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지옥행 편도 - 2차대전 공격용 글라이더 (1부)

by uesgi2003 2015. 6. 29.


2차대전 글라이더는 획기적이었는데도 바로 사라진 희한한 무기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지만 효율과 효과 면에서 심각한 약점을 보였고 미국, 영국과 독일이 시도한 대규모 글라이더 작전은 거의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783, 프랑스가 열기구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2인용 열기구 5천 개라는 공격용 글라이더 항공대를 주장했다. 바람을 타고 1만 명을 후방에 떨어트리면 적이 대응하기 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853, 영국인 조지 케일리George Cayley는 역사상 최초로 사람이 타는 글라이더를 발명해서 비동력 유인항공기 시대를 열었고 소련은 실제로 사용한 최초의 국가였다. 1932, 미국보다 10년이나 앞서서 16인승 그리봅스키Bribovski G-63을 제작했는데 날개에도 수송공간이 있는 최첨단 구조였다.

 

소련의 안토놉 설계국은 1942년에 아예 T-60 경전차의 뒷부분에 날개를 달았다. 기존의 공격용 글라이더는 조종을 하다가 목적지에서 동체착륙을 했지만 안토놉Antonov A-40은 전차병만 타고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천운에 맡기는 동체착륙이었다. 시험비행에서는 견인기가 착륙직후에 글라이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끊어버렸는데도 비행장에 운좋게 다시 제대로 내려 앉은 일도 있었다.


 

독일의 루트프한자Lufthansa 항공사는 1930년대 중반에 여객기 뒤에 민간수송용 글라이더를 달고 가다가 비행장이 없는 중소도시에 떨구는 시험을 했었는데 나중에 지상의 공수부대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수송용 글라이더로 이어졌다.

벨기에는 글라이더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다. 1940, 벨기에-독일 국경에는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에벤아말Eben Emael요새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잔디가 덮인 요새 지붕에 DFS 230 글라이더를 착륙시키는 획기적인 계획을 승인했고 벨기에군은 독일군의 착륙을 알지도 못했다. 겨우 85명 밖에 안되는 공수부대원이 폭약과 화염방사기로 20분 만에 세계최대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독일군은 19415, 영국해군의 거점인 지중해 크레테Crete섬 공격에도 글라이더를 사용하려고 했다. 무선교신을 포착한 영국군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고 착륙지점에 대공포와 기관총을 배치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접근하던 글라이더와 공수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크레테섬을 점령했지만 히틀러는 공수작전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에 전세계는 프랑스전선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미국 육군항공단의 헨리 아놀드Henry Arnold 소장은 에벤아말 작전을 놓치지 않았고 육군에게 글라이더와 조종사 양성을 요청했다.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고 글라이더 구매담당 대령은 아놀드 장군에게 글라이더를 팔아먹는 사람은 히틀러의 친구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일단 훈련용 글라이더부터 구매하기 시작했다. 슈바이처Schweizer와 같은 스포츠 글라이더 제조회사가 초기계약을 맺었고 육군항공단은 전국에 널린 민간용 글라이더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이퍼Piper, 테일러크래프트Taylorcraft 등에게도 2인승 글라이더 제작을 지시했다.

해군까지도 글라이더에 관심을 갖고 펜살콜라Pensacola에서 글라이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해병을 해안에 바로 내려놓을 수 있는 수륙양용 글라이더를 제안한 사람도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미 군용기 생산계약을 맺은 업체는 기존의 계약에 충실하도록 글라이더 제작에 참여할 수 없었고 오하이오에 있던 와코Waco항공기가 계약에 참여했다. 와코는 우아한 성형(별모양-Radial) 엔진의 스포츠 복엽기와 여객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CG-3CG-4A(사진참조)를 제안했다.

미국특유의 실용성으로, 이 회사는 원시적인 꼬리날개와 초코렛 모양의 넓적한 날개만 붙이고 짐을 쉽게 오르내릴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성형 엔진


 

이렇게 설계된 CG-4A는 제작비용이 낮았지만 심각한 품질문제가 있었고 실제로 그 중 한 대가 미국의 글라이더 프로그램 전체를 무산시킬 뻔 했었다. 194381, 세인트 루이스 공항에는 이제 막 공장에서 빠져나온 글라이더의 시범비행에 5,000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윌리암 소령, 고위장교와 와코사장이 탄 글라이더는 C-47 수송기에서 풀려나자 마자 오른쪽 날개가 떨어져나갔고 인파 바로 앞에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글라이더 참사가 주요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고 글라이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국민들도 탑승객을 죽인 글라이더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영국군의 에어스피드 호사Airspeed Horsa도 하늘의 관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글라이더의 태생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요 국가에서는 가능성을 믿고 그대로 유지했다. 공수부대와 달리, 글라이더에 타는 병력은 특별한 훈련이 필요없었고 무사히 착륙만 한다면 14명의 보병이 중요한 방어거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공수부대는 개인화기가 고작이었지만 글라이더부대는 심지어 야포나 차량까지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글라이더는 소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기습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에벤아말에서도 루프트바페(독일공군)가 글라이더를 멀리서부터 풀어서 벨기에군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착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르망디나 라인강 작전에서는 수 백 대의 수송기와 폭격기가 하늘을 덮으면서 글라이더 작전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글라이더의 가격이 저렴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CG-4A 한 대는 계약조건에 따라 15,500~24,000달러였는데 2차대전 최고의 전폭기 P-51 머스탱Mustang1945년에 겨우 51,000달러 밖에 안 되었다. P-51은 전투기로도, 폭격기로도 손색이 없었고 글라이더처럼 일회용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