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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스탈린의 좌절, 이지움 포켓(1942) - 1부

by uesgi2003 2015. 7. 29.


오늘 오후에 드디어 윈도우 10이 공개되는군요. 아직 MS에 저를 좋게 기억해주는 팀원들이 많아서, 윈도우 10이 큰 성공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스탈린의 좌절, 이지움 포켓(1942)

 

1941년 겨울 동안, 적군Red Army와 독일군Wehrmacht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소련영토를 수 백 km나 밀고 들어갔지만 뜻밖의 복병 10월 진흙장군을 만났고 거의 모든 길이 수렁으로 변하면서 발목을 잡혔다. 100년만의 강추위와 눈이 그 뒤를 따라왔다.

 

12 5일 저녁, 소련최고사령부(Soviet Supreme Command, STAVKA)는 대대적인 반격을 펼쳐 기진맥진한 독일군을 모스크바 바로 앞에서 밀어냈다. 1942 3월까지 소련군의 반격기세는 대단했다.

적군은 일부 지역에서 320km를 수복했고 그 대가로 50만 명 이상의 목숨을 내줬다. 독일군의 피해도 막심했다. 군참모총장 상급대장Generaloberst 프란츠 할더Franz Halder의 일기를 보면, 1941 11 1~1942 4 1일 사이의 인명피해는 거의 90만 명(부상과 질병 포함)이었고 상당부분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할더 상급대장은 처음부터 히틀러의 확전에 반대를 했고 (종전 후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동부전선에서도 히틀러의 무모한 계획에 반대하다가 1942 9월에 해임되었고 1944 7월에 있었던 히틀러 암살모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무혐의였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자살과 사형을 당한 독일군 수뇌부와 달리 종전 후에 전사가로 활동하면서 천수를 누렸습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가 시급해서 북부와 중앙전선에 주력을 투입했지만 동부 우크라이나의 하르코프Kharkov와 같은 남부전선에서도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1942 1, 소련 4개 군이 하르코프 남동쪽 120km 지점의 이지움Izyum 부근에서 독일군 6 17군을 공격했다.

본격적인 반격은 아니었고 나중에 드니에페르Dnieper강의 남쪽 전략거점을 공격할 수 있는 발판확보가 목표였다. 상황에 따라 통신과 수송거점인 하르코프로 북진하거나 17군의 배후로 남진할 수도 있었다.

 

1933년 재건된 후로 줄곧 공격일변도였던 독일군도 이제는 방어태세에 익숙해져야 했다. 6 (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Paulus)와 제17 (중장 한스 폰 잘무트Hans von salmuth)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앞이 잘무트입니다. 



지휘관 자질도, 용기도 부족했던 파울루스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정예 6군을 그대로 전멸시킨 장본인으로 종전 후 동독에서 전사가로 살아갔습니다. 그가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 앉은 탓에 91,000명(전사자 제외)이 포로가 되었고 종전 후에 살아서 돌아간 숫자는 겨우 6,000명에 불과합니다. 


소련군이 독일 방어선을 공격해오자 일선 지휘관의 상황판단에 따라 부대의 운명이 갈렸다. 소련보병이 전차의 지원을 받아 방어선 곳곳에 구멍을 냈지만 일부는 그 자리에 버티며 방파제 역할을 했다.

독일 지휘관은 병력을 제대로 후퇴시킨 후에 방어에 적합한 지형을 골라 다시 전선을 만들었다. 평야에 있는 작은 마을은 추운 겨울을 피하는 야영지이자 방어시설이 되었다. 독일군은 마을에 도착하면 쉬지도 않고 차량잔해, 돌담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방어막을 만들었다.

 

소련군 공세 2주차가 지나자, 이렇게 만들어진 임시 방어거점은 소련군의 진격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소련군 선봉대가 독일군의 방어거점을 무시하고 지나치면 등뒤에서 반격을 받았고 후속부대와 연결이 끊겼다.

방어거점 소탕도 쉽지 않았다. 선봉대가 멈춰서 전열을 갖추고 단단히 틀어박힌 적을 모두 몰아내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커져갔다. 독일군의 방어거점은 마치 발바닥 깊숙이 박힌 가시와 같았다. 무시할 수도 파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지연되는 동안 독일군이 증원되었고 결국 소련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다시 해빙기가 와서 진흙탕이 모든 지역을 지배했고 양쪽은 그 틈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병력을 충원했다. 소련군은 약 100km를 수복한 후에 멈췄는데 약 100km*70km 크기의 돌출부가 하르코프 남부에 만들어졌다.



러시아 남부에 조그만 돌출부가 보이죠? 이지움 돌출부입니다. 하르코프가 전략요충지였기 때문에 하르코프 공방전의 일환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에는 역사나 전사 공부하기가 정말 편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원서를 구하기도 힘들었고 원하던 책을 손에 넣어도 그림이나 사진자료가 없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죠. 지금은 아마존 등에서 원서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한 눈에 보여주는 지도가 인터넷에 널려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여러분에게 보다 쉽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이지움 돌출부Izyum Bulge는 양쪽 모두에게 고민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소련군은 돌출부를 발판으로 하르코프를 탈환하거나 드니에페르강의 전략요충지인 드네프로페트롭스크Dnepropetrovsk와 자로포즈예Zaporozhye를 공격해서 독일 남부군의 교통망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다.

반면에 독일군은 적의 대규모 병력이 밀려드는 돌출부를 전매특허인 기동협공Pincer Attack으로 전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942년 초봄 내내, 양쪽의 사령부는 돌출부를 이용할 계획에 몰두했다. 소련군 남서전선사령관 세멘 티멘센코Semen Timenshenko원수, 정치위원 니키타 흐루시쳅Nikita Khrushchev, 참모장 이반 바그라먄Ivan Bagramyan원수는 모스크바로 가서 고멜Gomel부터 체르카시Cherkassy에 이르는 지역의 공격작전에 대해 보고를 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주코프를 더 신뢰했고 티멘센코가 이지움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자 해임시켰습니다. 티멘센코는 이전의 신뢰를 되찾지 못하고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전선의 사령관직을 맡았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1970년에 사망했습니다.

 

티멘센코는 1895년 생으로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 기병장교로 활약했고 조세프 스탈린Josef Stalin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하면서도 스탈린에 대한 절대충성으로 1930년대 소련군 지휘부를 휩쓴 대숙청에서 살아남았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시작되자, 티멘센코는 적군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한 달 후에 스탈린에게 넘겨주고 서부전선사령관을 맡은 티멘센코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1941 9월에 남서전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티멘센코가 스탈린과 소련최고사령부를 만나는 동안 계획을 약간 변경했고 하르코프를 탈환한 후에 드네프로페트롭스크로 진격하기로 했다. 하르코프 북동쪽 32km 지점의 볼찬스크Volchansk돌출부 방면에서도 동시에 공세를 펼쳐 독일 6군을 협공해 섬멸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작전은 5 12일로 결정되었다.

 

독일남부군집단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사진 참조)도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고민하고 있었다. 남부군집단은 코카서스Caucasus에서 귀중한 유전을 확보하고 이지움 동쪽 480km 떨어진 산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지움 돌출부에서 소련군을 소탕하는 것이 먼저였다.



프리데리쿠스Fridericus(프로이센의 위대한 국왕 프리드리히의 라틴어표기) 암호명의 작전은 도네츠Donets강의 서쪽 강변을 따라 공격해 소련군의 돌출부를 끊는 협공이었다. 파울루스의 6군은 북쪽에서, 폰 클라이스트von Kleist 군집단의 3전차군단은 남쪽에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 계획을 들은 히틀러와 할더는 도네츠강의 동쪽 강변에서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폰 보크와 독일군최고사령부가 상세내용을 다듬는 동안 양쪽 모두 돌출부의 병력을 크게 늘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작전은 수송문제로 지연되어 프리데리쿠스II라는 암호명과 함께 5 18일로 결정되었다. 겨우 일주일 사이를 두고 양쪽이 대반격을 동시에 노리게 되었다


티멘센코는 남서와 남부전선군에 640,000, 1,200대의 전차, 13,000문의 박격포와 대포, 962대의 항공기를 집결시켰다.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병력은 3:2, 전차는 2:1 비율로 많았고 병력이 집중된 진격로에는 그 차이가 훨씬 벌어졌다.

남서전선군의 상대는 파울루스의 제6 군이었다. 파울루스는 1942 1 1일에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1890년에 태어난 그는 계속 참모역할만 해왔었다.

사단 이상의 병력을 지휘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1월에 부임해서 토막난 전선을 보고는 당황했다. 다행히 실전경험이 풍부한 참모와 일선 지휘관덕분에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모두 1,000,000명이 넘는 병력을 지휘하는 양쪽의 명령체계는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소련은 일선 지휘관의 권한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고 전술작전까지도 모스크바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 했다.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임의대로 판단한 지휘관은 해임되거나 군사재판의 사형판결을 받았다. 요행히 사형당하지 않고 형벌부대 처벌을 받더라도 사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작전계획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다시 모스크바로 보고를 하고 승인을 기다려야 했다. 모스크바뿐만 아니었다. 정치위원이 지휘관을 감시하고 옭아맸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참패 후에 광기를 부렸고 일선 지휘관의 판단까지도 통제하며 독일군의 몰락을 자초했는데 다행히 이지움 돌출부 전투까지만 해도 일선 지휘관의 전술판단을 인정했고 선제작전을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서로의 고집을 극단적으로 맞바꾸게 됩니다. 스탈린은 전선이 안정되고 승세를 굳히자 지휘관의 판단을 인정한 반면에 히틀러는 2차대전 최고의 명장인 만슈타인을 해임시킨 후에는 그 자리에서의 옥쇄를 명령하며 독일의 패망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양쪽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총성이 울리면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독일군의 유연한 지휘체계가 또 다른 전력이 되었고 경직된 지휘체계의 러시아군은 참패가 필연적이었다


수정된 계획에 따르면 고로드냔스키Gorodnyanskii 6(보병사단 8, 전차여단 4, 포병연대 14)과 봅킨Bobkin의 기동작전집단(보병사단 2, 기병사단 3, 전차여단 1)은 독일군의 23km 전선을 돌파하고, 고로드냔스키가 가지고 있는 추가병력 전차여단 5개와 기계화보병여단 2개는 티멘센코가 적당한 시기에 전술예비군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고로드냔스키의 좌익에는 포들라스Podlas 57군과 하리토놉Kharitonov 9군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 병력은 남쪽측면을 보호하며 독일군의 반격을 막는 역할이었다. 57군과 9군의 병력은 보병과 기병사단 25, 전차여단 11개와 기계화여단 1개였다.

 

볼찬스크 돌출부에서는 랴비셉Ryavishev 28군이 서진해서 독일 8군이 6군을 응원하지 못하게 막기로 했다. 28군의 병력은 보병과 기병사단 13, 전차여단 2, 기계화보병여단 1개였고 38군과 21군의 일부가 측면을 보호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남서전선군은 기병군단 1개와 100대의 전차 여단 1개를 예비병력으로 준비했다. 티멘센코는 필요한 경우에 남부전선군의 보병사단 7개와 전차군단 1개를 더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병력이발터 하이츠Walter Heitz 8군군단Army Corps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8군군단은 64보병사단, 108 헝가리 경보병사단, 454보안사단이 전부였다. 454보안사단은 원래 후방의 주요 거점을 방어하며 파르티잔을 소탕하는 역할이었지만 6군이 입은 손실 때문에 최전방으로 투입되었고 적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군은 3개 군단으로 이지움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었다. 칼 아돌프 홀리트Karl Hollidt 17군군단은 79 294보병사단을, 51군단은 44, 71, 297보병사단을, 29군군단은 57, 75, 168보병사단을 가지고 있었다.

파울루스는 113보병사단과 23전차사단을 예비병력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전차사단은 프랑스에서 3월에 전출되어 폴타바에서 재정비 중이었다. 3전차사단도 쿠르스크에서 열차편으로 이동 중이었는데 도착하면 프리데리쿠스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