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여행도 다녀오고 사회인야구 감독을 다시 맡으면서 요즘 역사이야기 정리가 뜸해졌습니다. 그리고 더운 날씨때문에 PC의 뜨거운 바람도 힘들고요.
인터넷에는 누군가가 조작한 정보가 좀비처럼 부활하며 장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빌 게이츠 명언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빌 형은 그런 말을 하는 성격도 아니고 MS가 공식부인했는데도 여전히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죠.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눈과 귀를 좀 더 열어야 하는데 어설픈 지식으로 사실을 호도하고 있죠. 오늘도 역사상 최대의 실수 10가지라는 글이 다음 메인에 떴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잡상식을 그대로 가져가더라도 제 서재에 놀러오시는 분은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겠죠?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겨울침공이 최대실수라???
이 리스트를 정리한 사람에게 뭐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 오늘 연합뉴스 기사에서도 나폴레옹 군대 몰살 비밀이 200년 만에 풀렸다며 이런 주장을 보도했으니까요. 그런데 조사내용을 잘 읽어보면 대규모 시체가 발견되었고 비밀경찰에서 학살된 줄 알았는데 나폴레옹 군대였고 원인은 아사더라 입니다. 원정 탈출로 마지막이 리투아니아이기 때문에 고립된 부대의 동사와 아사는 당연하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겨울에 침공해서 패전한 것처럼 생각되죠?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마치 신과 같은 전지전능의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며 과거에 대해 폄하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과연 수많은 참모가 바보여서 겨울에 전쟁을 벌였을까요?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 원정에 가장 좋은 6월에 원정을 시작했고 이미 겨울이전에 최고/최대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러시아의 봄과 가을은 진흙장군(라스푸티차, Rasputitsa)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도로가 진흙탕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5월 이후가 원정을 시작하는 가장 좋은 시기였고 두 사람은 모두 최적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진흙장군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더구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한 것은 9월 14일이니까 겨울과 상관이 없죠. 오히려 원정군은 여름 행군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 사람이 패전한 이유는 러시아 하나만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전선과 전력을 둘로 나누었고, 러시아 민족을 얕잡아봤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모스크 바만 점령하면 저절로 항복이나 평화협상을 받아낼 것으로 오판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수도를 내주더라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였죠.
러시아 총사령관 쿠투좁이 모스크바 포기를 결정하는 장면입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입성 이전에 보로디노전투(http://blog.daum.net/uesgi2003/720)에서 얕잡아보던 러시아군에게 4만 명과 49명의 장군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렇게 끔찍한 전투는 없었다고 했을 정도였고 대육군(원정군)은 부상병도 버릴 정도로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19일에 모스크바를 비웠는데 그 때는 이미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러시아군은 잃어버린 병력 이상을 보충한 반면에 대육군은 보충할 방법이 없었죠.
나폴레옹 대육군의 왕복로입니다.
대육군의 병력손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모스크바 입성 전에 이미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이미 사기가 크게 떨어진데다가 다급하게 후퇴하는 상황이었으니 전투가 될 리가 없었습니다. 겨울날씨는 이미 승패가 기운 후에 개입한 것이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그렇게 궤멸한 것입니다.
히틀러의 경우는 오히려 나폴레옹보다 더 안 좋은 경우였습니다. 스탈린의 대숙청 덕분에 초반 전설적인 전과를 올리기는 했어도 (우리의 오해와는 정반대로) 러시아는 독일에 비해 압도적인 전차와 보병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모스크바를 점령하지도 못했습니다.
참고로 개전초기 러시아전차는 독일전차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이었고 KV1 전차 한 대가 독일군1개 사단을 하루 동안 붙잡아두는 일도 있었습니다.
소련군은 첫 해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도 바로 보충했고 오히려 독일군 전력을 압도했습니다.
첫 해에 전설적인 전과를 올려서 버틴 것이지 원래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죠. 스탈린은 나폴레옹 당시의 차르처럼 수도를 비우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는 그냥 정치중심 도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오로지 모스크바 진격으로 퇴로가 모두 차단되었지만 히틀러는 전체 전선을 넓혀 그런 위험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초반에 엄청난 대성공을 거뒀고요.
히틀러가 장기전을 각오하고 러시아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 벨로러시아 등을 해방시켰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졌을텐데 히틀러의 민족차별주의가 그것을 허용할 리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해방군으로 환영하는 이들을 아낌없이(?)수탈해서 후방을 모조리 적대지역으로 만들었습니다.
히틀러의 황당한 삽질 이야기를 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다시 요약하면 히틀러는 최적기인 6월에 원정을 시작했고 혹독한 겨울추위를 4번이나 넘겼습니다. 독일군이 막힌 이유는 겨울추위때문이 아니라 스탈린의 대반격과 히틀러의 광기때문이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은 참 난감한 주제입니다. 우리역사와 직접 연관되어 있어서 제3자의 시선으로 분석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간단하게만 정리하겠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목줄(석유금수와 중국철군 등)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선공한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일본의 절대적인 목표는 항모였는데 신의 다른 한 수덕분에 항모의 귀항이 예정보다 하루 정도가 늦어졌고 공습을 피한 항모들은 이후 미드웨이를 비롯해 주요 해전에서 대역전을 이뤄냅니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선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전술목표물(항모 그 다음은 전함)에만 집중했고 전략목표물(도크와 유류저장고)은 등한시 했습니다.
항모가 어디에 있는 지를 몰라 반격을 우려한 나구모는 3차공습을 거부하고 선수를 돌렸는데 도크시설과 기름탱크가 온전했기 때문에 침몰/대파된 전함은 애리조나와 유타를 제외하고 모두 수리해서 전선에 투입했습니다.
전함 네바다는 수리 후인 1942년 12월에 복귀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오지마 상륙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3차공습으로 도크와 저장고를 파괴했다면 미군은 중간기지를 재정비하느라 반격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이고 일본은 자유롭게 태평양 전선을 누비고 다녔을 겁니다. 아마 미드웨이 해전이 없었을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는 끔찍한 일이죠.
어쨌든 진주만 공습은 신의 한수였습니다.
제가 언젠가는 번역출간하고 싶어하는 책인데 진주만 공습의 배경과 일본해군의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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