포와 정확하게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이 순간에 판터의 포가 작렬했고 셔먼은 불타올랐다. 50m도 안 되는 거리였기 때문에 조금만 늦었다면 랑앙케를 목숨을 잃었다.

셔먼의 전차장은 다행히 밖으로 빠져 나왔는데 랑앙케가 만난 미군 중에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 과감한 상대였다.

 

다시 한 번 포격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공습도 함께 왔다. 이번에는 조는 승무원은 없었다. 211호의 안테나가 날아갔고 큐폴라 망원경도 날아가서 랑앙케는 이제 해치를 열고 싸워야 할 판이었다.

포격이 끝나자 기관총탄이 211호의 차체를 두들겼다. 가까운 거리까지 보병이 접근했다는 증거였다. 요하임은 뒤로 돌아가려는 보병을 발견했다. 그는 급히 전차를 돌려 100m 뒤로 빠진 후에 랑앙케를 엄호했다.

 

랑앙케는 201호가 급한 소음을 내며 움직이는 것을 듣고는 셔먼이 다시 오고 있다고 판단하고 도로로 올려 선회를 하던 중에 연거푸 포탄을 맞았다. 하일과 마인들은 포격의 충격으로 제대로 구분을 못하고 있었고 랑앙케가 해치를 열고 직접 확인해야 했다.

여러 대의 셔먼이 먼저 파괴된 전차 뒤에서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전차를 정면으로 약간씩만 돌려 놓았기 때문에 마치 축포를 쏘는 것처럼 연달아 섬광이 터져 나왔다.

 

랑앙케는 파괴된 셔먼이 자신의 중간에 오도록 재빨리 움직여서 그 전차를 중심으로 선회하면서 셔먼을 한 대씩 상대하기로 했다. 인터콤으로 부하들에게 생각을 알리고는 전차를 왼쪽으로 움직였다.

선회하던 중에 다시 한 번 측면의 경사장갑에 한 방을 맞았는데 이번에는 충격이 꽤 심했다. 장갑에 손상이 갔고 인터콤도 죽어버렸다. 랑앙케는 이제 포수의 양쪽 어깨를 두드리며 왼쪽과 오른쪽 사격을 지시했다.

하일은 랑앙케가 직진하라는 명령을 못 듣고 계속 왼쪽으로 선회해서 측면을 그대로 셔먼에게 노출시켰다.

 

뒤에 있던 요하임은 211호가 측면으로 농가 쪽으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농가는 이미 미군보병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바주카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요하임은 다급한 나머지 철갑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농가에 쏘라고 지시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랑앙케의 전차가 바주카를 맞았다.

랑앙케는 장전수가 불에 휩싸인 채로 서 있는 모습을 보았고 바로 탈출!’을 외치며 큐폴라에서 도로 옆 도랑으로 몸을 던졌다.

요하임은 농가를 7.5cm 포로 부수고 길가에 있던 보병을 기관총으로 쫓아 보냈다. 211호는 연달아 포를 맞으며 완전히 불타 올랐다.


 

장전수를 뺀 나머지 승무원은 1km 정도를 걸어 연대본부로 귀환했고 201호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교전을 피했다. 그날 오후 늦게 디즈니 부대가 도로를 완전히 장악했고 구축전차Tank Destroyer가 투입되면서 짧지만 격렬했던 상세베칼바도스 도로전투가 끝났다.

독일군은 100명 이상의 보병(대부분 포로), 한 대의 판터를 잃었지만 미군을 24시간 동안 묶어두었다. 미군은 5대의 전차(전차병 15명 사상)과 의무팀(포로)을 잃었다. 그리고 과수원을 우회하면서 30명의 보병이 사상 당했지만 결국에는 도로봉쇄를 풀었다.

 

제임스 맥카트니대위는 종전 후까지 살아남았고 벌지전투 직전에 운 좋게도 참모직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루이스 탠킨대위도 살아남아 독일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러시아군에게 풀려났지만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귀국했다.

토마스 로버츠 대령은 언덕을 벗어난 직후에 대전차포를 맞고 다른 승무원과 함께 전사했다. 요하임은 대위로 승진했다가 아르덴느 작전에 투입되었다. 항복 후에 소련 전쟁포로수용소에서 10년을 보냈다. 랑앙케는 억세게도 운 좋은 생존을 계속했고 2년은 미군, 마지막 1년은 영국군 수용소에서 보냈다.

마인들과 슈트르만은 포위망을 탈출하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 풀름은 판터 전차장으로 승진했다가 종전 직전에 오스트리아에서 포탄 파편을 맞고 전사했다. 하일은 종전까지 살아남았다


셔먼 대 판터

 

독일 판터는 거의 모든 면에서 M4 셔먼보다 우수했지만 그렇다고 전승을 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판터는 화력, 기동력과 방어력 모두 균형이 잘 잡힌 걸작전차였다. 우수한 주포와 전면장갑을 갖추고 있었는데 75mm 고속포는 타이거의 88mm에 비해 떨어진다고 해도 웬만한 사거리에서는 셔먼의 차체와 포탑을 뚫을 수 있었다.

전면장갑은 100mm 두께였고 경사각도로 탄을 튕겨낼 수 있었다. 넓은 철제 트랙덕분에 야지에서도 주행성능이 좋았고 접지압도 우수했다.


 

판터는 원래 러시아의 T-34KV-1에 대응해서 4호전차를 대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초기 디자인모델은 T-34와 많이 비슷했다. 그렇지만 판터위원회는 더 전통적인 엔지니어링을 선호했고 그 결과로 독특한 판터의 디자인이 탄생했다.

 

셔먼은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75mm 주포를 달았지만 저속형 포였다. 셔먼을 설계할 때에 저속포가 고속포에 비해 내구성이 좋다고 결정했지만 전장에서는 주포의 내구성보다 셔먼 자체의 전투력이 더 중요했다. 나중에 고속포로 교체했지만 1944 11월에야 실전 배치되었다.

장갑은 81mm로 판터에 비해 얇았고 철갑탄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셔먼도 장점이 있었다. 얇은 장갑은 가벼운 무게를 의미했으며 기동력도 더 좋아서 서유럽의 작은 마을, 언덕지형, 춥고 메마른 기후에 적합했다. 셔먼의 포탑선회 속도는 판터보다 더 빨라서 첫 탄을 먼저 쏠 수 있었다.


 

판터는 복잡한 구성 때문에 기계고장이 늘 있었지만 셔먼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사실 어떤 셔먼도 판터와 맞대결할 수 없었지만 미 제3과 제7 군은 압도적인 공군지원을 받았고 예비전력과 보급 면에서 비교되지 않았다. 셔먼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속도와 기동력을 이용해 적 전차를 상대하지 않고 빠져나간 후에 구축전차와 공군에게 처리를 맡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전차가 상대하기에 미군전차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미국 군수산업은 폭격을 받지 않았고 애국심에 불타는 노동력(독일은 점령지 노예인력에 의존)이 풍부해서 거의 5만 대의 셔먼을 쏟아냈다. 독일과 영국이 대전 중에 만들어낸 숫자보다 더 많았으며 독일은 판터를 겨우 6천 대 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연합군 비행기는 D-데이부터 종전까지 유럽 상공을 지배했고 전폭기는 전방의 독일군 기갑부대를, 폭격기는 생산공장, 저장고와 각종 부품과 오일공장을 불태웠다. 그리고 미군의 압도적인 포병전력은 독일전차의 움직임을 최저치까지 옭아맸다.

하늘을 지배한 덕분에 자유로운 보급을 받을 수 있던 전차회수팀은 전장에 주저앉은 셔먼을 끌고 와 기름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품으로 재생을 시켰다. 반면에 독일은 손상된 판터를 그 자리에 두거나 폐기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셔먼 전차병은 이제 막 참전했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았다. 독일군은 미군이 참전하기 6년 전부터 전투를 벌였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1944 8월 초에 신형 판터는 모두 기존 사단에 보내지 말고 새로운 부대를 편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독일의 베테랑 전차병은 4호전차를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공장에서 새로 나온 판터는 미숙한 전차병의 차지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판터의 미숙한 대처에 셔먼이 큰 이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장점이 있다고 해도 미군 전차병은 셔먼이 절대로 독일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서유럽에서 셔먼은 죽음의 덫Death Trap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대전 당시의 자료로 알고 있는데... 그냥 정신승리용이죠. 


셔먼은 삼각지의 전쟁기념관을 가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판터는 어쩔 수 없이 외국을 나가야 하는데 실제로 앞에서 보면 엄청나게 큽니다. 



퍼싱전차에게 격파된 판터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