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출판사와의 협의 그리고 아르바이트 일이 한꺼번에 생기면서 이야기 정리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야기는 워낙 많은 자료가 있는데다가 (가지고 있는 원서 대부분이 2차대전인데도) 제가 별로 흥미를 못 느껴서 동부전선 폭풍연재 후에 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연속으로 2차대전 그것도 독일군과 미군의 전투이야기이냐고요? 영화 퓨리의 허술한 설정에 뒤끝을 부리는 것입니다. 타이거와 맞대결을 벌인다는 설정도 이해가 안 되는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튀니지에서 공포스러운 전투를 치른 전차병들이 타이거를 잡겠다고 달려드는 설정은 더더욱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영화로만 보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처럼 일부러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여러분이 판터와 셔먼의 대결이 어땠는지 그리고 튀니지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겠죠. 어차피 이런 것을 알아봐야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지만 그래도 늘 뭔가를 궁금하게 생각하며 자료를 찾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과 눈과 귀를 막고 대충 넘어가는 사람은 실생활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제 서재에 놀러 오시니 저도 잊고 있었던 튀니지 전투를 꺼내 들어서 좋고 제가 뒤끝을 부리니 여러분도 튀니지 전투에 대해 알게 되어 서로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튀니지 전투에서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고 북아프리카 전선이 사라집니다.
튀니지 전투 (1부) - 튀니지 경주
튀지니 캠페인은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선 중 튀니지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연합군 주력은 영국군이었고 미군과 프랑스군이 보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시작되었지만 연합군의 막대한 공급과 수적 우위로 추축군은 회복할 수 없는 패배로 몰렸다. 23만 명 이상의 독일과 이탈리아 병사가 포로로 잡혔고 전설적인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처음 2년은 양쪽 모두 보급난에 시달렸다. 북아프리카 해안에는 자연항구가 거의 없었고 나일 삼각주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항은 이탈리아령 트리폴리Tripoli와 무려 2,400km나 떨어져 있었다. 좀 작은 벵가지Benghazi와 토브룩Tobruk은 알렉산드리아 서쪽으로 각각 1,500km와 1,000km 거리였다. 세 항구를 연결하는 도로는 좁은 해안도로 하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중해에서는 전력이 비슷한 영국과 이탈리아 함대가 치열한 작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나 토브룩으로 마음대로 수송선을 보낼 수 없었다. 영국은 이탈리아보다 그나마 나았던 것이, 희망봉을 도는 먼 수송로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해군 전력은 영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주력은 대서양에 투입되고 지중해는 이진급 전력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해군보다 오히려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미 정리해두었습니다. 이탈리아 해군이 멈춘 날, 마타판 곶 전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uesgi2003/664)
해안도로는 혈관과 같았고 양쪽은 대동맥을 두고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이 시소게임을 벌였다. 이탈리아군은 1940년 공세에서 리비아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100km 정도 진입했고 최전선은 트리폴리에서 무려 1,600km나 멀어져 버렸다. 그래도 보급기지에 가까웠던 영국군은 병력을 모으고 반격해 이탈리아군을 리비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다시 알렉산드리아에서 1,600km 떨어진 엘 아게일라El Agheila가 최전선이 되었다. 독일 아프리카군단이 도착하면서 추축군은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냈지만 보급문제로 이집트 국경을 완전히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1941년 11월, 보급로가 짧아진 연합군은 다시 한 번 전력을 모았고 십자군Crusader 공세를 벌여 토브룩의 포위망을 풀고 다시 한 번 최전선을 엘 아게일라까지 밀어냈다. 그렇지만 롬멜의 반격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에서 겨우 160km 떨어진 엘 알라메인El Alamein까지 밀려났다.
1942년 후반이 되면서 전세는 연합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영국해군과 이탈리아해군은 여전히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중이었지만 영국은 말타Malta를 지켜낸 덕분에 공군이 이탈리아의 해상보급로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미국이 막대한 군수품을 지원하면서 버나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의 8군은 아프리카군단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8군은 보급문제에서 자유로워진 반면에 추축군은 1942년 11월에 벌어진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후에 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1942년 7월, 연합군은 북부 프랑스에 소규모 상륙작전(쇠망치Sledgehammer 작전)을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다가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북아프리카 모로코Morocco, 알제리Algeria와 튀니지의 비시Vichy 프랑스군 영토를 확보한 후에 추축군의 배후를 치기로 했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해안을 완전히 장악하면 지중해를 통한 해상수송로를 열 수 있었다.
시실리와 튀니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추축군은 연합군의 상륙(횃불Torch 공세)을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고 연합군은 상륙 즉시 튀니지를 장악해야만 했다.
10월 말 현재, 시실리와 사르디니아Sardinia에는 독일 298대와 이탈리아 574대의 비행기가 있었기 때문에 횃불Torch 상륙지를 동쪽 멀리로 정할 수도 없었고 알제Algiers(알제리 수도)를 상륙지로 선택했다. 프랑스군(자유 프랑스가 아닌 비시)이 어떻게 나올 지를 알 수 없지만 상륙하게 가장 좋은 지점이었다. 알제를 장악하면 상륙군은 추축군이 대응하기 전에, 겨울 우기에 열악한 도로를 따라 1,400km 떨어진 튀니지 진입해야 했다. 그리고 해군과 공군이 추축군의 병력결집을 최대한 막아주어야 했다. 튀니지 작전은 케네스 앤더슨Kenneth Anderson의 영국 제 1군 사령부가 지휘하기로 했다.
11월 8일, 횃불 작전 상륙부대가 알제리(알제와 오랑Oran)와 모로코(카바블랑카)에 상륙했다.
튀니지는 직사각형 형태로 북부와 동부 대부분은 지중해에 접해 있다. 알제리와 맞붙은 서부 국경 대부분은 삼각형 모양의 아틀라스Atlas 산맥이 있어서 몇 군데의 협곡만 막으면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남부에는 프랑스군이 리비아의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강력한 방어선(마레트Mareth)을 구축해두었었다. 북부는 아틀라스 산맥이 해안 부근에서 끊어져서 북서쪽은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었다.
튀니지는 횃불 작전군을 막아내기 좋은 지형이었다. 그리고 수심이 깊은 2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시실리의 수송선이 밤에 들어와서 숨어있다가 다시 밤에 돌아갈 수 있었다. 히틀러는 튀니지를 최소 몇 개월에서 최대 몇 년은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은 11월 10일에 연합군과의 전투를 중지하면서 튀니지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인 상태가 되었고 연합군과 추축군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충분한 병력이 없는데다가 추축군의 공습을 우려해 튀니지 상륙을 고려하지 않았다. 겨우 2개 여단에 약간의 기갑전력뿐이었지만 신속하게 진격한다면 비교적 적은 피해로 튀니지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앤더슨은 아직 바다에 있던 제36 보병여단을 급히 투입했다.
튀니지 정부는 눈치를 보며 양쪽 모두에게 비행장을 개방했다. 11월 9일, 튀니스(튀니지의 수도)에 40대의 독일항공기가 도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튿날 항공정찰에서는 100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11월 말이 되자 3개 독일군 사단 (제10 전차사단 포함)과 2개 이탈리아 사단이 보강되었다. 11월 17일, 새로 편제된 90군단 사령관 발터 네링Walter Nehring(아래 사진 오른쪽)이 도착했다.
그렇지만 튀니지의 프랑스군 지휘관 바레Barre는 이탈리아군을 믿지 않고 산맥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테베르스소우크Tebersouk에서 마자즈 알 바브Majaz al Bab까지 방어선을 펼치고 어느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알제리에서 튀니지로 통하는 도로를 두 곳이 있었다. 연합군은 2개의 도로를 따라 진격한 후에 비제르테Bizerte와 튀니스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11월 11일, 영국 제36 보병여단은 베자이아Bejaia에 무혈입성했지만 보급문제로 진격속도가 늦었다. 제3 강하대대가 공수작전으로 보네Bone 비행장을 점령했고 12일에는 6코만도 부대가 항구를 점령했다. 15일에는 36여단 선봉대가 테바르카Tebarka까지 진격했고 18일에 처음으로 추축군과 전투를 벌였다.
훨씬 남쪽에서는 15일에 미군 강하대대가 아무런 피해없이 내린 후에 이틀 만에 가프사Gafsa 비행장을 노렸다.
선인장 사이에 매복 중인 이탈리아군입니다. 상당히 따가울 것 같습니다만.
11월 19일, 독일 사령관 발터 네링은 메제즈Medjez 다리를 건너겠다고 바레에게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프랑스군은 2번에 걸친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피해가 심각한데다가 중화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바레의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비시 병력은 아직 태도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11월 22일, 북아프리카 비시군은 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연합군의 전진을 허용하기로 했다. 추축군은 이미 군단편제를 끝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연합군을 압도했다.
연합군 2개 여단은 각각 서쪽으로 진격로를 잡았고 루프트바페는 멀리 알제리에 떨어져 있는 연합군 전투기를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연합군을 공격했다.
17일, 네링이 도착하던 날, 36여단의 선봉부대가 17대의 전차와 400명의 공수부대와 전투를 벌여 11대의 전차를 파괴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9일 동안 드제벨 아비오드Djebel Abiod(지도 참조)에 묶였다.
2개 여단은 드제벨 아비오드와 베자Beja에 모여 24일 공격을 준비했다. 36여단을 북쪽에서 11여단은 남쪽에서 그리고 기갑연대는 두 여단 사이로 진격하기로 했다.
폭우로 북부 공격은 지연되었고 11연대의 남부 공격은 격심한 저항에 막혔다. 기갑연대 중 일부가 추축군 배후로 돌아 비행장에 있던 20대 이상의 비행기를 부쉈지만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났다. 기갑연대의 공격에 놀란 네링은 전선을 뒤로 물려 튀니스에서 겨우 30km 떨어진 드제데이다Djedeida를 지키기로 했다.
36여단은 26일에야 공격에 나섰다가 매복공격을 당해 149명의 피해를 입고 독일군의 방어선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30일에 1 코만도부대가 상륙해 독일 방어거점을 우회하지 못하고 12월 3일에 36여단에 합류했다.
이렇게 굳어진 방어선은 이듬해 봄의 북아프리카 군단의 최후순간까지 돌파하지 못했다.
11월 26일부터 독일군이 후퇴하자 11여단은 독일군이 떠난 도시를 무혈입성했고 드제데이다로 향했다. 그렇지만 27일, 독일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은데다가 28일에는 미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아 드제데이다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9일, 미 제1 기갑사단의 전투단Combat Command B(연대규모)가 도착해 영국 기갑연대와 함께 12월 2일 공격을 준비하다가 튀니지에 급하게 투입된 독일 10기갑사단의 반격을 받았다. 기갑연대는 후퇴했고 11여단과 전투단 B가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다. 11여단은 필사적인 저항을 다해 추축군을 4일 동안 막아냈고 전투단 B와 함께 전투후퇴를 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10km 떨어진 롱스탑 고지로 후퇴했다가 포위될 위험이 있어서 메제즈 엘 바브 동쪽까지 물러나 12월 말의 공격을 준비했다. 연합군 전력을 끊임없이 불어나 영국군 54,000명, 미군 73,800명, 프랑스군 7,000명이 집결했는데 추축군은 전투병력 125,000명과 비전투병력 70,000명(대부분 이탈리아인)을 모았다.
12월 22일, 연합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연합군과 추축군은 튀니지로 향하는 강을 두고 3일 동안 줄다리기를 하다가 롱스탑 고지를 빼앗지 못한 연합군이 후퇴하면서 튀니지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연합군은 2주 전에 출발했던 원래의 전선으로 복귀했고 20,743명의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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