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 당에서 박수만으로 대표를 축출하는 북한스러운 짓이 벌어졌군요. 뭔일이 어떻게 벌어져도 지지율이 30%는 이어지니 앞으로도 아프리카 한구석이나 북한에서 봄직한 희대의 코미디는 계속될겁니다.
지옥행 편도 - 2차대전 공격용 글라이더 (2부)
글라이더 누가 조종했을까? 최소한 미국에서는 미육군항공단의 전폭기 조종사는 절대로 아니었고 보통은 공군의 비행교육에서 탈락했거나 비행경험이 있는 민간 경비행기 조종사였다. 현역 중에서도 대학학위가 없어서 조종사가 되지 못하거나 외국인도 글라이더 조종사로 지원했다.
육군은 전폭기를 조종하려면 충분한 교육과 지능이 필요했기에 조종사를 장교로 충원했지만 글라이더 조종사에게 장교계급을 줄 수 없었고 비행장교Flight Officer라는 새 계급을 만들었다. 육군의 준위Warrant Officer와 같은 계급이었다.
글라이더 조종사 중에도 정식 장교가 된 사람이 많았고 마이크 머피는 중령까지 올라갔다. 그는 다방면에 유능한 조종사로 미육군항공단의 글라이더 프로그램 성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반면에 신분제가 심했던 영국에서는 글라이더 조종사에 대한 교육에 더 치중했다. 무려 10만 명의 지원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대학입시와 같은 시험을 거쳐 후보자를 선발한 후에 전폭기 조종사와 같은 수준의 교육을 실시했다. 같은 교육을 받았는데도 지원자는 글라이더 훈련학교로 향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특공대말고는 어느 누구도 공격용 글라이더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는 비행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글라이더는 느리고 약한데다가 어떤 방어나 공격무기도 없었고 적진의 대공포망에 그냥 뛰어들어야 했다.
대공포로 견인줄이 끊기거나 수송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냥 추락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많은 글라이더가 바다에 처박혔다. 조종사가 천신만고끝에 착륙지점까지 몰고 가도 기수부터 처박고 날개는 부러지고 동체는 나무덤불에 구멍이 뚫렸다.
살아남은 조종사는 그 때부터 보병역할을 했고 착륙지점의 전투가 끝나면 알아서 복귀해야 했다.
미국에서는 7,260명의 글라이더 조종사 중에서 375명이 전투나 임무 중에 숨졌다. 미육군항공단의 글라이더 조종사 20명 중 한 명이 죽은 셈이다. 전투기, 폭격기 심지어 시험 비행조종사도 그보다는 생존율이 높았고 베트남전의 전술통제기 조종사만이 더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미군이 1943년 7월에 시실리에서 벌인 첫 번째 글라이더 작전은 대실패였다. 미영 지휘관은 마치 서로를 독일군대하듯이 반목했고 좁고 가파른 암반지역을 착륙지점으로 골랐다. 게다가 야간착륙을 선택했다.
글라이더 항공대는 강풍을 만났고 대공포 사격을 겁낸 수송기는 너무 일찍 견인줄을 끊어서 해변까지도 가지 못한 글라이더가 많았다. 비행장을 떠난 130대의 미영 글라이더 중에 절반은 바다에 떨어졌고 육지에 착륙한 59대 중에서도 겨우 12대 만이 목표지점에 착륙했다.
다음날 저녁, 144대의 C-47 수송기가 튀니지를 출발했는데 이번에는 글라이더 대신에 공수부대를 실었다. 60대가 격추되거나 큰 손상을 입었는데 모두 미해군의 놀라운 명사수의 작품이었다. 결국 상륙작전으로 시실리를 점령했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는 공수사단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지경이 되었다.
11개월 후의 노르망디Normandy 상륙에서는 아이젠하워도 어느 정도는 공수작전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다양한 공수작전이 시도되었는데 이번에도 글라이더 수송작전은 여러 이유 때문에 동이 트기 전으로 결정되었다. 글라이더는 아무래도 어둠 속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글라이더 작전에 대해 미리 예상하고 착륙지점을 나무막대Rommelspargel(롬멜의 아스파라거스)로 덮었다. 그나마 열린 지역은 나무덤불로 쌓여 있었고 지표면도 오랜 기간 동안 단단히 다져진 지형이었다. 전차도 뚫기 힘든 지형이었으니 글라이더는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마이크 머피조차도 착륙에 실패해서 수송칸에 타고 있던 여단장이 죽었을 정도였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512대의 글라이더는 거의 모두 피해를 입었고 수송병력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함께 수송한 중화기와 탄약덕분에 교두보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만약 공수부대만 투하했다면 독일군의 반격에 그대로 밀려났을 것이다.
(히틀러가 연합군의 공습을 염려해 기계화부대를 멀리 배치한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습니다. 아무리 공습피해가 커도 상륙 즉시 반격해서 교두보를 봉쇄했어야 했는데, 히틀러에게 상륙사실이 너무 늦게 보고되었고 그나마도 좁은 통로에 순차적으로 투입하면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히틀러의 정신병적인 개입덕분에 최소한 유럽전선에서는 전쟁이 1년은 먼저 끝날 수 있었습니다만.)
D데이 2개월 후 남프랑스에서 벌어진 드라군Dragoon작전에서는 약 400대의 글라이더가 동원되었는데 이번에도 인명피해는 컸지만 수송화물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동시에 진행된 상륙작전이 아무런 차질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수작전은 불필요한 희생만 낳은 셈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글라이더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는 마켓가든Market Garden(마켓은 공수작전, 가든은 후속 지상군 작전을 의미)이었는데 1944년 9월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이 작전에는 2,600대의 미영 글라이더가 투입되었고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연합통신 종군기자 월터 크론카이트Walter Cronkite(미국의 전설적인 기자)가 와코스 한 대에 어쩔 수 없이 탄 적이 있었는데 한 책의 추천사에 이렇게 말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전장에 나가야 할 일이 있어도 글라이더는 타지 마세요. 걷고, 기고, 낙하하고, 헤엄치고, 떠다니더라도 절대로 글라이더는 아닙니다.”
결국 글라이더는 소규모 특수작전에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에반 에말이 그랬고 1943년 3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이탈리아에서 빼내는 무장친위대의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 특수작전도 그랬다.
1944년 12월 벌지Bulge전투에서 독일군은 미 82공수사단의 의무부대와 의무품을 포위해서 사로 잡았는데 단 한 대의 글라이더가 외과의사와 약품을 싣고 바스통Bastogne 지역에 침투한 적이 있었다. 64대의 글라이더가 그 뒤를 이어 기름과 탄약을 보급했고 82사단은 날씨가 풀려 구원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1944년 3월, 태평양전선에서도 54대의 글라이더가 버마정글의 후방 160km 지점까지 공병과 항공장비를 싣고 무사히 침투해 24시간 만에 수송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를 만들어냈다. 일본군이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대형수송기가 9,000명 이상의 병력을 수송했는데 무엇보다 1,400마리의 노새와 250톤의 보급품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아역배우출신으로 유명했던 재키 쿠간Jackie Coogan은 코끼리로 글라이더를 이륙시키면 어떨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실행에 옮겼는데 뒤에 매달린 것이 통나무가 아닌 괴상한 비행기라는 것을 안 코끼리가 놀라 정글로 뛰어들었고 글라이더는 날개가 부서지며 정글에 불시착했다. 다행히 재키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고 나중에 글래머 스타와 결혼해 동료 조종사의 부러움을 샀다.
육군은 베를린을 점령하는 이클립스Eclipse작전을 계획했지만 다행히 실현되지 않았다. 만약 계획대로 미영 글라이더가 베를린 대로에 착륙했다면 건물을 거점삼아 끝까지 버티던 독일 광신도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943년 초에 이미 더 강력한 C-54 수송기가 투입되었기 때문에 천이 아닌 금속제 글라이더가 필요했고 체이스Chase라는 회사가 개발을 맡았다. 체이스 XCG-18A 글라이더에 성형엔진을 붙였고 YC-122 아비트룩Avitruc으로 바뀌었다가 페어차일드Fairchild C-123이라는 이름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터보제트 엔진까지 장착한 XCG-20A(사진참조)가 나왔다.
우리는 과연 글라이더 작전을 다시 볼 기회가 있을까? 아마도 독일군의 수송용 글라이더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병력투입용으로는 이미 헬리콥터, 호버크래프트Hovercraft와 같이 많은 대용기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대용기계는 병력을 투입하는 동시에 철수시킬 수도 있다.
이제 글라이더 침투는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역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2차대전에 사용한 주요 글라이더
미국 와코Waco CG-4A
미육군항공단 글라이더 부대의 주축기. 13명 탑승. 16개 하청업체가 14,000대를 제작.
영국 에어스피드Airspeed AS 51 호사Horsa
와코보다 크고 강한 기체로 25명 수송. 종전까지 사용되었고 D데이에서 페가수스Pegasus다리 점령으로 유명함.
독일 고타Gotha Go 242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조종사 외에 23명 탑승. 1,500대가 제작되었고 133대는 엔진장착형 Go 244로 개조.
메셔슈미트Messerschmitt Me 321
2차대전 중 최대의 글라이더. 130명 또는 몇 톤의 화물을 수송. Me 323은 엔진 6개를 장착했고 1942년에 투입.
일본 코쿠사이Kokusai Ku-7 마나주루Manazuru
독일 Go 242와 비슷한 설계이지만 좀 더 대형. 2대의 시험기만 제작했고 실전투입은 없음.
어느 정도로 위험했으면 절대로 글라이더를 타고 적진으로 향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직접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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